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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그리고 문명의 조건으로서의 스트레스

이선영

탄생, 그리고 문명의 조건으로서의 스트레스

스트레스 파이터 展 (2007. 12.28--2008.1.18, 대안공간 풀)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스트레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태어나 살고 스러지는 모든 유기체들이 견뎌내야 하는 삶의 상수와도 같다. 10명의 젊은 작가가 참여한 ‘스트레스 파이터’전은 유한한 존재를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스트레스라는 심각한 질환을, 싸우고 부시고 죽이는 게임의 리듬에 실은 전시이다. 게임에서 속도는 스트레스를 쌓이게도 하고 해소하기도 하는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의 환경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인 전자 미디어와 그것의 폭주는 삶을 과포화 상태로 몰고 가며, 극적인 변화에의 욕망을 재생산한다. 전자 미디어의 시간 감각의 원형은 얼마 전 과거로 소급된다. R. 코젤렉은 [지나간 미래]에서 18세기에 만들어진 역사라는 개념이 파생시킨 근대적 시간 감각, 즉 ‘이질적 경험을 생산하는 시간 간격의 단축과 변화의 가속’에 대해 묘사한 바 있다. 근대부터 변화에 대한 갈망, 즉 기존의 경험과 미지의 기대의 간격이 커졌고, 모든 것이 유동적이 되었으며 맹목적인 변화에의 사랑이 싹텄다는 것이다. 


미래에는 다르리라는 기대와 이와 연관된 시간적 리듬의 변화는 미래의 비중을 크게 하면서 점점 빨라지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점점 짧은 시간 간격을 강요하는 세계를 도래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도의 기술적이고 형식적 체계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애주기는 맞아 떨어지지 않으며, 그것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현대인은 시간이라는 유령에 쫒기며 산다. 예술은 불필요한 자극이 쇄도하는 번잡한 삶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듯하나, 작업하는 삶의 스트레스 또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작업의 성패는 스트레스에 노출된 자신을 얼마나 잘 다스리는가에 달려 있다. 전쟁 같은 스트레스와 대적하는 이 전시의 많은 작품 중 신지선과 서지선의 작품은 평온한 분위기로 눈길을 끈다. 신지선의 [스페이스 아파트]는 빨래, 고추 등이 매달려 있는 아파트 발코니를 그린 그림이고, 서지선은 커피, 칵테일, 맥주같은 음료와 지인들과 담소하는 모습을 담았다. 


멀찍이서 바라 본 일상의 모습, 그리고 깔끔한 상품처럼 제시된 여가의 이미지는 익숙한 대상이면서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설정하여 심미적인 만족을 준다. 그러나 깔아뭉갤 듯한 거대한 바퀴를 들이대는 작품 [맹렬한 포격](박준범)에서처럼, 비좁은 골목에 대형 공사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면? 강준영의 [B-tower]는 금색 땡땡이 무늬가 새겨진 작은 탑과 깨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탑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우리의 자그마한 일상의 행복과 그것의 파괴에 대한 비유 같다.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상은 정해진 공간을 나누어 써야하는 문명의 양면성, 즉 안전의 확보와 억압을 동시에 암시한다. 거친 자연 상태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인류는 문명을 창조했지만, 함께 모여 사는 것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욕망은 아직 문명에 길들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에서 나온 것이고, 따라서 문명에 대한 적개심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노상준의 작품은 문명과 개인의 대립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낸다. 작품 [presentation]은 양쪽에 양복 입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리 튜브를 타고 헤엄치는 모습인데, 이는 엄격한 초자아와 긴장관계를 이루는 자아를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은 비좁은 풀장 가운데에 솟은 빌딩을 에워싸고 헤엄치는 인간들과 드넓은 풀장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비교한다. 딱딱한 규격과 밀집으로 상징되는 것은 문명의 명령, 즉 외부의 강제이고, 개인은 이러한 중심의 질서를 억압으로 느끼고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초자아와 자아, 이드의 구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최성록은 인간인지, 동물인지, 기계인지 알 수 없는 경계가 불분명한 괴물을 만들었다. 개체의 경계가 불확실한 존재, 즉 비정상과 병리적인 양상은 자아로 조직화되기 이전의 무의식적인 실체이다. 그것은 의식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원초적 충동에 휘둘린다. 덜덜 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외설적이다. 이러한 발작적인 움직임은 ‘억압이 존재하고 무의식의 메커니즘이 우세한 상태, 즉 히스테리가 형성되는 상태’(프로이트)이다. 


이완의 작품은 곰팡이가 피고 있는 음식과 사격 연습 용 과녁을 통해 죽음과 공격본능을 드러낸다. 원초적인 본능인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물이 썩어가는 과정은 유기체가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그와는 정반대의 것, 즉 그 단위를 해체하여 원래의 무기물 상태로 돌려보내려는 욕망이 공존한다. 최두수의 [obsession night]는 잡지에서 오린 이미지들을 꼴라주한 작품으로, 성스러움과 세속성, 섹슈얼리티와 죽음 등이 교차하는 자극적인 장면이다. 화면에 고착된 쇄도하는 장면들은 과도한 자극에 몰두하는 현대의 강박 관념과 묵시록적인 장면을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서는 사랑의 본능이 공격과 지배의 본능과, 그리고 만족이 파괴와 연결되어 있다.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은 끝없는 대리물을 찾으며, 이는 더욱 강한 자극을 야기한다. 또한 잡지 꼴라주라는 양식은 자극받은 욕망이 그 한시적 만족을 채우기 위해 구매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함을 예시한다. 


안두진의 [victory]는 극단적인 파괴본능이 야기하는 카타르시스를 표현한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하늘 아래 산처럼 쌓인 시체더미들 위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두 고수의 몸짓이 비장하다. 온통 피 색으로 물든 죽음의 우주에서 감지되는 것은 묘한 생명의 약동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죽음을 한쪽 구석으로 밀쳐놓고 그것을 삶에서 배제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태도는 죽음을 필연적인 것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프로이트는 생존이라는 도박에서 가장 큰 밑천은 생명 자체라고 강조한다. 이 생명이 내기에 걸려있지 않으면 삶은 빈곤해지고 무기력해 지는 것이다. 죽음을 삶의 한 가운데로 불러들이는 안두진의 작품은 마치 종교와도 같은 절대적 욕구로 가득 차 있다.


신창용의 작품 [zero]는 하늘과 바다색이 멋지게 어우러진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작품의 제목이나 구도처럼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휴식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원점에 놓는다. 해변의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현실과의 모든 관련을 끊고 은자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흔한 인생에서 쾌락원칙의 프로그램에 추동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완벽에 가까운 만족의 장면은 매우 환상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예술 역시 현실에서 면제된 그 어떤 차원의 확보를 통해 현실에서 잃어버린 것을 허구세계에서 찾으려는 충동에 대한 대리만족을 제공한다. 그래서 예술은 ‘문명을 위해 욕망을 희생한 사람의 불만을 달래기에 가장 적합하다’(프로이트)는 평가를 받곤 한다.  



출전; 컬처뉴스(www.culturenews.net) 기사입력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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