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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차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필획

이선영

차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필획

송현숙 전 (2008. 9.30--10.26, 학고재)

  

이선영(미술평론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단색조의 바탕에 몇 개의 획으로 완성된 그림들은 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겹의 울림을 준다. 공간을 가르는 선은 빛이 되어 궤적을 남기고, 작가의 무의식적 기억 속에서 퍼 올린 원형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 이미지들은 단단한 덩어리가 아니라, 열린 경계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경계는 분리가 아닌, 부드러운 접촉을 낳는다. 드러내면서 감추는 천의 장막, 선이면서 면인 복합적 차원, 그리면서 지우는 듯한 붓질은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천이나 도기 표면처럼 숨구멍이 있다. ‘breath and brushstrokes’라는 부제로 열린 재독 작가 송현숙의 작품에서 숨(생명, 삶, 자연)과 붓질(예술)은 하나가 된다. 송현숙의 ‘일필휘지’에는 심오한 관념성이나 구구절절한 형이상학, 또는 천재 예술가의 신화를 암시하는 과잉된 제스추어가 없다. 시적으로 함축적인 화면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고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염려, 상처받은 삶을 치유하려는 몸짓 등을 읽을 수 있다. 


‘몇 획’, 또는 ‘몇 획 위에 몇 획’ 같은 작품 제목은, 말 그대로 각 작품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붓의 획수이며, 가필 없이 단번에 그어진 선들은 관객이 그 순서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명료하다. 필획은 녹두 색 바탕 위에 서있는 막대기 같은 선 하나가 있는 [1획](2006)부터 기와지붕을 지지하는 가는 막대기를 그린 [65획](2006)에 까지 제목에 붙여진 숫자  만큼이나 다양하다. 대숲 뒤에 흰옷 입은 여인의 뒷모습이 약간 보이는 [30획](2008)이나 늘어진 천 뒤에 호랑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호랑이 위에 6획](2004)같은 예외적인 작품을 빼면, 생물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절도 있는 붓질은 항아리, 나무 막대기, 천, 집, 고무신 같은 오래된 사물들을 그리며, 작품들은 그것들 사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항아리의 입구를 표현하기 위해 1획으로 그어진 타원형은 비스듬하게 보이는 원을 그리는 단순한 행위의 궤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물감의 밀도를 통해 어디가 처음 시작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항아리 내부의 어두운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동그라미 안을 어둡게 색칠한 것이 아니다. 동그라미를 그리기 전에 일획의 붓질 자국을 화면에 그대로 남겨둔다. 이때 일획은 항아리 내부의 심연이 된다. 붓질의 궤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일획들로만 이루어지는 송현숙의 작품에서는 선과 면의 구별이 없다. 항아리 몸통은 5획부터 9획에 이르는 여러 가지 변주가 있다. 색상 및 명도의 차이를 두는 항아리는 화면상에는 보이지 않는 바닥 위에 수평으로 놓여 있지만, 2008년에 새롭게 제작된 작품 중에는 [7획]처럼 삐뚜름하게 놓인 것도 있다. 정신을 집중하여 단번에 그어진 선의 궤적에 내재된 운동성이 각도의 변주로 나타난 듯하다. 항아리 입구를 형상화하는 원은 공(空)을 상징하는 아라비아 숫자 0처럼 보인다. 숫자로서의 0은 복잡한 수의 계산을 간편하게 해주는 숫자 이전의 숫자이다. 0이라는 이미지는 비어있는 항아리를 상징하는 기호가 되어 준다. 


항아리의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항아리의 비어있음은 부재와 무를 넘어 무한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기원한 모태이며, 기호의 차원에서는 ‘존재의 집’(하이데거)같은 위상을 지닌다. 70년대 초에 해외 노동자로 고향을 떠난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초가집이나 기와집은 일부분이며, 든든한 기둥이 아니라 취약한 나무 막대기로 지탱된다. 지상의 구조물은 심연을 간직한 항아리만큼의 넉넉함과 완전함이 없다. 나무 막대기와 천들이 있는 작품 역시 항아리 그림처럼 시원한 선묘의 흐름을 보여준다. 아래로 그은 획으로 표현된 천의 이미지는 고향의 마당 빨래줄 로부터 왔다고 작가는 밝힌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농사일 외에도 길쌈을 쉬지 않고 했으며, 마당에는 무명, 명주, 모시, 삼베 등이 널려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분리된 이미지가 조합되어 있기 때문에 작품 제목은 ‘몇 획 위에 몇 획’ 등으로 표시된다. 


가령 보이지 않는 줄을 지탱하는 나무기둥이 일획이고, 그 위에 널린 여러 폭의 천 이미지들이 나머지 몇 획을 이루는 식이다. 줄에 널려 있는 듯한 천은 여러 폭과 투명도, 각도를 가지고 있다. 그 뒤로 그림자처럼 비치는 나무 막대기는, 작품 [2획 위에 12획](2002)처럼 둘이 되기도 하는데, 지상에 서있는 수직 이미지가 인간을 연상시키는 미술의 상징적 관례에 따르자면, 마치 밀회 중인 연인 같다. 나무 봉은 그네나 횃대,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나무 봉 같은 이미지로 증식되고 이때 결합되는 천은 펼쳐지기 보다는 매듭지어진 형태이다. 쫙 펼쳐진 천들이 보여주는 시원함 대신에 지상적 존재의 삶이 그러하듯, 얽히고설키며 맺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러진 것을 붙여주는 붕대처럼 분리된 것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하다. 작품 [3획 I](2007)은 긴 나무와 작은 나무가 밝은 천으로 묶여 있는데, 마치 모자상 같은 느낌을 준다. 천은 부러진 횃대의 가로 목을 연결시켜주기도 하고, 초가지붕을 버팅 기는 가는 나무 기둥들을 묶어주기도 한다. 


작품 [33획](2005)처럼 두 개의 나무 기둥을 연결하는 천은 분단된 조국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이다. ‘김포공항에서 추방당함’--당시에 민주화 운동과 연대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밝힌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 [39획](1994)은 각각 고무신을 얹고 있는 두 개의 나무을 잇는 수많은 흰 천들을 보여주는데, 엇겨진 양쪽 고무신을 합치면 아마도 태극이 될 것이다. 최근 작품은 거의 추상화처럼 보일정도로 단출해 졌지만, 이러한 그림에서도 70년대에 외국인 노동자로 독일로 건너온 작가가 고향 전라도에 대한 향수와 군부독재의 탄압에 분노하며 일기처럼 그려나간 그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고무신 무더기 위에 13획](2005)은 고무신 무더기들을 13폭의 천이 덮은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기념일에 그린 그림이며, 일제 강점기에 정신대로 끌려가 성적 노예로 수난당한 여성들을 기억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송현숙의 그림에서 주인 잃은 고무신들은 치유의 대상처럼 천에 묶여 있곤 한다. 고무신은 솟대처럼 장대 위에 올려 있기도 한데, 오래 전에 떠나온 조국을 향해 고개를 빼고 있는 듯하다.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가서 화가로 거듭난 그녀에게 초가집과 기와집은 어릴 적 고향의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들이다. 초창기 작품인 [39획](1991)은 가운데 혼 불을 품고 있는 기와집의 일부를 보여주며, 작품 [21획](1993)에서는 고무신이 하나 있는 초가집을 보여주는데, 이 두 작품을 연결 지어 본다면 혼 불과 고무신은 비슷한 비중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떠도는 영혼과 떠도는 삶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이들 초창기 작품에는 작품의 바탕에 붓질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요즘 작품은 붓질 흔적이 없는 단색조이다. 청자색을 닮은 연녹색조와 검은 색조의 바탕에 활달하게 칠해지는 붓질은 자칫 무겁게 가라앉을 수도 있는 측면을 보완해 준다. 이러한 균형감각은 채색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서양의 템페라와 동양의 필획이 닳아빠진 납작한 풀비로 조화롭게 버무려진다. 마르거나 젖은 상태의 바탕에 긋는 템페라고 긋는 획들은 붓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데 이 붓질은 동시에 작품 속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감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나무 막대의 결, 펼쳐진 천들의 섬유질,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감된 항아리의 볼륨감 있는 표면이 되는 것이다. 작품제목을 이루는 획수와 이미지를 일치시키듯이, 평면 위에 발린 붓질이자 재현적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문자이자 이미지이기도 하며, 붓과 혼연 일체가 된 몸의 흔적이기도 하다. 붓질 자체가 숨을 고르는 행위와 유사하다. 아무것도 없는 침묵의 공간에 불현듯 나타나 빠르게 가로지르는 필획은 사물의 단순한 자기동일성의 확인이나 추상적 통일성이 아니라, 배제되고 분리되어진 것들을 서로의 곁에 두게 한다. 이러한 공존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치유적 행위이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사회적, 역사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출전;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 기사입력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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