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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임 전 / 텍스트로서의 세계, 그리고 예술작품

이선영

텍스트로서의 세계, 그리고 예술작품

짜임 전 (2008. 3.6--4.16, 갤러리 잔다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지난 5년 동안 짜임새 있는 기획전이 열리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은 홍대 앞 갤러리 잔다리가 개관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패션을 주제로 하였지만, 전시의 면면은 의상이 아니라, 그것의 밑바탕을 이루는 날실과 씨실의 어우러짐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선 건물 전체를 금색과 꽃무늬 천으로 싸고도는 이정훈의 작품 [metamorphosis space]는 축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들은 지하 2층 내부 깊숙이까지 연결되면서, 건물 안팎을 하나로 연결된 뫼비우스 표면처럼 변모시킨다. 섬유의 조직과 패턴은 벽에 직접 그린 작품이나 바닥에 까는 평면적인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강선미의 작품 [연결하다]는 전시장의 하얀 벽면에 검은 테이프로 붙인 것으로, 0과 1의 이미지가 교차 반복되고, 그 위에 전구 이미지들이 얹어진다. 마치 굵은 전선이 줄기이고, 그 위에 핀 꽃 같은 전구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한정된 구성요소의 반복적 배열은 강한 인공성을 풍기는데, 그것은 이미지라는 것이 결국 벽에 투사된 평면임을 강조한다. 


벽에 직접 그려진 아이 사사키의 작품에도 꽃이 등장하지만, [the lost flowers]라는 제목처럼 꽃은 하얀 벽면에 숨어버렸다. 이 작품은 설탕가루, 레몬주스, 바닐라 향, 계란 흰자 등을 섞어서 만든 하얀 안료로 벽면을 가득 매운 꽃 모양의 패턴이다. 편물처럼 한 코 한 코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무한반복의 구조이다. 식재료라는 소재적 특징은 작품의 일시적이고 과정적 성격을 드러낸다. 신지 오마키의 [echoes-infinity]는 꽃무늬를 이용한 무한한 울림을 자아낸다. 그것은 하얀 펠트 천위에 내려앉은 꽃잎 무늬 양탄자인데, 완전히 고착되지 않은 여러 색소가 꽃 모양으로 얹혀 있는 상태이다. 관객이 밟으면 형태와 색채가 흩어짐으로서 작품 내부에 시간적 한시성을 내장하고 있다.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텍스추어는 텍스트와 결합하기도 한다. 그룹 덤(강필주, 김원모, 황상운)은 [세 여자 이야기]에서 글자가 오려진 가죽, 또는 비닐을 걸어 놓았고, 우혜민은 [zipper-pipe]에서 색색의 지퍼를 연결한 통에 조명을 비추어서 섬유의 굵은 텍스추어와 다양한 색감을 장식적으로 드러낸다. 


현대미술이 3차원적 환영을 벗어나는 가운데, 화면의 평면성과 인공성을 의식하면서 장식미술과 초창기 모더니즘은 교감한 바 있다. 천성림의 작품은 책을 오려서 엮은 평면적 패턴을 겹쳐서 몬드리안의 기하추상 회화를 공간적으로 변주하였다. 추상적 패턴에는 3차원적 환영이 아니라, 자체의 구성적 요소에서 만들어지는 환영을 창출한다. 요시히로 야마세의 [stripes]는 4개의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그린 기하학적 패턴이 가운데 선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룬다. 그것은 패턴화 된 평면 이미지이지만, 줄무늬의 배열에 따라 원근감이 발생한다. 이러한 기하학적 패턴들은 점차 캔버스를 넘어서 환경으로 뻗어나간다. 김희경의 작품에서 환경은 몸풍경bodyscape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세면실같이 완전히 인공적인 패턴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을 천이나 편물로 전치시켰다. 미끌거리고 단단한 위생도기 대신에 흡수력이 있으며, 여기저기로 뚫린 구멍이 있는 축축 늘어진 천 세면실은 직접 피부에 와 닿는 수건이 그렇듯이, 피부나 장기를 닮아 있다.  


다양한 텍스트들이 등장하고 텍스추어의 향연이 벌어지는 ‘짜임’ 전에서 단단한 실체는 표면, 또는 표면들로 흩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의 표면은 본질, 또는 핵심과 구별되는 의미 보다는, 그 이원 항이 해체된 상태라 해야 할 것이다. 전시의 많은 작품들에서 표면들은 한정된 부피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특정한 중심이 없는 무한 구조로 확대되고 있다. 이전 시대의 미학에서 본질이라 가정된 사실이나 지시대상 역시 모호한 것이 된다. 전시장 내벽과 외벽, 바닥까지 잠식하는 패턴들은 사물들의 현실과 자연의 깊이와 거리가 있는 허구의 영역에 속해있다. 그것은 실제와 기호 사이에 놓인 불연속성을 예시한다. 대상으로부터 놓여난 기호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형태들을 생산하며 나아간다. 형태들은 현실과 유사관계를 가질 뿐이다. 작품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들로 된 망을 엮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기호들이란 문자와 단어들과 이미지를 의미한다. 전시장은 외부의 반영이나 내면의 표현을 넘어서, 언어적 요소들의 자유로운 결합이 이루어지는 실험적 장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말하듯이,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전의 견고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지탱했던 이원론은 여럿(다원론)이 곧 하나(일원론)인 방식으로 변화한다. ‘짜임’이라는 전시의 개념어는 전시의 작품 면면에서 드러나듯 텍스트와 연결되는데, 오늘날 텍스트는 근본을 이루는 핵심이 없이 까도까도 끝이 없는 양파의 모델과 비유되곤 한다. 그것은 인식론적 허무주의나 불가지론이라기보다는, 열린 작품을 옹호하는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텍스트란 ‘짜여진 것, 얽힘, 짜여진 방식’을 말한다. 그것은 껍데기를 벗겨내면 숨겨져 있는 배후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상호 엮어져 가며 만들어 내는 생성의 개념을 강조한다. 이미 가정된 진리를 논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구축화 과정이 중요하다. 기존의 ‘예술작품’은 성장하는 유기체에 비유되곤 하였지만, 이제 텍스트에 대한 비유는 네트워크이다. 이 회로망은 연속적인 결합을 통해 확장된다. 


텍스트는 닫힌 정의가 아니라, 복수 언어적이고 무한한 구조를 강조한다. 텍스트는 그 짜임새와 구멍들에 의해 살아 움직이며, 코드들의 무한한 유희는 다양한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서로를 표현하는 짜임의 방식들은 의미의 궁극적 기원이나 목표가 없으며, ‘불완전한 원초성을 대신하는 보충’(데리다)만이 있을 따름이다. 또한 텍스트는 선행 언설들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문화의 모든 것과 관련된다. 서술은 더 이상 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표면이 되고, 작품의 통일성과 의미는 표면을 확장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지, 표면 밑에 놓여 있는 유일한 원리를 발견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끝없는 과정과 비결정성으로서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무기력한 현실 안주나 예술지상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자못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텍스트 이론에서 정치적 함의를 읽는 좌파 이론가 P. 마슈레는 텍스트가 서로 갈등하는 이데올로기들과 목소리들이 활동하는 경쟁의 장으로, 다수의 이데올로기적 모순들이 발휘하는 효과를 생산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언어는 투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들이 관통하며, 개인을 주체로서 구성한다. 따라서 텍스트 또는 예술작품은 여전히 생산양식의 사회적 관계들이 재생산될 수 있다.   


출전;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 기사입력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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