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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덕 / 흐르는 시간의 응시

이선영

흐르는 시간의 응시

 

이선영(미술평론가)

  

배순덕의 작품에 선명한 것은 시간의 이미지이다. 길, 강물, 배, 가로수, 걷는 사람 등은 시간의 축을 따라 이동하는 경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지속성이 단절되는 이미지 또한 있다. 그것은 시간의 축을 따라 전개되는 공간 속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을 비닐봉지로 포장을 하여 봉인한 것으로 나타난다. 지속과 순간으로 이루어진 시간성 속에서 어떤 시간이 봉인되는가. ‘시간아 멈추어다오’라고 말하게 되는 때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것처럼, 그때가 봉인되는가. 월터 페이터가 [르네상스]에서 아름답게 묘사했듯이, 정지된 매체인 회화는 그러한 순간들에 민감하다.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색을 펼쳤던 가스통 바슐라르는 지속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순간을 꿈꾸기도 했다. 보통 화가들은 삶의 지속 속에서 그러한 보석같은 순간을 건져내는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미뿐 아니라 추 또한 주요한 예술적 주제가 되었으니만큼, 미/추를 떠나 강렬하거나 밀도 높은 순간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휴식중]


특히 배순덕에게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순간은 사랑하는 이가 치매에 걸린, 개인에게는 크게 다가왔던 불행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상황을 ‘시간이 거꾸로 뒤엉키고 계절이 순서를 잃기 시작했다. 견고하던 일상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내렸다.’고 묘사한다. 치매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수행하던 일상이 방해받을 정도로 시간을 망각하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간은 어느 시점에서 봉인되는 것이다. 작품 [화엽씨의 화이트 데이]에서 포장된 비닐봉지 안에 가로수들이 들어있는 작품처럼 말이다, 그 밖에 작가는 작품 [탑], [오래된 역사] 등을 통해 돌탑이나 12지상 같은 대상을 비닐봉지 안에 봉인했다. 물론 돌탑이나 12지상 또한 여전히 어떤 시간성 속에 있겠지만, 문화재급 대상들은 이미 역사적 대상으로서 봉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시간의 부식으로부터 보호받기도 한다. 


그러나 봉인된 것들도 누군가에게 다시 읽기의 대상이 되어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상징은 여러 중심을 가지는 알레고리로 변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배순덕의 작품에서 봉인은 자연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산 또는 강이 나오는 풍경에 배치된 종이배는 시점을 어떤가에 따라서 산속에 또는 강물 속에 배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섬-몽촌토성1, 2]를 통해 산책길을 함께 나선 풍경과 그 풍경 아래에 한 쌍의 새를 묻어놓은 듯한 작품 또한 그러하다. 저 멀리 함께 가고 있는 두 사람의 꿈은 함께 봉인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닐봉지 포장에 담긴 대상들은 확실한 봉인의 표시이다. 작품 [가로수]처럼 가로수가 봉인된 경우에는 가로수와 관련된 어떤 기억이 봉인되는 것이다. 특히 작가는 연필과 먹, 목탄 등을 사용하여 모노 톤의 작품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작품 속 대상들을 마치 흑백 사진처럼 기억과 관련된 이미지로 변화시킨다. 현실의 어떤 차원은 휘발되어 버리고, 어떤 차원은 보다 묵직하게 남아있다. 



[섬-몽촌토성2]


배순덕의 작품에서 봉인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는 가야 할 것이 가지 못하는 상황의 연출이다. 작품 [휴식 중]에서는 종이배들이 한 줄로 죽 걸려 있다. 그 중 유일하게 검정색인 배에는 또 다른 배가 걸려 있어, 이중의 멈춤을 보여준다. 배순덕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인 배는 자연뿐 아니라 도시라는 맥락에 배치되기도 한다. 작품 [The City1]에서 종이배는 유리컵 안에 멈춰서 있다. 작품 [The city2]에서는 화면 가득히 도시 풍경이 있는 종이로 접은 배가 보인다. 종이배 자체가 견고하지 못한 일회성 대상이다. 도시적 삶 또한 원하든 원치 않든 떠도는 삶을 요구한다. 누구와도 호환될 수 있는 익명적 노동 속에서 일시적인 관계를 맺을 뿐인 도시적 삶은 전통사회처럼 지속적인 관계망을 가지지 않는다. 현대인은 이러한 관계에 익숙해져서 지속적 관계망을 구속으로 여기기도 한다. 현대라는 매트릭스에서는 인간은 하나의 요소로 계속 순환된다. 그러한 해고나 은퇴 등을 통해 순환에서 배제될 때 그는 자유로워지지만, 그것은 또 다른 유폐의 시작이다. 흐름의 멈춤은 재난으로 다가온다. 


예술은 이러한 유폐적 시공간 속에서도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고통조차도 삶의 밑거름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인 것이다. 배나 강물같은 도상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전형적인 상징이라면,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은 보다 직접적이다. 작가는 [응시하다] 시리즈를 통해 깊이 주름진 얼굴들을 화면 가득히 보여준다. 인물의 주름을 그린 것이 아니라 마치 주름을 그리기 위해 인물을 동원한 것처럼, 살아있는 표면인 피부를 가로지르는 선들은 강력하다. 작가는 작품 속 인물의 나이에 상관없이 화면 자체에 많은 주름을 준다. 동물이 응시하는 경우에는 육식동물의 보는 눈과 초식동물의 보여지는 눈이 대조된다. 시간의 흔적을 새기고 있는 주름진 얼굴들이 응시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라고 생각된다.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이상한 동화작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고정될 수 없기에 시선 또한 고정되지 않는다. 초점이 안 맞는 눈은 물론, 눈동자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는 초상도 보인다. 보고/보이는 상호성 속에서의 존재가 아니라 보이기만 하는 존재가 될 때 봉인의 종말적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출전; 구리아트홀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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