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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주 / 세계와의 접촉

이선영

세계와의 접촉

  

이선영(미술평론가)

  

박길주의 풍경에는 초록빛 융단으로 뒤덮인 풍부한 자연이 있다. 겨울에는 회색빛 융단으로 바뀐다. 작품마다 다르지만, 융단의 털은 꽤 길고 촘촘해서 촉각성을 자극한다. 거칠거칠하면서도 부드럽고 웬만한 충격에 대해서는 완충작용을 할 수 있을 만큼 두툼한 실재감이 있다. 화면 안에 부는 바람은 이 미세한 선들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뒤척인다. 속도감 있게 붓을 놀린 화면은 붓질의 방향과 명암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는 역동적인 자연의 면모를 드러낸다. 초록빛의 무덤덤한 세계는 매 순간 달라진다. 단지 장소나 계절에 따른 빛의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의 만남만큼이나 오래되었을 작업의 축적에 의한 것이다. 붓터치가 드러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재현대상에 충실하기 위해 붓터치를 최소화할 수도 있겠지만, 박길주는 자유로운 붓의 운용을 통해 재현과 표현을 일치시킨다. 재현과 표현이 자연스럽게 일치되는 대상을 찾은 셈이다. 객체냐 주체냐에 대한 선택이 있지만. 그것이 상반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바람을 타고 91.0x116.8cm oil on canvas 2016



작품 [푸른 자연]은 초록의 촉각성으로 표현된 숲의 일부이며, 작품 [바람을 타고]는 화면 가득히 푸른 숲을 담았다. 왜 한국에서는 녹색 숲을 푸른 숲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푸르다는 표현은 바다나 하늘과 연관되어 더 무한하게 다가온다. 박길주의 풍경은 색을 달리하면 바다일 수도 구름일 수도 있을 듯, 경계가 불분명하다. 캔버스의 가장자리만이 무한히 이어지는 자연을 한정 짓는다. 녹색계열의 색조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작품들은 색을 위한 풍경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여기에서 형식과 내용은 혼연일체가 되어있다. 조형언어는 자율적이면서도 실제와의 연결을 유지한다. 거의 모노크롬 풍의 작품 [노랑의 위로]에서도 화면 안에서 미풍이 부는 듯 공간감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것이다. 작품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는 녹색 융단같은 촉각성이 극대화된 가운데, 숲과 하늘이 색과 밀도로 구별되어 있다. 


작품 [제주에서 파리지엥]은 그저 색 점의 얼룩으로 표현된 자연이다. 작품 [ecstasy]는 보랏빛 그늘에 잠긴 식물의 잎새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화사한 외광을 표현하기 위해 검은색을 쓰지 않았던 인상파의 선택을 떠오르게 한다. 인상파는 눈에 더 충실한 작품을 하다가 결국 주관적인 세계로 넘어갔다. 장소성이 제거된 작품 제목에서 자연을 만나 화폭에 옮겼을 때의 감성만 남아있다. 박길주의 작품에서 자연 안에 작게 자리한 인간의 흔적은 자연을 더욱 거대하게 다가오게 한다. 작품 자체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박길주의 작품은 대부분 유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양화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다. 만약에 서양화라면 이성적 시각에 의해 체계화된 고전주의가 아니라, 자연의 거대함을 암시하는 낭만주의에 속할 것이다. 낭만주의에서 자연은 인간의 척도를 능가하는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며, 미학자들은 이를 미와 대조되는 숭고로 개념화하곤 했다. 




lost season in jeju oil on canavs 162.2x97cm 2016



작품 [다시 푸르다]에서 화면 상단에 언뜻 보이는 하얀 띠는 인공구조물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인공구조물을 감싸는 자연이 어디인지 특정될 수 없듯이 말이다. 작품 [lost season in jeju]에서 구름, 안개, 눈 같은 기상적 요소에 의해 어떤 분위기에 잠겨 있는 산야가 펼쳐지는데, 그 앞에 버스와 관광객들은 매우 작게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서 무채색은 흑백사진 같은 어떤 차원의 삭감이 아니라, 계절에 맞는 사실적인 색감이기도 하다. 흑백의 농담으로 이루어진 동양화가 어느 계절에는 매우 사실적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가로 6 미터가 넘는 작품 [괜찮아 아빠가 있잖아]는 스펙터클하게 펼쳐진 산야 앞에 작게 표현된 사람 둘이 서로에게 의지한다. 둘의 관계는 마치 사람과 자연의 관계처럼 긴밀하다. 작품 [파란 바람의 추억]에서 눈 온 들판에서 함께 뛰노는 사람들은 지난 여름의 푸른 바람을 추억한다. 다시 (가)봐도 새로운 것이 바로 자연이다. 


인공적인 것에서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공간이 시간과 연결되듯이, 지각은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작품 [하늘 여행]에서 초록 들판의 색감과 질감을 즐기던 관객의 눈이 하늘 방향으로 빠지는 순간 우연히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이 발견된다. 박길주의 작품에서 인간은 행동하고 있지만, 대부분 화면 한가운데에 있지 않다. 인간은 무엇을 하든 간에 압도적인 자연의 극히 일부를 차지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이 가세함으로서 자연은 더욱 생동감있고 광활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박길주의 작품에 표현된 자연에 감성이 가득 깃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자연의 의미는 인간적인 의미임을 말한다. 인간중심주의로 자연을 보면 자연은 대상화, 도구화된다. 그러나 박길주의 작품에서 인간은 중심에서 비켜나 있다. 원근법적 시야로 보면 인간은 작게 표현되어 있지만, 내면적 시선은 화면에 편재한다. 거기에는 인간 없이도 인간이 있다. 




파란 바람의 추억 112.1x162.2cm 2017



중심이 산재하는, 가까이서 본 자연은 촉각적이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다른 감각은 특정 감각기관에 집중되지만, 촉각은 온몸에 다 퍼져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사이언스지에 실린 한 과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촉각은 최초로 점화되는 감각이며 대개 마지막에 소멸한다. 눈이 우리를 배신한 뒤에도 오랫동안, 손은 세계를 전하는 일에 충실하다. 촉각이 없이 사는 것은 흐릿하고 마비된 세상을 사는 것과 같다.’ 시각예술가가 아니어도 인간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가장 강력한 기관은 눈이다. 그렇지만 화가가 눈에 집중된 감각을 주변화된 감각으로 돌리는 순간 새로운 시각이 가능해진다. 동일성은 동일성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음악가라면 자신이 늘 들어왔던 소리보다 보는 것을 통해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이러한 다름을 위한 영원한 무대, 또는 원천이다.


촉각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특히 필요한 것은 채색법일 것이다. 박길주의 작품은 명확한 외곽선이 없고 장소를 특정할 수 없으며, 때로는 색채의 물결만이 출렁이는 광경이 있다. 색 터치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편이 되고 단편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단편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 그자체가 전체가 될 수도 있다. 박길주의 작품에서 형태와 색채는 서로를 고양한다.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회의]에서 ‘세잔에게 윤곽은 색채의 결과’라고 보면서, ‘색채가 풍부해질 때 그 형태 역시 충만’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화가는 ‘세계와의 접촉’(메를로 퐁티)을 표현한다. 현대 이전의 화가의 경우 렘브란트의 예가 있을 수 있다. 박길주의 작품에 두드러지는 촉각성은 회화의 본질과 관계된다. 우리가 ‘회화적’이라는 표현을 쓸 때 한 시각에 의해 명확히 재단될 수 있는 형태나 형식에 치중하기 보다는 느슨하고 자유롭게 열려 있는 작품을 말한다. 




하늘여행 91x116 oil on canvas 2017



시각이 지배적인 관점으로 코드화되기 쉽다면, 필촉은 단지 자신의 감정선이나 리듬을 따라 흘러갈 것만을 요구한다. 그렇게 회화는 대상이나 주제로부터 빠져나와 자율적이며 자유로운 것으로 고양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또다시 코드화(또는 영토화)될 수 있는데, 추상미술의 역사는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재현주의는 그것을 넘어서려 했던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다. 그 경우에는 논리나 관념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결과는 특정 조형언어로의 환원이다. 대안은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는 것이다. 언어는 한정적이고 현실은 모호하다. 현대 화가는 자신의 여정에서 두 가지 걸림돌을 만나곤 한다. 질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말하듯이 ‘코드와 혼란을 동시에 피해야’ 한다. 박길주에게 가장 강력한 현실은 자연이다. 그에 평행하게 존재하는 것은 색감과 터치이다. 그 둘은 서로를 보강하며 자연적 실재와 회화적 실재를 근접시킨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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