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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세계한민족미술대축제 /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여정

이선영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여정

  

이선영(미술평론가)

  


1. 우리 집은 어디인가

  

2018년 세계 한민족 미술대축제는 아시아권과 유럽권, 남북미권 등 여러 대륙에 흩어져 살며 작업하고 있는 한민족들의 작업이 한데 모인 축제의 성격을 띄는 미술 전시이다. 한국에서 작업하고 있는 남한 미술가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고, 거리상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70년이 넘는 분단으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던 북한 미술가들도 참여하여 ‘한민족’이라는 키워드를 더욱 내실 있고 감격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이번 시즌에 남북한 미술인들의 만남이 여러군데서 열리고 있는데, 예술은 앞으로 이뤄질 상황에 대한 예기(豫期)라는 점에서, 이러한 만남들은 우리 민족에게 긍정적 신호로 다가온다. 예술은 기존의 현실 속에서 미지의 잠재적인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2018년의 축제는 남쪽과 북쪽의 한민족 모두에게 질곡이 되었던 분단체제가 곧 실행되리라고 기대되는 종전선언을 통해 급격히 변화되어가는 즈음에 열리는 것이라 더욱 무게감이 실린다. 






세계평화에 오랫동안 난기류를 형성하고 있던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은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맥락과 긴밀하다. 지구촌 시대에 정치든 문화든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한민족’이라고 호명된 주체들은 느슨한 축제적 집합이면서도 긴급한 현실성을 가진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한민족 역량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정치경제 부문에서의 역할이 있듯이, 미술계에서는 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남과 대화를 추구한다. 대화는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대화를 말한다. 같은 부류끼리의 대화는 무늬만 대화지 독백과 다름없다. 축제의 성격을 띄는 이 전시는 독백의 음울함이 아니라, 타지에서 온 얼굴과 얼굴이 맞대는 대화를 추구하는 장이다. 몸이 직접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술작품이란 작가의 얼굴과 몸에 해당되니 만큼, 세계 한민족 미술대축제는 타자의 얼굴들이 마주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행사의 귀한 손님인 북한 작가들은 오랫동안 타자였다. 북한 미술인과의 만남은 ‘동질성 회복’같은 강제적인 또는 피상적인 화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그동안 (사)한민족미술교류협회가 수년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던 가치는 ‘평화, 상생, 공존’이었다.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지구촌 시대에 더욱 가까워진 세계인들에게는 그만큼 이질성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는데, 이때 경쟁이 아닌 상생, 유아독존이 아닌 공존은 평화의 조건이다. 평화는 ‘세계는 하나’라는 피상적인 구호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대화는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 문화와 예술은 식물과 비교하자면 꽃에 해당된다. 정치가 씨를 뿌리고 경제가 성장시킨다면, 문화는 그 결과의 만개이다. 물론 그 꽃이 만들어낸 열매와 씨는 그다음의 순환주기에 돌입할 것이다. 


예술이 꽃과 비유될 때, 그것은 장식이나 잉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작을 알리는 기능을 가진다. 같은 씨앗도 다른 토양과 기후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서 펼치는 장은 그러한 형질 변환을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차이는 소통의 조건이고, 성공적 소통은 차이에서 긍정적인 면을 추출하니만큼, 대규모 문화교류의 장은 생산적 기능을 할 수 있다. ‘평화, 상생, 공존’이라는 기조 아래, 올해의 전시주제는 ‘우리 집은 어디인가’이다. 분단은 물론 세계각지에 흩어진 미술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을 떠나는 여정에 진입했고, 늘 상 자신이 비롯된 곳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왔다. 거기에는 조국, 고향, 집에 대한 이상적 상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 집’은 누군가한테는 실제적인 장소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이 근본적인 가치는 다른 모든 가치와 더불어 불확실해졌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가치들이 허구나 허위의식은 아니다. 이상은 관념을 넘어서 현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 또한 작가에게는 엄연히 자신이 직면한 현실이다. 집은 또한 몸이다. 우리 집이 어디인가를 묻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함께 참여한 다른 전시기획 위원들과 분담하여 평문을 쓰기로 했지만, 국내 120여명, 해외 60여명, 북한 20여명 등, 전체 2백여 명이 넘는 작가의 작품 경향을 일일이 분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어렵고, 독자들에게 장황함을 줄 것 같아서 필자의 평문은 크게 ‘최초의 중심’, ‘중심의 상실’, 그리고 ‘다시 중심을 찾으려는 경향’이라는 이론적 서사를 기조로 할 것이다. 최초의 중심이란 있었던 또는 있었을지 모를 최초의 집이다. 그러나 그러한 최초의 집에서 온전히 존재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집은 몸과 비교되지만, 그 단계는 자궁 속에서 바깥의 모든 불쾌한 자극으로부터 보호되면서 필요한 모든 에너지가 공급되었던 원초적 시공간이기도 하다. 


현대, 세계화라는 격동은 최초의 중심을 거의 신화의 시대로 소급하게 한다. 최초의 중심은 집단적 신화일 수도 있고, 집단의 신화가 차원을 달리하여 반복된다는 점에서 개인의 신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중심은 상실되었고, 그것을 되찾으려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여정은 원래의 중심뿐 아니라 새로운 중심으로의 이동 또한 포함된다. 이러한 여정은 유목이나 산종(散種)이라는 우리 시대 문화의 키워드와 관련된다. 현대는 늘 상 과도기로 규정되곤 하였기에 떠남은 상시적이다. 떠남은 물리적 이동 뿐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상상적 떠남 또한 포함된다. 예술은 이러한 여정의 궤적이고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게 또 다른 정착이 매번 시작된다. 최초의 집은 아니지만, 새롭게 머물게 된 그곳들에 대안의 집이 구축된다. 세계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그곳의 풍토와 상호작용한 문화적 결과물에서 우리는 대안의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상실된 중심을 되찾으려는 이들의 여정에서 새로운 중심이 생겨났다. 그러한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여정 속에서 ‘우리 집’은 그 경계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2. 우리 집(中心)의 상징

  

우리 집의 원형은 고향 집이다. 누군가에게는 제주도, 누군가에게는 함경도에 있었을 그 집 말이다. 그들에게 고향 집은 현재의 변화된 상황과 무관하게 변치 않은 시공 속에 존재하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회귀하는 원형으로 작동한다. 철학자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이란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라고 하면서,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집을 인간 그 자체와 동일시 한다. 즉 그것은 ‘육체이자 영혼이며 인간 존재의 최초의 세계’이기에, 그것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릴 것’이다. 그자체가 소우주인 예술작품에는 소우주로서의 집과 몸에 대한 비유가 압축되곤 한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도 [상징, 신성, 예술]에서 우주-인간의 동형론을 주장하면서, 질서화된 영역과 인간 거주지는 우주와 신적 거주지에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와 집(또는 사원), 그리고 인간의 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동일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통로가 열려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주-집-인간의 몸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은 지금까지도 현존하는 인도의 철학적 사유를 낳았고, 서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그 관념이 계속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그토록 중요한 집은 최초의 출발이 된다. 설사 실제의 고향 집이 존재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낙원이 아니더라도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기대치가 있으며, 이후의 고난에 찬 여로는 실제 고향 집의 흠결마저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게 한다. 알에서 깨어나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인간은 실존주의자들이 즐겨 묘사했듯이 ‘세계에 내던져’진다. 대도시를 포함하여 낯선 곳이라 함은 집과 반대편에 놓이는 장소로 소외감을 준다. 이때 소외된 자는 ‘집을 에워싸서 공격하는 힘을 적대하여 싸우는 집의 보호적 가치’(바슐라르)를 꿈꾼다. 집은 그다지 우호적이라 할 수 없는 바깥에 대항하여 은신 가능한 완벽한 처소에 대한 이상의 집적체가 된다. 특히 도시로의 집중이 일어난 근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향 집을 떠났다. 근대적 경쟁의 또 다른 모습인 제국주의 전쟁 또한 자신이 비롯된 곳으로부터의 떠남을 야기했다.


근대적 세계관을 담은 미술에서, 기계같은 집같지 않은 집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대중의 모습을 자주 발견된다. 고향 집과 같은 따스한 집을 다시 일구기 위해서 요구되는 심신의 에너지는 너무나 크게 다가오며, 예술작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이 투사되는 장이 되곤 한다. ‘우리 집은 어디인가’라는 주제는 어쩌면 예술로 밖에 찾아질 수 없는 원초적 시공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을 말한다. [공간의 시학]은 ‘어린이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는 것은, 그의 행복을 그 속에 보호하고 싶어하는 가장 은밀한 꿈을 보여 달라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한편 모성적 공간을 떠올리는 집에 대한 상상은 성(性)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남성에게 집은 사적 공간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여성에게는 또 다른 일터, 즉 공적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집은 기대치와 실제가 맞부딪치는 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집이라는 가장 친밀한 공간에서 기괴함(unheimlich, uncanny)을 발견하기도 했다. 


‘은자의 오두막’ 등을 상찬하는 바슐라르의 논의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고풍스럽기까지 하지만, 거의 신성하게 다가오기까지 하는 집이라는 상징적 중심은 신화의 반복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신성한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 공간을 변화시키고 특수화함으로서, 요컨대 주변의 세속적 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서 이 공간을 축성했던 원초의 성현을 반복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성벽은 군사적 보루가 되기에 앞서서 주술적 방어물이다. 그것은 악마와 원령이 우글거리는 카오스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조직화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주화 된’, 즉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일체의 축성된 공간은 중심이다. 집 또한 그러한 모델에 따라 지어진다. 새로 짓는 모든 집은 세계의 재건인 것이다. 엘리아데는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현실적이기 위해서 새로운 주거나 새로운 도시는 건조의 의례에 의해서 우주의 중심이 투영돼야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새 도시의 건설은 세계 창조의 반복이며, 우주의 복제이다. 도시가 항상 세계상이듯이 집은 소우주이다. 모든 집은 중심으로 변화한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과정에서 낙원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발견한다. 그가 말하는 낙원에의 향수는 항상,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세계와 실재와 신성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싶은 바람, 요컨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여 신의 조건을 회복하려는 바람이다. 집에 대한 기대나 그리움이 낙원에 대한 향수와 연결될 때, 예술작품은 그러한 향수를 담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신화의 시대가 지나고 초월은 내재적인 것으로 변화했다. 전통사회에서 중심의 상징은 사원 등 종교적 건물에 관철되었다. 사원은 성스러운 공간이다. 엘리아데는 [상징, 신성, 예술]에서 주변을 둘러싼 우주적 환경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역인 성스러운 공간은 세속의 공간과는 구분되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서 선택된 지역이라고 말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聖)의 공간은 항상 거대하고 무질서하며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속(俗)의 공간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여기에서 무질서하다고 말한 것은 속의 공간이란 유기체적으로 구조지워져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이다. 성의 공간은 명확한 한계를 가지며 완벽하게 구조지워져 있다. 즉 그것은 중심에 자리 잡은 성화 된 공간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성스러운 공간은 저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를 향한 열려짐을 표상한다. 성스러운 장소란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의 교통이 가능한 공간이다. 즉 사원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르는 통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다. 엘리아데의 학설은 종교적 건축에 깔린 사상을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우리의 집이 신성한 것은 보다 큰 집의 상징적 질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적 의미의 집을 그린다는 것은 우주창생을 반복하는 행위와 비교될 수 있다. 

  


3. 잃어버린 중심을 찾아서

  

이상적 집에 대한 상상이 투사되는 예술작품에는 혼란을 질서로 전이하려는 희망이 담겨있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과정을 ‘우주화’라고 묘사한다. 제의적으로 구축된 성스러운 공간, 즉 성소는 우주의 복사판으로서 하나의 세계상이 된다. 고향 집에 대한 이상이 깔려 있는 예술작품에는 그것이 구체적인 집의 재현이나 묘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대우주의 질서를 반향하는 소우주로서의 위상이 존재한다. 존재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원하는 기능주의 시대에, 예술은 분열과 파편화를 딛고 자신이 구축하는 또 다른 현실 속에 전체를 담고자 한다. 이때 중심의 상징이 투사된 집의 이미지는 치유와 비전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正)의 상태는 곧 반(反)의 상태를 끌어들인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에서 엘리아데의 가설을 반박한다. 그에 의하면 엘리아데가 가정하는 중심의 상징체계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 중심은 주변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의 상징을 해체하기 위해 건축된 성소가 없는 유목민의 예를 든다. 


유목민에게는 성스러운 건축 대신에 성스러운 지형적 특징들이 있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이라는 언어가 우선적으로 정치적인 것이고 이차적으로만 우주론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중심은 기본적으로 왕권과 왕의 기능이라는 고대 이데올로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 유형을 보편적인(또는 지배적인) 상징화 유형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중심과의 연결보다는 중심과의 분리가 더욱 보편적이다. 분리가 더욱 가속도를 붙이던 근대 이후 ‘중심의 상실’(제들마이어)이라는 주제는 모든 문명비판서의 중심 논제가 되다시피 했다. 분리에 방점이 찍힐 때, 우주론보다는 인간론이 전면에 부각된다. 조너선 스미스는 중심으로부터의 분리가 반드시 불화, 타락, 비존재라는 카오스로의 침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났지만 변신의 과정을 통해 타자--사물, 사람, 혹은 표지--안에 자리잡음으로서 영속성을 성취하며, 그는 영원히 접근가능하도록 남아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신화적 중심의 상징은 신전같은 웅장한 건축과 잘 어울리지만, 이제 중심은 그러한 웅장한 장소에서 극화(재현) 되지 않는다. 중심의 재현을 대체하는 것은 이제 회상이다. 이러한 논지는 공간적 중심이라는 전통적 사고에 깔린 공간적 비유를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시간적 비유로 바꾼다. 잃어버린 중심을 찾는 현대적 논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와 짝을 이룬다. 상실이나 결핍은 전통을 벗어나는 모든 과도기 사회에서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방점의 이동에서 거대한 상징적 공간을 건설(making)하는 문제보다는, 잃어버린 상징을 기억하기 위한 표시(marking)가 더 중요해진다. 조너선 스미스는 그것을 건축물의 언어가 아니라, 경로, 길, 자취, 표시 그리고 발자국의 언어에서 찾는다. 중심은 계획적 건설이 아니라, 여행의 우연한 부산물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명확한 중심이 아니라 흔적이다. 흔적은 기억을 일으키고 기억 속에서 영속화될 수 있다. [자리잡기]의 저자는 현상학자나 종교사가들의 글에 등장해서 익숙한 명사적인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담고자 했다고 밝힌다. 


공간/자리의 구별은 친숙함을 기준으로 한다. 친숙해진 공간이 바로 자리인 것이다. 조너선 스미스는 인문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의 말을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공간은 자리보다 추상적이다. 미분화된 공간으로 시작된 것이,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가치를 부여함에 따라 자리가 된다...만약 우리가 공간을 운동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리는 휴지를 허락하는 것이다. 운동 중의 각각의 휴지는 위치를 자리로 변하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이푸 투안) 조너선 스미스에 의하면 공간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기억들이 불러내지는 데 사용되는 이미지들이 자리할 빈 장소들로 나누어져 있다고 인식된다. 즉 장소는 선재 하며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만약 공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만약 자리가 수동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이식의 능동적 산물이라면? 


고향자리(home place)에 대한 성찰로부터 끌어낸 [자리잡기]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신화적인 중심 대신에 우리의 몸과 경험을 부각시킨다. 즉 공간 내에서 우리에게 방위를 설정해주고 자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즉 인간이 위치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결론이 추출된다. 요컨대 중심의 상징을 재현하는 문제보다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하학적 공간에서 구체적인 자리로의 이동은 고향 또한 내가 태어난 자리나 내가 살던 자리보다는, 기억이 머무는(housed) 곳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이 머무르는 곳이 또 다른 우리 집이 되며 내자신이 되는 것이다. ‘우리집은 어디인가’에 대한 답은 추상적으로 주어진 공간을 구체적인 자리로 만들려는 모든 행위들에서 찾아진다. 지각과 기억에 바탕 하는 자리잡기는 하나의 중심에서 수많은 중심으로, 또는 그 흔적으로 변해가는 우리 집에 대한 심상지도(mental map)를 만들어낼 것이다. 2018 세계한민족미술대축제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를 위한 가장 유력한 행위가 바로 예술임을 알려주고 있다. 

  

출전; (사) 한민족미술교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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