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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여성주의 미술에 있어서의 주체

이선영

80년대 여성주의 미술에 있어서의 주체


이선영(미술평론가)


1. 시대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기억


페미니즘을 매개로 하여 80년대의 문화예술 지도를 그려보는 이번 기획에서 역사적 해석은 자료를 선별하고 배열하면서 강약을 부여하는 행위이다. 적어도 문화예술 부분에 있어서는 무엇이든 아카이브가 될 수 있어서, 그 범위는 너무나 방대하지만, 그중에서도 미술잡지는 중요한 자료에 속한다. 미술잡지는 가장 중요한 자료인 작품사진과 정보, 그에 대한 담론이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1순위가 될 수 있다. 더구나 미술관보다 사회적 현장 속에서 소통되었던 1980년대의 미술의 경우 말그대로 잡다(雜多)한 기록은 중요하다. 몇십 년 전의 자료이다 보니 해당 작가와 평론가의 생각이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잡지라는 공공영역에 나온 발언들은 공유의 자산이 되어 역사적 사건의 흐름에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볼 때, 발언의 주요 대목들을 다시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이번 분기의 소주제인 ‘80년대 페미니즘 1차 문헌 자료에서 뽑은 여성주의 미술에 있어서의 주체’ 문제는 국내에서 발간된 잡지지만, 개인의 경험과 기억에 바탕 한 것도 포함된다.


개인적 기억은 수많은 실증적 자료들을 헤쳐나가는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여성 문제는 ‘보다 큰’ 문제에 묻혀 소소한 흐름처럼 간주 되었지만, ‘작은’ 문제였기 때문에 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을 가진다. 198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도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이 퍼지면서 미시담론, 그리고 담론이 권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미시정치학이 문제시되었을 때 페미니즘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 뿌리가 1980년대 저항적 문화예술 운동에 있는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은 전체적인 맥락 속에 있는 부분의 역할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일각에서 강조되는 ‘해체적 주체’와도 다르다. 80년대 당시에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미술잡지에 실린 담론들을 보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90년대 와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80년대의 여성주의 미술을 중요한 운동으로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금도 ‘미투’를 비롯한 여권 운동 속에서 이 땅에서 일어났던 선구적인 움직임은 단지 미술사적 의미를 넘어설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미술계를 넘어 삶의 현장으로 ‘진출’ 했기 때문이다.



김인순_평등을_향하여(그림패_둥지_공동창작), 400×250_천에_아크릴, 1987

여성주의 미술은 그것이 속해 있었던 민중미술의 흐름의 일부였고 다수가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198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였지만, 당면한 경치 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한국에서는 강한 주체 개념이 득세했다. 당시에 중시되었던 민족이나 민중은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을 가진 역사적 주체로 간주되었다. 주체, 보통 남성적, 서구적 주체로 인식되는 주체 개념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페미니즘조차도 워낙 헤쳐 나가야할 사회적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강한 주체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체나 확장은 정(正)이 확립된 그 이후의 일이다. 고도 성장기였던 1980년대에 여성들도 사회에 많이 참여했다. 또는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다. 지금도 기억나는 버스의 차장이나 백화점의 엘리베이터 걸, 제복이 예뻐 보였던 패스트푸드점의 점원뿐 아니라, 여성 공장 노동자, 농민 등이 그녀들이다. 물론 학생 인구의 급증으로 여대생(여기에서는 여자 미대생)도 많았고, 그녀들은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 전문직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큰 만큼 현실성이 받쳐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사회적 갈등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페미니즘이 신선하게 다가오든 아니든 근본적 문제는 남아있다. 실제적 문제와 이념이 잘 맞아 떨어졌을 때 사상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은 남성/여성을 떠나 개인 대 개인의 무한경쟁이 펼쳐진 시대지만, 성(性)적 차이는 언제든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전통사회를 벗어난 근대 이후는 모든 시기가 과도기로 간주 되었지만, 한국의 80년대는 성장(과 그 가능성)을 두고 모순과 갈등이 증폭되었던 시대로 평가된다. 그 시대는 역사적 시대였을 뿐 아니라, 발전 또는 진보에 대한 단선적 의식을 가졌던 역사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압축적 성장을 하고 있던 사회에서, 집중을 통해서라도 물질적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발전(개발)주의인가, 성장에 걸맞는 민주적 문화가 있는 진보주의인가에 대한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물질적 발전이든 문화적 진보든 이제는 성장 자체가 더이상 당연시되지 않는 시대에서 1980년대의 ‘활력’은 다소간 특이하게 다가온다.


2. 자료읽기; 여성주의의 주체로서 여성농민과 여성노동자


1980년대 여성주의 관련 문헌에서 대표적 여성 주체로 호명된 이들은 여성농민과 여성노동자들이다. 여성 (해방)미술로서의 페미니즘의 시작은 여성 농민과 여성노동자를 주체로 내세운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미술평론가 라원식(양원모)은 [새누리를 일구어내는 페미니즘 미술-80년대 여성미술운동]에서 ‘80년대 미술의 갈래 가운데 뒤늦게 발아하여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준 것은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평가하면서, ‘페미니즘은 80년대 미술계에서는 보통 여성(해방)미술로 주창되었다. 내가 온전한 의미의 페미니스트인 이 땅의 여성화가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6년도였다.’고 회고한다. 여성평우회가 마련한 여성문화 큰잔치(주제; 일하는 여성)에 손님으로 초대된 라원식은 ‘여성운동과 조직적으로 연계한 가운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 문제를 전면에 부각한 미술작품’을 보게 되었다.



정정엽, 봄날에 .at a spring day, 1988, woodcut, 34 x 27 cm(사진제공; 정정엽)


거기에서 발견되는 여성상들은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합심하여 단결하는 것을 주대로 그리고 매 맞는 여성, 매매춘 당하는 여성, 길들여지는 여성’ 등이었고, ‘억압받는 여성들의 어두운 현실의 단면이 사방으로 펼쳐 보여주는 걸개그림들’에 담겨있었다. 라원실의 글에 인용된 여성평우회의 취지문 [새로운 여성문화의 장을 열며]에서는 노동하는 여성을 주체로 내세운다. 그 취지문에 의하면, ‘건강한 여성문화의 창조는 무엇보다도 일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여성운동을 이끄는 주체로 ‘여성근로자와 여성농민’을 명시한다. 미술자체보다는 다른 진보적 문화운동에 더 영향을 받았던 여성주의 미술 또한 누구를 대표적 여성으로 내세울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공유했을 것이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내부에 여성미술분과가 생긴 것이 1986년 12월이고, ‘여성과 현실’ 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전을 열기 시작한 것이 1987년이다. 1987년은 진보적 문화운동이 대중화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시기이다.


진보적 미술운동과 함께했던 이론가 그룹인 미술비평연구회원이있던 비평가 오혜주는 제3회 ‘여성의 현실’ 전에 대한 리뷰에서, ‘여성 미술이란? 여성해방의 입장에서 행하는 미술’이라고 정의한다. 오혜주에 의하면 ‘사회모순과 여성억압은 같은 뿌리이기 때문에 사회변혁의 주체가 노동계급이듯이 여성해방의 작동력도 노동계급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결국 여성 미술이 해야 할 일은 미술이 매개가 되어 여성문제를 통해 총체적인 사회인식을 가능하게끔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혜주는 ‘제3회 여성과 현실 전에서 두드러진 점은 성모순에 주목하기 보다는 사회모순과 성모순의 얽힘관계를 보고자 했다는 것과 계급계층별로 여성을 분류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오혜주는 ‘여성과 현실’ 전에 대한 또 다른 리뷰에서 민미협 내부의 여러 분과 중에서 여성미술 분과가 ‘가장 왕성한 활동력과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다’고 하면서, ‘이들은 이동 순회 전시와 걸개그림, 벽화제작 등에 참여하고 있고 특히 노동현장과의 결합도가 강하다’고 평가한다.



그림패 둥지 [우리는 일하는 기계], 1989, 천위에 아크릴, 110x120cm


민미협 내에 여성미술 분과를 처음 만들고, 1991년에는 민미협 공동의장으로 선출된 김인순은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을 시작하고 이론적 기반도 다진 대표적인 작가이다. 김인순은 자신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펼친 논문 [근현대미술에 나타난 여성이미지]에서 여류미술가와 여성미술가를 구분하고, 1987년에 열렸던 [여성과 현실] 전의 미술사적 의미를 정의한다. 김인순은 여기에서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렸던 [여성과 현실] 전 이후 여성미술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왔다’고 말한다. 김인순은 ‘80년대 이르러서는 미술대학의 졸업생 수가 남성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여류라는 접두어가 붙은 전시가 자주 등장하는데, 여류 미술인들 작품 대부분은 인간 일반이나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여성 특유의 관조성’이나 ‘여성다운 감수성’, ‘일상에 대한 관심’, ‘섬세하고 환상적인 표현’에 매몰되어’ 왔음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진보적 미술로서의 여성미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바람직한 예술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따라서 현실은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는 세계관과 더불어 인간의 본질 또한 사회관계에서 생겨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의해서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여성미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 분류의 여성이 하는 미술이 아니고 우리 역사와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처해있는 삶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예술가가 갖고 있는 정치적 도덕적 세계관의 미적 표현일 때 가능해진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계급관계와 가부장제라는 사회구조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미술의 역할은 ‘여성의 현실, 즉 여성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억압 구조를 드러내야’한다. 여성 미술이 해야 할 일은 ‘미술이 매개가 되어 여성 문제를 통해 총체적인 사회인식을 가능하게끔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3. 자료읽기; 87년 민주화 운동의 대중화 국면에서 여성주의 미술의 변신


김인순은 긴 논문의 말미에서 ‘(사회적)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야 하지만 여성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여성의 불평등한 현실이 존재하면서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해방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계급철폐와 더불어 여성해방의 과제가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글들은 미술잡지 뿐 아니라, 전시 중에 세미나 등을 통해서 슬라이드와 함께 발표되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진보와 함께 하는 여성 주체라는 사고, 여기에서의 여성미술가들이 역할에 대한 의식은 처음부터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작가이자 이론가라고 할 수 있었던 김인순에게도 그랬다. 그녀는 1941년생으로, 첫 개인전을 연 1984년에 불혹을 넘긴 나이였고, 이후 다른 여성 작가들와 단체전을 할 때에도 여성관이나 예술관은 다소간 소박했다. 그 점은 자아 비판적인 성격을 가진 글에도 잘 나타난다.



김인순_현모양처_110×91_캔버스에_아크릴, 1986.


김인순은 앞의 논문 [근현대미술에 나타난 여성 이미지]에서 ‘여성 일반개인의 체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사회 전반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심화 된 형태로 폭넓게 발전’되었던 ‘여성과 현실’ 전에 앞서, 1986년 10월에 김인순, 김진숙, 윤석남이 참여한 [반에서 하나로] 전을 ‘여성 문제가 내용으로 다루어진 첫 전시회’라고 자평하면서도, ‘전시된 작품들은 소시민적인 관념성을 여지없이 드러냈음’을 비판한다. ‘김인순의 [현모양처], 김진숙의 [내일을 향하여], 윤석남의 [L 부인] 등에서 보여지듯이, 작가들의 개인적인 분노가 주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술의 출발이 개인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소박한’ 시작도 중요하다. 김인순은 ‘1986년 [반에서 하나로]란 이름으로 여성 문제를 작업으로 하는 두번째 시월모임 전을 김진숙, 윤석남과 함께 준비하면서 나의 가슴은 마치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끓고 있던 뜨거운 쇳물이 하나의 분출구를 통해 쏟아지는 것같은 뜨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으로서의 이미지나 형상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가슴 밑에 쌓여졌던 여러 가지 분노들이 한꺼번에 소리쳐대고 그러면서 다시 자학으로 메아리쳐 오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왔던 생활 속에서 여성으로서 눌리고 참아오고 체념했던 여러 가지 것들의 외침이었다. 그 분노를 한가지씩 끌어내며 나는 마치 몸이 뜨는 것 같아 몸을 떨기도 하며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러한 터트리기의 식의 카타르시스는 사회적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그러한 계기는 꿈틀거리고 있는 사회로부터 왔다. 김인순은 같은 논문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진정한 아름다움일까.’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이제 그림은 나에게 있어 쟁기이고 나팔’이라고 선언한다. 1987년 민중운동의 대중화 국면은 작가들의 변신을 촉구했던 것이다. 김인순은 ‘87년 6월 항쟁 전후로 활발해진 여성운동은 작가들로 하여금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미술 활동을 하게끔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한다. 87년 7-8월에 일어났던 노동자 대투쟁과 더불어 여성미술 또한 여성 노동자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윤석남, 손이 열이라도, 1986.


여성미술연구회에 속한 모임 [둥지]의 참여작가 이정희는 [나만의 밀실에서 해방된 세상으로]에서 ‘여성미술은 여성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문제는 단지 대 남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조적인 모순과 근원을 같이하고 있으며, 여성해방이 전제되지 않는 인간해방은 진정한 인간해방이 아니라는 점 등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87년 1월부터 둥지에서 활동한 이정희는 ‘나를 포함한 5명이 함께 그린 걸개그림이 걸려있는 여성대회에 처음 가보았을 때의 감동’을 전한다. 이정희는 ‘5-6백명이 넘는 남녀 노동자들이 모여 함께 노래하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던 당당한 모습, 우리가 그린 그림은 거기에 왔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보았고 그 집회가 끝날 때까지 그들 앞에 걸려 있었다. 그날의 일은 내게 미술의 역할과 내가 해야 할 일의 방향을 분명히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회고에 의하면 둥지에서 만들어진 공동작업은 ‘각 대학과 지방 여성단체와 집회, 파업 현장 등에서’ 활발하게 전시되었다.


김인순은 작가가 ‘현실의 잡다함과 결별해야 하고 순수하고 외골수로 정열적이고 미쳐야 하는’ 예술관을 극복한 계기로 70년대의 문학운동과 사회과학 쪽의 저서를 지적한다. 1980년대에는 체계화된 여성연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의 여성미술에 대한 가나아트의 특집(1990)에서 김승희 기자는 ‘과학적으로 여성에 대한 연구 및 운동의 활성화를 직접적으로 추동한 것은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82)의 설치와 한국 여성학회의 창립(84)을 비롯하여, ‘성차별문화 타파’, ‘인간다운 삶’, ‘통일사회 건설’ 등의 운동목표를 설정하고 출발한 여성평우회(83) 등의 발족에 있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여성문제가 현실적인 실천운동으로서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이 1987년 이후이고 그것이 여러 여성운동과 맥을 같이 하며 나타난 [여성과 현실] 전(87. 9월)에서부터 비로소 여성의 문제는 실천적 조직력을 갖춘 집단에 의한 미술로서 표방되기에 이르렀다.’고 정리한다. 1987년에 처음 열리기 시작한 [여성과 현실] 전은 ‘이 땅에 해방된 여성의 자리매김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4. 자료읽기; 자체적 평가와 역사적 평가


김인순의 작업실은 운동의 이념을 공유하는 다른 여성 미술가들과의 공동 작업장이 되었다. 미술관보다는 현장에서 펼쳐지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들은 공동작업을 통해 중산층 여성 화가의 개인주의적 관점을 뛰어넘고자 했다. 평론가 민혜숙은 김인순에 대한 작가론 [여성과 현실, 그 모순의 벽을 허물며]에서 ‘여성해방은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모든 억압과 착취가 근절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든 결정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책임지는 함께 사는 공동체 건설을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항변한다. 그의 그림에 일하는 여성, 즉 공장노동자나 농촌여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이다. 김인순이 주장하는 여성미술은 여성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게 억압당하는 여성, 성모순과 계급모순이 상승작용을 해서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의 문제를 그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기연(두렁),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요],걸개그림,1984


그러나 여성 미술의 산실이기도 했던 민중미술 진영에서 여성미술가들의 입지가 얼마나 탄탄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다. 김인순은 최근에 미술평론가 김종길과의 대담에서 당시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회고한다. ‘그런데 민미협이라는 데가 워낙 보수여서 이 여성운동을 받아들이지를 못해요. 그때뿐만이 아니라 나중에 우리가 여성과 현실 전을 다섯 번 치르는 동안 아무도 안 왔어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다고...민미협에서 여성분과는 인정을 하는데 여성미술을 인정을 안하는 거예요. 남녀평등이라는 문제를 민족미술에서 다루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이야기이죠.’ 민중미술은 지배문화에 대항했지만, 저항적 주체로서의 강인성에는 부지불식간에 남성중심적 경향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같은 진영에 있었던 남성 작가와의 의식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작품만큼이나 주의 주장이 강했던 두 남녀 작가의 발언을 들어보자.


박불똥은 [공간]지 1986년 12월호에서 ‘내게 있어 그림은 미술이니 예술이니 하는 따위의 빛 좋은 용어로 포장된 고차원적 정서 놀음이기 보다 농부의 괭이, 노동자의 망치, 병사의 총칼과 다름없는 이명동의(異名同意)적 생존의 무기이다....순화된 감정이 양질의 예술창조에는 절대로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나로서는 다소 격렬한 치고받고 부딪히고 깨어지는 요통의 몸부림에 아직은 더 많은 애착을 느낀다. 어차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산다는 것은 곧 투쟁임을 부인하지 않는다....투쟁이야 말로 생존을 위한 생명현상의 본성이라고 신앙한다’고 주장 한 바 있다. 요컨대 ‘여성’ 작가 김인순에게 미술은 ‘쟁기이며 나팔’이었지만, ‘남성’ 작가 박불똥에게 미술은 ‘무기’였던 것이다. 진보적 운동을 함께 했지만 방점이나 태도의 차이가 감지된다. 김인순은 1980년대 여성주의 미술에 있어 대표작가로 꼽힌다. 미술사가 윤난지는 [1980년대 여성구상작가들의 작품세계]에서 스스로 ‘그림 노동자’라고 칭한 김인순은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토대로 작품을 제작함으로서 동시대성과 현장성이라는 사실주의의 본질을 성취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작가가 민중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말한다. 윤난지는 미술이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기 보다는 생활 속의 운동’(89)이라고 한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보다는 진실을 찾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삶의 현실 속에 있다고 믿는 사실주의의 충실한 계승자’로 평가한다.


5. 나가며


1990년대 말에 외환위기를 겪고 난 이후인 2000년대 이후의 냉랭한 시대에 비해 1980년대는 매우 뜨거운 시대로 생각된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원시/문명을 대조하는데 활용했던 cool/hot의 대조는 어제와 다른 오늘, 그리고 내일을 기대하는 사회에서 보편적이다. 1990년대는 오후 무렵의 낙조처럼 뜨거운 물질적 덩어리에서 빠져나온 에너지가 다양한 무늬를 만들었던 '문화의 시대'라 할 만했다. 1980년대 후반 민중미술의 한 부분으로 시작된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은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가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적 현상이다. 페미니즘은 처음부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공언했으며,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모두에 취약한 어떤 지점들을 파고들었다. 요즘 들불처럼 번지는 ‘미투’ 운동이 단순히 (개인적)성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적)권력의 문제임을 알렸던 것도 여성주의 또는 페미니즘이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에도 이어졌던 군사독재 정권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을 감당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었다. 지배와 억압은 적나라했고, 저항 또한 죽음을 무릅쓸 만큼 강력했다. 적어도 '초가집 지붕을 고치고 마을 길을 넓히는' 식의 1970년대 새마을 운동 풍의 계몽주의로는 불가능했다. 시동이 이미 걸려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무한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한 가속도를 내고 있는 한편에, 지배계층의 정치경제적 유착은 정치적 독재에 경제적 독점을 심화시켜 나갔다. 여기에 분단 상황과 연계된 제국주의의 압력이 또 하나의 모순으로 가세했다. 독점을 완화 또는 해체하려는 정치경제 문화적 차원을 아우르는 총체적 전선이 그어졌고, 사회의 각 계층은 이 중층적 모순들과 상호작용했다. 특히 민족과 민중이라는 대안적 주체가 부상했다. 민주화 운동이 대중화된 1987년 이후에는 시민도 부각되었다. 시민은 날로 확장되는 대중 소비 문화의 수동적 대상인 대중과도 구별되는 주체이다.


대중은 개인적인 것을 중시하지만, 비슷한 생산/소비의 패턴을 통해 비슷한 개인이라는 함정이 있다. 대중은 평소에는 대중이었다가 시민이 될 수도 있는 다중(多衆)과 구별된다. 따로 또 같이 집단적 지성을 발휘하는 다중적 주체의 시대가 열린 것은 보다 발전된 소통시스템이 일반화된 이후라고 생각된다. 민중미술은 이미 판화나 걸개그림 등을 통해 집단적 소통을 실험해왔지만, 이후에 소통기술에 관련한 기술의 폭발적 성장은 80년대 또한 역사로 생각하게 한다. 이제 정치적 운동이 전개되는 광장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다. 노동의 현장 또한 세계적인 분업에 의해 그 성격과 비중이 달라졌다. 물론 자본/노동의 대립은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지만 말이다. 정보의 소통 회로에 입자처럼 걸쳐있는 개인은 80년대에 운동의 중요한 운동의 두 가지 국면이었던 노동이나 혁명의 위상도 변화시킨다. 전 세계와 거의 보조를 같이했던 동시대적 변화의 기점은 PC 통신이 시작되던 무렵인 90년대 중반으로 생각된다.


정보혁명 시대의 미디어는 주체 개념을 약화 시킨다. 미디어는 분명 소통을 위한 엄청난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주체 또한 자동적으로 유통되는 정보의 한 항목으로 축소시킨다. 1980년대와는 다르지만, 여전히 사회적 문제는 남아있고, 사회적 문제를 낳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사회적 운동을 추동하는 주체를 호출한다. 예술은 이러한 주체의 새로운 구축(또는 해체-구성)에 필수적이다. 민족, 민중, 시민 등의 주체가 80년대와 90년대를 아울렀다. 얼마 전 촛불혁명을 통해 권좌에서 내려온 지배자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을 ‘백성(왕에 대응하는)’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때, 민중, 민족, 시민 등의 주체는 그저 중성적인 개념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모순을 헤처 나가려는 대안적 주체였으며, 분단-외세-자본주의의 모순에 얽힌 질곡의 현실을 극복하는 집단적 주체이기도 했다. 여성 또한 이 대안의 주체들과 함께 개인으로 또는 집단으로 참여했다. 페미니즘은 공적/사적 영역 모두에서 자기 목소리를 키워나갔다.


출전; 한국미술담론 활성화 사업, 1980년대 미술연구팀 워크숍 (예술경영지원센터)


참고문헌

라원식,[새누리를 일구어내는 페미니즘 미술-80년대 여성미술운동], 미술세계 92년 9월 p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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