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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훈 / 동질이상(同質異像)의 세계

이선영

동질이상(同質異像)의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임도훈은 4-5mm 정도 크기의 작은 베어링 볼을 용접하여 동식물부터 인간, 성상(聖像)부터 무기류에 이르는 다양한 것들을 만든다. 조각의 재료로 사용되는 베어링 볼은 마치 원자처럼 수많은 방식으로 구성되면서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것들을 생겨나게 한다. 그의 작품에 자연물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원자보다는 세포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생물학이나 의학도 분자적 차원을 다루는 만큼, 물리학/화학/생물학은 분리불가능 하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하여 거듭된 분열을 거치면서 성체가 된다. 그리고 개체가 죽음에 이르면 원래의 구성요소로 해체된다. 또한 베어링이라는 기계적 요소는 모든 유기체가 치밀하게 조직된 것임을 알려준다. 철학사나 과학사는 동물, 그리고 결국은 인간도 기계와 비교되어 설명했음을 보여준다. 기계적 요소로 만들어진 생물체들은 동물-기계-인간이라는 그물망을 예술적 입장에서 조망하게 한다. 



별이 부는 밤에 120x220x50(cm) stainless steel 2015




불 밭에서 핀꽃 120x220x160(cm) stainless steel 2016



베어링 볼이 원자에 대한 비유이든 세포에 대한 비유이든, 그것은 형태를 만드는 최소의 단위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한국의 속담처럼, 같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다양한 형태는 동일성 속 차이의 유희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비유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정도의 차이를 가질 뿐이다. 3차원 상에 안정감 있게 서 있는 용접 구조물을 만드는 것은 우선적으로 기술과 노동이 필요하지만, 임도훈은 마음먹은 것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만큼 작업과정에 익숙—그래서 결국은 능숙한—하다. 그것은 아직 젊은 그가 해온 작업의 양과 질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즘 스타일의 작업은 2014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하루 12시간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작품 하나당 두 달 정도가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꽤 많은 작업량을 보여준다. 흙으로 모델링 하고 그것을 석고로 뜬 다음 거푸집 안에서 하나하나 용접을 하는 과정은 어느 한 단계도 건너뛸 수 없는 촘촘한 작업이다. 


그러나 관객으로서 결과물만 본다면, 그의 작품은 마치 음악가가 자신이 들은 소리 한 자락을 악보나 악기로 쉽게 재현할 수 있듯이, 마치 화가가 자신이 본 것이나 기억한 것을 스케치북에 어렵지 않게 옮겨놓을 수 있듯이, 3차원 상에서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개념이나 영감의 한 자락을 단번에 포획할 수 있는, 작업과정에 대한 장악력은 작가로서 필수지만, 상당 기간의 훈련을 감내해야 가능한 기본기를 갖춘 작가는 그리 많지는 않다. 물론 이러한 익숙함은 매너리즘의 위험을 동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익숙한 작업과정이 매뉴얼화 되어 타인의 노동을 활용한 ‘생산’의 단계에 진입할 수도 있다. ‘창조’의 과정과 다소간 거리가 있는 이러한 방식은 한 작가가 시장에 진입하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자고로 현대 예술가라 함은 작업에 익숙해질 틈이 없이 순간순간 변해야 한다는 기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한 기대치를 게으른 손으로 대응하려다 보니 현대미술은 사기라는 불신도 생겨난다. 




낭만전쟁- 성인식 45x75x35(cm) stainless steel 2014


불 밭에서 핀꽃 220x120x230(cm) stainless steel 2017


낭만전쟁-신기루 45x40x70(cm) stainless steel 2014


낭만전쟁- 겁쟁이 60x120x100(cm) stainless steel 2014



임도훈의 작품은 일단 잘 만들어진 대상이라는 인상을 준다. 기능적인 형태를 가지는 생명체나 기계류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에 감성이나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무거운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그는 일찍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었디. 존재는 모르겠지만, 시간성은 확실하게 의식된다. 하나하나 붙여가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나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주제가 그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존재란 무엇보다도 시간적 존재이다. 특히 어딘가 조금씩 뜯겨져 나간 양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기호를 내장한 생명체의 운명을 보여준다. 그가 자주 붙이는 [불밭에서 핀 꽃]이라는 제목은 용접의 과정에 내재 된 연소를 통해 생명을 본성을 암시한다. 용접 온도에 따라 붉은기, 보라기, 파란기가 도는 작품들은 신비로움과 안정감을 준다. 


그의 작품은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면서 살아가는 유기체와 기계, 또는 유기체로의 기계, 또는 기계적 유기체에 대한 비유이다. 계몽주의 시대 때 [동물 기계]론과 [인간 기계]론이 주창된 이래, 유기체와 기계 사이의 불연속성은 더 줄어들고 있다. 리플리컨트(replicant)의 반란을 주제로 하는 SF 영화에서 종종 나타나듯, 기계는 사용 연한이 정해져 있다. 인간 또한 매 순간 죽음에 다가간다.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임도훈의 작품은 무엇이 한 개체를 이루는 정체성인가를 자문한다. 면역학은 이질적인 것의 침투에 상호작용하는 개체의 정체성에 관련된 것이다. 공격/방어를 떠올리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임도훈의 작품에서 생명체 못지않은 축을 이루는 무기류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 자주 사용되는 ‘낭만 전쟁’이라는 신조어에서 전쟁은 물론이고, ‘낭만’이라는 관념에도 자아와 타자의 역학관계가 있다. 낭만주의는 역사상 그 어느 문예사조 보다도 자아의 확장을 강조하였다. 자아의 확장은 예술가의 고립을 야기한 초유의 사태 속에서 생겨난 상상이다, 




낭만전쟁-빅뱅 80x50x160(cm) stainless steel 2014




초신성 50x50(cm) stainless steel 2015



낭만주의가 발원한 근대시대에 예술가는 오직 자아에 의지하며 나아 갈 수 밖에 없었다. 근대는 누군가의 확장이 다른 누군가의 침해가 될 만큼 촘촘하게 몰려 살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예술가들은 자본가나 정치가들과 달리, 현실적으로 타자들을 착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아나 주체 같은 근대적 개념은 근대의 성과와 더불어 그 폐해가 드러났을 때 다시 검토되었다. 일련의 단위구조로 조합되었기에 유동적인 경계를 내포하는 임도훈의 작품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자아의 확장이 극대화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비관주의는 아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금언도 있듯이, 무엇보다도 예술은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만의 창조물이기도 했다. 임도훈의 작품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은 작업의 방법론에 내재 되어 있다. 단위구조의 조합으로 생겨난 형태들은 다시 재조합—용접이라는 물리적 과정상 레고 게임같은 재활용의 방식은 아니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 단지 재구성될 뿐이다. 그가 사용하는 베어링 볼은 작업의 편의를 위한 기성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합집산하면서 세상을 만들어내는 원자의 비유를 가진다. 베어링 볼의 조합은 대상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작품의 내용에 따른 밀도의 변화를 준다. 어떤 것은 성글게 어떤 것은 빡빡하게, 어떤 것은 완전하게,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만든다. 어떤 작품들에서 한 종을 특징짓는 외곽선은 흐트러진다. 생명체가 살아 있음은 환경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 즉 항상성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계가 흐트러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질 치명적인 상처를 떠올린다.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구별이 불확실하다고 할 때, 이러한 경계의 변화를 부정적인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경계의 와해가 훼손을 상기시킨다면 그것은 동시에 치유되는 과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좋든 아니든 변화를 말한다. 



낭만전쟁-생일선물 85x85x90(cm) stainless steel 2015




낭만전쟁-생일선물 8x10x15(cm) stainless steel 2015



낭만전쟁 -생일선물 50x40x70(cm) stainless steel 2015



베어링이라는 세포같은 구조는 불완전보다는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금속 조각이라는 다소간 정지된 형식에 움직임의 환영, 즉 시간성을 부여한다. 작품의 메시지에 따라 외곽선이 열린 정도는 변화하며, 애써 용접한 것들을 다시 뜯어내는 경우도 있다. 그의 작품은 마치 동양화처럼 여백을 조형의 중요한 요소로 끌어들인다. 희박한 밀도를 가진 작품은 공간과의 관계가 더욱 상호적이다. 가령 작품 [반가사유상](2018) 같은 경우 성글게 용접된 형태는 공(空)에 대한 불교의 사고를 보여주는 듯하다. 달리는 말을 표현한 [낭만 전쟁-신기루](2014)는 비어있는 부분이 많아서 속도감이 있다. 반면 무기류를 표현한 작품군은 그 빽빽한 밀도가 그 자체로 압박감을 준다. 내 것이라는 표지를 새겨 쌓아 두려는 소유에의 열망, 그것이 낳는 경쟁과 전쟁을 암시한다. 무기류를 표현한 작품에는 야만성이나 공격성을 감추기 위한 사회적 포장술 또한 발견된다. 


타자를 해치는 권총이나 폭탄, 탱크 같은 구조물에는 리본이 달려있고, ‘선물’이나 ‘꽃다발’같은 역설적 제목이 붙여지는 것이다. 동물의 표현에는 뜯겨진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작품 [불밭에서 핀 꽃](2017)은 뒤쪽이 많이 뜯긴 초식동물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생태계 하위 집단으로서 피식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즉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포식자가 있는 것이다. 작품 [낭만전쟁-겁쟁이](2014) 같이 사자같은 생태계 상위 집단의 경우 우화적인 면모를 띈다. 강자에게도 족쇄가 있으며, 그 족쇄를 끊어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의 작품 속에서 자주 보이는 고릴라는 인간과 동물의 중간쯤에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거울처럼 비치는 바닥 위에서 하늘을 보는 고릴라를 표현한 작품 [불밭에서 핀 꽃](2016) 하늘이라는 다소간 지상의 삶과는 거리를 둔 세계, 그리고 거울이라는 사물에 내재된 상상적 측면이 그 존재를 동물의 단계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멈추길 원하지 않는다 140x70x50(cm) stainless steel 2015



천상의 피조물 45x90x30(cm) stainless steel 2018



임도훈이 표현한 동물들에는 굳이 어떤 성이 없지만,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남성에 감정이입 된다. 강인해 보이는 동물인 고릴라, 강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자, 진정한 어른--보통 성인 남자로 간주되는—으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수사슴 등이 그렇다. 한편 [낭만전쟁- 빅뱅](2014)이나 (고릴라 상과 같은 제목의)[불밭에서 핀 꽃](2016)에서 여성은 전성기의 몸을 가진 생식력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빅뱅이란 우주의 발생에 관련된 물리학적 서사 중의 하나로, 일정한 덩치를 갖춘 모든 동물은 암컷으로부터 태어남을 전제로 할 때 기원에 대한 신화를 내포하는 것이다. 우화를 포함하여 임도훈의 작품에 내재 된 서사를 작품들 사이에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태반 속에 자리한 아이들 같은 모습을 한 작품에 [초신성](2015)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점은 이상하지 않다. 


우주에 산재 된 먼지의 집적체인 별은 최후의 순간 폭발을 통해 자신이 태어난 우주에 그 에너지를 되돌려준다. 죽음과 삶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은 인간이라는 소우주나 인간이 속한 대우주나 마찬가지다. 태아는 벨벳 천으로 연출된 어둠 속에서 발하는 빛처럼 생겨난 존재이다. 임신부의 초음파 사진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듯한 작품 [초신성]에서 아이는 해골로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메멘토 모리라는 그의 작품 주제가 반향 되고 있다. 자연과 세계를 넘어서 우주까지 뻗치는 그의 관심은 노아의 방주처럼 모든 종을 빠짐없이 배려한다. 많지는 않지만 동물과 인간, 기계에 이은 식물적 존재가 그것이다. 선인장같이 혹독한 생태계와 관련된 식물은 다소간 광물성을 띄는데, 작품 [천사의 피조물](2018)은 뜯긴 데가 없이 완전하다. 반가사유상이나 만다라, 고딕의 창문을 떠올리는 종교적 상징물의 경우에도 손상되지 않은 외곽선을 보유한다. 




천상의 피조물 가변설치 stainless steel, wood 2018



불 밭에서 핀꽃 90x90(cm) stainless steel 2018



반가사유상 70x91x160(cm) stainless steel 2018



종교적 상징을 소재로 한 작품군은 종교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의식을 문화로 해결하는 방식임을 알려준다. 모든 종교는 죽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 용접되어 있기에 벽에 걸 수도 있는 만다라 형상은 본래 완성되자 마자 흐트러트리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조직된 것을 삶, 해체된 것을 죽음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양자 간의 호환성을 말한다. 성상을 소재로 한 임도훈의 작품은 예술 이전의 단계부터 있었던 장식적 전통은 항구적인 패턴을 통해 영원성을 암시하면서 유한한 삶을 해석한다. 한 개체의 삶을 더 큰 시간의 주기에 포함 시킬 때 죽음은 상대화 된다. 즉 초월 된다. 그러한 무한한 시간의 주기 속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일은 없는 것이다. 많은 개체들이 ‘낭만 전쟁’ 중인 임도훈의 작품에서 그 시간성은 우주까지 확장된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이 포함된 모든 예술에는 종교의 유전자(meme)가 내장되어 있다.

 

출전; 남도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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