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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남 / 낙원을 찾아서

이선영

낙원을 찾아서

  

이선영(미술평론가)

  

햇빛에 잘 달궈져서 따스해진 장독대는 고양이들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곤 한다. ‘옹기종기’라는 말이 있듯이 크기도 형태도 다른 장독들 사이사이로 꽃이 피어있고, 그 위로 나비까지 노닐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한여남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독대의 통통한 고양이들은 보살핌을 잘 받고 있음에 틀림없다. 작가가 장독대를 비롯한 옛 물건들이 나오는 광경에서 유토피아를 보는 것은 개체에 적대적이지 않은 상징적 우주의 표현이다. 한지에 석채, 분채 등이 적용된 전통 채색화이니 유토피아라는 말보다는 작가의 표현대로 ‘청산’ 또는 ‘무릉도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몇십 년 전 만 해도 평범한 일상의 한 풍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 된 장독대는 이제는 없는, 또는 원래 없었을지도 모르는 이상향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서 길어 올린 기억의 풍경에서 작가는 늘 따스한 햇빛이 들던 아늑한 공간을 본다. 그것은 또한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등의 주된 작업장이자 보물창고인 여성적 공간이었다. 




이전의 [내 마음의 뜨락], [뜰], [엄마의 뜰]같은 작품에서도 장독대는 유토피아적 장소로서의 여성 공간으로 계속 등장했다. 작가는 ‘나는 삶이 힘들수록 행복한 곳으로 가는 꿈을 꾼다. 또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던가를 되짚어 내 마음속의 무릉도원을 찾기도 한다’고 말한다. 원초적 낙원이 있었다가 그로부터 이탈된다는 서사는 인류의 신화와 종교에 거듭해서 등장하는 보편적인 소재이며, 계통발생이 개체발생으로 반복되듯이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상상이다. 원초적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모성적 공간이다. 아이는 받기만 하는 존재로, 어떤 의무도 없는 이 시공간은 낙원의 원형이 될만하다. 아이의 어머니가 되곤 하는 여성은 누구나 이 원초적 공간에 대해, 누군가의 이상이 누군가의 현실임을 알고 있다. 종교가 사회의 주된 무대에서 벗어나고 개인의 영역이 되었을 때 종교의 역할을 대신한 것은 예술이었다. 예술은 낙원과 실낙원, 복락원에 대한 비전으로 가득하다. 한여남의 작품에서 복락원과 관련된 도상은 신발이다. 즉 신을 신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작품 속 신은 예쁘기 그지없으나 여정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작가는 ‘나는 어린 시절 힘든 일이 있을 때 항상 신발을 잃어 버리는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작품에는 짝을 맞춘 한 켤레가 언제나 오롯이 자리하곤 한다. 그것은 현실이라기 보다는 희망사항이다. 그 예쁜 신발로 인생이라는 험로를 몇 걸음이나 가겠는가. 그리고 작가의 회고에 의하면 어릴 때 비단 꽃신을 신고 산 것도 아니었다. 비단 꽃신 대신에 고무신을 신고 자랐지만, 지금은 꽃신도 고무신도 모두 다 사라졌다. 그러나 꽃신에 투사되었던 욕망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전 작품 [꿀단지]를 보면 작은 단지에서 보물처럼 보이는 소품들이 나오는 광경이 있는데, 그림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모아 놓는 희망 사항의 목록인 것이다. 그림이라는 방편을 가진 이는 그림을 매개로 원초적 낙원을 복구할 수 있다. 대다수의 대중들은 이런 저런 소비를 통해 가상적 만족을 꾀한다. 예술은 종교적 의례처럼 나라는 존재가 비롯되었던 원초적 시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갱생에의 희망을 상징적으로 실현한다. 




한여남의 최근 작품에서 둥근 구도의 그림이 등장하는 것은 원하는 것들이 두루 충족되었던 오롯한 상징적 우주의 추상화이다. 붉은색, 푸른색으로 채워진 원형의 화면에는 꽃 버선이 한 켤레씩 놓여있다. 장독대라는 소우주를 오롯이 누리는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동물과 곤충이 등장하듯, 자족적 소우주로서의 원에 자리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추상적 바탕과 걸맞는 납작한 대상이다. 버선은 신으면 입체적으로 되지만 본래 모습은 평면적이다. 작가는 버선 위에 수놓은 꽃무늬가 최대한 잘 드러나는 측면을 재현했다. 바탕 면의 무늬와 시각적인 연결망을 가진다. 붉은 바탕의 화면에 있는 버선은 푸른 리본을 매고 있어서 푸른 바탕의 버섯의 붉은 리본과 연결된다. 청/홍에 대한 동양의 상징색을 반영하듯, 푸른/붉은 화면은 마주 보고 있는 한 쌍을 이룬다. 둘은 상보적인 관계여서 함께 있어야 조화를 이루며, 그것은 낙원의 전제조건인 충만함에 대한 이미지이다. 또 하나의 원형 화면에는 버선이 아닌 신발이 등장하여 실내가 아닌 바깥을 암시한다. 


화면 위에서 한 자락 내려오는 꽃들은 그 아래에 놓인 한 켤레의 신이 꽃길만 걷고 싶다는 소망이 반영된다. 신발은 어딘가를 가는 모습, 멈춘 모습 등으로 나타나 있다. 작가가 좋아하는 옛것에는 장독이나 버선, 꽃신 같은 대상뿐 아니라 기법 또한 포함된다. 그리고 그러한 소재와 기법에는 당대의 세계관이 있는데, 그것은 복을 바라는 마음이다. 한여남의 작품은 민화에 깔려있는 기복신앙에 개인적인 기억과 희망이 덧입혀진 형국이다. 네 폭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신발의 상태로 나타나는 인생의 단계들이 있다. 박넝쿨이 내려오고 그 아래 여러 나이대의 신발의 주인공을 유추할 수 있는 구도이다. 바가지 안의 아이 버선부터 시작하여 맨 왼쪽으로 갈수록 할머니 신발로 변한다. 큰 박 뒤에 숨겨진 하얀 고무신은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진 세대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듬해 박꽃이 다시 피고 박이 풍성하게 열리듯이 또 다른 세대가 시작된다. 식물적 우주는 인류에게 윤회나 부활에 대한 관념을 낳게 했다. 직선이 아닌 순환적 시간관에서 천국은 한번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재생된다. 한여남의 작품은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평생을 하는 예술에 걸맞는 세계관과 친숙하다.  

 

출전; 구리아트홀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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