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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햇살 / 침묵속의 교감

이선영

침묵속의 교감


이선영(미술평론가)

  

박햇살은 주로 유화로 그리지만, 수묵화같은 흑백 톤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흑백 사진이 컬러보다 어느 면에서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듯이, 그리고 먹에는 모든 색이 있다는 동양화론의 주장이 있듯이, 이 흑백 톤은 부재나 결핍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림의 재료 중에서 보이는 것을 충실히 재현하는데 있어 최적화된 유화를 ‘그런 식으로’ 쓰는 것에는 결국 형식보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화면 왼편에 검은 눈동자 같은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작품 [눈을 통해 전해진 감각](2017)을 보면, 박햇살의 작품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다. 작가는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상징주의나 표현주의처럼, 본 것 보다는 기억된 것을 그린다. 전 작품에 걸쳐 손이 유독 많이 나오는 작품으로부터 유추되는 바는, 작가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듬듯이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시인의 손자국이 남아있는 동굴벽화 유적처럼 손은 눈을 대신하여 어두컴컴한 세계를 가늠한다. 




눈을 통해 전해진 감각, 2018, 캔버스에 유채, 60.6×72.7cm



보이지 않는 얼굴, 2018, 캔버스에 유채, 53.0×65.1cm



작품 속 손은 몸의 일부가 아니라 손 그자체로만 등장하며, 한명의 것인지 몇 명의 것인지도 확인할 수 없다. 어떤 자세인지도 모호하다. 거기에는 닿아 있는 손과 닿기 전후의 손들이 있다. 작품에 따라서 피아노를 치거나 수화를 하는 듯한 모습도 연상된다. 그것은 작가가 타자와의 만남에 있어서 말보다 중요시하는 침묵을 떠올린다. 검은 색과 하얀색으로 구별된 두 가지 손은 손에 대한 어떤 개념이나 상상을 말한다. 흑과 백으로 명백하게 구별 지은 손들은 다른 이에게 속한 손이다. 여기저기에 있는 손들은 정지된 화면에 잠재적 동감을 부여하면서 관객 또한 그 손들을 따라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제시하는 세상을 더듬게 한다. 이러한 잠재적 동감을 제외한다면 화면은 고요하다. 이러한 고요함 속에서 작가는 타자와 접촉을 꿈꾼다. 작품 [닿다]나 [홀로 함께], [보이지 않는 얼굴] 등은 타자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타자와의 만남은 ‘의사소통적 합리성’(하버마스)에 기반 한 투명한 소통보다는 침묵을 배경으로 한다. 


침묵은 각종 허언과 형식주의에 의해 그 내용물이 유실되어버린 현대적 소통의 치유를 위한 것이다. 말이 말을 낳곤 하는 동어반복의 시대에 침묵은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를 인정하면서 그 거리를 줄이기 위한 대안의 소통으로 다가온다.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은 말에게는 자연이며 휴식이며 황야이다. 말은 침묵에게서 활기를 얻고, 말 자신으로 하여 생긴 횡포를 침묵에 의하여 정화시킨다. 침묵 속에서 말은 숨을 죽이고 자신을 다시금 원초성으로 가득 채운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다른 침묵의 철학자 르 클레지오는 [침묵]에서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라고 말한 바 있다. 침묵의 위상이 이처럼 높아진다면 말하는 존재인 인간 또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은 한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규정하는 단단한 경계를 풀어헤치는 일이다. 




내가 한 사람이 아닐 때, 2017, 캔버스에 유채, 112.1×145.5cm



하늘에 대하여, 2018, 캔버스에 유채, 112.0×145.5cm



작품 [내가 한 사람이 아닐 때]는 미친 사람이나 죽은 사람처럼 경계가 풀어헤쳐진 존재가 있다. 그것은 휴머니즘적 전통에서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해체적 모습이다. 인간의 동일성이 타자로 이루어졌음을 주장하는 현대의 사상은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낯설게 사용한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인간은 곧 사라질 존재로 봤으며, 르 클레지오는 [침묵]에서 ‘인간의 표시들 뒤에는 인간이 아닌 것, 결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의 표시가 새겨져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작품 [내가 한 사람이 아닐 때]에서 화면 왼편 사람으로 본다면 사람일 수도 있는 실루엣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개인 이전일수도 있고 이후 일 수도 있을 뿐, 개인은 아니다. 휴머니즘에 의해 구축되어온 인간이라는 관념은 동일자보다 타자의 위상이 더욱 커지는 근대이후의 세계에서 도전받는다. 물론 여기에서의 작가가 접촉하고자 하는 타자는 그냥 타인은 아니다. 작가의 실생활은 그다지 외부 지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작업의 시간 자체가 홀로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타자란 타인은 아니다. 가령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에 나오는 세 가지 부류의 인간, 즉 ‘전통지향형, 내적 지향성, 타인지향형’의 인물 중 현대 대중사회의 개인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인지향형’의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리스먼의 분류에 의한다면 내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겠지만, 박햇살의 작품은 유아독존식의 고립된 주체라기보다는 바깥으로 트여있다. 정확한 재현은 아니지만 바다, 하늘, 동식물 등이 자주 등장하는 작품에서 타자는 인간 이외의 것에 더욱 가깝다. 인간이라는 관념이 상투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적이지 않은 것들에서 오히려 인간적인 것을 찾아야 하는 역설의 시대를 공유한다. 박햇살의 작품에서 오랫동안 인간의 타자로 착취되어 왔던 자연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그것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작품은 기호와 사물의 중간적 형태를 띈 형상들이 생겨나거나 소멸하는 장이다. 그것은 자연의 정확한 외관보다는 자연의 과정, 특히 작가의 심상에 걸러진 자연이다.

 



말없이 함께, 설치전경



매번 풍경을 바꾸는 바다, 무채색조 가운데에 언뜻언뜻 푸른 얼굴을 보여주는 푸른 빛 하늘, 그 안팎에 있는 동식물들이 그것이다. 작품 [하늘에 대하여]에서는 추상적 원근감이 있는 하늘 풍경에 하얀 새들의 모습도 보인다. 어둠을 걷어내는 듯한 밝음은 채도의 조절을 통해 접근했다. 작가는 ‘명도는 낮지만 채도는 높은 색은 빛의 느낌’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를 ‘채도의 빛’이라고 명명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어두운 빛’에서 빛은 물리적 의미의 빛이라기 보다는 ‘선명하게 드러나고 묻히는’ 상황과 관련된다. 작품 [말없이 함께] 연작에서는 손과 식물이 연결되는 모습이 있다. 작가는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나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변화하는지를 더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 일’을 자신의 중요한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지향하는 타자와의 만남은 시끌벅적한 소통이 아니라, 침묵 속의 교감에 가깝다. 침묵은 작업을 포함하는 몰입하는 모든 행동에 내재해 있다.  최종적으로 화면에 정착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찾아져야 하는 미지의 것이다. 


무채색조의 화면 속 수많은 손들처럼 작업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을 찾는 다소간 맹목적 행위이다. 수많은 기호들이 이합집산하면서 미지의 존재를 생성하기 위한 실험에 돌입한다. 타자와의 만남이 그랬듯이 기호들은 불완전하다. 경계를 허문 불완전한 단편들이 공전한다. 이때 유일한 버팀목은 몰입일 것이다. 몰입은 자신을 잊음으로서 자신을 찾는 역설을 말한다. 몰입은 아무런 전제 없이 시작된다. 그것은 계산이나 전략이 아니다. 작가는 집중하는 순간의 쾌락을 말한다. 이 집중은 자신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던 지점으로 자신을 이동시킨다. 몰입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그날그날 감각이 달라서’, ‘라디오 주파수 맞추듯이’ 맞춰야 하며, ‘그 감각을 쭉 가져가야’한다. 사전 스케치 없이 시작되는 그림은 그자체가 드로잉의 성격을 띈다. 종이에 먹과 아크릴로 드로잉 한 작품은 유화보다 자유롭다. 동양화처럼 한 호흡에 가는 것이 중요하므로 중간에 수정은 거의 없다. 한편 유화의 경우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지점을 향한다. 




멈춰있는 시간과 흐르는 시간, 2018, 캔버스에 유채, 112.7×152.7



그러한 자연스러운 실행은 스스로 시작된 것을 낯섦과 만나게 한다. 작품에는 작가가 즐겨 듣는 피아노곡이나 즐겨 찾는 바닷가의 단편이 등장한다. 기억 속의 소리나 해안선은 추상화되어 화면을 부유한다. 모노톤의 화면은 흑백으로 이루어진 피아노의 건반을 떠올리며 작품마다 유동적인 해안선을 자연의 흐름과 리듬을 표현한다. [어떤 음들이 다가와]나 [파도의 연상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유동적인 경계를 보여주는 해안선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요구되는 성향을 알려준다. 바다나 하늘같은 광대한 무대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동식물은 타자로서의 자연의 면모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온전한 형태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기호로 떠돌면서 다양한 의미의 짝짓기가 시도된다. 소리를 내지만 말을 하지 않는 자연은 타자와의 만남에 요구되는 침묵을 깔고 있다. 작품에는 자연물 뿐 아니라 사물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떨어진 컵이다. 인간이 만든 것은 자연물에 비해 의도적인 면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현대예술가들은 오래된 사물이나 오브제 등을 통해서 기능을 가지는 물건이나 상품들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으로 탈주하려 했지만, 인간이 아니라 대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만큼 그 운용의 폭이 큰 것은 아니다. 박햇살의 작품 속 (깨어지는)컵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상징을 가진다. 작품 [떨어진 컵의 궤적]에서는 조각나는 검은 파편들이나, 작품 [뜻이 이루어지다]에서 화면 상단의 손과 대비되는 화면 하단의 엎질러진 액체를 볼 수 있다. 떨어져 깨지는 컵의 형상은 비가역적인 시간의 상징이다. 일상 속에서 컵의 깨짐은 큰 사고까지는 아니어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역적 시간은 근대의 역사주의에서 대표적이다. 발전(또는 진보)를 향한 불가피한 단선적 전진 속에서 얼마나 많은 타자들이 희생되었는가. 폭력적일만큼 단선적인 여정에서 다수의 타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작가는 침묵을 부정적이거나 수동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사용한다. 




뜻이 이루어지이다, 2017, 캔버스에 유채, 116.5×91.0



떨어진 컵의 궤적, 2018, 캔버스에 유채, 97.5×77.0cm



시간의 행성, 2018, 캔버스에 유채, 149.0×121.0cm



속도감 있는 붓질이 있는 작품 [너는 흘러서 어딘가로]는 갈수록 가속도를 붙이는 불가역적 시간성이 향하는 지점이 반드시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것만은 아님을 암시한다. 현대란 과도기의 연속일 뿐이다. 이미 가속도란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었다. 스튜디오에서의 전시제목이 ‘원에 대한 궤적들’로 정해진 것은 이러한 불가역적 방향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주는 듯하다. 제자리로 다시 올 수 있는 순환적인 원은 가역적인 시간의 상징이다. 동양을 포함한 근대이전의 많은 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이 가역적인 시간성이다. 만물이 생성되었을 시공간으로의 반복적인 회귀는 갱생과 치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가역적인, 즉 순환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작품 [멈춰있는 시간과 흐르는 시간]이라는 제목처럼 흐르는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시간, 즉 멈춰진 시간이 있을 수 있다. 작가는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불교에 관심을 가진다. 윤회적 사상과 그리 멀지 않을 원이라는 상징은 궤도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져 [시간의 행성]같은 우주적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저녁 무렵 둥근 실루엣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해지는 풍경에서 우리는 일상 속 우주를 만날 수 있다. 그러한 이행기의 시공간은 기계적 일상과 단절되는 낯섦 또는 신비로움이 있다. 그 시공간은 미지의 것으로 다가온다. 미지의 것으로서의 타자는 미래처럼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사로잡는 것’(레비나스)이다. 박햇살의 작품은 시간 또한 주체나 객체처럼 타자적으로 사유된다. 타자의 철학자라고 알려진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그 자체 동화할 수 없는 것, 절대로 다른 것, 경험에 의해서 동화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또는 그 자체 무한한 것, 개념적 이해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는 것과의 관계로서 사유해야함’을 말한다. 작품 [시간의 행성]에서 저녁은 낮과 밤을 만나게 하는 경계의 지대를 보여준다. 작가는 저녁 풍경에서 떨어진 것을 이어주는 원의 상징을 본다. 이러한 포용력 덕분에 원은 인류의 상상계에서 자아를 상징해왔다.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한 작업은 그 자체가 ‘원의 궤적’(전시부제)가 될 것이다. 

 

출전; 경남예술창작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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