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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 딱 떨어지지 않는 현실

이선영

딱 떨어지지 않는 현실

  

이선영(미술평론가)

  

2008년 관훈갤러리에서 처음 본 박은하의 작품은, 경계를 넘어 출렁거리는 환상적인 패턴이 특징이었다. 파이의 겹처럼 미세한 주름들의 운동은 접힘과 펼침을 반복하면서 역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화려한 색채와 미묘한 형태의 결합은 기분에 따라 달라 보였다는 점에서 단순한 장식적 패턴과는 달랐다. 그림 속 형태의 외곽선뿐 아니라 캔버스를 넘어서 확장되는 패턴은 사각 틀의 한계를 넘어서는 독특한 해법으로 다가온다. 박은하는 지금도 설치의 결과를 그림으로, 또는 그림을 설치의 방식으로 배치하는 등의 시도를 하곤 한다. 당시 학교 문을 나선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작가였는데, 완판을 알리는 빨간 딱지들이 붙어있는 작품들을 접하면서, 전시장 전체를 아우르며 출렁이는 듯한 패턴들이 이 행운아의 환희를 전달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젊은 작가에게 잠깐 열렸던 시장의 문이 닫히고, 어렵게 시작했던 작가의 길을 걸어온 지 십수 년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0년대 들어서 젊은 작가들에게 제도적 지원이 집중되었고, 박은하 또한 국내외 레지던시 및 전시에의 참여가 활발했던 유망 작가 중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결정지을 수 없고 버릴수도 없는_캔버스에 유채_183×274cm diptych_2015



인간이라는 식물기르기_The Training of the Human Plant_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_194X130,162X97,162X112,194X130cm_Quadriptych_2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전의 흔적은 새로이 선택된 대상의 표면이나 어지러운 배치들에 남아있지만,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기운은 우연히 걸려든 사물 안에 얼어 붙어있다. 1982년생의 작가에게 이러한 변화는 20대의 발랄함이 꺾여가는 징후일까. 아니면 보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 내공의 증가인가. 그것은 자신을 재차 원점에 놓곤 하는 작가적 치열성 때문이라 믿지만, 현실 또한 그렇게 한다. 연동되곤 하는 외부의 현실과 내부의 현실 중, 작가는 이제 내부에 집중한다. 익명의 타인들이 아니라 가족이 등장하는 최근 작품은 내부에 해당한다. 가족은 공적/사적 영역으로 나뉜 현대사회에서 후자에 속하며, 귀속성이 운명처럼 다가오는 영역이다. 적어도 아직은 누구도 가족을 선택하며 태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적 영역은 마치 자연적으로 다가오는데, 자연은 따스함과 가혹함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이전 작품보다 자연물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운명적 엮임에 대한 생각을 반영한다. 


봉건적 질서로부터 개인이 자유로워진 이래, 개인은 자율적 주체로 믿어졌지만, 개인의 자유는 애써 얻어내야 하는 가치이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다. 자율성이 위협받는 현대사회에서 자율적 영역이라고 믿어지는 예술적 삶을 사는 작가로서의 삶의 정조가 어둡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하리라. 거꾸로 보면 과도한 화려함 또한 삶의 어둠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작가는 이제 이전 시기의 거품을 걷어내고 알맹이만을 보려 한다. 그런데 그 알맹이들이 본질이라고 하기에는 척박하다. 죽은 동식물들, 방치되고 폐기된 사물들, 그 모든 것이 한 데 어지러이 얽혀있는 어떤 공간들이 많이 등장한다. 작품 속 사적 영역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직접적 묘사가 아닌, 은유를 통해 다소간 완화되어 있지만, 가족 관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은 많은 작품에서 드러난다. 가령, 작품 [망가진 꽃밭](2013)은 뭔가 뒤죽박죽 어수선한 상황을 보여주며, 경계를 녹이며 흘러나온 것들이 무질서함의 극치를 이룬다. 




망가진 꽃밭_Broken Garden_130X96.5cm_oil on canvas_2013



작가의 회상에 의하면, 꽃밭은 어릴 적 어머니의 일기장에서 훔쳐본 집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마블링 패턴으로 뭉개진 [모르는 얼굴](2012)에 간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 [맹인의 전망](2017)에는 초가집 모양의 구조 안의 굴비같이 생긴 물고기가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 기괴하다. 작가는 초가지붕 대신에 거대한 나무뿌리로 대신 얹어 놓았는데, 살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이 순간 고정된 채 죽어있는 뿌리의 움직임은 붉은색 배경으로 더욱 창백하게 다가온다. 작품 [하우스](2013)에는 집의 실루엣 안의 여러 물건들이 무질서하고, 일렁이는 붉은색 패턴이 마치 불이 난 것 같은 모습이다. 최근 작품에는 마블링 패턴이 많지 않지만, 그리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던 집과 마블링 패턴의 결합은 그 패턴의 의미 또한 다시 생각하게 한다. 붉은색은 불이나 고기를 떠올리는데, 포식자의 혀를 환희로 물들일 그것은 고통의 무늬이기도 한 것이다. 고급 쇠고기의 단면 같은 마블링은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이 있다. 


탐식가에게 인기 있다는 마블링 무늬의 고기 조각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원래 풀을 먹는 소에게 곡물을 먹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소화불량과 비만을 낳고 죽기 직전까지 고통스럽게 한다. 박은하의 이전 작품 [육식의 종말](2010)에는 실제의 고기 마블링이 등장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고통의 무늬인 마블링은 집의 이중성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최근 작품에서는 마블링을 내재한 소재들이 눈에 띈다. 이리저리 꼬인 밧줄이나 뿌리들이 그것이다. 이미 그 안에 패턴이 있으므로 또 다른 마블링 패턴이 필요 없다. 작은 패널들이 배열된 작품 [세상은 아버지들로 가득 차 있었다](2017)는 패턴들과 밧줄들의 일부가 교대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패턴과 밧줄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작품 제목은 최근 작품의 특징인 자전적 서사와 관련된다. 그러나 집안의 대소사에 관련된 사연들은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가족은 지금 가장 위협받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우스_house_97X162cm_oil on canvas_2013



맹인의 전망_Outlook for the Blind_oil on canvas _137X183cm_2017



가족이나 가정은 자명하게 개인의 안식처로 간주 될 수 있는가. 만약 그 사적 영역이 아직도 그렇다고 믿어진다면 그것은 많은 우연과 필연이 복합된 외적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경제라는 공적 영역의 직격탄을 맞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더듬는 작가의 작품에서 트라우마를 야기했던 지나간 흔적들이 편재한다. 좋은 기억이든 아니든, 그것들은 자신을 형성해왔던 것들이며, 이제 그것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시점에서 애써 잊고 살았던 기억들은 각별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작가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의 점차적 소멸을 생각하게 했다. 지인들의 사라짐은 무의식적 은폐 대신에 의식적 기억을 촉구했다. 한편 억압되었던 것들의 복귀는 그만큼 더 강해진 자아를 반영한다. 이제 내 이야기도 남 이야기하듯이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삶에 대한 내적인 성찰은 타자와의 보다 긴밀한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 타자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양자는 분리되어있지 않고 뫼비우스 띠처럼 표면/이면을 수시로 바꿔가며 출렁댄다. 


박은하의 작품에서도 죽음은 삶을 조명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죽음의 접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나의 고독은 죽음을 통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깨어진다. 레비나스는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더욱 팽팽하게 지탱하고 죽음에 직면해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영역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박은하의 최근 작품에서 타자는 이제 그들이 아니다.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들이다. 개인으로서는 어떤 선택도 불가능한 어린 시절의 무력감은 크지만, 반대로 어리기 때문에 심각하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던 사건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자연과 인공이, 물질과 비물질이, 안과 밖이 함께 출렁였던 작품에서 사적 영역 또한 공적 영역이 스며든다. 카페나 사무실같이 개방된 공간에서 요동쳤던 패턴들이 공적 영역에 잠재된 욕망의 흐름이었듯이, 사적 영역 또한 공적 영역의 냉혹함을 반영한다  





결정지을 수 없고 버릴수도 없는_acrylic oil on canvas_227X173, 254X112cm_2015



경계의 유동성을 표현하곤 했던 박은하에게 사회적 영향의 공적/사적 영역을 가르는 벽은 극히 취약하다. 이전 작품에서 고통과 희열이 함께 하는 마블링 패턴은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에도 사람 또는 공간에 내재 된 욕망의 표현에도 어울리곤 했다. 황병기의 가야금 작품 [미궁]에서 홍신자의 소리처럼 우는 소리와 웃는 소리, 비명과 환호의 소리가 크게 다르지 않은 데다가, 그림은 그 자체로는 침묵하기 마련이니까. 작업 초기에 화단에 작가의 존재감을 알렸던 화려한 패턴은 이제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최근 작품에 나타나는 밧줄이나 뿌리 같은 구체적 대상들에서 그 형태소를 발견할 수 있다.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야기하는 기억들에서는 이전의 자유로운 필치가 발견된다. 이러한 전이는 변증법에서 말하듯이 추상으로부터 구체로 상승이다. 이제 마블링 패턴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재한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전의 마블링 패턴이 이분법—작가에 의하면 현실/비현실, 풍요/빈곤 등—을 바탕으로 한 대조어법을 구사했다면, 이제는 하나의 사물 안에 공존한다. 


대조어법에서 서사는 분명하지만, 하나로 뭉뚱그려진 사물에서 서사는 모호해진다. 가령 이전 작품 [밤의 황제](2011)는 화면 앞쪽에 권력을 가진 남성들과 뒤편의 얼굴 없는 마네킹을 대조하면서 현실을 풍자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문제이다. 은유적 대상으로 나타난 인간은 다소간 비루하다. 화려한 마블링의 패턴이 비루한 사물의 표면에서 잠재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출렁거린다. 작가는 버려지고 방치된 하찮은 사물들을 화면의 주인공으로 기념비화 한다. ‘농가나 공사장에서 쓰인 낡은 담요와 비닐 뭉텅이, 어선에서 버린 그물, 밧줄 더미, 스티로폼 따위, 그리고 시든 꽃과 뽑힌 나무뿌리, 흔하게 지나치는 군상, 거리의 개 등 지극히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소재들’(작가노트)이 그것이다. 가령 꼬인 밧줄이나 폐허가 된 풍경에는 경계를 넘어 휘몰아치던 패턴이 내재한다. 마블링 패턴은 매우 화려하고 강렬했지만 그 자체로 서 있지는 못했고 구체적 형태들과 함께하면서 형태들이 말하는 바를 변화시켰다. 왜곡이라고 볼 수도 있는 마블링 패턴은 그려진 도상의 메시지를 메아리처럼 확장시키거나 상쇄시켰다. 




결정지을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는_캔버스에 유채, 벽에 아크릴_캔버스크기 183x274cm_스페이스K_과천_2015



15_결정지을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연작_캔버스에 유채와 아크릴_(왼쪽부터) 100X194,227X173,183X137,60X73,254X112,73X100,183X137,153X108cm 총8점_2015



정상적, 또는 일상적, 또는 굳어진 현실은 변화 또는 변화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제 출렁임은 외곽의 변형 및 확장이 아니라 내부에 자리한다. 작가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던 마블링 패턴이 사라진 것이 2013년 무렵이라고 말한다. 백령도 인근에서 행해졌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자신이 ‘마블링 작가’로 코드화되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변화를 모색하던 작가의 눈에 들어온 하찮은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계기가 되었다. 풍경 속에 있는 바다는 인류를 비롯한 모든 것을 낳은 원천이지만, 삶의 기원은 이제 죽음의 기원과 맞닿아 있다는 자각이다. 작품의 주제 또한 자신의 기원을 향한다. 언제나 은유적 의미가 풍부한 작품 제목에서 추려진 전시 부제 [결정지을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는]은 자신과 가족을 포함한 사적 영역의 어두운 면을 압축한다. 그런데 이러한 난국은 내용적 측면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수많은 내용적, 형식적 관심사 중에서 무엇이 결정적으로 작품에 남을지는 완성돼서야 알 수 있다. 무엇을 버릴지 확실해지는 것은 작품의 완성 국면에서일 뿐이다. 


그전까지는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이 필요한지 아닌지 전전긍긍하는 결정 불가능성에 빠진다. 조형적 요소의 배치가 계산적인 기하 추상작품이나 확실한 이야기를 전달하려는데 목표가 있는 도상과 달리, 박은하의 작품은 불확실한 요소가 많다. 큰 왜곡 없이 그 자체를 자세히 그렸지만, 언뜻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대상이 그러하다. 추상적 요소가 있지만 전적으로 추상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던 작품들에서 추상적 요소는 선택된 대상 표면의 이상야릇한 주름들로 나타난다. 캔버스를 넘어서 벽으로 천정으로 바닥으로 향하면서 외향적으로 펼쳐졌던 패턴은 얼어붙은 사물 위에 접혀있다. 이상하게 뭉쳐있거나 어느 부분인지 알 수 없는 단편이 포착된 은유적 화면들 앞에서 관객은 접힌 주름들을 하나하나 펼쳐가며 해석해야 한다. 이번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결정지을 수 없고 버릴 수도 없는](2015) 시리즈에는 무엇의 어느 부분인지 알 수 없는 폐기물 덩어리나 방치된 밧줄 더미 등이 보인다. 버려지거나 방치된 사물, 그리고 사물과 인간의 유비(類比)는 곧장 죽음과 연결된다. 



죽은 남자에 대한 보상 문제_Compensation Issues for the Dead Man_148X148cm_oil on canvas_2017



털이 무성한 밤들_Furry Nights_oil on linen_162x130cm_2019



작품 [죽은 남자에 대한 보상 문제](2017)는 물화 된 얼굴을 상징하는 마스크와 그것을 둘러싸는 심연의 회오리를 보여준다. 요즘 몰두하는 시리즈인 [털이 무성한 밤들](2019)에서 마주보듯이 배치된 죽은 동식물은 그 가혹한 밤들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독특한 제목에 대하여 ‘독일에서는 동물들의 털이 많이 자라는 연중 가장 추운 묵은해와 새해 사이의 12일간을 ‘털이 무성한 밤들(Raunacht)’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동물로서는 가장 힘든 시기를 상징하는 이 말은 자기보호 본능이 깔려있다. 잦은 작업실 이동을 뒤로하고, 몇 년 전에 자리 잡은 파주의 작업실은 평양이 서울보다 더 가까운 최북단의 지역으로, 작가로서는 그 스산한 곳에서 ’털이 무성한 밤들‘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밤은 위험하고 두려우면서도 꿈과 기억, 무의식의 산실이기도 하다. 박은하가 인용하는 밤은 예술의 조건이자 예술 자체의 양상이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하지만, 동시에 작가로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출전;  안양연고작가발굴지원전-Focus on Anyang 2019 (안양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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