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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원에서 n차원으로

이선영

2차원에서 n차원으로

  

플랫랜드(Flatland) 전 (6.1-9. 2, 금호미술관)

김범중 전 (6.16-6.30, 갤러리 조선)

  

분업화된 사회에서의 질적인 승부수

21세기에는 융복합이 회자 되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비슷해지는 하향 평준화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조금씩 구색이 맞춰진 것들은 진정한 차이를 엇비슷한 것으로 얼버무려지곤 한다. 근대가 개막된 이후, 잡다함이 장식화된 키치적 방식은 대중문화에서건 고급문화에서건 수면 아래에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잡다함은 변화된 현실에 대한 융통성 있는 대처와는 거리가 있으며, 문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항목을 계속 추가하는데 불과하다. 소비사회는 그 항목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시스템을 갖춘 동일성은 차이를 급속하게 식민화한다. 그 결과는 비슷한 것들 간의 무한경쟁이다. 오늘날 예술이 그러한 지배적 추세에 대해 예외가 되고 있을까. 현실초월이나 극복, 대안까지는 아니어도, 또 다른 영역으로서 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다름을 인정받기, 그것은 단순한 진실 같아도 매우 힘든 게임이다. 근대 이후의 모든 예술가적 삶에는 이 고단한 투쟁이 배어있다. 아무리 현대의 예술가가 고립되었다 할지라도 그들 또한 사회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다 보니 이러한 사회적 인정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예술 자체가 제도화되면서 사회와의 상호작용은 필수적 요소가 되다시피 했다. ‘타고난’ 작가라 할지라도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독특함으로 예술을 보는 관점이야말로 예술을 높이 평가해주는 척하면서 예술가적 삶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다. 예술이 사회의 지배적 원칙에 거슬러, 또는 그에 부응하여 자신의 존재 방식을 관철시키려 할 때, 미술작품의 형식은 중요한 요소가 된다. 수학자에게 있어서의 수, 언어학자에 있어서의 문법, 가수에게 있어서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예술적 형식은 단지 기존의 어떤 내용을 담기보다는 보다 많은 내용을 파생시킬 수 있는 잠재적 영역으로 다가온다. 예술은 현실성보다는 잠재성으로 더 평가받는다. 금호미술관 전관에서 열리는 플랫랜드 전과 갤러리 조선에서 열린 김범중 전에서 감지되는 미술, 특히 회화의 기본조건으로서의 평면성에 대한 집요한 탐색과 탐구는 미술사의 한 단락으로서의 추상미술의 현재적 모습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의 조건에 대한 조용한 반항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어떤 선언문도 선언적 태도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추상미술이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여기저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이미 20세기 초이고, 평면성이라는 회화의 조건에 대해 그린버그 같은 출중한 비평가에 의해 명료하게 개념화된 것도 20세기 중반의 일이니, 이 작품들에 ‘새로움’과 ‘진보’라는 근대적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각계의 분업화와 무관치 않은 근대적 국면과 연결되는 지점 한가지는, 두 전시의 작가들이 미술의 질적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평면성의 국면들이 매우 다양하다. 그것들에는 추상미술로 정점을 찍은 미술사의 형식주의적 논리 또한 포함되지만, 그러한 형식주의는 여러 항목 중의 하나로 상대화된다. 그들의 작품은 단지 회화의 조건으로서의 평면이라는 관념을 넘어서, 작가의 의지, 감수성, 생각, 행동 등이 효과적으로 펼쳐지는 장(場)이 된다. 작가란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누구에게도 필요한 어떤 장을 자기 주도적으로 확보하는 이들을 말한다. 많은 것들이 수렴된 이 강도 높은 평면에서 또한 많은 의미들이 발산된다. 2차원 평면에 압축적으로 담긴 것들은 n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Flatland, 언어이자 현실인 추상

7명의 작가가 참여한 ‘플랫랜드’ 전에서 평면은 회화의 기본 조건 뿐 아니라, 기하학적 스펙터클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적 현실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바우하우스의 실험이 그러했듯이,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수렴이다. 회화의 자기 확인으로서의 평면성은 현실로 확장된다. 근대건축가들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가졌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이상에 의하면, 제어될 수 없는 자연적인 것들은 투명한 이성에 의해 전면적으로 재배치 또는 구조화 될 것이었다. 그라운드 제로부터 시작하려는 그들의 의지는 후에 독단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적어도 그것이 역사적으로 개시되었을 무렵에는 긍정적인 부분만 부각됐다. 회화적인 것 이외의 모든 것을 배제하려 한 모더니즘 또한 유토피아적으로 해석된다. 미술사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보려는 충동]에서, 추상적인 형식이 ‘순수한 해방이자 순수한 투명성’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김용익, 유토피아 Utopia, 2018, 캔버스 및 벽면에 연필, 비닐 시트, 가변크기(사진 출전; 금호미술관)


그녀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결론지은 ‘자기 영역 내에서 확고하게 기반을 다질 수 있는 특유의 방법들을 사용하는 경향에 내재된 경향’, 즉 ‘각 분과들이 그것들 각각에 고유한 감각적 경험 영역으로의 철수에는 어떤 긍정적인 것 내지는 유토피아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주의적인 모더니즘은 각각 분리된 그리하여 자기충족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서 새롭게 이해된, 이러한 감각 층들은 구조나 피난의 경험, 즉 노동이나 과학의 세계가 지닌 도구성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은 고상한 영역과 유희를 허용하고, 따라서 자유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잘린드 크라우스)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용익의 작품 [유토피아]는 사각 캔버스를 넘어서는 ‘땡땡이’ 형태의 단위구조를 통해서 그러한 유토피아를 종횡무진 확장하려 한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화면에 국한시켰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직조의 방식을 통해 캔버스의 평면적 조건을 조밀하게 탐구해온 차승언의 작품에서 팽팽해야 할 평면은 축축 처진다. 또한 차승언은 짜여진 것과 기성품, 그려진 것을 병치함으로서 유사함 사이의 이질적 계기들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수많은 동그라미 자국이 엇겨져 만들어진 층을 감싸고 있는 색 면이 있는 박미나의 작품은 평면적으로 보이는 화면 내부에 깔린 수많은 균열들을 드러낸다. 미술관 입구에 연출된 색면은 추상이 환경과 어우러졌을 때의 힘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의 호흡이 만들어낸 형상들이 있는 최선의 작품에서 캔버스는 물감(잉크)이 흘러가는 매끄러운 평면임이 강조된다. 



 차승언, 천막-7 Tent-7, 2013, 면사, 염료, 아크릴 물감, 비닐, 각 194x97cm(2점)



 조재영, 앨리스의 방 Alice_s Room, 2017, 나무, 판지, 시트지, 페인트, 가변크기

그것은 시각성을 물화시키는 추상미술이 억압했던 육체적 체험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김규호의 작품은 매 순간 다르게 펼쳐지는 시야를 제공하는 움직이는 추상이다. 전시장 양 벽에 투사되는 거대한 영상작품인 [잔광]은 일순간에 충만한 시각을 쟁취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현재성(presentness)을 지속의 과정으로 와해시킨다. 김진희의 작품 [그릇]은 전자제품 부속을 엮어서 그물망을 만든다. 가상현실로 대변되는 코드의 조합은 새로운 현실로 간주 될 만큼 견고해 보이지만, 코드의 그물망으로 실재를 포획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쪼개진 밥그릇 형태의 그물망은 강조한다. 벽면을 따라 배치된 가구처럼 보이는 조재영의 작품은 맞춤 가구처럼 공간과 잘 들어맞지만, 무엇인가를 담는 기능이 없다. 그것은 기능(깊이)과 무관한, 단지 선과 면이 만들어내는 균열을 따라 끝없이 떠나는 표면여행을 권한다. 

  

phase haze, 청각성과 촉각성

장지에 연필로 선을 그어 만든 김범중의 ‘phase haze’ 전은 평면뿐 아니라 그 잔여물도 함께 보여준다. 다양한 강도로 긋는 연필이 종이 표면을 긁어 생겨나는 보푸라기 같은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표면 공간을 긁는 무수한 시간들은 또다른 깊이를 창출한다. 그것은 하나의 시각(vision)이 아니라 다양하게 작동되는 시각성(visuality)이다. 일정하게 나뉘어진 모나드 같은 구조를 채우는 수많은 주름들을 작품마다 다르게 펼쳐지거나 접혀진다. 그는 이같은 다양한 시각성을 연필과 종이 단 두 가지 도구로만 관철시켰다. 무한정한 분열을 막기 위해 크기를 한정했지만, 보다 큰 세계의 일부같은 느낌은 여전하다. 핼 포스터는 [시각과 시각성]에서 시각에 대한 근대적 모델에서 벗어나 시각성들이 다양하게 작동하는 것을 ‘단순히 동일자(the same)로 전유되거나 혹은 타자로서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갤러리 조선 설치전경


모더니즘적 도그마를 벗어나 ‘시각에서의 차이가 여전히 남아서 활동할 수 있도록’(핼 포스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근법이 하나의 상징형식’(파노프스키)이라면, 평면성으로의 환원이라는 귀결을 낳은 형식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그것이 주류 이론으로 공인을 받았을 경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화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회화의 평면성’ 같은 관념적 논제가 미술사의 한 시기를 규정하는 전문 지식 외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김범중은 관념보다는 감각으로 접근한다. 추상미술에서 가장 주도적인 감각은 눈이다. 

추상미술의 한계는 대부분 이러한 시각 편향성으로부터 야기된다. 김범중의 작품은 어떤 형태도 재현하지 않는 추상이지만, 시각 편향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다. 


만약 사진으로만 그의 작품을 본다면 포커스가 안맞은 것처럼 흐릿할 것이다. 그러나 육안으로 보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섬세한 촉들의 아우성이 소름 끼친다. ‘phase haze’라는 전시부제는 사진적 복제로는 잘 재현되지 않는 독특한 질감을 강조한다. 본질보다는 잔여물이 전면에 놓인다. 그렸다기 보다는 표면을 긁은 결과물에는 청각-촉각의 복합적 감각이 깔려있다. 장지 위에 연필로 선을 그어 형상을 만들어내는 김범중의 방식은 필사가의 노동을 떠올린다. 중세시대 말 인쇄기가 발명되기 이전에 텍스트는 필사가의 도움으로 재생되었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인쇄기술이 문자와 시각 편향성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phase haze, 장지에 연필, 120x320cm, 2018



phase haze, 장지에 연필, 120x320cm, 2018(부분)


그 이전 시대에는 독서조차도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고, 종이 위에 직접 쓰는 필사는 소리와 촉감이라는 감각을 깔고 있다. 맥루한의 이론적 구도에서 시각성과 대구를 이루는 것은 청각성이다. 그것은 보다 큰 범주인 문자(literal)문화와 구술(oral)문화의 감각을 대표한다. ‘악기만한 크기’의 작품에 담겨진 시각적 메아리는 한눈에 전모를 파악 또는 재단하는 시각적 지향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감각을 촉각적으로 집약한다. 이러한 시각 이전의 공(共)감각적 감수성은 시각의 시대를 넘어서 전자의 시대가 되면서 다시 떠올랐다.


출전; 아트인 컬처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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