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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현 / 총체와 해체 사이에 유동하는 붉은 산하

이선영

총체와 해체 사이에 유동하는 붉은 산하 

이세현 전 (2008. 8.21--9.20, 갤러리 원 앤 제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산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농가와 길, 밭이랑과 논, 다리와 등대 등 사람 사는 동네들이 사이사이에 박혀있다. 그러나 인적 없는 그곳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국의 비무장 지대를 소재로 한 것임을 알게 될 때, 붉은 산야는 민족적 비극의 차원으로 전이된다. 붉은 색이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까지 가세하면, 붉은 색이 자아내는 심리적, 심미적 효과는 복잡한 차원으로 얽혀든다. 작가는 군복무시절 군사 분계선 근처에서 야간 보초를 섰고, 그 때마다 야간 투시경을 썼는데 온통 붉게 보인 세상은 충격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남북한을 가르는 군사적 완충지대는 급격한 현대화 와중에도 원형이 보존된 곳이지만, 두 적대 진영 사이에 번뜩이는 감시의 눈길을 받아온 경계지역 특유의 불안정감이 내재한다. 


그곳은 손상되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적막하지만 평화로울 수만은 없는 모호한 장소이다. 붉은 색 필터로 걸러진 비무장지대의 풍경에서 하얀 공백은 느긋한 동양화의 여백을 생각나게 하면서도, 쩍쩍 갈라지고 갈갈이 찢겨진 대지의 경계선을 드러낸다. 여러 장소에서 따온 요소가 다양하게 조합된 풍경에서 여백은 각 작품에 차이를 부여한다. 그의 작품은 산야의 형태보다는 그 형태들의 구성에 따라 차이 지워진 여백이 각 작품의 특징과 표정을 만든다. 충격적인 심홍색과 대조되는 백색 공간은, 수직으로 여러 겹 쌓아올려진 풍경이나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진 풍경에서 보이지 않는 구성적 중심이 되고 있다. 여백은 작품에 따라 화면 상하로, 또는 화면 중앙에서 산야에 에워싸여 있거나, 또는 화면의 허리를 완전히 비워 놓는 식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보여준다. 


이세현의 풍경화는 현실에서 출발했지만 그 풍경이 가리키는 곳은 현실이 아니다. 먼 이국에서 작업하던 화가에게 원초적인 자연의 상을 제공했을 고향은 분단국의 어촌지역으로, 잠재적인 전쟁과 전쟁 같은 개발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곳이다. 2008년 영국 유니온 갤러리의 전시 평문을 쓴 키타무라(Katie Kitamura)가 언급하듯, 이세현의 풍경은 노스탤지어와 유토피아가 복합된 관념적인 풍경이다.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는 풍경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향토가 사라질 때 향토적인 것이 번성하는 것이다. 작품 [Between Red-63]에는 왼쪽 아래에 농가가 오른쪽 아래 논이 배열된 풍경이지만, 붉은 형태에 완전히 막혀있는 비좁은 여백은 현대사회에서 그 입지가 좁아져 쇠락의 길을 걷는 농촌을 예시하는 듯하다. 작품 [Between Red-51]에서 나지막한 농가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듯이 떠 있는 장면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이세현의 풍경화는 통상적인 풍경화처럼 관객의 시선을 풍경 안으로 안내하는 도입부가 있는데, 바위산 위에 삐죽이 솟아난 등대나 소나무, 정자 등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이세현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복합적인 시점은, 우선 풍경을 이루는 각 요소들을 다른 작품에 반복하여 배치하는 꼴라주 스타일의 작업방식에서 연유한 것이다. 가령 거의 구름처럼 보이는 밝은 꽃나무가 도열해 있는 장면은 여러 작품에서 등장한다. 한 덩어리의 풍경은 서양의 원근법에 충실하지만, 그 덩어리들을 배치하는 방식에 있어 동양화, 또는 르네상스 이전의 서양화처럼 다(多)시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귀결되는 정지된 관점이 아니라, 풍경 안을 눈으로 거닐 수 있는 이동 시점이다. 물론 두 가지 시점에 대해 하나를 사실적, 다른 하나를 추상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주의처럼 보이는 서양의 원근법 역시, 동양의 관념 산수화 못지않게 이상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서양의 원근법은 인간이 중심이자 척도가 되는, 자연의 세계를 도해하는 인공적인 방식이었다. 원근법이 완성시킨 것은 공간의 수량화, 즉 수학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서양의 원근법 역시 사실적(real)이기보다는 이상적(ideal)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시선이 중첩된 전지적 시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세현의 작품은 몇 개의 풍경 덩어리를 위로 쌓아 올린 부감적 시점과 수평으로 배열한 파노라마적 시점이 공존한다. 풍경 안에 여러 형태와 크기로 배치된 여백은 불연속적인 공간으로, 점진적이거나 급격한 도약의 무대를 제공한다. 여백은 풍경에 완전히 에워싸이기도 하고, 화면 여기저기로 뚫려있기도 하다. 


특히 여러 풍경적 요소를 뭉쳐서 타원이나 밥공기를 업어놓은 듯 배열한 작품들은 시각적인 응집력이 강하다. 반대로 [Between Red-62]처럼, 완전히 풍경으로 막힌 여백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 수직 정렬된 풍경을 붙이거나 왼쪽으로 풍경을 붙여 가운데를 텅 비워놓거나, [Between Red-45]와 [-49]처럼 두 개의 작품이 쌍을 이루어 완결되는 풍경도 있다. 풍경의 꼴라주와 그 결과물인 여백은 화면에 자족적인 완결성을 향하거나 여러 방향으로 열린 파편적 풍경을 연출한다. 이세현의 작품에서 총체성과 단편화 사이의 기묘한 공간이 있음을 주목하는 키타무라는 쾌락과 트라우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공존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세현의 풍경은 정반대의 의미로 뒤집어질 수도 있는 이상한 불균형을 내포한다. 이 환상적 풍경화는 리얼리즘과 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다. 환상의 이면에 현실이 있고, 현실의 이면에 환상이 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양면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다양한 시점의 복합이다. 대지는 원근법과 원근법을 상대화하는 또 다른 시점에 의해 재구조화된다. 작가는 각각의 장면에 원근법을 부여하고 이를 재배치한다. 원근법 자체가 전지전능한 존재인 신의 시점이 중첩된 재현의 방식이므로, 배치 방식에 따라 총체와 해체 사이를 진동하게 된다. 이렇게 기표화 된 대지는 영토화와 탈영토화 사이에 존재하는 흐름을 형성한다. 이세현의 작품에서 극단화 된 것이지만, 본래 풍경은 풍경 그 자체로 존재한 적이 없다. 마르틴 바른케는 [정치적 풍경]에서 풍경은 온갖 종류의 변형을 강요하는 폭력적 힘이 작용하는 장소된다고 주장한다. 자연에는 정치적 환상이 투사되기 마련이다. 가령 중세의 황금빛 하늘이 근대의 푸른색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세월과 피가 흘렀다. 


현대의 화가 이세현에게 하늘은 황금색도, 푸른색도 아닌 텅 빈 중성적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의 역학 관계가 내재한다. 바른케는 오늘날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는 원래 군사시설이었던 곳이 많다고 말한다. 성채에서 풍경을 둘러보는 눈길은 몇 백 년 동안 경계를 늦추지 않는 긴장된 지배 권력자의 눈이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바라본 풍경 역시 적대적 대치 상황에서 상호간의 감시적 시선이 착종된 곳이다. 동시에 이러한 팽팽한 대치로 인해 역설적으로 자연이 보존된 곳이다. 자연적인 경계지역은 또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온한 풍경인 동시에 개발의 이익을 탐하는 시선에 의해 남김없이 유린된 곳이다. 탁 트인 파노라마 시점과 첩첩이 쌓인 풍경화의 시점들은 소유와 지배에 얽혀 있는 것이다. 분단국의 정치상황과 연관시키자면, 그곳은 무엇보다도 잠재적인 전쟁의 무대이다. 바른케는 풍경화의 전술적 의미를 논하면서, 전쟁무대로서의 풍경이 장기판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고 지적한다. 


풍경들을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이리저리 배치하는 이세현의 방식은 게임과 전쟁, 그리고 예술을 가로지르는 기호적 차원의 유희가 있다. 공백은 장기들이 움직이는 바탕이 되어준다. 기호적 차원의 유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실제를 괄호 안에 묶어 놓아야 한다. 그것은 산업에 의해 풍경이 사라지기 시작할 즈음에 풍경을 그자체로 감상하는 방식이 대두되었다는 사실과도 밀접하다. 자연 및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위기가 닥치자, 인간들은 자연에 이상향을 투사했다. 그러나 자연에 투사된 유토피아적 환상은 결국은 부재의 결과이므로, 비극성이 내포되어 있다. 붉게 타는 노을이나 가을 산을 떠오르게 하는 이세현의 풍경화는 퇴락이나 쇠락 직전에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듯하다. 하얀 공백으로 풍경의 실제 맥락을 지워버린 작가는 붉은 대지들을 시간 밖에 존재하는 유토피아 섬으로 치환시킨다. 유토피아적 환상은 현실이 어두울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출전;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 기사입력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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