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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연 / 자연의 내재율

이선영

자연의 내재율

  

이선영(미술평론가)

  

종이가 아닌 종이의 원재료를 사용하는 우지연의 작품은 가장 원초적 감각인 촉각에 호소한다. 물론 자개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색감은 눈의 호사를 누리게 하지만, 그 또한 얇은 화면에 한두 번 발린 색깔이 아니라, 두툼한 바탕 면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오는 깊이의 결과이다. 흡수성이 탁월한 한지의 속성은 독특한 발색을 가능하게 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한지로 성형된 바탕에 채색한 후, 여기에 둥글거나 길쭉한 모양의 자개 파편들을 붙여서 자연을 닮은 무늬를 만든다. 이전 전시에서는 자개 외에 크리스털같은 자재가 사용되기도 했다. 깊이감 있는 바탕에 추상적 또는 자연적인 형태로 박혀있는 박편은 심층적 흐름을 타면서도 표면 위를 날렵하게 횡단하는 느낌을 준다.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하게 붙어있는 자개 조각들은 매우 얇지만, 율동감있는 바탕 면과 밀착 연동되어 다양한 각도로 빛을 발산한다. 깊이와 표면을 동시에 공략하는 우지연의 작품은 햇살을 시시각각 반사하는 바다 표면을 떠올린다.



Blue Mountain, 110x68cm 126x177cm, 한지성형 위에 채색 및 자개, 2019.



표면의 광휘는 대양적 스케일의 물질 및 운동 에너지의 결과이다. 바다나 대지로 대표될 수 있는 자연은 실재감의 원천이며,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상상이나 사회적 상징이 생겨난다. 추상적 코드가 더욱 촘촘하게 인간 현실을 에워싸고 있는 현재, 작가는 보다 깊은 실재와 접촉하려 한다. 동양화가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전통과 현대’의 관계는 단순한 형식 실험을 넘어서 실재에의 회귀라는 근본적인 움직임을 요구한다. 코드로부터 코드가 생산될 뿐인 지배적 흐름에 대항하여, 진정한 진보나 새로움을 가능하게 할 실재에 대한 감각이 중요한 것이다. 우지연의 작품에서 종이죽 바탕으로부터 정제되어 나온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파편들은 장식적이면서도 자연의 본질과 현상 간의 다양한 유희를 보여준다. 자개 또한 자연의 산물이긴 하지만, 좀 더 정제되어 있다.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는 모자이크처럼 크기와 형태가 일정하다. 종이죽을 다룰 때의 감각은 최종작품에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마치 동굴 벽화에 남아있는 원시인들의 손자국처럼 말이다. 


많은 작품들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듯한 질감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번 전시 작품의 주된 소재는 산이다. 작가는 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산을 만든다. 산이 만들어지는 원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반복한다. 즉 산의 재현이 아니라 산이 생성되었을 때의 과정을 반복한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을 향하며 그 역의 움직임도 야기될 것이다. 가령 지금의 산이 있기 위해 최초의 대지는 종이죽처럼 물렁물렁했으리라. 여기에 힘이 가해지고 땅속 깊은 곳의 열기가 빠져나간 후 현재의 산 모양이 잡혔으리라. 산의 능선들에는 부드러웠을 때의 기운이 남아있곤 한다. 작가는 숨 쉬는 재료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친화적인 재료인 종이에 자연의 순환주기를 담는다. 산의 몸통을 채우는 손자국의 율동은 자연이 고정되지 않고 과정 중에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 또한 그러한 자연에 속해있다. 자연과의 단절은 먼저 인간에게, 그리고 예술에도 빈곤함을 야기했을 뿐이다. 




Some Landscape, 67x96cm, 한지성형 위에 채색 및 자개, 2019.



Shining Moment, 47.5x51.5cm, 한지성형 위에 채색 및 자개, 2019.



어떤 생명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숨은 작업의 율동 속에 내재한다. 종이죽은 산에 많이 있는 나무들이 원재료임을 생각할 때, 자연적 실재와 예술적 상징의 연결고리는 채워진다. ‘Breathe’라는 전시부제는 단어의 의미상 가볍게 다가오지만, 숨은 바로 살아있는 생명의 본질이기에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숨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것이 방해되었을 때만 의식된다. 전시된 작품 중 자개 무늬가 없는 산은 바탕 면의 율동감이 더 두드러진다. 표면에는 자개가 붙어있지 않지만, 마치 자개가 녹아서 스며든 듯 산의 몸통 전체가 은은하게 빛난다. 이전 전시의 작품이 ‘장식풍경’이었음을 생각할 때, 작가는 자연과 장식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 종합적 단계를 지향한다. 자연은 본질을, 반면에 장식은 뭔가 잉여의 것이라 생각되는데, 우리는 공작새의 깃털이나 호랑나비의 날개, 붉은 단풍잎 등을 무상으로 덧붙여진 것이라 보지 않는다. 


자연에는 불필요한 부분이 없다. 자연은 최상의 경제성을 구현한다. 그러면서도 자연은 생존을 위한 수많은 실험을 거듭해왔다. 일부 현대미술에 발견되는 것처럼 무익한 유희로서의 실험이 아니다. 동서고금의 무늬들은 자연으로부터 비룻된 내재율이 추상화된 것이며,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상징을 가진다. 근대에 순수예술이 발명되기 전에 예술은 장식이었고, 순수예술론이 도그마로 굳어지면서 장식은 또 다른 의미로 부활되고 있다. 그러나 샹들리에 같은 화려한 기물을 소재로 한 이전 작품에서 장식은 ‘인간의 욕망과 과시주의’를 표현에 활용하기도 했다. 상층부가 산의 실루엣대로 만들어지고 아랫부분의 여백같은 공간을 연한 색으로 처리한 작품은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산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라데이션으로 처리한 색감은 높이에 따라 다른 공기 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작가 노트의 한 구절처럼 그러한 산들은 ‘色 다른 空間’의 구축이다. 




Randomicity , 36x58cm, 한지성형 위에 채색, 2019.



Accumulation, 78x100cm, 한지성형 위에 채색 및 자개, 2019.



동양화에서의 공간의식이 그렇듯이, 풍경은 일점 원근법을 벗어나 소요하는 시점들을 내포한다. 우지연의 풍경은 한순간의 응결이 아니라 지속의 느낌을 보존한다. 그것은 수 없는 반복과 차이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방법론에 상응하는 시간적 측면의 강조이다. 2016년에 있었던 ‘겹겹’ 전은 시간적 차이가 만들어내는 공간감을 표현했다. 시간이라는 변수는 순간을 영원화하는 모든 물화의 움직임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우지연의 산은 산이 어느 시점에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게 한다. 산 실루엣의 덩어리에 식물의 잎이나 가지가 무늬처럼 드리워진 작품은 풍경보다 장식성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산을 이루고 있는 암석에도 자개 단편처럼 반짝거리는 금속성 원소를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표면에서 반짝거리는 단편들은 산에 잠재된 물질이 현실화된 것이다. 표면을 많이 덮고 있는 자개들은 산의 굴곡면을 타고 흐르는 물, 또는 그 산에 있을지 모를 굵은 광맥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둥글거나 길쭉한 단위로 일정하게 잘려진 자개 단편은 화면 상부에 살짝 얹혀진 듯한 것부터 산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흐름을 형성하는 것 등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진다. 자개 단편으로 붙여 만들어진 식물 문양은 바탕의 굴곡 면을 따라 흐른다. 많은 나무 중에서 굳이 버드나무가 택해진 것은 그것이 어느 나무보다도 유려한 운동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산이 위로의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잎이나 가지는 아래로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두 힘이 하나의 게슈탈트 안에서 밀고 당기면서 상호작용한다. 아래로 축 처지는 버드나무는 슬픈 느낌을 준다. 하늘을 향해 뻗는 가지들과 달리 중력의 방향을 향하는 가지들은 인간이 되돌아가야 할 자리가 대지임을 암시한다.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동생의 죽음은 작가로 하여금 예술을 화려한 자기표현보다는 치유의 행위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축 늘어진 버드나무 조차도 ‘호흡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유연하다’(작가)라는 의미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Randomicity , 117x135cm 168x135cm 151x135cm, 한지성형 위에 채색, 2019.



우지연의 주재료인 한지 자체가 버드나무같은 외유내강의 특성을 가진다. 한편 가지 모양으로 배열된 것들은 바탕의 푸르른 색감과 어울려 마치 물에 비춰진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반영상은 예술이 자연의 반영임을 잊지 않게 한다. 꽃 또는 바위 모양의 형태 위에 둥근 자개들을 무늬처럼 붙인 소품들은 대우주를 품고 있는 소우주처럼 밀도감이 있다. 둥근 실루엣 안에 자리 잡은 다양한 덩어리들 또한 유동적으로 배치되면서 대우주를 반향하는 소우주의 역할을 할 것이다. 물처럼 연출된 덩어리 위의 헤엄치는 오리들, 그리고 독립적으로 또는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새들은 산으로 대변되는 자연과 공존하는 유기체들이다. 종이죽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직접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들게 하는 질감을 가진다. 종이라는 가장 대표적인 아날로그 매체는 무엇인가 씌여지고 인쇄되는 매체이며, 작가는 그 재료에 내재된 의미를 살리고자 한다. 


무엇하나 의미 없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은 그 자체가 어떤 기호를 새기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상징적 우주를 강조하는 종교적 세계관에서 보편적이다. 동양에서 처음 종이가 발명되었을 때 그것은 20세기의 컴퓨터 못지않은 첨단매체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가 지배하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도 종이책이나 그림이 사라질 것이라 단언하는 이들은 없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종이 위에서 이루어지는 필사의 촉각성을 강조한다. 이후에 종이는 인쇄문화를 준비했다.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미디어의 힘을 강조하는 마샬 맥루한은 종이에 씌여진 것, 또는 새겨진 것이 인간의 내면성을 낳았다고 본다. 내면성은 예술의 전제조건이다. 문자나 이미지가 종이같은 평면에 고정시킬 수 없는 이전의 구술적 문화가 말하고 들으면서 전통을 전수하는 신화와 종교의 시대였다면, 예술은 보다 자의식적인 매체를 요구했다. 




Randomicity , 150x225cm, 한지성형 위에 채색, 2019.



우지연이 활용하는 종이죽, 즉 종이의 전 단계는 만들면서 새겨넣는 이중의 역할을 담당한다. 재료인 종이죽은 그 안팎에 새겨진 것을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는 중성적인 바탕은 아니다. 작가는 종이의 물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렇지만 물성 그 자체로 남겨두지는 않는다. 거기에 칠해지는 색, 어떤 형태를 지시하는 선, 하이라이트가 되는 단편들의 배치 등은 작가의 의도를 보다 분명히 하는 기호들이다. 우지연의 작품에서 물성이나 기호는 벌거벗은 채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재료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미니멀리즘이나 코드로만 이루어진 가상현실 등의 양태와 비교될 수 있다. 물질 그 자체나 물질을 휘발시키는 경우, 그 어느 쪽이든 실재에 대한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적 재료로 자연을 다루는 방식은 실재로 귀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지연에게 실재는 단순히 보이는 것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실재는 생명의 기본 운율인 숨에 맞춰져 있고, 그러한 운율이 보다 깊은 차원에서 드러난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물질적인 반복은 언제나 보다 심층적인 반복의 결과라고 말한 바 있다. 생명의 내재율과 조응하려는 예술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기계적 반복을 넘어서 ‘차이의 분화소’(질 들뢰즈)로서의 반복을 향한다. ‘붓을 다시 들을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슬픔의 극복으로 나온 우지연의 작품은 긍정적이다. 이러한 긍정성은 그녀의 작품이 아름다운 색과 빛나는 재료로 뒤덮여서가 아니다. [차이와 반복]의 저자가 쓴 또 다른 책 [주름]에 나타나듯이, 한 재료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양태들이 특징적인 우지연의 작품은 ‘이 세계 안의 무한한 차이 혹은 다양함의 긍정’을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바로크 시대의 철학자 라이프니쯔를 연구하는 [주름]은 ‘만일 이 세계가 실존한다면 이 세계가 가장 좋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으로 이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이다. 가장 좋은 세계는 영원한 것을 재생산하는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 생산되는 세계, 새로움과 창조성의 능력을 가진 세계’라고 말한다. 현대철학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해서 자연과 최대한 가까워지려는 우지연의 작품을 잘 해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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