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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애 / 타자의 미학과 윤리학

이선영

타자의 미학과 윤리학

이승애 전 (2008.12.11--2009.1.20, 아라리오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마치 실제로 본 듯이 종이 위에 연필로 정교하게 그려진 환상적인 괴물들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선들은 브라운 운동을 하는 연기처럼, 또는 실처럼 가늘게 뽑아 올려져 변화무쌍하게 변모하면서 인간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불명료한 타자를 가시화한다. 괴물의 형상 그자체가 제멋대로의 조합이듯, 작품 제목들도 알 수 없는 기호와 숫자, 문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다양한 괴물의 형태를 담은 작품 제목들은 분류 기호화 되어 있다. 이 분류 기호들은 괴물의 자의적 형상과 달리, 엄격한 기준에 따라 붙어 있다. 그것은 과학적 법칙처럼 객관적이지는 않지만, 나름의 규칙이 있다. 제목에는 서식지, 임무, 파생 순서, 탄생, 수명, 체질 등의 정보가 압축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괴물의 임무에는 방어, 생산, 치유, 전환, 소통 등이 포함된다. 이승애의 괴물은 기괴한 형상을 띄고 있지만, 그들이 맡은 임무는 마치 수호천사처럼 매우 긍정적인 듯하다. 그것은 괴물에 속해 있는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에 의하면, 라틴어 ‘monstrare’의 어원은 ‘보이다’와 ‘경고하다’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괴물은 불순한 힘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르고 신비스러운 것의 출현이라는 역설을 내포한다.


두려움과 신비의 양면성을 가지는 그것은 인간의 심성 깊숙이 존재하는 종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종교학자들은 ‘힘 있는 것의 나타남’이라는 의미의 크라토파니(Kratophany)와 성현(Hierophany,)이 동의어로 쓰인다고 지적한다. 같은 맥락에서 신과 악마,  성스러움과 금기의 대상 역시 같은 기원을 가진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히에로파니, 즉 신성한 폭력과 접촉했던 것은 모두 그때부터 신의 것이 되며, 그렇기에 그것은 또한 절대적인 금기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성스러운’이란 뜻의 hieros라는 수식어는 강한, 강렬한, 흥분한 등으로 번역되면서, 폭력과 전쟁의 도구들에 적용된다. 그리스어 hieros는 가장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의 결합이다. 초월성은 인간에게 내려올 때는 항상 신의 내재성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불결한 유혹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괴물이 가지는 형태 또한 복합적이다. 그 형태는 무질서하다는 점에서 병리적으로 보이지만, 질병은 ‘생명의 복잡스런 운동일 뿐이며, 생명이 팽창된 형태 내지는 생명 안에서 유추된 이상변이’(미셀 푸코)이다. 무질서는 위험과 예외적인 능력 모두를 상징하며, 이 지점에서 괴물은 실험과 도발을 추구했던 예술과 뒤얽힌다.

  

이승애의 괴물들은 반인반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요 작품들은 다양한 동물들과 생물의 발생 단계 등이 조합된다. 괴물들은 적절한 균형과 절제가 아닌, 미분화 되거나 과잉 분화라는 두 가지 극점 사이에서 여러 단계로 펼쳐진다. 그것은 열등함 또는 초월성이라는 극점을 오고간다. 괴물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다. 이는 괴물이 가지는 원초적 혼돈성이 가지는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원초적 혼돈성은 모성 원리나 무의식과 관련된다. 괴물은 남성적 영웅에 의해 제압되어 질서가 잡힌 상징적 우주로 편입되곤 하는 것이다. 작품  [green eyes]는 복수 시리즈의 하나로, 무엇인가를 갈갈이 물어뜯어 해체시키는 표범 같은 형상이 보인다. 넷으로 불어난 눈동자의 응시는 증오와 복수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괴물의 기본형을 이루는 용이나 뱀 같은 형태에 필수적인, 쩍 벌어진 턱은  ‘깨무는 질vagina dentata의 변형’(루시 스미스)이다. 


[green eyes]와 반대로, 작품 [brothers of moon]은 포식자 아닌 피식자가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다. 괴물한테 먹히는 양의 모습은 두려움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이승애의 작품 속 괴물들은 먹고 먹히는 모습을 통해 증오와 두려움을 표현한다. 인간 사회 역시 이러한 생태계의 연장이라고 본다면, 먹고 먹히는 관계는 삶의 충만부터 박탈에 이르는 감정의 편차를 드러내는 셈이다. 그것은 동시에 상처와 치유의 동인이 된다. 작품 [nice dream]은 이승애의 괴물 중 가장 활력에 넘치는 형태로 ‘빅토리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한 인간이 정신적 충격으로 인하여 마음의 손상이 기준치를 넘게 되는 순간 뇌세포에서 검은 가시가 만들어진다. 그 가시는 그의 영혼에 단단히 박히게 되고 그 때부터  검은 가시와의 전투가 시작 된다’고 한다. [nice dream]은 그 검은 가시를 이겨낸 괴물의 환희에 찬 모습이다.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도 괴물이지만, 이를 이겨내는 것도 괴물이다. 상처와 치유의 관계는 괴물이 모성과 연관될 때 더욱 분명해 진다. 

 

작품 [mother]는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 가진 애틋한 모성애를 그린다. [mother]는 비늘, 뿔, 수염 등을 여러 동물로부터 빌려오고, 몸의 안과 밖의 구별조차도 모호한 전형적인 괴물의 모습을 가진다. 새끼들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새끼들의 양분이 되는 것 같기도 한 어미의 모습은 모성 자체가 자아 내부에 품고 있는 타자임을 알려준다. 작가는 깊고 검은 바다를 괴물의 서식지로 지목하는데, 바다는 만물이 발생한 원초적 혼돈의 영역으로, 괴물이 가지는 특성을 공유한다. 이 원초적 혼돈의 영역(또는 시간)에서 다양한 차이들이 뒤섞이고, 기이한 짝짓기가 일어난다. 괴물이 상징하는 것은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승애의 괴물들은 적절한 한계를 가지는 인간적 감정의 진폭을 크게 진동시킨다. 하늘 끝까지 고양되는가 하면, 지옥 아래까지 하강한다. 그것은 숭고함과 비천함을 넘나든다. 이러한 넘나듦은 괴물과 괴물을 제압하는 영웅의 공통된 자질이다. 또한 그것은 괴물이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벌어지는 격렬한 싸움터라는 것을 예시 한다. 


괴물은 사회가 규정하는 적절한 주체의 한계를 넘나드는 존재로 주체의 짝패처럼 등장한다. 신화, 종교, 철학 등은 주체라는 동일자에 괴물로서의 타자가 대응해온 무대였다. 리차드 커니는 타자를 동일자와 전혀 다른 이질성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자아의 연장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눈다. 동일자를 타자에 종속시키려는 반대편에, 타자를 동일자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가 절대적 외재성의 영역에 타자를 놓는다면, 후자는 내재성에 타자를 놓는다. 절대적 타자는 ‘불가능하고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믿기지 않는 절대적인 놀라움’(카푸토)이며, ‘환원 불가능한 타자(신성 무한한 타자)’(레비나스)이다. 타자를 자아의 단순한 연장으로 보는 관점도 문제지만, 자아와 타자와의 접촉 지점 자체를 거부하는 것도 극단적이다. 무매개성은 도약과 신비를 낳지만 그자체로 고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우세종인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는 이질성alterity과 숭고sublime가 그러하다. 

  

경계를 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경계의 구분인데, 그렇지 못할 때 경계 넘기와 해체는 고착화되고 맹목적이 된다. 작품 [growing time]은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의 운명을 예시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온통 하얗게 빛나서 천국과도 같은데 너무 추워서’ 따뜻한 세상으로 넘어온 존재를 묘사한다. 이 경계(금기) 위반자는 ‘눈의 나라에는 없는 많은 것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는지’ 뒤늦게 깨닫는다. 그는 풍토병과 전염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자아의 해체, 또는 죽음에 이르는 위험을 낳는 경계 넘기에는 변신이 필수적이다. 들뢰즈는 카프카를 연구한 저서에서 작가가 인간이기를 멈추고 동물변신, 비인간 변신이 되는 상태를 탈주로 묘사 한다; ‘동물 변신은 모든 형태, 의미화, 기호, 기의를 와해시켜 비형태, 비영토화의 물결, 무의미의 기호에 자리를 내준다. 그곳은 내용이 형태를 벗어버리고, 표현이 표현을 가능하게 한 기표를 벗어 던지는 곳이다. 동물변신은 절대적인 탈영토화이다. 카프카가 벌레로 변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찾지 못한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이다.’  


작품 [enemy at the gate]는 성(城)에 들어선 괴물들을 그린다. 작가에 의하면 이 성은 ‘20년간 암흑 속에 가둔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불길한 곳으로서 감옥을 상징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처럼 성은 거대한 관료적 기계로 미로같이 연결된 문은 ‘아마도 감옥이거나 이성을 관리하는 기계실, 아니면 여기서 나가는 비밀통로’(작가)로 비추어진다. 괴물적 존재가 체계를 억압으로 느끼며 탈주를 꿈꾸는 사고는 마찬가지로 경계 밖으로 내쳐진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연결된다. 이승애의 [Mummy] 시리즈가 그렇다. 화면을 넘어 벽면으로까지 그 기운을 뻗치는 괴물들과 달리, 미라 시리즈는 박물지의 표본처럼 진열되어 있다. 작가는 괴물의 생존전략에 대해, ‘기온이 따뜻하고 토양이 비옥하고 햇빛이 가득하고 먹이가 풍부한 곳에서는 가장 사치스럽고 에너지가 많이 사용되는 행동이 펼쳐진다. 그러나 춥고 구름이 많은 황량한 곳에서는 부족한 자원 때문에 몬스터들은 어쩔 수 없이 독특한 생존전략을 택한다’고 말한다. 바싹 마른 잠자리나 박쥐날개를 한 미라들은 유일한 방어수단으로 위장을 택하였다. 

 

에너지 넘치는 괴물들이 흑과 백이 분명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인간의 얼굴을 한 미라들은 회색조이다. 전자가 극도의 이질성을 통해 기이한 아름다움을 뽐낸다면, 후자는 인간적 연민을 자아낸다. 실재하는 노숙자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미라 시리즈는 타자의 윤리학을 제기한다. 그것은 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의 변방으로 모린 희생양이다. 미라들은 표본처럼 고착되어 있기에 더욱 비참해 보인다. 그들의 모호한 존재 양태는 비상이 아니라 추락과 관련된다. 인간 이상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존재들인 것이다. 이승애는 다소 구별되는 두 가지 스타일의 괴물을 통해 타자가 이질성과 동질성을 드러낸다. 두 가지 스타일의 괴물 모두에서 감정이입은 일어나지만, 차이는 있다. 타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감지는 미학 뿐 아니라, 윤리학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리처드 커니는 타자가 동일성 안으로 붕괴되거나, 무매개적이고 접근 불가능한 타자성이 되지 않는, 타자와의 접촉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타자의 윤리학은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회색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승애의 괴물들은 타자의 이질성, 즉 그것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나 분리에 탐닉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아와 동료인간들의 삶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자아(로고스)와 타자(안티 로고스) 사이에 소통을 시도한다.     


출전;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 기사입력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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