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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재 / 사물 간의 오래된 이야기

이선영

사물 간의 오래된 이야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유리상자-아트스타 & 야외설치’ 전에서 작가에게 제공되는 것은 4면이 유리로 이루어진 높이 7m, 면적 42.9㎡ 정도의 상자이다. 그 공간은 그자체로 온전히 서 있는 조각이나 벽에 걸리는 그림과 달리, 주어진 모든 면들이 활성화되어야 하는 설치작품에 어울리며, 수집한 오브제, 또는 그것을 약간 변형시켜 어떤 장면들을 연출해온 이은재의 작품에 최적화된 장소라고 생각된다. 그의 설치작품의 구성요소들은 그자체로 보다는 어떤 맥락을 통해서 의미를 증폭(또는 변화)시키는 것들로 이루어졌다. 작가는 천정은 높지만 작은 방 같은 느낌의 공간을 마치 무대처럼 꾸몄다. 보통 연극의 무대는 앞면만이 뚫려 있지만, 이 무대는 마치 마당극처럼 관객의 시선에 입체적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는 점은 무대적 속성을 유지한다. 이은재가 연출한 무대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여타의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여기의 인간은 철저히 익명적이어서 주변 사물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봉산문화회관 설치 전경




가령 무대의 가장 눈에 띄는 세트라고 할 수 있는 계단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내디딜 바닥 자체가 없다. 바닥도 없고 초월도 없다. 이러한 단절감은 누보로망 등에서 실험된 바 있지만, 시공간이 역동적으로 편집되는 이미지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또 다른 일상이 되었다. 이은재의 작품에서 사물은 인간의 부속품이나 소유물은 아니다. 이끼나 잡초로 뒤덮인 인간은 사물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반열에 있다. 사물들은 의자나 화분 같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실내외의 물건들이지만, 소금물에 적신 휴지를 겹겹이 쌓아 만든 구조물 등 추상적인 것들도 있다. 휴지의 경우 ‘변화를 잘 받아들이는’ 그 특성 때문에 선택된 사물이자 재료이다. 변화, 유동성, 개방성 등은 작가 노트를 통해서건 실제의 대화를 통해서건 그가 잘 사용하는 어휘이다. 어디엔가 있던 물건을 가져다 쓰는 것은 직접 그리거나 만드는 것에 비해 주체의 의도가 약화된다. 이은재의 작품은 사물들을 아우르는 주어가 명확치 않다. 


각 영역에 자리한 사물들이 만드는 부분적 이야기가 어떤 총체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질지는 작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물론 작가에게는 기본적인 구상이 있지만, 결과물이 이야기하는 것은 확정적이지 않다. 작가들이 서사의 확정성을 기피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칫 상투적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조형의 단위는 오브제인데, 오브제는 코드처럼 송신자가 입력한 하나의 값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단선적인 서사는 불가능하다. 그의 작품에서 사물들은 인간 못지않게 이야기한다. 급격하게 다가온 AI 시대는 사물들끼리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아날로그 형식의 사물들은 신호가 아니라 다의적 상징을 통해 중층적으로 이야기 한다. 이은재의 작품에서 등장인물 격인 인간상들은 낡은 느낌을 주는 다른 사물처럼 이끼로 뒤덮여 있거나 잡초가 자라나고 있지만, 다른 사물들에 비해 좀 더 전경화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의미의 중심이 늘 인간이었던 관례 탓이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인간이라는 중심을 해체하고자 했다. 






무대의 윗부분에서 농업용 그물망에 연결되어 아래로 내려오는 작은 오브제들은 현실을 딱 떼어온 듯한 재현적 면모를 일소한다. 파편적인 오브제들은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거울로서의 예술작품이라는 위상을 거부하는 듯하다. 오래되어 모서리가 둥글려진 사물들이 편재하는 가운데 만지면 다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날 선 사물들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물망에 매달린 작은 오브제들은 중력에 의해 아래로 향하면서 그 아래에 배치된 사물들의 분위기를 상당 부분 결정한다. 그것은 오래되었으면서도 그다지 밝은 이야기는 아니다. 무대의 지배적인 두 인물이 하나는 수평으로 다른 하나는 수직으로 배치된 대조적인 모습도 뭔가 불길하다. 사물들 곳곳에서 발견되는 말라죽은 야생풀들은 이 장면이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어느 날 불현듯 공개된 사건 현장처럼 보이게 한다. 마른 야생풀이나 나무는 인간의 몸통에서도 발견된다. 


그것들은 버려진(그래서 작가에게 수집된) 화분처럼 한 창 살아있던 때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 죽은 모습 같다. 머리나 몸에서 자라나는 식물은 몸과 대지의 유사를 생각하게 한다. 수목들은 대지의 털과 비교될 수 있다. 관객은 재현된 현실의 단면이 아니라 오래된 사물을 보는 것처럼 거듭해서 해석된다. 이은재의 작품은 즉각적인 소통보다는 관자의 이성과 상상력이 모두 동원되는 추리적 과정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번에 파악되어 빠른 생산의 주기 속에서 회전해야 하는 스펙터클과는 정반대의 형식이다. 그의 작품은 스펙터클처럼 의미의 소비가 아니라 생산을 요구하는 것이다. 생산이 야기되는 곳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빈 틈이다. 빈틈은 연속성을 단절시킨다. 단절은 또 다른 연결의 가능성이기도 하며, 그 역도 성립된다. 각각의 개체보다는 맥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이은재의 작품은 ‘텍스트로서의 예술작품’(롤랑 바르트)처럼, 텍스트의 빈 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짜나갈 것을 요구한다. 무대 위편에 드리워진 거대한 망은 그러한 텍스트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가가 수집한 물건들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함으로서 생기는 빈틈이 발견된다. 구성된 작품들에도 빈틈이 있다. 가령 바닥에 수평으로 배치된 남성의 인체는 서 있는 여성 마네킹보다는 빈틈이 많다. 나뭇조각들로 만들어진 신체는 개체의 항상성을 유지해주는 그 경계가 취약하다. 나뭇조각들로 이루어진 동물의 머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것은 죽음조차도 떠올리지만, 열린 텍스트가 되기 위한 조건은 한계를 초월하는 어떤 불완전성일 것이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정확한 의미를 끝없이 지연시키면서, 해체주의자들이 요구한 것처럼 끝없는 보충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이 적절히 섞여 있다. 약간의 변형이 있지만, 마네킹을 비롯한 인간의 형태, 화분, 가구 등등은 익숙하다. 그러나 공간 모퉁이에 옹기종기 설치된 휴지 덩어리는 작가가 한 장 한 장 붙여서 만든 것으로 그 실체가 모호하다. 


오래된 책이나 서류뭉치가 습기가 차서 떡이 되어 버린 형국으로, 그 안에 있었을지 모를 모든 내용물들은 다 휘발된 상태이다. 만약 그 중에서 하나를 분리할 수 있다면 미생물을 배양하는 실험 접시의 표면처럼 얼룩덜룩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다른 사물들처럼 겹을 가진 대상이다. 겹을 내장한 사물들이 다시 재조합되어 또 다른 겹을 만든다. 이전 전시의 제목들인 ‘물상의 연금술’(2016)이나 ‘재생 새로운 탄생’(2017) 등은 변형과 새로운 맥락화를 암시한다. ‘불확실에 관한 소고’(2017)나 ‘ BEYOND’(2018)도 비슷한 맥락이다.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는 사물들끼리의 만남에는 불확실성이 내재 되어 있고, 그것은 각각의 의미로부터도 초월하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기본 단위들이 수집된 오브제라는 점은 우연과 필연이라는 문제를 내포한다. 그의 작업실에는 수집된 물건들로 가득하며, 그것을 놀이하듯이 조합해 보다가 그 상태로 전시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단어의 다른 순서가 다른 의미를 낳듯이, 사물의 색다른 배치는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오는 마른풀들에서 보여지듯, 인공물 뿐 아니라 자연물도 수집 대상이다. 수집물의 종류는 무척 다양해서 ‘힘들지 않게 주워올 정도의 크기’라는 최소한의 공통점만 있다. 변형도 거치지만 색칠하고 덧붙이는 정도이다. 이러한 사물의 반열에는 자신이 예전에 했던 작품(그리거나 만든, 또는 찍은 것) 또한 포함된다. 물건이 예술이 된다면, 예술작품 또한 물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생물)과 물건(무생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게임이 시작될 때, 작품이건 사물이건 동일한 차원에서 패가 섞인다. 어디선가로부터 떨어져 나온 단편은 유희적으로 조합되는 그의 설치물은 ‘허접쓰레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작가는 작업실에 모아놓은 수집품들을 이리저리 배치하면서 무질서에 감춰진 질서를 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질서(ordre)’라는 단어는 그가 펼쳐놓은 사물들의 혼돈 때문에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미셀 푸코는 광인의 언어에 특징적인 무질서를 ‘오직 그들 자신에게만 속하는 질서’로 설명한 바 있다. 


물론 광기나 비정상은 푸코의 어법에서 부정적이지 않다. 정통 역사학자나 철학자들과 다른 사유를 펼쳤던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고유의 특이성을 빼앗고 자신의 우연성과 조화되지 않은 요소들을 순화시키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푸코는 그러한 사유를 19세기에서 보는데, 그에 의하면 19세기의 패러다임은 ‘거울이 될 수 있는 지점까지 과학적 언어를 중성화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19세기의 사실주의가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이러한 재현주의를 해체하려 한다. 재현의 해체는 곧 질서의 해체처럼 다가온다. 오브제를 애용했던 초현실주의는 이러한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은재는 무질서/질서의 관계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연적인 것에서 필연적인 것을 보려 한다. 정확히는 대조되는 이원 항을 문제시한다. 가장 큰 이원 항이라 할 수 있는 남성/여성 조차도 그의 작품에서는 사물화의 여정에 함께 놓인다. 무질서나 우연이 일순간 고정된 것이 질서나 필연 아닐까, 이원항의 어떤 항이든 절대화되는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그의 작품은 놀이나 축제와 더불어 이러한 이원 항을 상대화시키는 유연성을 가지는 분야가 예술임을 알려주고 있다. 

 

출전; 봉산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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