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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훈 / 편집되는 현실 또는 환상

이선영

편집되는 현실 또는 환상

  

이선영(미술평론가)

  

주로 인물화를 그리던 신영훈은 요 몇 년간의 변화를 담은 이번 전시에서 풍경화를 보여준다. 전시에 포함될 설치작품 또한 그림 속 풍경과 같은 이미지를 활용한다. 그것은 작가로서 전격적인 변신일까. 그러나 [Director's Cut]이라고 붙은 작품들은 이미 자신에게 있던 것을 순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인상이다. 감독편집판이란 대규모 자본투자의 예술이기도 한 영화에서 대중보다는 작가의 선택을 강조한다. 회화보다는 역사가 짧지만, 회화의 관례까지 모두 흡수하며 발전해온 100년 이상 된 장르인 영화는 대중문화의 범주에만 묶어 놓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작가는 [전원일기]부터 [시네마 천국]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인 것 예술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즐겨 보는데 그런 영화들은 다소간 현실도피의 수단이다. 가운데에 침대를 설치한 3면 풍경설치 작품은 그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바를 나타낸다. 무릉도원같지만, 결국 사라지는 환영이다. 그것은 전통 산수화에 내재 된 관념성이나 이상주의를 다른 차원에서 드러낸 것이다. 




Director's Cut_58x44cm_광목에 수묵채색_2019



그의 일상을 닮은 세팅은 다른 세계에 빠져들게 하지만, 어김없이 현실은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의 감성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경우도 있다. 좋아하는 것과 놀거나 일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유지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젊은 남자에게 또 하나의 도피 수단은 다른 성(性)일 것이다. 사랑의 노래에서 가장 많은 내용은 그(녀)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환상의 대상은 다름 아닌 ‘죽이는’ 여자/남자이다. 그/녀는 현실의 나를 죽이고 환상 속에 살게 할 것이다. 특히 대중적인 영화 속에는 그러한 선남선녀들이 자주 등장하여 대중의 시선을 붙잡아 둔다. 신영훈은 2017년 전시 도록의 대담에서 ‘나에게 여성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 속 대상을 넘어 감성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고 저 깊은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2017년 [음유적 클리셰] 전 속의 여성은 바탕은 비워두고 형태도 다 칠해지지 않은 모습이다. 여성은 보는 이의 욕망에 화답하게끔 비워진 곳이 있는 유동적인 기표로 나타난다. 


작품 속 대상은 굳이 여성이 아니어도 되는 모호한 욕망의 집결체이다. 2018년 [패러독스] 전의 작품인 [hard boiled]는 반라의 여성이 좀 더 수위 높은 포즈를 취한다. 작가의 이상형이 투사된 여성은 2010년의 전시 제목처럼 ‘몬스터’이다. 인류의 상상계에서는 성녀부터 악녀에 이르는 여러 여성상이 있었지만, 그녀들은 남성(=인간)과는 구별되는 타자로, 성적 대상부터 성스러운 존재까지 광폭의 계열 속에서 출렁거린다. 사랑이 이루어지든 아니든 타자에 대한 환상은 깨지게 되어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자가 생각하는 내가 다른 사회적 현실에서, 나와 타자의 간극은 선명하다. 자기 안의 타자들과의 간극도 크다. 다소간 분열된 존재들인 현대인에게 사랑을 비롯한 환상으로의 도피는 어찌어찌하게 시작되고 유지되는 짧은 순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 속 자신의 이상적인 짝은 결국 자신의 분신이다. 자신의 은유로서의 타자, 그러한 타자와의 사랑이나 욕망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현실 속의 그녀가 누구이든, 그곳이 어디이든 자신의 또 다른 면모일 뿐이다. 




Director's Cut_146x62cm_광목에 수묵채색_2018



신영훈에게 그러한 자신 속의 타자에 해당되는 환상 속의 여성이나 장소는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숲은 자연/ 문명, 여성/남성의 오래된 이분법적 상상력 속에서 여성을 상징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인물은 전혀 안 나오는 것은 아닌데, 이전처럼 화면 가득한 것이 아니라, 멀리서 포착된다. 작가가 즐겨보는 영화로 친다면 줌 아웃 된 상태이다. 뭔가 주요한 사건이 다 지나간 이후의 평정함을 담은 듯, 푸른 나무가 가득한 풍경은 평화롭다. 그러나 한 장의 사진처럼 정지된 화면은 긴장감으로 전화될 수 있다. 깊은 숲과 어울리지 않는 난데없는 인물상은 그러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광목에 수묵채색으로 제작한 작품 [Director's Cut](2019)에서 작가는 책가방을 멘 여학생이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다른 작품에서 성숙해 보이는 여성이 같은 숲에서 나오는 장면이 있는 것을 보면, 작품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략된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그 사이에서 일련의 서사가 발생한다. 


많이 생략된 듯한 장면들 사이의 간극은 관객이 채울 수 밖에 없다. 짝처럼 보이는 이 두 작품에서 숲은 들고 나는 사람들의 배경처럼 등장한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이 분신과도 같은 은유적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 스스로가 어떤 장소를 들고 나는 것이다. 미세먼지는 차단하고 피톤치드가 풀풀 풍겨 나올 듯한 빽빽한 숲은 도시인이 꿈꾸는 치유의 공간이다. 인류는 자연을 정복한 후에 그것이 고갈되고 피폐해지자 곧장 원초적 자연을 유토피아로 삼았지만, 유토피아는 그 뜻이 그렇듯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뒷배경에 그림이 있는 1970년대 이동식 사진관처럼 마치 자연을 배경으로 한 사진같은 효과가 있다. 그의 작품 속 자연은 세트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의 배경은 제주이다. 제주는 얼마 전 자동차로 단 몇 초 더 빨리 통과하겠다고 길가에 울창하게 늘어선 멋진 숲을 대대적으로 베어 내려 한 계획으로 문제가 된 곳이기도 하다. 자연은 늘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따라 제멋대로 파괴되고 이식되고 갱신된다. 






현대의 자연은 환상까지는 아니어도 그 실재감을 상실한다. 그는 이번 전시에 끌어들인 제주풍경에서 어딘지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이국적이지도 않은 면’에 끌렸다고 말한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미묘한 면모는 형식적 장치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동양화를 모태 언어로 가지고 있지만, 한지가 아니라 광목천에다 그리고 먹과 물감을 같이 사용한다. 스며듦과 얹힘이 함께 하는 화면은 구별되는 두 차원의 경계에 위치한다. 숲속 나무의 중간만을 그려서 깊은 공간감을 배제했다. 숲은 사실적으로 그렸으면서 나무들을 회화의 평면과 평행하게 배열하여 평평한 효과를 주었다. 환영이란 고도의 인공적 조건, 즉 형식의 산물이다. 현실을 그대로 베껴내기 위해서는 현실 아닌 것들이 요구된다. 모더니즘은 기만적인 환영의 기술을 소격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대중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고, ‘현대미술은 사기’라는 혐의가 씌워졌으며, 꼴라주나 오브제를 비롯한 몇 가지 조형적인 발견 이외에 성과없는 실험들을 낳았을 뿐이다. 


예술은 환영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충격을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별되는 차원 간의 관계이다. 신영훈처럼 인물이든 풍경이든 잘 그리는 작가에게 현실/환영 간의 게임은 더욱 그럴듯하게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나날이 진보하는 기술의 날개를 달고 더 빠르고 편리하게 자리 잡은 환영들은 굳이 현실이 따로 있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 현재, 예술은 예술 안의 전투를 벗어나 이 또 다른 ‘현실’과 직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영훈의 도피행각은 그다지 시간 낭비는 아니다. 그것은 대중들에게 스며든 영상의 문법과 대화 할 수 있게 했다. 그때 미술 자체가 가지는 고전적인 형식은 예기치 못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한 달에 최대 60여편의 영화까지도 본다는 작가가 장르 구별이 모호한 현재에도 영화감독이 아니라 화가로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제목이나 전시부제 등에는 영화의 흔적이 남아있다. 






최근 작품의 제목인 [Director's Cut]은 물론이고, 이전 작품에서는 [필름 시퀀스](2018)가 그렇다. [필름 시퀀스]에서 작가는 모델을 섭외해서 영화 오프닝 장면처럼 연출한 화면을 보여주었다. 지어낸 이름이 뜨는 화면은 영화적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관객은 배우일 것이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번 전시에서의 숲은 이중적으로 환영이다. 우선 그림이라는 것이 실제의 환영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자연의 여러 면모 중에서, 굳이 평평한 세트같은 컷을 골랐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가 그린 숲은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하다. 마치 스크린처럼 하나의 장막을 형성한다. 한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과연 자연광인지도 의심스럽다. 이때 태양은 지는 것이 아니라 꺼질 것이다. 숲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기(또는 정복했다고 믿기) 전까지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미지의 장소였다. 2018년에 제작된 동명의 작품은 굵직굵직한 나무숲에서 긴 머리를 매만지며 나오는 하얀 옷의 여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원초적 자연처럼 순수해 보인다. 


여학생이든 여성이든 그녀들의 하얀 의상은 순수함이기도 하지만 비현실적이기도 해서 유령처럼 보인다. 흑백텔레비전 시대부터 있었던 인기 시리즈 [전설의 고향]에서도 깊은 숲속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는 하얀소복을 입고 등장하지 않는가. 이전 작품에서 육감적인 여성이 하얀 날개를 달고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양면성이다. 도시에 사는 남성/주체에게 숲속의 여성/객체는 대조되기도 하면서, 회화라는 매체가 어느 정도는 화가와 일정 거리를 두고 있는 환영임을 깨닫게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즉물적 현실을 회피하려 한다. 그것은 동물과 다른 인간만의 특징이다. 동물은 당면한 상황에 대한 본능적 대처와 약간의 학습 경험이 있을 뿐, 현실과 엇비슷한 비중을 가지는 상대적으로 자율적 상상 공간을 가질 수 없다. 누군가한테는 현실보다 환상의 비중이 훨씬 높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환상의 비중을 높이려고 애를 쓴다.

 



Director's Cut_82x37cm_광목에 수묵채색_2019



Director's Cut_82x37cm_광목에 수묵채색_2019



평범하면 안 되는 작가의 경우가 그렇다. 전대미문의 환상은 물론이거니와 평범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평범 이상이 되어야 한다. 환영의 장치들은 예술가가 시작한 것도 있고, 기술자가 시작한 것도 있지만, 최초의 기술적 발명이 어떤 것이었든, 그 내용을 충만하게 채우는 이는 예술가였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현실을 돌아볼 여유가 없던 작가는 환상을 자신의 홈그라운드로 삼고 싶어 한다. 만들어진 환상이 공유되면 현실이 될 수 있다. 실사기술이 발달한 현대정보화 사회에서 환상/현실의 구별은 더욱 모호해졌다. 신영훈은 전시장 안의 작은 방을 아예 환상의 무대로 꾸몄다. 삼면 전체에 숲 이미지로 영사하고 한가운데에 작가의 침대를 가져다 놓았다. 침대는 꿈꿀 때 뿐 아니라 영화를 볼 때의 자리이며, 다른 회화 작품에도 등장하는 작가의 환유(換喩 metonymy)이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숲 안쪽의 침대를 보여준다. 


화면 한가운데의 눈을 찌를듯한 빛은 꿈을 깨야 하는 상황을 알려준다. 침대 속 인물은 부재한다. 환상에서 깨어난 순간의 환멸은 생략된 채, 각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한 쌍처럼 보이는 또 다른 작품들은 나무가 좀 더 성성하게 있는 숲을 향하는 남자를 보여준다. 두툼한 겨울 외투는 배경의 하얀 면을 쌓인 눈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는 푸른색 붉은색 꽃길을 걷는다. 그러나 시선이 바닥을 향해 있는 멜랑콜리한 인물이다. 멜랑콜리는 예술과도 밀접해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멜랑콜리를 ‘열렬한 사랑의 어두운 이면’으로 보고 한권의 책--[검은 태양]--을 쓰기도 했다. 한편 환상이 환상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환상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가령 자리에서 일어나 일을 하거나 작업을 하거나 해서 자신이 꿈꾸는 상황을 실현해야 한다. 그 누구도 환상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그리고 아무리 가혹한 환경 속의 인간에게도 그가 가지는 한 조각의 환상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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