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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연 / 움직이는 경계

이선영

움직이는 경계

  

이선영(미술평론가)

  

홍수연의 작품에는 얇지만 완전히 평면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형태가 차분한 색감 위에 얹혀 있다. 그러한 그림들은 가볍게 실행될 것 같지만, 작가는 이러한 실행을 구축(build up)이라고 말할 만큼 엄격한 규칙을 관철시킨다. 구축이라고 해도 보이는 결과물은 꽃잎이나 렌즈처럼 피부에 밀착해도 이물감 없는 유연한 형태들로 다가온다. 공기감이 있는 것에서는 팔락거리고, 흐름이 있는 것에서는 표류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중첩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터지기도 하면서 다양한 상황과 이야기를 만든다. 물론 그것은 추상화라서 서사는 은유적일 것이다.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린 정지된 화면 안에서 시간성과 서사가 느껴지는 것은 경계의 중첩들이나 닫힌/열린 형태의 병치 또는 공존으로부터 비롯된다. 반투명 종이 위에 그린 드로잉 작품은 여러 장 같이 놓이면서 애니메이션 같은 움직임을 보여준다. 원인과 목적이 불분명한 변화이기에, 순서를 정하기는 힘들다. 




 Equilibrium_Explosion #3, 2015,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130x100cm .



flash-foward#2,65X45



화면 속에서 직선을 거의 발견할 수 없는 홍수연의 작품은 유기체적이다. 정확하게는 유기체의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유기체가 만들어지고 성장하기 위해 최초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사건들의 제시이다. 온전한 유기체가 안과 밖의 차이가 있어서 항상성을 유지하고 전체와 부분 간의 규칙적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면, 홍수연의 작품 속 형상들은 아직 그러한 유기체적 형태가 만들어지기 이전이다. 해체적 분위기가 완연한 이 전시의 작품을 염두에 둔다면, 유기체 이후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미시적이고 원초적인 과정에는 차후의 과정들이 압축적으로 실행된다. 수 많은 형상들 간의 조합이 있는 작품들은 명확한 선적 계열로 정리될 수는 없지만, 2002년 귀국한 이후의 작업만 살펴봐도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조합도 이미 있다고 해야 할 만큼 많이 실행해 왔다. 대개는 육안보다는 현미경적 시야에서 일어나는 미시적인 세계이며, 그것은 인간의 가슴이나 머리에서도 일어나는 과정이다. 


강도 높은 몰입이 필요한 홍수연의 작업은 무엇보다 육신을 혹사 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에 미술을 할 것인가 무용을 할 것인가 고민했을 정도라고 하니, 심신의 균형에 대한 감각은 체질화 되어 있을 것이다. 작품의 컨셉에 이미 포함되어 있듯이 삶에 있어서의 평형과 균형도 필요하다. 작업에 있어서 육신의 혹사는 정신력으로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점이 보통의 노동과 예술노동의 차이일 것이다. 홍수연의 작업은 추상화라고 해서 정신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작품들은 비정형성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미시적 차원의 그것들은 약간의 입체감이 있으며 관찰을 위한 중성적인 바탕 면에 배열되어 있지만, 중력으로부터 약간의 자율성을 가진 채 자유롭게 떠돈다. 초창기 작업에부터 분명한 경계가 첩첩이 쌓이는 이미지는 동감을 주는 요소이다. 마치 아메바가 자기 몸통으로부터 위족(pseudopodium)을 내어 움직이듯, 단일한 폐곡선의 외곽이 여럿이다. 또는 여럿으로 불어난다. 




 Equilibrium_Explosion #5, 2014-2015,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70x70cm



 Equilibrium_Explosion #6, 2015,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91x72cm



미시적 차원에서의 세포질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Equilibrium] 시리즈는 원시 단세포 동물처럼 몸체 일부를 변형시켜 무채색 공간 안에서 서서히 움직인다. 움직임의 범위는 진동부터 이동까지 다양하다. 갈 길을 명확하게 안다는 듯한 움직임부터 암중모색에 이르기까지 그 정도도 다양하다. 배경이 대부분 매끄럽기에 미세한 움직임이든 큰 움직임이든 저항은 없다. 매끈하게 정리된 표면에서 모든 것은 미끄러지듯 움직인다. 그래서 소리도 없다. 심지어는 폭발이라는 극적 순간까지도 묵음(默吟)의 상태이다. 무채색 계열은 소리를 흡수하는 듯하다. 매끄럽고 중성적인 배경은 미세한 차이를 드러나게 할 것이다. 움직임의 흔적들이 또 다른 경계가 된다. 이러한 미지의 유기체는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움직임의 궤적에 의해 그때그때 잠정적으로 규정될 것이다. 거기에는 명확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1에서 존재 n으로의 변환을 위한 수많은 순간들이 있다. 


이 순간들은 재현될 수 없고 단지 암시될 뿐이다. 흔들리는 경계에 감싸인 미지의 형상들은 생성되거나 변환되고, 마침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또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작품 [Equilibrium_Acrobat] 시리즈에 나타나듯이, 만약에 구성 요소들이 멈춰있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위태롭게 쌓은 돌탑처럼 미묘한 균형의 순간일 뿐이다. 유기체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친다면, 변환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뭔가 폭발하는 이미지가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우선적으로 죽음을 연상시킨다. 중첩되는 외곽선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배경과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질(質)은 폭파되어 그 내용물을 기저 면에 흘린다. 그러나 흐름은 중력에만 반응하지 않고 그 방향이 제 각각이다. 그것은 작품 제목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듯이 폭발(explosion)이지만, 내부에서의 폭발(내파, implosion)같은 양상도 있다. 전시장 벽면과 천정에 페인트 껍질들을 설치한 초창기 작업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사각 캔버스 안에서의 폭발이니 내파라고도 할 수 있다. 




 Equilibrium_Acrobat #1, 2015,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200x140cm



 Equilibrium_acrobat#12, 2017,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130x100cm



 Equilibrium_combine #2, 2017,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152.5x122cm



외적이 폭발이든 내적인 폭발이든 폭발은 경계들을 급격하게 해체한다. 여기에서 파괴는 생성의 조건이다. 배경이 없는 작품은 화면 전체가 흐르는 것들로 가득하다. 터지고 나서야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알 수 있을 법하게 전/후의 상황은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여럿이 된다. 여럿 역시 경계들이 있지만 보다 복잡하게 뒤얽힌다. 일상어 중에서 ‘빵 터진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터짐은 죽음만이 아니라 의외의 사태에 대한 신선한 충격 같이도 다가온다. 새로움을 창조해야 하는 예술가들은 늘 그런 순간을 기다린다. 홍수연의 작품에는 터지기 직전의 고요한 상태 또한 폭발의 과정에 포함된다. 그러나 많은 작품들에서 터진 내용물들이 위로 향해 있는 점은 폭발의 순간이 긍정적인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피 흘리는 폭발도 있지만, 밤하늘을 다채롭게 수놓는 폭발도 있지 않은가. 작품 [flash-foward#2]는 아래의 한 지점으로부터 폭죽처럼 분출되는 듯한 이미지가 있다. 


작가는 폭발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소리는 빼야 한다고 말한다. 소리 없는 폭발에서 시각적 요소, 또는 요소를 요소로 만들어주는 차이는 최대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는 경계를 교란하는 진동으로 바뀔 것이다. 반대로 시야가 깜깜하다면 촉각이나 청각은 더 예민하게 작동될 것이다. 색의 감축이 있었던 것처럼, 여러 차원이 복합된 현실의 어떤 면을 생략하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다. 물론 이러한 감축은 현실의 단순화라기 보다는 현실의 또 다른 면을 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감축의 과정은 예술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이루어진다. 가령 식물학자들은 식물의 단면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위해 염색을 하는데, 그렇게 하면 어떤 것은 더 잘 보이고 어떤 것은 더 안 보인다. 자연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재현하곤 하는 실험실의 조건은 중성적으로 조율된다. 현대의 실험실이 아니어도, 고대 원자론자들은 만물을 원자와 그 원자들이 움직이는 허공으로 감축했다. 화이트 큐브는 과학적 실험실을 연상시킨다. 




 drawing_invisible hands, 2012, tusche on trepal paper, 79x54.5cm



 drawing_invisible hands, 2012, tusche on trepal paper, 79x54.5cm



홍수연의 매끄러운 형상들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공적 좌표에 배치된 샘플이나 모델같은 느낌이다. 색채학자들은 자동차를 비롯한 기능적인 물건에 무채색이 많은 이유는 기능에 보다 집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은 현대적 디자인의 고전적인 문구로, 복잡한 장식이나 쓸데없는 무늬, 색을 포기한다는 뜻이며, 유채색을 포기하면 객관성과 기능성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검정-흰색은 뚜렷함, 심지어는 진실을 연상시키는 배색이다. [색의 유혹]에서는 아이젠스타인이 영화제작에서 색채를 포기 한 이유로, ‘색의 매력을 포기하고 나면 형식과 내용이 더욱 주목을 끌게 된다’(아이젠스타인)는 점을 인용한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유채색의 세상에서 검정과 흰색은 객관적인 사실의 색으로 간주된다. 작품 [Equilibrium_Explosion #1]을 비롯해서, 최근 작업에 두드러진 어두운 색 배경은 폭발로 상징되는 급격한 변화를 두드러지게 한다. 


색의 감축을 비롯해서, 시각적 실험실이라고 할만한 장에서 이루어지는 감축은 몇몇 조형적 요소 내지는 관념으로의 환원은 아니다. 원래의 가정을 재확인할 뿐인 빈곤하고 단조로울 뿐인 환원이 있고, 의외의 것에 열려 있는 감축이 있다. 작가는 그 동안 자신을 너무 옥죄였던 엄밀한 방식을 해체하려 한다. 회화지만 거의 조각에 가까웠던 작업을 이번 전시를 통해 회화적으로 풀어헤치고 싶다는 충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터져서 열려 있는 것들 또한 우연적으로 방치되지는 않으며, 또 다른 엄밀성으로 배치되곤 한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것들은 서로의 경계를 더듬으며 재조직화되려고 한다. 터져 있는 상태 그대로라면 그것은 그저 원초적 혼돈이라는 하나의 상황으로 환원되고 만다. 그러나 변화를 위해 잠시 이완된 상태는 카오스도 코스모스도 아닌 카오스모제의 상태를 말한다. 완전한 익숙함도 완전한 생경함도 아니다. 작가는 이러한 상태를 처음 가보는 동네에서의 낯설면서도 자유로운 느낌과 비교한다. 익숙함/ 낯섦을 포함하여, 구별되는 범주들의 차이를 감식하고 의식하는 것이 유의미한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Equilibrium_combine #3, 2017,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100X80cm



 Shadows of winter #4, 2017,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65X91cm



질서 그 자체 혼돈 그 자체는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구조로부터 발생이 가능하고, 발생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구조의 발생을 말한다. 홍수연의 작품에서 하나에서 터져 나온 여럿은 다시금 각각의 하나로 추슬러진다. 이때 해체는 또 다른 구성이 된다. 작업은 하나와 여럿의 지속적인 변환과정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배치들이 된다. 이전 작품들에서 그 과정이 매우 서서히 또는 간헐적으로 일어났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폭발이라는 극적인 사건이 포함된다. 공간적으로 폭발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접면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난다. 폭발은 격렬하게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말한다. 작품 안에서 폭발이 있는가 하면, 작품들 간에도 폭발 전후의 상황이 있다. 숨을 쉬거나 뒤척이는 정도의 미소한 운동감은 존재의 전면적인 변신을 향해 열리게 된다. 이전 작품에 선명했던 긴장감은 다소간 풀어진다. 엔트로피는 커지고 이 과정에서 풀려나온 에너지가 활기차다. 이 에너지가 급격하게 흩어지면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여러 개의 질이 섞여드는 모습이 선명한 작품 [flash-foward#1]에서는 배경에 붓질 자국이 남아 있다. 위아래의 방향을 가진 움직임은 변화에 필연적인 시간성을 가시화한다. 트레팔지 위에 그려진 드로잉 작품에는 다른 작품에서 잘 발견되지 않는 직선적 요소와 해먹으로 처리한 거칠거칠한 질감의 형상이 자리한다. 폭발을 비롯한 어떤 질적 변화가 잠재된 형상들이다. 드로잉은 시리즈 작품으로 여러 단계의 상황이 전개된다. 동그스름한 용기 안에 들어있는 걸쭉한 액체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뒤섞여 미세한 진동부터 격렬한 폭발에 이르는 화학적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이 용기(容器) 안의 검은 액체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화면 또한 다양한 변환이 이루어지는 연금술적 용기가 될 것이다. 자연적 유기체나 물질은 끝없이 변화하지만 조형적이거나 과학적인 실험은 이러한 과정을 압축적으로 재연(replay)한다. 동일한 결과를 낳을 수 없기에 그것은 재현이나 생산이 아니다. 연금술은 근대 과학 이전의 상징적 과학이었다. 




Equilibrium_Explosion #1, 2015, acrylic & mixed media on canvas, 200x140cm



flash-foward#1,38.2X45



tonal dialogue,65X45.5cm,2017



연금술사들은 그들이 원하는 궁극의 완전체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무수한 시도들로 인해 근대의 실험과학이 예비되었다. 이러한 연금술적 과정을 작업과 비교하자면, 홍수연의 최근 작품에서 두드러진 폭발의 이미지는 생성을 위한 극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것에서 동일한 것이 나올 뿐 아니라 이질적인 것도 나온다. 자연에서의 돌연변이처럼 실험은 다양함의 실행이라는 사치일 뿐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거듭남을 통해 끝장을 극복하는 것이다. 홍수연의 작품에서 해체(구성)는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이다. 우연적이기 보다는 필연적이다. 알이 깨져야 새는 날 수 있고, 피막이 벗겨져야 번데기는 성충이 될 수 있다.  ‘소리가 나지 않는 폭발’이라는 작가의 비유에 걸맞는 꽃봉오리의 개화 순간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봄이 되어 피는 꽃들은 폭발적이다. 이러한 폭발에서는 어떤 소리도 안 날 것이다. 대신 색의 폭발이 있을 것이다. 생물학이 아니라 물리학적 차원으로 보자면 폭발은 상전이(phase transition)의 순간과 비교될 수 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조직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해당하는 상전이로 진화하는 우주의 창조성과 놀라움’(찰스 젠크스)을 인용한다. 필립 볼은 ‘상전이’의 현상을 르네 통의 격변설, 맬컴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전이’에서도 발견한다. 홍수연의 최근작에서 발견되는 변화는 상전이처럼, ‘수많은 구성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로, 상전이는 ‘입자에 작용하는 어떤 전반적인 영향이 어떤 문턱 값(threshhold)을 넘어설 때’(필립 볼) 일어난다. 예술은 무엇보다도 양/질의 전환 과정과 밀접하다. 어떤 문턱에 이르러야 흩어진 퍼즐은 맞춰진다. 작가는 결과에 대한 어떤 확신도 가지지 못한 채로 변화를 위해 흔들리는 순간을 기록한다. 변화에 내재된 시간적 과정을 가속시키는 홍수연의 작품은 모든 유기체에 필연적인 시간적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 내재한 변화를 직관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기술이 바로 예술임을 알려준다. 

 

출전; 스페이스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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