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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중 민복기 / 두 작가가 일으킨 파문 (波紋)

이선영

두 작가가 일으킨 파문 (波紋)

  

이선영(미술평론가)

  

온 우주에 편재하는 진동


진동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Oscíllo를 전시부제로 한 전시는 김범중과 민복기의 공통 관심사가 융합된다. 오랫동안 음을 연구해왔던 김범중, 그리고 ‘빛의 메아리’에 대한 이미지를 금속공예로 표현해온 민복기는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입자의 파동과 소리에 대한 상상력을 이상적인 스피커 형태로 구현한다. 신화 속의 풍요의 뿔(cornucopia)처럼, 원하는 음이 원하는 방식으로 무한하게 흘러나오는 기구가 있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기술이 있다면 광고주들이 선점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실제로 지구의 안과 밖은 발신/수신되는 신호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진보된 통신기관이 없던 고대시대부터의 상상과 관련된다. 현대의 물리학은 모든 물질이 고유의 진동수(natural frequency)를 가진다고 보는데, 최초의 음향학자로 평가받는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세계 질서의 중심에 수(數)를 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우주의 음악(musica universalis)이나 ‘천구의 음악(music of the spheres)’ 등으로 불렸던 사상을 통해 우주에 가득한 음악을 표현하기도 했다. 






시각보다 더 원초적 감각인 청각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김범중 +민복기의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그 형태만으로도 공간에 가득 한 소리를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소리는 진동을 통해 전달되지만, 조형예술가인 그들은 시각적 수단을 통해서 온 우주에 편재하는 진동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무(다)지향성(Omni Directional) 스피커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밑이 약간 뾰족한 그릇 형태의 스피커는 편재하는 소리를 거둬들이는 지점 또한 암시한다. 그것은 가상의 무대에서 들려오는 식이 아니라 사방으로 퍼지는 음을 지향한다. 위로 쏘아 올려진 음이 사방으로 퍼져 모든 방향에서 음의 파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음은 강물처럼 흘러가지 않고 샘처럼 솟아날 것이다. ‘혼돈의 과학’을 주장한 미셀 세르가 현대적 시간의 이미지에 대해 상상했듯이 말이다. 이 스피커에서 음의 방출은 한 쪽 방향도 양쪽  방향도 아닌 다방향이다. 


그것을 시각적 이미지와 비교하자면, 전경과 배경의 구별이 없는 에셔의 그림처럼 무(舞)중심, 또는 다(多)중심의 세계를 말한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인지과학을 주제로 한 저서 [괴델 에셔 바흐]에서 전경과 배경의 구별이 없이 짜여 들어가고 짜여나오는 순환구조를 가진 에셔의 그림에서 무한의 개념을 발견한다. 호프스태터는 19세기 말 집합론의 창시자 칸토어에서 빌려온 ‘유한하지만 무한성을 담고 있는’ ‘모든’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무지향, 정확히는 모든 지향을 가진 스피커는 무한에 대한 상상이 있다. [우주와 세계의 무한성에 관하여](1584)를 쓴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우주의 중심이 하나가 아닌 여럿임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배척되어 화형당한 이도 있으니만큼, 다중심 또는 편재하는 중심에 대한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두 작가의 공동작품에서 스피커그릴에 해당되는 구조는 마치 아래에서 출력되는 음에 의해 변형된 듯 오록볼록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것은 무지향 드라이버가 만든 음을 통과시키면서 더욱더 사방으로 퍼뜨리는 디퓨저의 역할을 한다.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아래로부터의 에너지를 통과하는 물질적 기관의 외양을 가진다. 하늘을 향하고 있는 스피커는 작지만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진동을 발산할 것 같은 모습이다. 형태만으로 소리를 상상하는 것은 비약일지 모르지만, 내용이 형식을 파생시킨다면 형식 또한 내용을 규정할 수 있다. 어떤 지시대상도 없는 음의 세계에서 형식주의는 때로 결정적이다. 가령 우리는 성량이 풍부한 성악가로 울림통의 역할을 할 몸통이 큰 성악가를 상상할 수 있다. 형식주의라고 비판받기도 했던, 20세기 전반 초기 추상화가에게 끼친 음악의 영향은 잘 알려져 있다. 한지에 연필로 파동을 형상화하는 김범중과 기본 원소로 이루어진 형태들의 간섭작용을 금속공예 작품으로 표현해온 민복기의 공통 관심사가 수렴된 작품은 우주를 가득 채우는 소리를 발산하는 상상적 기구이다. 


우주를 에너지가 진동하는 장으로 보는 우주 에너지장 (Universal Energy Field) 이론을 연상하게 하는 두 작가의 진동에 대한 관심사는 보편성을 가진다. 과학적 이론은 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심미적으로 향유될 수 있다. 우주적 진동을 음악적 상상력으로 전화시키는 발상은 고대부터 우주로 발사체를 쏘아 올린 현대에도 이어졌다. 1977년 발사된 무인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에 실린 황금(도금) 레코드에는 미지의 우주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실려 있는데, 저장된 정보 중에 우주인이 입력된 신호를 성공적으로 재생할 수 있다면 나오는 정보들에는 태양계에서 지구의 위치를 비롯하여, 가장 완벽한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는 바하의 음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기성이 있는 진동은 음에 관련된 원시적 상상력부터 컴퓨터 알고리즘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내재한다.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들의 작업의 규모는 크지 않다. 퍼펙트의 조건인 컴펙트를 충족시킨다.

  


김범중-편재하는 중심으로부터의 진동


민복기와의 공동작업인 다지향성 스피커가 밥그릇 만한 크기를 가진다면, 김범중이 평면작품들은 들고 연주할만한 아담한 악기같은 규모이다. 위아래로 길쭉한 작품들은 어쿠스틱 기타, 첼로나 바이올린,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모델로 한다. 그의 작품은 수량화에 치중하거나 점차 그것으로의 환원을 지향하는 디지털 문화에 비해 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아나로그 문화에 바탕한다. 디지털 방식은 복제능력과 속도면에서 아나로그 방식에 앞서 있을 뿐이다. 질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차이에의 감각이다. 장지에 연필로 드로잉하여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중첩의 조건이 무한대의 차이를 염두에 둔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악기 특히 현악기가 떠오르는데, 그것은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이 가느다란 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을 긋는 행위로 이루어진 작업과정은 연주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지금은 나일론 등으로 대체되었지만, 원래 바이올린의 현은 양의 창자를 말려서 꼬아 만든 것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수련도 그렇고, 아름다움을 향한 지독한 수행적 행위에는 일말의 잔인함이 깔려있다. 



김범중_Oscillo_장지에 연필_20x100cm_2018


그리드나 수직선 구도를 가지는 작품에서 경계는 심연에 잠겨있다. 심연으로부터 나오고 되돌아가는 운동의 궤적들에 비추는 광선은 균일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입체적이면서도 평면적이다. 특히 장지 위를 주행하는 연필 선들의 흔적들 또한 작품의 중요한 요소이다. 2015년 작품 [Eigen Frequency]에는 보이지 않는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소리의 파장이 선명하다. 여기에서 중심은 보이지 않는 지평선에 산재한다. 작품 [Stereodium]은 두 개의 중심이 있는 것 같지만, 가장자리로 갈수록 다시 줄어드는 단위구조들은 여러 중심 주에서 두 개만을 전경화시킨 것처럼 보이게 한다. 즉 그것은 전체의 일부를 따온 듯한 모습이다. 최근 작품 [Oscillo]에서는 중심으로부터 동심원 구조로 퍼져나가는 듯한 선들이 파장이 있다. 차이의 놀이가 있는 그의 작품에서 놀이의 규칙은 비교적 단순하다. 모노톤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금욕적이다. 작가의 관심인, 만물에 내재하는 파장은 보이기 보다는 들리는 것이기에 시각적 단서는 최소화한다. 잘 듣기 위해서 때로 눈을 감아야 한다. 우리 머리 위에 늘 상 빛나고 있던 별을 보기 위해서는 문명의 빛을 줄여야 하듯이 말이다. 


민복기와의 공동작품인 다지향 스피커는 화려한 스펙터클에 길들여진 시각을 잡아끌 요소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곧 공간 전체의 성격을 급변하게 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지점임을 깨닫게 한다. 생김새는 도토리같고 밥그릇만큼 작은 스피커 몸통은 플라톤이 말한 원초적 그릇으로서의 코라(chōra)를 연상시킨다. 존 맥컴버는 근대의 시각성에 대한 반성을 다루는 논문 [데리다의 시각폐쇄]에서, 플라톤의 코라를 소개한다. 플라톤의 가장 잘 알려진 관념은 이데아론이며, 그것은 재현주의의 근본이 되었지만, 그의 또 다른 관념인 코라는 재현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원초적 에너지의 담지체이다. 존 맥컴버에 의하면 플라톤의 [티마에우스]에서 볼 수도 없고 형식도 없는 어떤 것이면서도 모든 것을 담고서 영원한 본질들을 생성의 유희로 끌어들이는 그 그릇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우리는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사물이 변화하고 존재하게 되고 사라져가는 것을 봄으로서 그 그릇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작된 원초적인 공간인 코라는 모성의 공간을 연상시킨다. 그 원초적 공간에서 비롯된 모든 존재들은 거기에서 지속적인 운율을 느꼈던 것이다. 코라--‘여러 요소가 정체성도 이성도 없이 들어차 있는 자궁, 혹은 유모이다 코라란 최초로 측정 가능한 육체 구성에 대한 예비 단계이고 카오스의 장소이다’(줄리아 크리스테바)--는 명백히 여성적 함의를 가지지만, 코라는 남성/여성을 떠나 모든 예술적 언어의 과정에 내재하는 근원적 맥동이다. 질서는 원초적 혼돈에서 나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비가시적인 것의 체제인 모체(matrix)도 비슷한 의미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보려는 충동]에서 ‘윤곽선에 의해 규정된 대상 아래에는 비가시적인 것의 체제가 놓여져 있다’는 리오타르의 말을 인용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에 의하면, 모체는 무의식에 속해 있는 것으로 외적인 공간의 좌표에 동화될 수 없는 공간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모체의 요소들은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블록을 형성한다. 체계가 아닌 블록은 하나의 위치가 아닌 많은 위치를 말한다. 


가로, 세로, 때로는 고치 모양으로 분절화되어 있는 김범중의 작품은 부분에도 전체를 담고 있다. 여러 곳에서 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에 대한 시각적 상응은 무엇일까. 그것은 근대의 시각중심주의에 도전한 많은 이론가들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 도전자들은 근대의 외눈박이 시점에서 맹목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보려는 것, 우리의 시계의 형태와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존 맥컴버), ‘시각성을 열면서 그것에 한계를 긋는, 그 보이지 않는 것’(데리다)이 더 중요하다. 미세한 선들과 그 흔적이 살아있는 김범중의 작품은 경계를 만들면서도 사라지게 한다. 경계를 무화시키기 보다는 보다 많은 경계들로 분산시킨다. 그러한 실험은 바자렐리 등 옵티컬 아트(민복기가 활용하고 있는 므와레 현상 또한)에서 행해진 바 있지만, 김범중의 버전은 어지러운 착시를 낳는 현란한 패턴이 아니라, 보다 잔잔한 수행성에 바탕한다.   

 


민복기; 우주의 먼지로부터 비롯된 상상력


민복기의 작품에는 작은 알갱이들의 이합집산처럼 보이는 기본입자들로 구성된 소우주가 있다. 구성된 것은 해체되어 재구성되곤 한다. 대우주를 반향하는 소우주는 그 크기에 상관없이 충만하다. 고양이 방울 속에도 우주가 있을 수 있다. 공예작품이다 보니 규모는 적지만, 이번의 협업 전시처럼 파장이라는 키워드는 빈 공간 또한 작품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알갱이 형태의 원소들이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공백이다. 공백이 있어야 다양한 배열의 유희가 가능하다. 그것은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처럼 작용하면서 그것이 속한 공간 전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작가가 염두에 두는 공간은 무엇인가를 담는 상자나 배경이 아니라 그자체가 주인공인 공간이다. 겹쳐진 공간, 휘어진 공간 등 그것의 위상학은 다양하다. 그릇 모양의 스피커 몸통과 그 위에 얹혀 있는 금속망은 굵어졋다가 가늘어졌다가 하는 작은 구들의 배열로, 전체적으로는 동심원처럼 파장이 바깥으로 확장된다. 



민복기_Oscillo_장지에 혼합재료_100x100cm_2018


파장은 서로 중첩되어 간섭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주적 차원의 사건에서 비롯된 영감이 있는 [light echo] 시리즈에는 지그재그, 또는 평행선으로 마주하는 여러 가지 선들의 배열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중간지대가 보인다. 목걸이나 펜던트같은 장식물로 응용된 형태는 입자가 모여 만들어진 막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오려지거나 접혀있다. 작가는 시공을 창조한 신이 최초에 행했을지도 모를 유희를 행한다. 그의 작품에서 만물의 기본요소라고 할만한 입자적 형상은 보존되어 있다. 입자의 배열로 만들어내는 형태는 매우 정교하다. 2011년에는 ‘cocoon’ 전을 통해 조밀하게 빛나는 세계를 표현하기도 했다. 입자들이 모여 피막을 이루고 막은 다양하게 접혀지고 펼쳐진다. 여기에서 사물의 다양한 양상은 근본적인 요소들의 배치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 양상이 매우 다양한 것을 보면, 작가는 세상을 원자적 형태로 환원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기본요소로의 감축은 진정한 다양성을 위한 조건이지, 또 다른 획일성으로 귀결될 임의성이 아니다. 그러나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은 오류나 오차에 열려 있으며, 작가는 그것을 작품의 또 다른 요소로 받아들인다. 예술작품에서 변수는 상수만큼이나 중요하다. 빛 메아리라는 제목을 가지는 작품들의 영감은 허블망원경이 발견한 V838, 지구에서 2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별의 폭발에서 발산되는 빛에서 왔다. 먼지로 이루어진 우주를 산란하는 빛은 파장처럼 번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폭발하는 별에는 방출된 먼지들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빛이 메아리치는 듯한 시각적 형태는 공기를 매개로 한 소리의 울림과 비교될 수 있다. 민복기의 작품이나 그 작품이 영감 받은 우주적 사건에서는 고대 원자론자들도 상상했던 모델이 발견된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열린 덧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 속에서 춤추는 먼지 알갱이에서 원자론을 생각했던 고대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그들 이전에 데모크리토스는 어떤 자연학, 다시 말해 존재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산재한다는 자연학 위에 그들의 철학을 세웠다. 장 살렘이 요약하는 고대 원자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물질적 미립자들이 모든 현실의 씨앗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들은 이제는 사라진, 영원히 분해된 세계들에서 흘러나온 잔해들로부터 형성된다. [고대 원자론]은 원자론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뿐 아니라, 원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허공임을 강조한다. 허공은 원자들이 영원히 운동하는 공간이다. 빛처럼 소리도 파장이다. 음악적 상상력은 입자-파장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조화와 비교할 수 있다. 민복기는 밤하늘의 별빛에서 느껴지는 조화에서 비롯된 경외감에 공명의 상상력을 더했다. 질 들뢰즈는 이러한 조화의 세계를 바로크의 음악과 라이프니츠의 단자론(Monadology)에서 발견한다.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음악은 초감성적인 질서와 척도에 대한 지적인 사랑이면서 그와 동시에 물체적인 진동들로부터 나오는 감성적인 쾌락이라고 말한다. 민복기의 작품에는 서로 다른 굵기와 방향을 가지는 띠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섭작용의 이미지가 있다. 작가는 간섭에 의해 파생된 제3의 파장에 관심을 가진다. 시각적으로는 모아레(Moire)같은 파장들의 간섭현상이 자아내는 공명과 여운이다. 소리 또는 빛의 간섭현상을 입자와 파동으로 표현하기 위해 정교한 세공기술이 요구된다. 여러 계열의 간섭이 있기 위해서는 각각의 계열이 가지는 차이점이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호만큼이나 신호의 간섭현상에 관심을 가지는 작가는 정보(코드) 만큼이나 노이즈(오차)를 주목한다. 그것은 시스템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만, 과학기술에서는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러한 배제는 두리뭉실한 문화를 낳았다. 차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예술가들의 실험영역으로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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