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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기와 생각하기

이선영

만들기와 생각하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오완석-생각하며 만들기, 또는 만들면서 생각하기

  

오완석은 원래 조각을 전공했지만, 적어도 최근 몇 년간의 작업은 개념적 성향을 보여준다. ‘나 OOO가 만약 작품을 만든다면...’으로 시작되는 앙케이트를 받아서 모은 카드 뭉치가 있는 작품은 미술계 지인들의 생각을 자신의 개념미술로 제시한다. 조각/개념미술을 나누는 서두의 언급은 정통 조각가는 개념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개념미술은 머리로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반박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상당 부분 그러한 경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조각가는 육체노동으로 녹아나고 개념미술가의 결과물은 난해하고 썰렁하기 그지없다. 조각가는 능숙한 기법을 통해 완성도 높은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특히 그가 어떤 하나의 아이템으로 유명세를 얻거나 가격대가 있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면 본격적인 생산 모드로 진입한다. 이 경우에는 반드시 자기가 안 만들어도 된다.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어 잘 팔리는 것도 좋지만, 이제 예술이 아닌 다른 상품의 영역에서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예술가로서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된다. 개념미술은 미술사에서 한 번 이상 정리된 이즘으로, 이제 그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설치 전경, 이응로 미술관



오완석, 일요일만 있는 달력_ 오브제 _ 35x35cm


개념미술이야말로 정말 새롭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중간적 형태로, 개념과 관련된 잡다한 자료들을 아카이브 식으로 늘어놓고서, 관객이 알아서 개념을 챙겨가라는 개념 없는 방식이 유행하기도 했다. 생각하면서 만들고, 만들면서 생각하면 좋을 텐데 말이다. 오완석 작품의 장점은 이 중간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이 고난이도의 제작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작품 [일요일만 있는 달력]에서 그는 탁상용 달력을 일요일만 있는 달력으로 재편집했는데, 칼자국이 얼기설기 나 있는 것이 누구라도 그 생각을 했다면 그 이상의 완성도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일요일만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노동(과 기술)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할 틈도 없이 몰아치는 노동생산성 중심의 사회가 개념을 전문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사람을 창출했다. 지우개 안에 배터리를 끼운 작품은 리모콘이나 작은 전자기기를 닮았다. 지우개 몸통은 원격조정 시스템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멀리서도 단추 하나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도구화시키는 사회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이선희-소통과 치유를 위한 만들기

  

전시장 한가운데에 놓인 실뭉탱이가 얹혀있는 구조물들은 사람을 떠올린다. 그것이 비록 추상적인 형태라 할지라도 인간의 면전에 직립해 있는 것들이 사람을 연상시키는 점은 조각의 전통에서 발견된다. 액자 한가운데 있는 형태의 경우에는 얼굴일 것이다. 이선희의 작품은 한 인간이 수행한 산물로 그 인간을 비유했다. 다채로운 색실로 엮인 부드러운 구조물은 중력의 방향으로 늘어져 있다. 여성의 긴 머릿단처럼 꼬여 있는 모습이다. 인체 내부도 수많은 모세관이나 신경망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실뭉치는 인간의 안과 밖을 동시에 암시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인체의 비유라면 과도한 점이 없지 않다. 아래의 좌대가 좁아 보일만큼 실뭉치는 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적절한 한계를 넘어서 흘러넘친다. 과도함은 예술의 특징이다. 10개를 해야 1-2개가 관철될까 말까 한 예술적 소통, 그리고 이제는 일상적 소통도 같은 운명이 된 현대 시대에, 고전주의적 균형이란 인류의 유년기에나 해당되는 오래 전 이상이 아닐까. 그것이 머리라면 생각은 너무 많고 작업은 끝없은 이야기처럼 이어진다. 선으로 이루어진 시간적인 그것은 이야기이다. 작가는 늘 치유와 소통을 말한다 





이선희, 이응로 미술관 설치전경


그것은 식상한 주제일 수도 있지만, 생각처럼 쉽게 쟁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보편적인 주제는 반복된다. 수년간 드문드문 봐온 이선희의 작품은 반복이 차이를 낳을 만큼의 역량이 쌓여 있다. 작가는 실을 다루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 넣고 타자들도 그렇게 해보기를 권한다. 그것은 작품처럼 완결된 것이 아니라 텍스트처럼 열려 있다. 이선희는 천이나 실같은 소재를 사용하여, 그러한 소재들을 짜고 엮고 배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작품은 적당히 건너뛸 수가 없다. 꾸준히 해야 한다. 어떤 시공간을 오롯이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들이 놓인 전시장 가장자리로 은색 철창들이 내려오는 듯이 연출했는데, 그것은 유폐되어있는 상황을 떠올린다. 그것은 스스로 자처한 유폐이다. 작가는 이러한 유폐의 장에서 천국과 지옥을 맛본다. 천국은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 인간의 열락이고, 지옥은 그로 인해 사회로부터 격리된 상황에서 온다. 사회적 인간은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단절될 때 위험에 빠진다. 그러나 작가는 유폐를 통해 유폐를 극복하려는 역설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녀의 예술 노동의 결과물이 타인들과 다시 만나게 했기 때문이다.

  


권영성-지도 안에서 새로운 지도를 만들기

  

권영성의 [발코니와 저녁노을의 관계 그래프]에는 저녁노을같은 낭만적인 풍경에 내재한 시스템이 발견된다. 작가는 저녁노을을 비롯하여 뻥 뚫린 좋은 전망을 가진 아파트같은 건축물에 눈금을 새겨 넣기 때문이다. 같은 아파트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 차이가 있다. 풍경에 값이 매겨지는 것이다. 세계 곳곳의 난개발로 이제는 희귀한 자원이 된 자연 풍경은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권영성의 작품 속 아파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눈금이다. 그것은 어떤 도시, 동네, 평수, 건설 회사 등등 같은 외적인 기준을 반영하는 거대한 자로 다가온다. 또 다른 작품인 [산과 아파트의 관계 그래프]도 그러한 기준과 측정치가 깔려있다. 그의 작품에서 아파트와 산은 다이아그램처럼 분석되어 있다. 저녁노을을 잘 볼 수 있는 아파트처럼, 산과 가까운 아파트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아파트 같은 고층건물은 풍경을 독점하기도 한다. 누구나 볼 수 있었던 산이 한 아파트 주민한테만 보인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이 된다. 이전 시대에 비교적 평등하게 누렸던 자연은 이제 수많은 소비품목처럼 정교하게 계측되고 가격이 매겨져 소비자 앞에 배열된다. 



권영성, 발코니와 저녁노을의 관계 그래프, 91.0x60.6cm, Acrylic on Canvas,  2017



권영성, 산과 아파트의 관계그래프, 181.8x227.3cm, Acrylic on Canvas, 2016


앞으로 그 추세는 더욱 강해져, 신선한 산소 한 모금을 흡입하는데도 돈을 써야 할지 모른다. 이미 스마트 기기로 식민화되어 있는 환경에서 사람들의 크고 작은 시간들은 눈금이 매겨져 유통되지 않는가. 나의 소소한 관심이나 심심함이 그들의 사업이 된다. 자연이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체계화되는 순간. 물신화의 회로에 진입한다. 계측되지 않은 것은 유통될 수 없기에 계측은 필사적이다. 권영성이 풍경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잣대는 유통망에 걸려든 시공간에 대한 풍자이다. 그는 왜 이런 불순한 풍경을 그리고 있을까. 상당 부분 한국의 상황에서 영감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가령 지방은 폐가가 넘쳐나지만, 전인구의 5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사는 아파트 공화국 한국말이다. 그의 작품은 풍경에 얽힌 정치경제학이다. 풍경이 그냥 풍경이 아니라 권력적 방식으로 얽혀있다는 점은 풍경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자신의 영토를 확인하고 싶었던 귀족이나 왕은 풍경화나 지도를 주문했다. 좋은 전망을 가지는 장소는 적을 관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풍경의 역사는 보는 것을 통해 이해하기, 소유하기, 지배하기라는 권력적 방식과 얽혀있는 것이다. 

 

출전; 아티스트 톡(이응노 미술관 신수장고 M2 프로젝트 룸, 20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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