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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경 / 변화무쌍한 빛의 정원

이선영

변화무쌍한 빛의 정원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은경의 ‘Romantic Garden’을 이루는 그림들은 마치 화면 뒤에 빛을 댄 라이트박스처럼 환하게 빛난다. 조그만 빛에도 활성화되는 홀로그램 필름이 부분적으로 활용된 작품 표면은 관객의 시점에 따라 매순간 달라지는 변화무쌍함이 특징이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에서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효과를 화면에 고착시키려 애썼다면, 21세기의 화가는 새로운 재료로 수시로 변하는 시각효과를 내려한다. 그것은 화려한 표현을 넘어서 회화라는 정지된 매체에 잠재적 움직임을 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늘 크리스마스가 낀 연말에 전시를 해왔던 작가는 저물어가는 해를 마지막으로 불사르는 듯한 인공 빛의 향연에 가세한다. 서은경의 작품은 도시의 야경 외에 휘황찬란한 자개나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장식미술의 전통 또한 포함한다. 그러한 고풍스러운 전통은 예술과 장식이 분리되기 이전의 총체적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러한 총체성으로 회귀하고 싶은 이상주의가 발흥할 때마다 귀중한 참조모델이 되곤 했다. 










크고 작은 작품 25여점이 걸린 전시장 자체가 정원에 들어온 듯 많은 식물들로 가득 차 있다. 연말에 열리는 이 전시는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년기의 크리스마스 추억을 반향 한다. 담으로 둘러쳐진 보호받는 정원은 이상적인 유년기의 공간이다. 정원은 또한 개체를 보호하고 자라게 하는 자궁 같은 공간으로 여성적 속성을 띈다. 이 따스함과 행복의 이미지는 그 반대의 배경을 전제로 빛을 발한다. 마이클 조던은 [초록덮개]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한 겨울 즉 자연전체가 죽은 듯한 시기에도 생명이 차고 견딘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상징이었다고 전한다. 서은경의 ‘로맨틱 가든’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겨울의 식물 이미지에서 풍요를 볼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겨울이라는, 모든 생명에게 가혹한 시기에 빛을 동반하는 식물의 이미지는 그자체가 풍요를 기원하는 값비싼 봉헌의 의미로 다가온다.  


‘로맨틱 가든’에 적용된 정원술은 본격적인 농사와는 다르지만, 정성스럽게 가꾸는 과정은 같다. 정원은 한 가지 일색의 종으로 생산성을 꾀하는 농사나 자연의 힘에 그대로 방치된 야생의 숲과 다르다. 생산적이지만 획일적인 노동과 다양하지만 어떻게 개입할 여지가 없는 물 그자체는 예술과 거리를 둔다. 야생과 문명 그 중간쯤에 걸쳐 있는 것이 정원술이다. 서은경의 낭만적 정원에는 버드나무부터 세비리치 야자 잎까지 다양한 종을 아우른다.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의 이파리 뿐 아니라, 접시꽃, 수선화, 나리꽃, 파초, 원추리 꽃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두는 각각 피는 계절이 다르다. 그렇지만 서은경의 정원에서는 한날한시에 한 공간에서 피어난다. 자연 생태계와는 차이를 가지는 정원이나 식물원의 반쯤은 인공적인 환경은 색감이나 밝기에 의해 더욱 극대화 된다. 검은 바탕은 색에 내재한 빛의 속성을 드러낸다. 












서은경의 작품에서 인공성의 정점은 홀로그램 필름을 입힌 화면의 형식이다. 홀로그램은 보통 인쇄물에 복제 방지 같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동양화 재료로 그려진 화면에 얇게 입혀져 오묘한 효과를 자아낸다. 동양화 재료에 이물감 없이 어울리는 홀로그램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안착시킨 서은경만의 형식이다. 여기에서 홀로그램은 식물과 빛의 관계를 강조한다. 자연광 뿐 아니라 인공광도 포함된다. 식물은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화하는 자신의 독특한 기관을 통해 지상의 생명을 가능하게 했고 지속시켰으며 번성시켰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식물만이 태양광선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고 말한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하는 식물의 능력에 의해 다른 동물들은 살아갈 수 있다. 식물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도 놓치려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식물의 선들은 빛에 대한 반응에 의한 결과물이다. 


서은경의 작품 속 빛을 반사하는 또는 발하는 식물의 이미지는 생명의 에너지에 대한 비유이다. 바깥에서 야기된 빛에 의해 비춰지면서도 그자체가 발광하여 바깥을 환하게 하는 식물들은 자연적이면서도 인공적이다. 검은 바탕은 인공성을 더 강조한다. 현대의 도시 또한 밤이 돼서야 그 면모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는가. 인간은 조명기구를 통해서 밤을 정복했으며 식물 또한 이에 적응해가고 있다. 21세기의 환경에 맞는 자연을 위해 조절과 조작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예술적 실험 또한 비슷한 경로를 통과한다. 서은경의 실험에서 화면에 빛을 고착시키는 기술은 빛을 머금는 재료를 화면에 보다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방향성을 취했다. 홀로그램 필름은 화면과 빛의 결합도를 높였다. 요즘 하고 있는 박 작업의 기원은 1990년대 작가가 즐겨했던 꼴라주이다. 학창시절 한국 미술계를 강타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에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실험을 해왔던 작가는 다양한 것들을 공존할 수 있는 기법을 사용해 왔다.












우리네 한복의 금박은박 장식처럼 표면에 얇게 필름을 입히는 방식은 이물감 없이 한번에 떨어지는 조합 기술이라는 점에서 꼴라주의 연장이자 변형이다. 이전 작업에서 몸빼 바지의 화려한 무늬를 천으로 붙여 만들었다면, 요즘작품에서 더해진 것은 물질감이 최소화된, 꼴라주 아닌 꼴라주라고 할 수 있다. 홀로그램과 유사한 효과를 지닌 전통자개 또한 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현대미술의 ‘컴바인 아트’에서 극대화된 이질감 때문에 선택되지 못했다. 꼴라주를 하려면 분채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동안 아크릴을 써왔지만, 홀로그램 박작업은 분채의 섬세함과 조화될 수 있었다. 하나는 유광이고 다른 하나는 무광이지만 반대되는 것은 서로를 더 강하게 끌어안을 수 있었다. 작가는 색/빛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블랙을 활용했다. 블랙으로 처리된 배경 때문에 색은 빛을 발한다. 백묘로 그리고 발색할 때 강약의 변화를 줘서, 명도와 채도를 높였다. 


깜깜한 밤에 빛나는 어떤 대상은 자연도 인공도 아닌 무엇, 예술작품과 가장 잘 비교될 수 있는 인공정원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조합에 의해 동양화가들이 가장 고민한다는 ‘현대와 전통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어릴 적부터 동양화를 해온 작가에게는 충돌보다는 조화를 염두에 둔 세계관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긴 작업의 연한에 비해 비교적 근자에 발견한 홀로그램을 활용한 기법은 자개 같은 오묘한 빛을 화면에 스며들게 한 격이다. 홀로그램은 그림의 표면과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여러 차원의 환영들이 상호작용하도록 한다. 작가는 홀로그램을 활용한 작품이 화려하면서도 경망스럽지 않기를 원했다. 얹고 덮고 올리고를 반복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화면은 볼 때 마다 다른 시각적 효과를 가진다. 작품들은 자연에 내장된 다양한 면모에 비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인공적 특성을 강하게 띄고 있는 재료의 독특한 조합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전통 분채에 홀로그램 박 작업이 행해진 화면들은 유려한 선들과 깊이감이 공존한다. 작품마다 홀로그램이 사용된 양은 조금씩 다르다. 홀로그램은 바람에 흩날리는 버드나무 이파리 몇 장을 빛내는가 하면, 열대 식물의 거대한 잎 전체를 도포하면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검은 색 배경을 깔고 이리저리 춤을 추는 이파리들은 인공 또는 자연광에 의해 빛나는 것 같으면서도 자체 발광하는 듯한 효과가 있다. 밑그림 없이, 바로 백묘법으로 그려지는 즉흥적인 형태는 정확한 매뉴얼이 있는 장식예술과도 다르다. 호흡조절을 하면서 한 잎 한 잎 그려지는 선들은 추후의 과정에 의해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한다. 살짝 얹힌 듯한 빛나는 면은 바람결에 입자를 날려 보내는 듯한 느낌으로 ‘빈티지 스타일’로 변모하기도 한다. 정확한 재현은 아니지만 추상도 아니고, 자신의 감성을 실으면서 자연의 내재율을 표현하려 한다. 


인공성이 강하게 적용된 화면이지만 야생성 또한 강하다. 서은경의 ‘정원’에서 식물들은 대개 부분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나무를 풀처럼 그린다. 가령 버드나무 잎은 보통 아래로 내려온 모습이지만 서은경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부분에서 다양한 방향성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해서 나무의 질서감보다는 풀의 자유로움이 두드러져 ‘로맨틱 가든’에 어울리는 모습이 된다. 대조적인 정원술인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과 비교하자면 서은경의 ‘로맨틱 가든’은 낭만주의에 충실한 영국식 정원과 더욱 가까울 것이다. 고전주의에 충실한 프랑스식 정원이 기하학적이라면 낭만적 정원은 반쯤은 방치된 자유로운 모습이다. 고전주의가 하나의 원근법을 강요한다면, 낭만주의는 좀 풀어져 있어 다양한 원근법을 깔고 있는 동양화와  잘 어울린다. 가브리엘 반 쥘랑은 [세계의 정원-작은 에덴동산]에서 자연에 대한 고전적 접근과 낭만적 접근을 두 가지 대조적인 정원술을 비교하면서 분석한다. 












가브리엘 반 쥘랑에 의하면, 경관이란 한 지점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범위이다. 정원에 중심적인 전망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정원의 설계도를 결정했다. 이것은 유럽 17세기의 영광인 프랑스식 정원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세계의 정원]에 의하면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식 정원은 자연 경관을 균형 잡히고 통제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지배의 상징으로 변화시켰다. 자연은 건축의 연장이어야 한다고 여긴 17세기 프랑스의 정원의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이다. 고전주의에 바탕 한 시각이데올로기는 플라톤 이래의 서구 재현주의 전통의 몸통이 되어왔다. 리얼리즘이나 낭만주의는 그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주류에 대한 반란이 있던 모든 문예사조사에서 발견된다. 정원술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서은경의 ‘로맨틱 가든’은 동양과도 어울리는 낭만주의를 내포한다. 낭만주의는 자연의 외관보다는 자연의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동양의 사고와 근접한다. 


기존의 시스템이 경직화되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 낭만주의, 더 넓게는 낭만적 정신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낭만주의를 특정 시기와 장소에 국한된 문예사조사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면, 근대이후 체계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는 현대에도 요구되는 정신이다. 다만 이제는 계몽주의 시대의 루소가 꿈꾸었던 것처럼 순수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는 발상이 가능하지 않다. 가일 층 발달하는 기계적 방식에 의해 시스템이 공고화되면서 그에 상응하는 반동이 신(新) 낭만주의로 나타나곤 한다. 문명도 길게 보면 자연이라고 보는 신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문명을 이상으로 생각한다. 예술 또한 그러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자연을 잘 묘사할 수 있을 동양화가가 자연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키는데 더 몰두하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현대가 주어진 자연, 그리고 그러한 자연에 바탕 한 예술적 형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서은경의 작품에 나타나는 자체 발광하는 듯한 식물은 문명과 공(共)진화하고 있는 새로운 자연의 면모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에 의해 생태계가 훼손되어 자연에서 활용될 수 있는 빛의 양이 급격하게 줄었을 때 필요한 돌연변이종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하나의 잎줄기의 색이 모두 다르게 빛나는 로맨틱 가든의 식물들은 이것저것이 교묘하게 합성된 어떤 새로운 실재를 떠오르게 한다. 자연생태계에서 공존하기 힘든 것도 한 영역에 모을 수 있다. 그러한 정원술은 꼴라주를 통해 차이의 공존을 지향해 왔던 이전의 작업방식과도 어울리는 소재이다. 새로운 형식을 통해 차이들은 이음매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결합되어 제 3의 실재를 생성해 나간다.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은 개체들로 하여금 유연한 접속의 지점을 만들게 할 것이다. 서은경의 ‘로맨틱 가든’은 크리스마스에 기대했던 거친 환경 속의 풍요와 따스함처럼, 새로운 기계문명과 상호작용하면서 자라나는 중간지대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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