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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혜 / 일으켜 세워진 바다

이선영

일으켜 세워진 바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조은혜의 작품은 생명이 기원한 곳, 이 세상 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다로부터 비롯된다. 알레브 라이틀 크루티어는 [물의 역사]에서 끝없이 진행되는 물의 순환은 이 세상 물의 97%를 차지하는 바닷물의 기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태양열로 기화된 물이 수증기가 되고 이 수증기가 대기로 들어가 구름이 된다. 구름이 응축되면 물이 비나 눈의 형태로 다시 대지로 떨어져 물을 재공급한다. 또한 바다는 모든 생명의 기원이기도 하다. 바다는 이처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고 넓다. 조은혜의 ‘over the horizon’(수평선 너머로) 전은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접하는 단일영역으로는 가장 큰 바다와 그 너머를 향한다. 그것은 너무 광대하고 멀기에 오히려 가상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의하면, 바다는 대지와 함께 현실을 잠식하고 있는 온갖 가상을 뛰어넘는 실재(the real)로 간주된다. 




설치전경, 가창창작 스튜디오



가장 실재적인 것이 가상처럼 보이는 것은 상당 부분 기법과 설치방법에서 연유한다. 작품 [수평선 너머로]는 얇은 종이로 마치 커튼처럼 여러 겹 드리워 자연 특유의 두툼한 물질성을 걷어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깊이가 있지만 얇은 층이 여러 겹 겹치면서 생겨난 깊이이다. 작가는 닥종이 위에 분채로 언뜻 바다와 같은 표면을 연출한다. 바닷물결을 이루는 형상들의 그려진 종이 표면이 구겨진 정도와 조명이 결합 되어 햇살에 반짝이는 듯한 바다 표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러한 환영은 채색되어 덧대어 이어진, 독특한 표면처리가 되어 있는 한 장의 종이임을 확인할 수 있다. 채색한 다음 바니쉬를 처리하여 투명함과 비치는 시각 효과를 주었다. 빛과 바람과 유희하는 물결의 다양 형태들이 있지만, 색을 많이 쓰지는 않는다. 최대 세 가지 색에서 농도만 다르게 해서 물의 다양한 깊이를 표현한다. 


작품 [수평선 너머로]에서 가장 멀리 보이는 바다면은 가장 연하고 얇다. 그것은 그 앞에 설치된 다른 (더 진하고 두터운)바다 면들에 비해 더 잔잔해 보인다. 채색 방식 외에 한지 자체에 내재 된 미세한 선들도 가세한다. 시각적 눈속임이 절묘한 만큼 작품의 물질적 조건은 발견적 가치를 가진다. 그것은 전시장의 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는 신축성을 가진다. 바닥에 닿는 부분은 모서리를 둥글려 놓아 그것이 말려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꿈틀거리며 분열하는 세포나 카무플라주(camouflage) 무늬처럼도 보이는 물결은 한 장 이상의 종이가 이어진 표면에 새겨진 주름이다. 전시가 끝나면 바다 이미지를 담은 종이들은 둘둘 말려 보관된다. 마치 바닷물의 끝없는 운동처럼 접힘과 펼침은 반복될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선 관객의 발치에 있는 둥글게 말려있는 수수께끼 같은 실체는 접힘과 펼침에 관련된 상상과 생각을 표현한다. 








질 들뢰즈가 [주름]에서 개진한 사상처럼, 세계는 접힘과 펼침의 관계로 이어진다. 가령 생명의 씨앗은 접혀진 잠재성이었다가 성체가 되면서 펼쳐진 현실성이 된다. 또한 조은혜의 작품은 표면뿐 아니라, 이면 또한 중요하며 감상의 대상이 된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먼저 보게 되는 겉이 바다의 표면이라면, 조명을 반사하지 않는 이면은 어딘가의 내부로 들어온 듯한 아늑한 느낌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방부터 더 원초적으로는 양수로 가득 차 있었을 자궁으로부터의 기억을 일깨운다. 크루티어의 [물의 역사]는 거의 모든 문명에서 생명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상정하고 있기에, 많은 언어에서 바다라는 단어는 여성의 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가령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수메르 어에서 ‘마르mar’라는 단어는 바다라는 뜻도 있지만 자궁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조은혜의 작품에서 표면과 이면은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이면은 깊숙이 숨어있지 않다. 조은혜의 작품에서 이면은 표면과 같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도 반응하면서 팔랑거리는 표면/이면은 뫼비우스 띠와 같은 관계를 가진다. 그것은 본질/가상을 나누는 이원성이 아니라, 하나의 유동적 표면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시야가 가닿는 바다 풍경이면서 내부이다. 바다를 보는 마음일 수도 있고, 바다로부터 출발한 생명체에 내재 된 몸 속의 바다일 수도 있다. 몸이라는 소우주에 담긴 대우주의 관계는 인간이 바다 앞에서의 감흥을 낳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앞뒤를 연동시킨 바다 풍경이 단지 시각적인 환영일 수 없는 이유이다. 작가는 자기 치유차—그래서 작품에는 질풍노도(疾風怒濤)하는 바다는 발견되지 않는다--바다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소리 또한 채집한다. 작품 초입에 있는 접혀진 형태 내부에는 바다 소리가 들릴락마락하게 새어 나온다. 작가에 의하면 풍경이든 소리든 일부러 찾아 나설 때 보다 우연히 만날 때 좋은 결과를 낳는다. 






이번 전시에서는 바다지만, 조은혜의 작품 속에서 물은 정화수로부터 파이프 관속의 물까지 다양한 계열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물은 단순한 소재라기 보다는 그 유동성과 변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기에는 삶뿐 아니라 죽음 또한 포함된다. 철학자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물은 항상 흐르며 떨어지며 그리고 수평적인 죽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물을 응시한다는 것은 흘러간다는 것, 분해한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이다. 바슐라르가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물의 운명을 말할 때 그는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 모두를 지적한다. 조은혜가 ‘수평선 너머로’ 보는 시점은 지상에 서 있는 모든 생명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물론 물은 그러한 종착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유동성을 가진다. 그 점에서 작가가 바다를 일으켜 세운 방식은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이미지와 설치의 결합은 광막한 장소에 고여있는 듯하면서도 내부에서는 움직임이 있는 바다의 면모를 표현한다. 


삶의 명암을 모두 포함하는 변형과 유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차원의 유동성이 요구되었다. 조은혜의 작품은 장지에 그려진 다양한 물결의 흐름 뿐 아니라 설치의 방식도 유동적이다. 물론 유동성은 이도 저도 아닌 혼돈이 아니라, 경계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한다. 이전 작품에서 [투명, 불투명, 그 경계], [채움, 비움, 그 경계] 같은 제목은 경계에 대해 작가가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전시장에 5장으로 펼쳐진 것이 바다를 닮았다면, 수평선을 응시하는 위치에 있는 접혀진 덩어리는 작가를 포함한 관객이다. 저편의 바다에도 접혀진 부분이 있다. 그 또한 분채나 종이 자체의 질감에 의해 그 내부에 주름을 포함한다. 종이를 얼마든지 덧붙여 바다 면을 확장할 수 있는 만큼 접혀질 수 있다. 접혀진(또는 말려진) 것은 바다라는 대우주를 관망하는 소우주, 즉 주체이다. 조은혜의 작품에서 소우주인 주체 또한 대우주처럼 유동적이다. 소우주는 보다 짧은 시공간 속에서 변모를 거듭한다.






몸, 특히 여성적인 몸의 유동성을 주장한 저자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라캉을 인용하면서 견고하고 안정된 정체성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인간의 형태에 매료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여성은 통합된 몸 이미지를 성취하기 힘들거나 거부하는데, 그것은 여성이 몸을 확고한 자기동일성을 가진 무엇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미지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로츠는 통합된 몸에 대한 표식이 용해되거나 해체되면 주체는 상상계 이전 단계의 ‘리얼(real)’로 빠져들게 될 위험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실재계는 그 전형성으로 인해 주체를 억압하는 상징계를 벗어나게 해준다. 조은혜가 이미지와 설치의 방식으로 표현한 바다는 유동적인 여성의 몸을 포함한 온 우주의 실재와 관련된다. 실재계는 문화적으로 재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새로움 또는 갱신을 위해 끝없이 다가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전; 가창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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