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서성강 / 현실의 반영과 변형

이선영

현실의 반영과 변형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성강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단색의 추상화처럼 평평한 색감이 두드러진다. 작품에 따라 다르지만 색들이 많지는 않아서 더욱 그런 것 같다. 원근감을 완화시키고 대상을 화면에 바짝 근접시킨 결과로 강조된 평평함은 관객의 이목을 색감에 집중하게 한다. 언뜻 크고 작은 붓터치처럼 보이는 색 표면의 질감을 이루는 요소들이 구체적인 자연 이미지라는 것은 가까이 가서야 확인된다. 달맞이 꽃, 벚꽃나무, 사과묘목, 기생초. 고들빼기 꽃, 튤립, 갈대, 억새, 자작나무숲, 유채 꽃, 금잔화, 쇠뜨기 풀, 능수버들, 수양버들, 함초, 개망초, 망채, 씀바귀 꽃, 그냥 풀 등…. 식물도감을 연상시킬 정도로 그 종류가 많다. 전시장에 걸린 40여점의 작품이 거의 다른 식물 종인 것처럼 다양하다. 살아있는 것도 있고 죽은 것도 있다. 작가는 지시대상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는 사진의 특성을 살린다. 그것은 사진이 본래 세상의 많은 이미지들을 수집해서 비교하게 했던 유력한 매체였음을 알려준다. 










사진적인 배열을 통해 자연과 문명은 그 구조와 패턴을 드러냈던 것이다. 추상은 기본 어법이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추상은 그저 관념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이기도 했다. 철과 콘트리트, 그리고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국제 양식’의 빌딩 숲은 추상의 현실성과 보편성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서성강의 작품은 사진적 재현의 특징인 세부가 살아있어서 그 위에 색이 첨삭되었어도 그 형태는 남는다. 특히 식물의 형태를 이루는 선들이 살아있다. 그의 작품에서 식물은 뿌리를 지하에, 잎을 지상에 두고 그 사이를 줄기가 이어주는 기본 형태를 가지며, 화려한 꽃봉오리도 추가되곤 한다. 해안, 또는 숲 같은 배경도 조금씩 섞여 있다. 그림으로 하면 한참을 베껴야 하는 과정을 한 번에 포획하며, 육안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부분까지 세세히 담아낼 수 있는 사진의 장점을 살려 형태감을 보존한다. 자연이야말로 기이한 형태들의 보고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형태들은 진화론이 알려주는 바처럼 우연이 아닌 필연의 산물이라는 점은 더욱 경이롭다. 서성강의 화려한 작품들은 생물학자가 현미경 아래의 시야 속에 어떤 부분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염색 등의 과정을 거쳐서 강약을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가 행해진 현미경 아래의 식물 단편들은 대성당의 창문 못지않은 화려함으로 드러나곤 한다. 식물의 뼈대인 형태는 피부나 살에 비해 색의 첨삭에 의해 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형태를 포함한 모든 것들의 분위기는 색감에 의해 급격하게 변화한다. 서성강의 작품에서 단풍드는 식물도 포함되어 있듯이, 자연도 계절이 지나면, 그러한 색감의 변화를 대대적으로 진행하곤 한다. 조형이라는 인위적 과정은 자연의 시간을 압축해서 실행하며, 자연에는 없는 요소까지 추가하여 유희를 즐긴다. 같은 소재를 찍은 것도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작가는 반영과 변형을 거듭하여 다양한 변주를 꾀한다. 










디테일이 주는 밀도감에 색이 첨가되면서 강렬해진다. 그의 작품에서 형태는 사진으로부터, 색은 후 보정으로 변화를 주었다. 사진작품이므로 자연 색이 부분적으로 살려진 것도 많다. 빛으로 그리는 작품인 사진에서 빛의 삼원색은 잘 선택되는 색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빼고 얼마간의 조율을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감이 파생되며, 색의 거친 정도는 노이즈를 가감한다. 붓 하나 안 댔지만 하나의 주제로 무한한 변주를 행한 추상화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극사실주의 회화가 사진과 비교된다면, 사진으로도 추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정통적인 의미의 화가로 하여금 왜 붓을 들고 작업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하게 할 것이다. 물론 스펙터클의 홍수에서 사진가의 정체성도 위협받는다. 서성강의 작품은 사진과 미술의 오래된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미지의 역사에서 사진은 회화보다 나중에, 그것도 회화의 보조수단으로 처음 등장했지만, 스펙터클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현대에, 사진이 시각 전통의 중심에 서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초상화 제작을 도와주었던 원시적 형태에서 기술적 진화를 거듭한 카메라는 디지털 방식으로 도약했다. 오늘날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기억의 보조수단으로 사진을 활용한다. 사진은 그저 수단이었지만, 그 흔적을 부지불식간에 화면에 남긴다. 화가가 사진을 활용하고 안하고를 넘어서, 사진적 환경에서 태어나는 현대인에게 순수한 육안이란 희귀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시각이 가능하다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작가로 높이 평가받을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사진이라는 코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성강의 작품은 후자의 선택을 반영한다. 그는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1982년 처음 사진에 입문한 이래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문으로 찍었던 작가였다. 그는 ‘고뇌의 바다1’(1994, 천안문화원)와 ‘고뇌의 바다2’(2009, 갤러리 북스, 충남학생교육문화회관)로 전시와 출판을 하기도 했다. 이전 작품에서 그는 거리의 소외된 사람들을 주로 찍었다. 그는 그때의 작품에서 최민식 선생의 영향을 지적한다. 지금의 작품과 너무 달라서 같은 작가의 작품인가 싶지만, 1987년부터 1992년 사이에 찍은 사진들을 모은 [고뇌의 바다—아픔을 ‘견디는’ 향기로운 사람들--](2009년 1쇄)를 살펴보니 묘목들 뒤에 할머니 있는 장면이 있는 작품 [1987년 삽교]가 지금의 작품과 연결고리를 가지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할머니는 그의 사진집에 많이 등장하는 거지, 부랑자, 노숙자, 할아버지 등 길 위의 사람들 중의 하나로, 이 작품에서만 화면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그의 흑백사진들이 시대의 리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면, 이제 리얼리티는 자연이나 조형의 실험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요인의 하나로, 그는 80년대의 그 엄혹한 시절에도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이 흔해진 요즘에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역설적 상황을 토로한다. 이제는 거의 모든 것에 소유권이 붙어있는 탓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인간 사회 보다는 중립적인 소재인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이를 바탕으로 조형적 실험을 행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번 전시의 작품 준비는 2년 정도 된다. 이번 개인전에서 “add noise”라는 전시 부제는 노이즈를 가감한, 컬러스크램블 기법으로 여러 변수들이 있기에 똑같이 반복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작품은 한 컷을 찍는 것이 아니라, 파노라마로 찍는다. 여러 컷을 찍어서 컴퓨터상에서 이어 붙인다. 그리고 전시되는 작품은 여러 부분으로 다시 나뉘어 근접 배열한다. 가령 기생초를 찍은 한 작품은 6컷이 한 장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전시장 벽에는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건다. 









나누기와 붙이기의 선택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프린터가 허락하는 한의 크기로 확대된 작품들은 회화적 느낌이 더욱 강하다. 그의 작품은 ‘파인 아트’ 중에서도 추상화, 특히 단색화 같은 외양을 가진 작품을 의식한다. 전시 부제에 속한 또 다른 컨셉인 ‘add noise’는 디지털 프로세스를 거치는 작품의 기법에 속한다. ‘노이즈’는 빛이 데이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요소이며, 노이즈 저감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노이즈를 인위적으로 줄이면 해상도가 떨어지고, 반대로 해상도를 높이면 노이즈는 증가하기 때문에 색감인가 선명도 인가를 선택하거나 절충해야 한다. 색감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과정은 ‘컬러 스크램블 기법’이다. 이러한 디지털 과정을 일반인도 이해하기 쉬운 아날로그 과정으로 비교해 보자. 가령 청바지에 빈티지 풍의 멋을 내기 위해 이런저런 처리를 하다 보면 색상이 변할 것이다. 


멀쩡한 청바지에서 원래 염색된 색을 빼고, 긁고, 찢고, 무엇인가를 묻히고 하는 방식은 한날한시에 만들어진 대량생산품에 또 다른 시간성을 부여하여 독특함 내지 유일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해당한다. 추상이란 무엇으로부터의 추상을 말한다. 그 무엇은 바로 현실이다. 그래서 초창기 추상 화가들은 그토록 현실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추상은 그냥 무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성강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요즘 미술시장에서 각광 받고 있는 단색화도 상당 부분 벽지 무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피상적인 작품이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추상이든 구상이든 실재감은 중요하다. 실재감으로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할 의미와 충격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실재는 또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매개를 거쳐야 한다. 형식은 실재에 이르는 사다리임과 동시에, 그 비중이 커질 때는 그 자체가 실재에 가까워진다. 








그 극단에는 형식이 실재를 대체하는 형식주의가 남는다. 서성강은 사진이라는 형식 외에 색과 노이즈라는 또 다른 형식을 도입한다. 작가는 벤야민이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염려한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복귀하기 위해 ‘노이즈’를 적극 활용했다. 그래서 회화 못지않은 독특한 물성을 구현했다. 이러한 물성에 의해 본래의 참조대상은 불확실해지지만, 심미적 효과는 증대된다. 서성강의 작품에서 노이즈는 컬러 스크램블 기법과 더불어 색감과 텍스춰를 결정하는 요소 중의 하나로, 단색화에 영감을 받아 회화 같은 사진작품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디지털 방식에서 노이즈는 정보와 반대된다. 오랫동안 아날로그에 바탕 한 예술에서 형식은 내용과 길항 작용을 해왔다. 형식과 내용이 상호상승작용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내용을 강조하거나 형식을 강조하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문예사조사에서 리얼리즘과 형식주의의 대결이 대표적이다. 형식주의 진영은 작품의 내용이 형식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내용을 괄호 치려고 했다. 내용을 묶어두면 형식의 유희는 극대화될 수 있지만, 말 그대로 내용이 휘발된다. 그래서 형식주의자들은 형식 자체가 바로 내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내용을 중시하는 미학은 자신이 출발하는 내용, 대개 현실에 존재하는 참조대상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현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 훌륭한 작품의 요건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소재주의에 머물기 쉽다. 소재가 훌륭하면 작품도 훌륭하다는 발상은 단순하다. 여인이나 꽃을 그린다면, 중요한 역사적 장면이나 종교적 내용을 담는다면 그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내용주의 미학은 미(美)보다는 선(善)이나 진(眞)에 더 치중한다. 그래서 형식을 소홀히 하는 내용주의 미학은 보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가령 러시아 혁명기에 리얼리즘과 아방가르드의 대결은 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승리로 끝났는데, 그 사조는 결국 당대의 지배적 정권의 선전미술로 전락했다. 형식의 유희, 또는 실험을 위해 지시대상을 괄호 치는 형식주의는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형식이 아무리 진보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부르주아 계급의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반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록 부르주아들이 형식을 감별할 만큼의 심미안이 없다할지라도 말이다. 대중, 특히 리얼리즘을 주장하는 이들이 중시하는 민중들에게 형식주의는 난해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할지라도 형식주의가 믿고 있는 바의 현실의 변형은 요원하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내용/형식과 관련된 이러한 고전적인 대립은 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등장으로 교란된다. 사진적 원리를 내장하고 있는 시각적 장치가 아닌, 본격적인 사진이라고 할 만한 형식 또한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 사회가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인공적 시스템 속에서 살게 되고, 그것이 새로운 현실이 된 때가 근대이다. 근대의 시스템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들은 자연과학부터 기술에 이르기까지 뼛속까지 추상적이다. 서성강의 주요 매체인 사진이나 컴퓨터가 보여주는 시각은 거의 자연과학적인 세밀함을 가진다. 색과 노이즈라는 형식적 요소가 교란하고 있지만, 식물학자라면 거기에서 종을 분간해낼 만큼 형태는 보존되어 있다. 작품 제목은 생략되어 있지만, 만약에 구체적인 제목을 붙인다면 찍혀있는 대상과 관련된 명제가 기억과 소통에 유리할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육안에 의존한 화가가 쟁취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육안으로 자세히 볼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모아 상호 비교하는 것은 사진적 시각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냥 정보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에 충실했던 사진가였던 서성강에게 예술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닌 노이즈였다. 하기야 80년대에 ‘불편한’ 현실을 찍으려 다녔던 작가를 검열했던 이들에게 그의 작품은 ‘발전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왜곡’하는 ‘노이즈’였을지도 모른다. 기술에서 나왔지만 예술에서도 중요한 노이즈는 투명한 소통을 교란시키는 요소이다. 그러나 우회적인 방식으로 대안의 소통을 꾀한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산문이 아니라 시에 가깝다. 물론 노이즈가 너무 과하면 무의미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것은 건조한 정보들의 나열만큼 이나 코드화 된다. 예술은 원래 어려워, 예술가들은 원래 그래….하는 상투화된 상으로 굳어진다. 이는 예술이 고립되기 시작된 근대 이래의 상황이다. 누가 찍어도 상관이 없는, 지시대상에 방점이 찍힌 정보를 넘어서는 순간 예술의 영역이 시작된다. 예술은 반영함과 동시에 변형한다. 


반영 자체가 선택이라는 면에서 변형을 내포하고 있지만, 예술적 변형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때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지시대상이 무색할 정도로 매력적인 화법이 있을 수 있다. 의미가 아닌 존재의 차원으로 격상된 언어가 있을 수 있다. 이때 각 장르는 자기 고유의 매체를 강조한다. 회화는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에 몰두하고, 사진 또한 마찬가지이다. 회화는 지시대상을 삭제하고 색감과 화가의 행위를 강조한다. 그렇게 해서 단색화도 생겨났다. 사진의 본질은 아마도 서성강이 80-90년대에 찍었던 다큐멘터리에서 정점을 찍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가상이 극도로 교란되는 시대에, 그 본질이라는 것이 문제시되었다. 회화의 본질은 회화를 텅 빈 캔버스로 만들었고, 사진의 본질은 이제 소비되는 수많은 스펙터클 속에 퇴색했다. 내용과 형식이 두루 포함되는 실험은 없을까. 서성강의 최근 작품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