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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 / 삶의 이정표

이선영

삶의 이정표

 

이선영(미술평론가)

  

삶과 작업은 그 자체가 여정이지만, 김연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독 떠도는 삶을 살아왔다. 세계화가 더욱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현재 그러한 삶의 방식은 어쩌면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본도 노동도 서로의 기회를 찾아 국경을 넘나들며, 국경 안에서도 개인이 위치 지어지는 좌표축은 수시로 변동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움과 소외라는 양면성을 가지는 유목적 삶은 현대가 개시된 이래 인간 사회의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 그러나 유목이 선택이 아닌 강요가 될 때, ‘추상적 공간을 구체적 자리로’(조너선 스미스) 만들려는 노력 또는 투쟁 또한 계속될 것이다. 한편 떠도는 이가 예술가라면 그들이 남긴 흔적들은 보다 특별하다. 늘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고민하는 예술가들에게, 소통 그자체가 화두의 전면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바로 유목이기 때문이다. 떠도는 이에게 소통의 조건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미룰 수 있는 것도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절박한 당면과제이다. 


소통은 생사의 문제가 걸린 것일 수도 있다. 기왕에 떠도는 삶, 김연희는 자신이 새롭게 속하게 된 장소에서 그와 관련된 작업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어디를 가든 똑같은 작업을 하는 것은 삶에 예술이 제시하는 비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 삶이 항상성을 유지하려 한다면, 예술은 다양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삶인가 예술인가의 선택이 아니라, 두 항목의 상보관계가 중요하다. 현대물리학도 기존의 결정론을 거부하고 상보관계를 말하는 시점에서, 분업화된 현대사회는 극단적일만큼의 파편화를 야기한다. 예술가들 또한 단편을 퍼즐처럼 맞추면서 잃어버린 전체를 찾으려고 한다. 유목하는 자가 바로 작가인 경우, 그가 받아들인 변화가 작품화되는 시공간이 완전히 일치될 수는 없다. 현재의 자극이 작품화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작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던져졌던 상황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은 결국 시간의 문제일 따름이다. 


자신의 방식을 지속하는 가운데 새로움이 추가되는 김연희의 작업에서 올해는 큰 변수가 생겼다. 미국 유학 시절에 5-6년을 함께 했던 언니뻘 되는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것이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5-6년은 그리 긴 기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가장 순도가 높은 청년기의 5-6년, 특히나 상대가 예술적 동료였을 경우 함께 했던 시간들은 양으로 가늠될 수 없는 시간이다. 한편으로 친구의 뼛가루를 뿌린 곳이고, 친구가 작가를 처음 그곳으로 데리고 왔던 장소 또한 창작 스튜디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기에, 창작 스튜디오에서 하려던 원래의 작품에서 크게 어긋난 것은 아니다. 떠도는 이방인이라는 주제는 이번 작품에서 죽음의 영역까지 확장된 것이다. 김연희의 작품 속에는 늘 길이 등장했는데, 죽음이라는 주제가 포함된 최근 작품 [언니가 죽었다]에서 길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인 셈이다. 


그 통로에 대한 이미지나 의미부여에 대한 수많은 문화적, 예술적 표현의 관례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성스러움과 세속성 간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의 위상은 변화했다. 새로움과 진보가 중시된 근대 시기의 문화와 예술은 세속성의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모더니티의 직선적인 시간관에서 죽음은 그저 모든 것의 끝장일 따름이다. 죽음은 타자화 되었다. 그에 대한 전형적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네가 거기에 있다면 죽음은 거기에 없을 것이고 죽음이 거기에 있다면 너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라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이다. 삶과 죽음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는 쾌락주의 철학자의 이러한 생각은 죽기까지의 고통과 공포만 없다면 나름대로 기능적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면? 삶의 최종적인 종말이 죽음이 아니라, 삶에 편재해 있는 것이 죽음이라면? 현대 예술가가 체감하는 죽음은 보다 내재적이다. 


작업이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가는 길이지만, 그 길에서 예술이 작가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내용을 담는 예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삶 자체에 죽음이 깔려있는 것이다. 죽음은 개인의 경험 속에서 주변성을 떨치고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김연희의 경우 올해에 작가를 가득 채웠던 친구의 죽음이라는 사건 때문에, 이 지역의 이방인과 관련된 별도의 리서치 작업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이미 그 친구와 함께했던 영상자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친구의 모친과 무덤(뼛가루를 뿌린 장소)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영상이 추가되었다. 전시되는 작품 [언니가 죽었다]는 시공간이 다른 두 영상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두 영상은 이정표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투사된다. 두 영상은 여정이라는 공통 모티브로 국내외의 장소들이 나타난다. 간간이 들리는 대화의 내용은 두 시공간이 삶과 죽음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한다. 


두 젊은 여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같이 노는 듯한 영상이 그것이고, 세대가 다른 두 여자가 다소간 침울하게 회고조의 대화를 하는 영상이다. 이정표의 앞뒷면에서 각각 흘러가는 두 영상은 깊은 숲길과 바다로 가는 산책로를 배경으로 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산책로는 친구가 살아생전에 작가를 데려온 곳이고 병을 치유하기 위해 망자가 자주 산책하던 장소이다. 망자가 걸었던 길과 봤을 법한 풍경이 나타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망자가 살아생전에 작가와 함께 걸었던 길이 나온다. 후자는 미시간 주의 가을 숲속에서 작가가 종이를 떨어뜨리며 가는 길을 친구가 찍어준 영상이다. 친구는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를 들려주며 길을 잃지 않기 위한 흔적을 남기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에 작가가 길에 표시했던 소재는 찢은 종이들이었다. 그것은 흔적이 되기에는 너무나 취약한 재료이다. 몇 년 후 친구의 흔적을 찾아 친구 어머니와 함께 하는 여정에서의 그 흔적도 취약하다. 


화장(火葬)은 무덤과 달리 지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윤회를 믿는 종교는 무덤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건이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이나 죽음을 대하는 관습은 다르다. 니겔 발리는 [죽음의 얼굴]에서 죽은 자에게 바쳐진 기념비는 인류의 창조력을 보여주는 기념비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 문화에서는 한 사람의 죽음을 생전의 그의 업적에 걸맞게 처리하는데 온갖 정열을 쏟아부었는가 하면, 남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사람이 죽으면 특별한 의식을 행하지 않고 지붕을 허물어 시신을 덮어버리고 떠나 버린다고 한다. 김연희의 작품 속에는 화장을 해서 잿가루를 바다에 뿌렸지만, 뭔가 아쉬워서 근처 소나무에 작은 표시를 해둔 장면이 나온다. 그 표시는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망망대해를 앞에 둔 추모의 이미지는 온 국민에게 집단적 트라우마를 주었던 세월호 사건으로 친숙하기조차 하다. 


사건 발생 장소와 가까운 항구 근처에 가득했던 노란 리본들은 이제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만 펄럭거리게 될 것이다. 지인의 추모를 넘어서 예술작품은 죽음을 포함한 삶의 여정 속에서 얼마만큼의 표시를 남길 수 있을 것인가. 미시간 주의 숲속에서 표시 도구였던 종이는 세라믹 등 다른 좀 더 견고한 소재로 변모하고 있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찢어진 종이든 꽃 모양의 세라믹이든 그것들은 지상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상징적인 표시라고 할 수 있다. 표시치고는 역설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같은 길도 여러 방식으로 다시 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2018년의 작품을 씨실과 날실로 짜고 있는 두 시공간의 축들은 얼마든지 다르게 짜여 질 수 있다.  2013년 미국에서의 작업은 그 친구 이외에 다른 이들이 찍은 영상들도 있었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 친구의 영상을 선택했다. 그렇게나마 친구의 흔적을 남긴 셈이다. 


인생에서 샅샅이 흩어지는 것들을 예술은 모아줄 수 있다. 예술은 무의미마저도 의미로 고양시킬 수 있다. 예술을 통해서, 때로는 오직 예술만을 통해서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그 전에는 종교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 니겔 발리는 [죽음의 얼굴]에서 죽음은 개인적인 경험 이상의 문제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인류학자들은 삶의 집단적 성격을 보여주는 관점에서 죽음을 연구했는데,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는 죽음을 모든 종교의 기원으로 보았으며, 그의 뒤를 이은 학자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가 모든 문화의 시원이라고 본다고 전한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맞지만, 그에 대한 의미부여는 인간만의 것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인식하는 차이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에드가 모랭은 [인간과 죽음]에서 인문과학은 도구를 가진 인간(호모 파베르), 뇌를 가진 인간(호모 사피엔스), 언어를 가진 인간(호모 로퀜스)를 분간하는데 자족하지만, 인간 종은 죽음이 생중에 실재해 있는 유일한 종이라고 말한다. 


[인간과 죽음]에 의하면 인간 종은 죽음에 장례를 동반하는 유일한 종이며, 또한 죽은 자들의 사후 생이나 부활을 믿는 유일한 종이다. 에드가 모랭은 죽음의 거부와 사후의 신화, 부활, 불멸은 종적으로 인간적 특질이라고 말한다. 예술 또한 인간만의 것이다. 죽음은 종교와 예술을 이어준다. 죽음이 너무 무거운 관념이라고 하면, 기억이나 회상이라고 해두자. 참조대상과 밀접한 영상은 생생한 기억의 매개가 된다. 김연희의 작품에서 또 하나의 매개는 사물이다. 대개 영상과 관련된 사물로, 영상이 그 사물에 투영되는 식이다. 영상은 단독으로 상영되는 경우도 있고 사물 위에, 또는 사물 안팎에 편재한다. 2013년 미국에서의 작업은 영상을 찍었을 때 착용했던 신발과 가방에 영상이 투사되었다. 간단한 봇짐에 짚신 몇 컬레를 걸고 길을 나섰던 우리네 선조처럼, 유목민에게 필수적인 물건인 신발과 가방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네비게이션에서 영감을 얻은 벌집 구조가 지속적인 주제 안에서의 차이를 말한다. 


올해 작업은 일련의 서사가 담긴 영상들이 이정표 위에 투사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친구의 죽음이 작가에게 이정표가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작가에겐 작품이 숙성하기 위한 보다 여유로운 시공간이 필요로 하는데, 늘 쫒기듯 살아온 삶에 대해 친구의 때 이른 죽음은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김연희의 작품에서 영상과 사물은 상보적이다. 멈춰져 있는 사물은 영상의 시간성에 내재 된 서사의 도움을 받는다. 영상 속에 단편적으로 지나가는 사물은 관객 앞에 현존하면서 눈앞에 지나가는 것들을 증거 한다. 이번 작품에서 영상들이 중층적 비밀을 깔고 있다면, 영상과 함께 하는 사물은 보다 직접적이다.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기성품으로 구입한 이정표는 대중에게 매우 익숙한 구조물이다. 어느 하나는 중심을 잡아주는 셈이다. 이제 이정표보다는 네비게이션이 더 익숙한 시대에 길가의 이정표들은 투명한 기호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쓰임새가 일상적이었던 물건이 새로운 시공간의 맥락에 놓이면서 수수께끼의 사물로 변하는 경우는 많다. 시간은 더욱 가속화되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투명하게 소통되었던 기호는 불투명해지고, 물건을 사물이 된다. 법적인 효력을 가지면 견고하게 서 있는 길 위의 이정표들은 수년 전 숲속에서 뿌렸던 종잇장들 못지않게 변화에 취약할 수 있다. 걸어가면서 찢어놓은 종잇장들보다 더 묵직한 물질 감을 가지고 있는 견고한 이정표들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가령 지금처럼 인간 운전자가 아니라 자율주행의 시대가 온다면 인간의 눈높이와는 다른 이정표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때 길 위의 그 수많은 이정표들은 생활사 박물관 같은 곳으로 안치되거나 고풍스러운 오브제로 예술작품에 활용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정표는 존재해야 한다. 이제 그것은 보나 내밀한 영역에 자리한다. 작가에게는 매 시기의 작품이 바로 그 이정표가 된다. 예술작품은 변화의 산물이고, 또 다른 변화를 예시한다.      

 

출전; 경남예술창작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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