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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태 / 근원을 향하여

이선영

근원을 향하여

  

이선영(미술평론가)

  

김홍태의 작품은 늦가을이나 겨울철 의상처럼 차분하고 고상한 색조가 특징이다. 대개 둘로 나뉜 화면은 잘 맞춰 입은 옷처럼 연결망을 가진다. 가령 반대편에 각각의 부분이 포함되어 있음으로 두 색조는 더욱 어울린다. 혼합재료로 제작된 레이어가 많은 화면에는 온기도 느껴진다. 그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결국 추상도 공중에 둥 떠있는 것은 아닌 만큼, 자연과 현실이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추상이란 무엇보다도 ‘--으로부터의’ 추상 아닌가. 수(지)평선처럼 그어진 선이 있고, 그 아래의 작은 막대기가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은 대자연 앞의 인간을 떠올린다. 수평선 아래의 작은 수직선은 대양이나 하늘을 보는 인간인 것이다. 수직으로 서있는 존재를 인간으로 보는 관점은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그래서 천사와 동물 사이에 있다고 말해졌던 관념에 근거한다. 하늘 부분에 많이 할애된 공간에서는 지상에 서있는 인간이 무한한 상상력이 투사된다. 






이러한 구도는 추상미술의 또 다른 기원이 되었던 낭만주의 풍경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나 사실주의와 달리, 한계보다는 무한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김홍태의 작품에서 수평선 위의 공간은 지상의 선과 마찬가지의 구성물로 가득 차 있다. 대우주에는 소우주가 있다. 추상미술은 재현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근대 미학자들이 ‘숭고’라고 이름 붙였던 관념과 만났다. 재현 불가능하지만 현존하는 미지의 실재는 이전시대의 종교, 특히 구체적 도상을 거부하는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주체는 대자연 앞에서 숭고를 느낀다. 근대의 미학은 한계에 충실한 아름다움과 그렇지 않은 숭고를 구별했다. 숭고는 말로 묘사될 수 없는 어떤 현상처럼 추상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숭고는 자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세계화에 의해 경계가 사라져 가는 현대 또한 숭고할 수 있다. 점차 평면화 되고 있는 인간에게 평면화 된 세계는 무한하게 다가올 것이다. 


작품 [Primitiveness+Child's Mind](2007)을 비롯하여, 사각형 안에 또 다른 사각형들이 있는 작품들은 자연보다는 인공적 환경과 관련된다. 두 개의 화면을 붙인 듯 반으로 나뉜 색감의 작품에서, 진한 색감 안에는 또 다른 창이 뚫려 있다. 크기가 다른 두 창은 그저 물리적인 크기의 차이라기보다는 큰 것은 가까운 곳에, 작은 것은 멀리 있는 곳에 있는 듯이 보인다. 추상적인 화면에서도 원근법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중층적 화면에는 심연으로 내려가는 것과 표면으로 올라가는 것들이 암시되는데, 그것은 전경과 후경의 관계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이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렇듯 추상회화에 내재한 유동성은 자유로움을 준다. 김홍태는 추상의 평면적 언어를 구사하지만 겹겹이 칠해진 바탕을 알 수 있게 하는 드러냄과 감춤의 방식, 그리고 크기가 다른 비슷한 형태로 구성하는 방식을 통해 원근감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색감을 통한 계절의 느낌을 포함하여, 현실의 시공간과의 연결망이 존재한다. 낙서하듯이 자유롭게 그려진 화면은 어떠한가. 긁히고 벗겨진 흔적들이 있는 그러한 작품 또한 자연과 무관하지 않다. 대개 자연은 인공보다는 두툼하다. 언제 생긴 지 모를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나무나 바위 같은 실재가 그러하다. 여러 시공간을 접거나 펼친 듯한 작품에서는 인생의 짧은 선적 시간을 초월한다. 우주를 포함한 자연사에 비한다면 인간사는 매우 짧으며, 현대인은 죽음 이후에 대해 이전 시대의 사람들처럼 풍부하게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을 지배하는 시간관은 선적으로 느껴진다. 진보나 발전을 확신하는 근대인에게 시간은 선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보다 큰 자연의 주기로 본다면 직선 또한 무한히 회귀하는 곡선의 일부 구간에 해당될 수 있다. [Primitiveness+Child's Mind]라고 붙인 시리즈에서 암시되듯이, 작가가 작품 제목을 통해 제시하는 시간은 보다 원초적이다. 


눈앞의 구체성을 시시콜콜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방식은 현재가 아닌 과거로 향하게 한다. 물론 그것은 몇날며칠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는 특정한 과거가 아니라, 시원적 과거이다. 시원에 대해서는 신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기에, 그것은 과거라 할지라도 마치 미래처럼 미지에 속한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에서 알 수 있듯, 역사이전 시대의 유물에서는 선으로 공간을 채우는 추상적 방식이 특징적이다. 그것은 수렵시대를 넘어서 농경을 비롯한 생산의 시대에 들어선 인류가 교환이나 날짜 가늠, 또는 노동에 내재된 주기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러한 계통 발생적 사건은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처음 필기구를 쥔 아이의 손은 선적 낙서로 공간을 채운다. 미술교육이 알려주듯이, 재현주의는 자연발생적 표현 이후에 온다. 그리고 교육의 시대를 끝내고, 기존의 것을 재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움을 창조해야 할 즈음, 몸과 마음에 배인 기성의 재현적 관례를 지우려 애쓴다. 




Primitiveness+Child's Mind 60.6x72.7cm Mixed Media on Canvas 2007



Primitiveness+Child's Mind 60.6x72.7cm Mixed Media on Canvas 2010



낙서같은 화법은 그리기와 지우기를 동렬의 차원에 놓음으로서 이중의 과제를 수행한다. 원시주의의 경우는 보다 분명한 역사가 추적된다. 근대미술가들이 원시미술을 참조했다는 미술사적 기록은 잘 알려져 있다. 추상회화는 회화가 가장 회화다운 조건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 즉 회화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려는 즈음에 타자를 발견했다. 타자는 주변에 늘 있었던 것이지만 재발견되었다. 추상미술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원했던 유럽의 기준에서 본다면, 원시는 서구적 동일성에 대응하는 타자였다. 원시적인 것은 곧 추상미술의 몸통이 되었다. 혹자는 서양이 원시나 동양을 훔쳤다고도 비판한다. 근대의 원시주의는 서구 식민지배의 시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주변 또는 바깥에 있는 타자들은 근대적 진보와 무관하게 태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기준에서 시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근대가 고무했던 새로움에 조응했다. 


타자는 동일자와 반대되는 것이거나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자 그 자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새로움과 진보에 대한 숭배가 극단적이었던 근대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자  잊혀지고 억압되었던 것들은 되돌아왔다. 그러한 타자에 대한 또 다른 이름으로 원시, 무의식, 꿈, 몸, 자연 등을 들 수 있다. 추상미술은 구체적 형태가 사라졌지만, 이러한 타자들로 가득 찼다. 원시주의는 개인 안에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유년기일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에 유년기를 의식적으로 다시 찾아질 수 있다. 김홍태의 작품에는 마치 아이들이 끄적거린 낙서처럼 전제 없이 시작하고 목적 없이 부유하는 선과 형태들이 있다. 차분한 색감이 균형을 맞춰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원시의 종족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전혀 비합리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설득력 있게 말했듯이, ‘야생의 사고’는 과학적 사고 못지않게 합리적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분에 의하면 사건에서 구조로 가는가, 구조에서 사건으로 가는가에 따라 신화와 과학으로 갈라진다. 인류학자는 신화와 과학을 대별했지만, 예술과 과학도 그와 비슷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김홍태가 주목하는 원시나 유년 또한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신화의 단계를 말하는 것 아닌가. 이데아라는 이상적 모델을 가지고 있는 플라톤주의 이래, 시각적 규범으로서는 르네상스 이래의 재현주의는 구조에서 사건으로 나아가는 과학에 더 가까웠다. 재현주의를 거부하고 시작되었던 추상미술은 현상으로부터 유추된 구조를 작품화한다. 김홍태의 작품에는 사건의 잔재들로부터 구축된 형태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구축된 형태를 가지고 작가는 놀이한다.  마치 연등놀이의 추억처럼 발랄한 단위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최근 작품 [Primitiveness+Child's Mind](2016)에는 놀이의 특징인 몰입과 그러한 몰입으로부터 야기되는 열락이 결합되어 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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