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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 21세기의 분신

이선영

21세기의 분신

  

이선영(미술평론가)

  

분신이라는 테마는 고대의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이 완전히 일상화 된 것은 스마트폰의 일반화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음성통화보다 더 많이 주고 받는 문자를 통한 소통에서 자신의 얼굴은 물론 그 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아바타와 이모티콘 등이 활용되곤 한다. 간단하게 메시지를 주고받으려면 문자 없이 이미지만으로도 한다. 이러한 소통에서 문자는 피상적이어서 가루로 분쇄되거나—ㅋㅋㅋㅎㅎㅎ 같은 용법--외계어로 변화된다. SNS에서 문자 텍스트가 너무 많이 나오는 페이스북 보다는 이미지 중심의는 인스타그램이 더 인기가 있는 것도 그러한 추세를 반영한다. 어려서부터 스마트 기기를 활용했던 젊은 세대일수록 아예 문자 없는 미디어, 가령 유튜브 같은 싸이트의 인기가 높은 것도 문자와 영상 간의 소통방식의 차이를 알려준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그림이나 (전통적인)조각이 문자에 해당된다면 영상의 문법은 구어에 해당된다. 




하늘한번보기 X 1440rpm 30 X 30 X 132 오석, stainless steel 2017



가리워진 길(Ⅱ) X 1440rpm 27 X 27 X 132 오석, stainless steel 2017



구술성에서 문자성, 그리고 문자에 바탕한 제2의 구술성이라는 미디어 진화의 거시적 단계는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나 마샬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 등에 잘 정리되어 있다. 자크 데리다도 말과 글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면서 ‘로고스(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각을 세운 바 있다. 이명훈의 작업은 스텐레스스틸이나 오석, 화강석 같은 묵직한 재료들을 사용하는 조각이지만, 작품의 결과는 날렵한 코드의 소통에 바탕 한 문화를 반영한다. 그의 작품은 조각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인체 상에 바탕을 두지만, 그 결과물은 캐릭터같다. 머리가 크고 굵은 선으로 확정되는 표정이 만화적이다. 검은색 오석으로 둥근 얼굴 부분을 채워서 눈모양 입모양으로 파낸 하얀 선이 두드러진다. 비슷한 모습이 상황만 다르게 표현된다. 그가 연출한 상황들은 예술작업을 하는 젊은 남자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즉 작품 속 인물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사람들은 분신을 다른 것에서 취해 오곤하지만, 작가는 스스로 만들 수 있다. 보통사람들은 소비를 통해서 자기 동일성을 주장(대변)하지만, 작가는 생산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이명훈의 작품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물이다. 물론 온라인 상에서 활발하게 유통되는 캐릭터 등도 다양한 상품화를 통해서 입체화 되곤 한다.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상점에는 늘 상 그러한 캐릭터 인형들이 가득하며, 예쁨과 귀여움만 있는 따스하고 아늑한 세계로 와 보라고 유혹하곤 한다. 온라인/오프라인 등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어마어마한 시장이 있다. 대중문화의 박리다매 전략은 소수의 컬렉터에 의존하는 미술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구속을 야기한다. 어쨌든 그러한 대중적 소비문화에 태어난 세대들이 자신의 동일성을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그 ‘인간’ 보다는 그것이 코드화된 분신들과 더 친숙할 것이다. 이명훈의 작품에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인간보다는 캐릭터와 더 유사하다. 




가리워진 길 X 1440rpm 70 X 37 X 132 오석, stainless steel 2017



겨우나기 X 1440rpm 50 X 40 X 140  오석, stainless steel  2017



그것은 인간의 외양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2018년에 제작된 최근 작업에서 인물은 표정 자체가 없는 로봇을 더욱 닮아가고 있다. 물론 예술은 코드의 소비에 머물지 않고 코드를 생산하는 만큼, 만약 그의 작품이 지금보다 더 널리 알려진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가 창조한 캐릭터를 자기화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으로 캐릭터를 표현했다고 할만한 이명훈의 작품은 상당 부분 대중적 문화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예술적이든 대중적이든 생산 또는 창조는 어려운 과업이다. 그의 작업에 예술가적 자의식이 묻어나는 상황이 자주 발견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작품 [가리워진 길(Ⅱ)](2017)는 어린 왕자처럼 별 위에 홀로 있는 모습이다. 그는 구면을 따라서 분화구들이 숭숭 나 있는 외딴 혹성에서 기타 치고 노래한다. 누가 그 노래를 들어줄 것인가, 누구와 함께 노래할 것인가. 작품 [하늘 한번 보기](2017) 또한 외로운 별이라는 세트는 동일하다. 


별 위에 홀로 서 있는 인물은 귀마개에 목도리를 두르고 추위를 견딘다. 그것은 물리적인 추위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추위에 가깝다. 작품 [겨우나기](2017)는 상징적이기 보다는 일상화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데, 구식 난로에서 불쬐는 모습은 겨울에 작업하는 고통을 말해준다. 이명훈의 인물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슷한 표정이기에 거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모호한 표정이 특징적이다. 작품 [가리워진 길](2017)에서 손수레를 끄는 모습은 일종의 노동 현장인데, 예술가에게 노동은 두 가지이다. 작업 자체에 내재한 노동과 작업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또 다른 노동이다. 후자의 노동에 너무 지치면 작업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반대로 후자의 노동에 지쳐 작업의 노동은 생략하고 관념으로 대치하는 어설픈 방편도 있다. 관념만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작품은 없다. 특히 조각에서 노동의 몫은 크다. 




 한눈팔기ver.1 X 1440rpm 70 X 37 X 132 오석, stainless steel 2017



흔한 노래 X 1440rpm 50 X 30 X 21 화강석, 오석, stainless steel  2014



더구나 이명훈처럼 금속이나 돌같은 재료를 사용하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두 노동은 겉으로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몰입을 낳는 행위/ 단순한 도구라는 차이는 남아있다. 몰입을 통해서만 예술작품에 필수불가결한 도약과 비약이 일어날 수 있다. 도구적 합리성으로 작업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세팅해 놓아도, 본격적인 작업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은 남아있다. 작품 [흔한 노래](2014)는 벤치 위에 노숙자처럼 누워 있는 인물을 보여주는데, 완전히 노숙자 버전이다. 낭만주의 이래로 정처 없이 떠도는 인물과 동일시될 수 있는 예술가상은 보편화 되었다. 그 와중에 남자 성기의 표현이 재미있다. 인물은 빈둥거리는 와중에 영감을 받았는가. 예술 또한 생산이라면 섹슈얼리티와 창조력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작품 [한눈 팔기](2017)는 몸이 향하는 곳과 얼굴이 향하는 곳이 다른, 양다리를 걸치는 듯한 인물의 표현이 코믹하다. 


조각에서의 서사는 회화와 달리 단순한 상황 속에서 내포적인 면이 있어야 하는데, 이명훈의 작품은 그러한 전형적 상황의 포착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캐릭터 외에 타자라고 할 수 있는 두 부류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개와 로봇이다. 동물과 기계는 인간의 동일성과 비교되는 타자이다.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가 아님으로서 비로소 인간으로 정의되었다. 그래서 타자인 동물과 기계는 같은 부류로 엮이기도 했다. 동물은 기계라는 발상이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의 일부이기도 하므로 인간도 기계일 수 있다는 논리의 전개는 자연스럽다. 그의 작품에서 개는 인간과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로봇은 안면몰수이다. 작품[Monologue](2018)에서 동그랗고 큰 머리는 비율로 치면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나 눈코입은 생략되어 있어 귀여운 외모 와중에도 상당히 공격적으로 다가온다. 다른 작품들에서 얼굴 부분을 담당하던 검은 돌은 사용되지 않았다. 




Monologue X 1440rpm 100 X 100 X 280 stainless steel, LED, 우레탄 도장 2018



돌은 스테인레스 스틸이나 LED보다는 따스한 매체이며, 이명훈은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한 조각을 통해 재료 자체가 가지는 온기를 활용해 왔다. 금속성 표면으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로봇같은 외양을 가진다. 왼쪽 가슴만 하트모양으로 빛이 나고 있지만, 그것은 살아있음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작동중이라는 표시에 더 가깝다. 작가는 작품 제목을 통해 로봇이 대화적이기 보다는 독백적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상호작용성’을 표방하며 인간적 대화를 흉내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많은 경우의 수가 입력된 결과물일 따름이다. 반짝거리는 하트 문양은 낯간지러운 표현지만 기계일수록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띄려고 한다. 인간은 기계화되어가고, 기계는 진화를 거듭할수록 인간만의 영역이라 할만한 부분을 잠식해 들어간다. 전형화된 캐릭터를 통하여 여러 상황을 연출하고 이야기하는 이명훈의 작업은 현재 우리가 몸을 담그고 있는 생태계를 간략하면서도 강력하게 압축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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