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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환타지 미술연구; 자화상을 중심으로

이선영

한국의 환타지 미술연구; 자화상을 중심으로
Fantasy Art in Korea ; focusing on self-portraits


권경엽(Louise Kwon)_엔젤스테일(Angel_s tale)_97X145.5cm_oil on canvas_2012



국문초록

환타지(fantasy)가 그 무엇을 의미하든 그 반대쪽에 현실(reality)이라는 무게중심이 자리한다. 현실이라는 개념 또한 환타지만큼이나 불확실하지만, 생물학적 생존으로부터 초월할 수 없는 삶에서 현실이 좀 더 중요하다는 가치평가가 보편적이다. 환타지는 현실로부터 날아올라 자유로워지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환타지는 20세기 말에 일어났던 인터넷을 바탕으로 한 정보혁명을 통해서 더욱 중요한 문화 현상이 됐다. 환타지 속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도 환타지가 있다. 환타지는 현실과 짝패의 관계이다. 환타지는 창의적인 면을 중시하는 예술과 관련되며, 예술 또한 대중과 소통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는 접점을 가진다. 심리적 현실인 환타지가 생성되고 전개되는 출발점은 자아이다. 자아의 상인 초상화는 환타지의 무대가 된다.

자크 라캉으로 대표되는 현대 심리학은 거울이 조각난 몸체를 통합하는 상상의 단계를 설정하는데, 분열된 것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균열들은 완전히 봉합되지 못한다. 이 논문의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는 라깡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적 언명을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 한다’로 변형시키면서 존재와 의식 사이의 분열을 표현했다. 환타지는 그러한 균열에서 생겨난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 그리고 거울로서의 회화는 역설적으로 자신과는 낯선 것들이 생성되는 장이다. 환타지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화상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 자아가 무엇인가 상상한다는 2차적 차원 이전에 자아의 상 자체에 환타지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본 논고는 2000년대 이후, 비교적 최근에 한국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발표된 초상화를 속에 나타나는 환타지를 살펴본다. 

키워드
자끄 라깡의 거울 단계, 허구, 픽션, 상상, 욕망 

한국의 환타지 미술연구; 자화상을 중심으로
Fantasy Art in Korea ; focusing on self-portraits

Ⅰ. 서론
Ⅱ. 환타지; 자아의 소망 충족의 무대
Ⅲ. 자화상에 재현되 환타지와 현실의 관계
Ⅳ. 자화상의 매개로서의 거울
Ⅴ. 자화상에 드러난 환타지의 예술적 언어
Ⅵ. 결론


Ⅰ. 서론

환타지(fantasy)라는 단어는 몽환(夢幻), 환상(幻想), 공상(空想), 망상(妄想)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곤 하지만,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환타지’라고 하면, 가령 ‘순정만화’나 ‘하이틴 로맨스 영화’, 방송가에서의 ‘예능’같이 모호하면서도 모두 이해하는 듯한 단어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이 논고에서 환타지라는 용어를 그냥 썼으며, 맥락에 따라 환상으로, 때로는 허구로 표현했다. 환타지의 대표적인 예는 ‘꿈의 공장’이라 불리우는 헐리우드에서 생산된 문화상품이다. 필자의 기억에 ‘판타지’와 유사한 맥락의 단어를 처음 의미 있게 접한 것은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환타지아(Fantasia)(1940)로, 클래식 음악을 동물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음악 자체가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데, 음악과 함께 흐르는 영상마저 난데없었지만, 그 새로운 조합은 전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대중문화의 환타지한 측면을 보여주었다. 

환타지한 작품은 정확한 지시대상으로부터 분리된 기표와 기표의 결합이 특징이며, 굳이 현실성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창안한 맥락에 따라 흘러갈 것만을 요구한다. 그 결과물은 비판적인 거리감보다는 몰입을 낳는다. 대중문화는 당대 진보적 기술로 대중들의 소망을 반영함과 동시에 예술적 전통 또한 참조한다. 환타지로 분류되는 시각 이미지에서 낭만주의 풍의 분위기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어찌 보면 근대 대중문화와 함께 태어난 낭만주의가 원조 환타지여서일 것이다. 환타지가 그 무엇을 의미하든 그 반대쪽에 현실(reality)이라는 무게중심이 자리한다. 물론 현실이라는 개념 또한 환타지만큼이나 불확실하지만, 생물학적 생존으로부터 초월할 수 없는 유기체의 삶에서 현실이 좀 더 중요하다는 가치평가는 가능하다. 환타지는 마치 하나의 바윗덩어리에 매단 여러 색깔의 풍선처럼,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호환성이 있다. 다양성은 풍부함이기도 하지만 혼란이기도 하다. 

환타지 자체가 그런 역설을 포함한다. 이 논고에서 환타지에 대한 설명에 활용한 것은 자크 라캉 이론이다. 그중에서 상상계에 대한 내용이다. 라캉이 인간 심리의 상상적 단계에서 비유적으로 활용하는 거울은 자화상을 설명하는데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라캉의 이론은 내가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에 대한 괴리를 강조하는데, 이점은 자화상이 단순히 자기의식의 반영이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자화상에서 환타지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은 자아의 반영보다는 자아의 분열과 변형이라는 측면을 더욱 두드러지게 할 것이다. 이 이론이 적용된 자화상은 2000년대 이후의 한국 미술에서 찾아본 것으로, 2000년 이후는 인터넷의 보편화에 의해 ‘거울’이 ‘전자거울’로 확장되었다고 본다. 물론 본 논고에서 환타지라는 개념은 특정 이론보다는 내가 본 작품과 작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었지만, 이론을 통해 더 확실하게 밝혀지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환타지는 현실로부터 날아올라 자유로워지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현실에 만족한다면 굳이 환타지가 필요 없을 것이다. 환타지는 환타지가 필요 없을 때까지만 존재하며, 예술처럼 ‘영원해야 한다’는 미학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 환타지는 자아의 요구(대부분 사회적 요구와 상호관계적인)에 대한 만족이라는 도구적 속성을 가진다. 그 점은 환타지와 예술적 상상력과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환타지와 상상력을 기성복과 맞춤복으로 비유하고 싶다. 환타지는 기존의 것, 특히 기표에서 선택하고 조합하는 경향이 있다. 몽상가들도 냉철한 개념미술가 마르셀 뒤샹처럼 선택한다. 그것은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라는 예술에 대한 신학적 가설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선택지가 넓어지면 환타지도 창조적 상상력에 육박할 수 있다. 인터넷 기반의 문화 생태계는 그러한 선택지를 획기적으로 넓혀주었다. 이전 시대처럼 자료를 구하기 너무 어렵다면 그것은 환타지가 아니라 리얼리즘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욕망은 소소한 현실 도피부터 현실을 삼켜버릴 정도로 강력해지는 단계까지 여러 강도가 있다. 도피가 돌파까지도 이어진다면 문화는 예술로 고양될 수 있을 것이다. 문자적 정보나 이미지를 접하는 최초의 관문이 인터넷이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있다. 부정적인 부분은 코드화되지 않은 것들은 배제된다는 점이다. 긍정적인 부분은 코드들의 용이한 탐색을 통해서 얇지만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하여 퍼즐을 맞추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환타지는 20세기 말에 일어났던 인터넷을 바탕으로 한 정보혁명을 통해서 더욱 중요한 문화 현상이 됐다. 본 발표에 예로 든 작품들은 거의 2000년 이후 필자가 보았던 전시에서 환타지에 관련된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을 선별한 것들이다. 필자가 작가와 대부분 실제로 만난 경우를 중시한 것은 환타지라는 속성상 현실적 기준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 자화상들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그들과 얼마큼 닮았는가에 대한 기준 말이다. 그것은 환타지 풍의 문화나 예술이 있음직함이라는 장치에 더욱 신경을 쓰는 것과 유사하다. 미술사 연구자가 향후에 2000년 이후의 미술을 연구할 때, 인터넷 기반의 생태계는 중요한 계기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그 중심에 환타지가 있을 것이다. 환타지란 무엇보다도 지시대상과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기표의 유희가 특징적이다. 유희가 가능하려면 일단 가벼워져야 하는데, 그 조건은 대상이나 기호, 의미가 아니라 기표일 것이다. 환타지가 더 이상 환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환타지와 관련된 수 많은 문화산업들에서 확인된다. 환타지 속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도 환타지가 있다. 현실 속의 환타지는 앞서 언급한 헐리웃의 문화산업이 대표적이지만, 사소한 소비행위에도 환타지는 필요하며 흥행에 성공하는 상품에는 단순한 기능주의를 넘는 무엇, 즉 환타지가 내포되어 있다. 

생산 방식이 금방 공유되는 현대사회에서 이익은 물신주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표가 특히 중요하다. 기표는 대상이나 의미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이익을 낳기 위한 빠른 자본 회전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유행은 기표의 강제적 순환이다. 예술 또한 이러한 유행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환타지는 근대 낭만주의의 대중적 형태일지 모르지만, 다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에 있어 나름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 점에서 환타지는 창의적인 면을 중시하는 예술과 관련된다. 예술 또한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과제를 가진다. 1980년대 ‘리얼리즘의 시대’를 지나고 나서 1990년대의 한국 미술계를 강타했던 키치 열풍은 대중문화나 하위문화를 예술보다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생각했던 젊은 예술가들의 경향이다.(도1) 키치는 행복이나 풍요, 아름다움에 대한 가상을 제공할 때 대중적 환타지에 의지한다. 환타지는 현실과 짝패의 관계이다. 

심리적 현실인 환타지가 생성되고 전개되는 출발점은 자아이다. 자아의 상인 초상화는 환타지의 무대가 된다. 초상화, 특히 자화상은 거울을 매개로 한다. 스마트폰을 포함한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 또한 일종의 거울이다. 정보혁명을 통해 현대의 대중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전자거울의 방이라는 디지털 생태계에서 살게 되었다. 현대인은 원시인들이 자연에 둘러싸여 살았던 만큼 이러한 거울의 방에서 사는 것이다. 자크 라캉으로 대표되는 현대 심리학은 조각난 몸체를 통합하는 거울에 있어서의 상상적 단계를 설정하는데, 분열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균열들은 완전히 봉합되지 못한다. 환타지는 그 틈에서 번성한다. 균열로부터 변형이 일어난다. 닮음으로부터 약간의 일탈부터 괴물 같은 모습에 이르기까지 변형의 정도는 다를 수 있다.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보고, 때로는 오로지 자기 모습만을 그리는 작가에게 초상화는 하나의 동일자가 무한한 타자로 변신하는 매력적인 장르이다. 

변신은 거울 앞에서의 한갓 된 유희부터 거울 너머로의 여행까지 다양한 수위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 그리고 거울로서의 회화는 역설적으로 자신과는 낯선 것들이 생성되는 장이다. 오랫동안 현실에 대한 환영(illusion)으로 간주 되어 왔던 미술은 주체를 재현해왔다. 환타지는 현실과의 닮음을 추구하는 재현 역시 하나의 틀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환타지는 거인과 난쟁이, 요정 등 온갖 신기한 것들이 출몰하는 그 어떤 장르보다도 자화상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 자아가 무엇을 상상한다는 2차적 차원 이전에, 자아의 상 자체에 환타지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의 환타지와 다른 점은, 선택 대상이 되는 코드들이 눈에 띄기 위해 무한경쟁 하는 시대에 걸맞게 과장이 심하다는 점이다. 대중적 환타지의 대표적인 예로 코스튬 플레이의 예를 생각해 보라. 인간의 몸과 얼굴은 변형을 정도를 가늠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어주기에 초상화는 환타지들을 비교할 수 있는 적절한 맥락을 만들어준다. 

본 논고는 2000년대 이후, 비교적 최근에 한국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발표된 초상화에 나타나는 환타지를 살펴본다. 본론의 시작인 2장에서는 환타지에 대한 심리학적으로 정의를 짧게 소개한다. 심리 상태가 육체와 밀접하다는 정신분석학적 가설을 바탕으로, 여성/남성 작가에게 나타나는 환타지의 차이를 설명한다. 3장에서는 환타지와 현실의 관계를 논한다. 환타지는 현실로부터 시작되며, 다시 현실로 귀환한다. 그사이에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본다. 4장에서는 환타지의 중요한 매개가 되는 거울상에 대한 논의를 통해 기만과 현혹, 분열이나 분신의 주제를 다룬다. 5장에서는 현실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평행한 또 다른 현실로서의 예술, 즉 자기지시적인 단계를 지향하는 환타지의 측면을 다룬다. 이 단계에서의 환타지는 진지한 예술과 매우 가까워진다. 환타지는 순간적 기분전환이나 시간 떼우기 식 오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현실과 연결된 통로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도 현실은 그자체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환타지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이면서 또 다른 현실이고, 때로는 현실로 가는 계단이 되어주기도 한다. 환타지는 현실적으로 보이기 위해 고전적이거나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한다. 가짜이기 때문에 진짜같음이 더욱 요구된다. 하지만, 그러한 언어 역시 투명한 것은 아니다. 예술적 언어의 불투명성은 예술적 언어의 자율적 측면을 강조한다. 더구나 현대는 고전주의 시대도 사실주의 시대도 아니다. 환타지의 어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보다는 2차적 현실로부터 파생된 시뮬라크르이다. ‘원본 없는 복제’(질 들뢰즈, 장 보드리야르)라고 정의되는 시뮬라크르는 모더니즘 이후의 문화예술 비평에서 중요하게 생각된다. 결론을 포함하는 마지막 장에서는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 환타지로서의 예술을 통해, 예술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사항이 투사된 환타지의 사회적 차원을 살펴본다. 그것은 예술을 다시금 신화나 종교와 근접시키며, 모더니즘에 의해 단절된 삶의 다양한 원천과의 재접합을 통해 예술에 풍부한 영양을 제공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Ⅱ. 환타지; 자아의 소망 충족의 무대

자아의 상과 관련된 현상인 환타지는 먼저 심리학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 난해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대한 대중적인 저서를 쓴 철학자 마단 사럽은 『알기쉬운 자크 라캉』에서 ‘환상(phantasy)이란 주체가 주인공이 되어 소망의 충족을 재현하는 상상적인 장면을 말한다. 환상의 본질은 그 불가능성이다. 비록 상상적이긴 해도 환상은 주체에 절대로 필요한 구조’ 라고 풀이한 바 있다. 이러한 정의에서 환타지는 개인의 소망을 일련의 재현적 과정을 통해 대리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크 라캉의 이론에서 나타나듯이, 그리고 일상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욕망은 만족 될 수 없다. 욕망의 대상으로 가정된 것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면 대상은 뒤로 한걸음 물러난다. 환타지는 삶이라는 황량한 사막을 건너는 피로한 여행자의 눈에 어른거리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개인의 꿈에 출몰하는 이미지들이 그렇듯이 환상의 재료는 현실이다. 

자화상에 나타나는 환타지는 자기라는 가장 확실해 보이는 현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여행자의 갈증으로부터 비롯된 착각이지만 그러한 희망을 통해 현실에서의 어려움은 일부나마 극복된다. ‘저주받은 천재’로 대변되는 근대 예술가의 신화에 잘 나타나 있듯이, 예술 하는 삶 자체가 어려움의 연속이다. 예술가에게 작품은 자신의 소망 충족을 위한 무대의 하나이다. 그것이 현실이 아닌 가상적인 무대이니만큼 유희는 극대화될 수 있다. 생물학적 욕구가 만족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욕망을 그렇지 않다. 자크 라캉은 생물학적 욕구(need)와 상상적 요구(demand), 그리고 상징적 욕망(desire)을 구별했다.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생물학적 욕구는 만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만족 될 수 없다. 욕망은 기표와 관련된 것이고 기표의 알맹이는 없기 때문이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에게 기표는 끝없이 미끄러지는 무엇이다. 기호, 그리고 나중에는 기표는 대상과의 일대일 관계가 아닌 느슨한 연결망을 이룬다. 

페터 비트머는 『욕망의 전복』에서 라깡의 거울 단계를 해설하면서, 상상이 쉽게 충족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욕망이 상징계에 속하고 욕구가 실재계에 속한다면 요구는 상상계에 속한다. 요구는 완벽성, 충족을 표상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구는 이상화하는 것에 가까이 있다. 욕구가 상징계의 영향에 의해서 소외되고 욕망으로 전환된다면 상상계는 이 소외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완벽한 충족, 행운, 직접성이 마치 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욕망은 그렇게 간단히 충족되지 않는다.’  이러한 괴리는 가장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존재인 나에게도 일어난다. 거울을 통해 자아의 상을 보게 되는 자아는 분열된 육체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자아는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거부한다. 여기에서 사회의 요구를 무난히 수용하거나 또는 그러한 요구의 부당성에 반발하는 이상화된 상이 생겨난다. 이상의 존재 자체가 현실과의 괴리를 말해준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남에 있어서 사회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즉 사회는 자아에 대해 타자로 다가온다. 나의 현실과 이상, 내가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의 괴리는 필연적이다. 타자의 시선을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측면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괴리는 괴리이며 소외를 낳는 그것은 극복의 과제로 떠오른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괴리가 중요한 사업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자본의 증식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결코 만족 될 수 없는 소비생활은 이러한 괴리를 에너지로 해서 진행되곤 한다. 그러나 예술은 소비가 아닌 생산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야기되는 소외는 예술적 생산의 동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또한 완벽한 충족이 불가능하기에 작업은 완결되지 않고 계속된다. 만화와 초상의 중간 단계 쯤에 해당하는 아름다운 자화상을 그리는 권경엽의 작품을 보자.(도2) 작품 속 초상은 최초에 자화상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본인의 모습과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녀의 모든 작품들이 본질적으로는 자아상의 변주이다. 

티끌 하나 없는 도자기 피부에, 핏기가 없는 외모에서 현실성은 휘발된다. 그러나 상처를 상징하는 붕대는 그것이 트라우마의 치유에 대한 소망이 담긴 자아의 요구를 상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림은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인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을 오마주하며, 가면을 만들어 쓰고 행위한다.(도3) 서양미술사를 참조하며 행하는 가장 놀이(mimicry)를 통해 자아는 강력한 신화적 여성으로 재탄생한다. 로제 카유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하는 자가 자신의 인격을 일시적으로 잊고 바꾸며 버리고서는 다른 인격을 가장하는데, 이러한 표현을 행하는 놀이를 미미크리라는 말로 지칭하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들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포토샵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이것저것 붙여 보면서 현실 또한 그러한 붙이기로 이루어져 있음을 풍자하곤 한다. 작가들의 상상력은 현실 풍자 뿐 아니라, 종교적, 과학적 상상으로 변주된다. 

유사 과학자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이형구는 동물의 시각을 연구하여 동물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어떨까 하는 상상을 실험한다. 그는 곤충이나 어류의 시각을 재현하는 기구를 만들어 착용하고 동물 되기를 시도한다. (도4) 21세기의 작품에서 환타지를 공급하는 주된 원천은 인터페이스이다. 기괴한 초상을 그리는 작가 이샛별이 그린 ‘인터페이스의 풍경’은 실제의 정글같이 복잡하고 떠도는 기표들과 순간순간 결합하는 자아의 상 또한 기괴하다. 그러나 어떠한 온기도 없는 냉랭한 모노톤의 작품은 이 전자거울이 실제의 어떤 차원을 삭감시키고 있음을 알려준다. (도5) 이러한 삭감은 유희를 원활하게 한다. 정보 회로 속에 존재하는 주체는 가변적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휴머니즘이라는 이전 시대의 인간적 기준은 흔들릴 수 있다. 매체계의 급변은 ‘인간 이후(post human)’에 도래하는 사상(Post Humanism)의 바탕이 된다. 

한편 기준의 불확실함은 오히려 여성성/남성성이 강화되는 현상을 야기 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여성과 남성은 극단적인 섹시함과 강력함을 가지고 있곤 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의 바다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 근거한 재현주의를 해체한다고 주장되기도 하지만, 정보화된 주체의 상이 기존의 재현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도 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코드와 코드가 쉽게 붙었다 떨어졌다 할 수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는 온갖 괴물의 온상이다. ‘인간 이후’의 세계에서 각종 괴물은 인간만큼이나 친숙하다. 괴물은 자아에 이미 똬리를 튼 것으로 문화산업이나 예술가들에 의해 가시화된다. 그것은 무의식의 의식화 작업이다. 폭격기의 시야에서부터 비롯된 사이버 세계는 공격적이다. 대중문화와 현대의 초상에 만연한 괴물적 형상들은 자아 내부의 이질적 타자가 표현된 것이다. 물론 공포스러운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해서 동일시하기도 하는 캐릭터가 등장하여 자신의 희망 사항을 대리로 수행한다. 주체의 변신에 필요한 환타지의 원천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Ⅲ. 자화상에 재현되 환타지와 현실의 관계

환타지는 비현실적이지만, 비현실에는 현실이 포함되어 있다. 비현실적인 환타지는 역으로 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리얼리즘은 현실에 충실한 유파이다. 리얼리즘은 시대에 따라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지만, 문예사조사의 기본 축이 될 수 있다. 변형이 있기 전에 반영이 있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이 아닌 허구이지만, 사람들은 예술에서 현실성이 얼마나 있는가를 끝없이 평가한다. 현실은 때로 예술에 의해 더욱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예술에 있어서 환상(fantasy)의 몫을 미메시스 만큼이나 중시했던 저자 캐스린 흄은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과학적인 관찰이 리얼리즘의 모델’이라고 보며, 이러한 리얼리즘은 ‘기본적으로 새로움과 입증 가능한 진리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환상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환상은 꿈같은 과대망상이나 응축의 상태를 허용한다. 과학적 언어(확대하면 리얼리즘의 언어)는 이러한 효과가 없다. 그 전체 기반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나의 지시대상만을 나타내는 전문용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 언어는 명백한 것을 지향한다. 반면에 환상은 풍부함을 지향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으므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는 가변적이다. 리얼리즘 또한 하나의 모델이다. 다만 그것이 모델임을 잊게 할 정도의 눈속임수를 쓴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환타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초현실주의는 이러란 눈속임수와 게임을 한다. 대표적인 작가는 르네 마그리트이다. 비평가 수지 개블릭은 『르네 마그리트』에서 현실이란 ‘인식(perception)과 관념(idea)의 매개체를 통과해야 한다는 헤겔의 관점’을 따른다고 하면서, 말과 사물의 복잡한 관계를 회화라는 환영의 장치로 실험했던 마그리트 작가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의 재현방법이 유사성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재현방법은 인지 법칙을 확립하기 위한 암호체계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였듯이 언어란 현실의 그림이 아니라, 많은 용도를 지닌 도구이기 때문에 재현방법은 관습의 문제이다. 재현이란 오브제를 그대로 비추거나 모방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과정이며,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상징적 연관 관계임을 보여준다. 회화가 오브제를 재현한다는 것은 오브제를 모방하기보다는 이를 분류하는 잘 알려진 표현체계여야만 한다.’
 
리얼리즘 또한 하나의 언어이고 관습이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에게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경계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현실(reality)과 실재(real)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특히 지난 세기 후반에 팽배했던 포스트모더니즘 영향으로 허구의 몫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지한 예술가들은 실재의 한 국면인 현실에 고착되기보다는 근본적인 실재를 탐구한다. 현실이나 실재는 그자체가 아니라 언어의 매개를 거치며 언어의 투명도는 사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현실 반영을 자처하는 리얼리즘에서 언어의 투명도는 최대이다. 이때 언어는 자신을 숨기고 지시하는 대상을 전달하는데 치중한다. 관객은 매체를 잊고 매체가 투명하게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확인할 뿐이다. 추상미술처럼 지시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자율적’ 예술에서 언어의 투명도는 최소—그린버그가 강조했듯이--가 되어 결국은 자기지시성으로 귀결된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픽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론』에서 ‘모든 예술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이 마니교의 전쟁 마냥 존재하고 있다. 즉 의사소통의 충동, 그리하여 의사소통의 매체를 수단으로 취급하려는 충동, 그리고 원재료로부터 인공물을 만들려는 충동, 그리하여 매체를 목적으로 취급하려는 충동이다’(윌리엄 개스)라고 인용한 바 있다. 환타지를 정확하게 보여줘야겠다는 의도는 기법적으로 리얼리즘의 언어를 구사하게 하지만, 자기지시적인 방향으로도 흐른다. 환타지의 현실 반영적 특징은 4장에서, 환타지의 자기지시적 특징은 5장에서 따로 다루고자 한다. 환타지는 있음직함을 넘어서 2차, 3차... n차의 생산물로 나아가면서 무성생식같은 분열을 거듭한다.

현실성은 점차 휘발되고 현실임직함을 위한 도구들로 가득 채워진다. 현실 묘사에 탁월한 기술을 가진 작가 최승선의 작품은 언어적으로는 리얼리즘이지만, 내용은 환상적이다. (도6) 작가는 성인이지만 아이의 모습으로만 재현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작품의 배경은 탄광촌에서 폐광으로, 그리고 카지노 도시로, 그야말로 마술적으로 변신한 고향 땅이며, 작가는 오직 어릴 때 모습으로만 재현된다. 어릴 때는 구질구질한 탄광촌을 떠나고 싶었지만, 탄광이 폐광이 되면서 어린 시절도 함께 떠나갔기에 그의 작품에는 깊은 향수가 깔려있다. 변화 이전이나 변화 이후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그는 항공 모자를 쓴 영원한 어린 유랑자의 모습으로 가상적 시공간을 떠돈다. 

작가에게 현실은 동시에 비현실이다. 작품 속에 늘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신창용의 경우, 이상적 남성상이 투사된다.(도7) 영화나 사이버스페이스의 영웅들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으로, 전능한 힘을 가진 남성적 환타지를 구현한다. 그의 작품에는 만화나 영화에 먼저 노출된 세대의 환상적 캐릭터로서의 초상이 발견된다. 강함은 남성적 가치이며, 이러한 이미지는 게임 등 사이버스페이스에 넘쳐난다. 그러나 대중문화와 달리 예술에서는 기존의 가치를 그저 확인하거나 확장하는 대신에 풍자한다. 작업실에서 야수들에게 뜯어 먹히는 환상을 표현한 심점환의 자화상에서 죽어가는 예술가의 몸은 어떤 실체감도 없이 종잇장처럼 취약하다.(도8) 더구나 그의 몸은 자신의 창조물에 의해 찢기는 듯하다. 인간의 상징적 우주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가부장적인 권력은 남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사회의 규칙을 법칙처럼 선포하는 자들 앞에 유영하는 자화상을 표현한 김인배의 작품에는 상징계의 억압성이 잘 나타난다, 상징계의 규칙과 자아의 상상이 맞부딪치는 경계에서 자아는 카프카적인 변모를 통해 탈주하려 한다.(도9)  

Ⅳ. 자화상의 매개로서의 거울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거울은 자화상의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나 정확함이라는 기대치에 부정확함이라는 역설이 끼어드는 거울은 그자체가 환타지의 무대가 된다. 환타지는 여러 감각에 호소할 수 있지만, 특히 시각적이라고 여겨진다. 환타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보이는 것을 더욱 요구한다. 가령 순수한 의미의 문학을 주장하는 문학가는 문학 보다 하위등급으로 간주되는 ‘환타지 물’과 비교한다. 환타지 또한 문학만큼이나 서사가 있지만, 순수문학의 관점에서 그것은 시각적인 서사, 그래서 만화나 영화같은 것으로 쉽게 각색될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고독한 예술가를 거부하고 대중적 흥행을 노리는 문학가는 처음부터 그러한 환타지물에 맞게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나 만화가 영화가 되는 경우도 많다. 하나의 소스(콘텐츠)는 여러 장르로 변주될 수 있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다루어지는 성적 환타지의 매개물인 물신은 시각적이다. 그것은 여성인 어머니가 남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직전에 본 것들, 가령, 구두, 속옷 등이다. 작은 가죽구두는 여성의 성기와는 무관하지만, 물신 숭배자에게는 욕망의 기표가 된다. 보다 일상의 차원에서 현대적 환경 그자체를 규정하다시피 하는 상품에서 시각적 기표의 역할은 중요하다. 몇 년 전에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상품 ‘피카츄 빵’은 빵 하나를 먹는 행위에도 개입되는 환타지를 알려준다. 피카츄 빵에서 피카츄라는 실체는 단팥빵에서의 단팥, 야채빵에서의 야채와 같은 위상을 가진다. 그러나 피카츄 자체가 가공적 캐릭터이기 때문에 피카츄 맛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피카츄 빵에서 피카츄는 스티커라는 부록으로 들어있을 뿐이다. 아이들은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그 빵을 사지만 맛없는 빵은 버린다고 한다. 

피카츄를 스티커 형태로 시각화하는 일은 쉽지만, 피카츄 맛을 내기는 힘들다. 만약 제빵업자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 나오는 향수 제조자처럼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면 예술 못지않은 창의적인 빵, 또는 환상적—음료수 이름 중에 환타(fanta)가 있듯이--인 빵이 되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여성이나 남성이 광고모델로 나오는 모든 상품에는 상품의 내용이나 기능과는 무관한 환타지가 부록처럼 붙어있으며, 때로 부록이 더 중요하다. 상표가 무늬로 되어있는 명품의 예는 많이 있다. 기표 그자체가 몸통이 되는 것이다. 상품과 관련된 기표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각적인 것이고 시각적인 것은 복제하기 쉽다. 그래서 남용되기 쉽다. 그래서 현대는 ‘스펙터클의 시대’(기 드보르)로 정의된다. 현대의 스펙터클이 있기 전에 근대의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a)’가 있었다. 아케이드에 상품이 가득 배열된 19세기의 파리를 거닐던 발터 벤야민이 본 것이 마법의 환등 같은 도시풍경이었다. 그것은 유령처럼 떠도는 도시의 산책자에게 다가오는 도시풍경이기도 하다. 

F로도 시작하고 Ph로도 시작되는 이 단어는 우리나라 말로 ‘주마등’과 비슷한 내용을 가진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판타스마고리아 개념은 마르크스가 상품물신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자화상의 중요한 도구가 되는 거울은 시각적인 대상이다. 라깡을 비롯한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행위에 내재된 심리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거울상의 예를 들었는데, 그것은 거의 이론의 차원으로 고양되었다.

자아에 관한 상상과 관련된 거울에 대한 이론은 시각 이미지에서의 환타지를 연구하는데 시사점을 던져준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거울상의 역설은 환타지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라깡의 거울단계 이론을 거울의 문화사라 할만한 자료들의 예를 들면서 풍부하게 기술한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의 반사상은 상(image)과 닮음(resemblance)의 개념--반사상은 원래의 모습을 불완전하지만 정확하게 옮겨 놓는다—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하면서, ‘인간은 언제나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진 동일자이면서 타자이며 닮았으면서도 다르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거울 안에서 나의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는 바뀐다. 반사상이 만들어질 때 다름이 스며드는 거울은 얼굴의 이질성이 솟아나는 역동적인 장이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상과 환상을 연결 짓는다. ‘반사상에 대한 의식이며 의식의 반사상인 거울의 상은 여전히 환상이다. 하지만 환상이라고 해서 언제나 거짓은 아니다. 환상은 심리적 현실의 유용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거울은 주체가 원래의 모습을 감추고 자신의 환영(fantasme)과 관계를 맺는 전이의 장소이며, 잠재적인 공간이다. 거울의 허구는 현실과 상상의 엄격한 구분을 거부한다.’

 김혜진의 자화상은 마주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배열은 거울상을 생각하게 한다.(도10) 한쪽은 보다 느슨한 크리스털 입자로 되어있다. 자아의 상은 단단하지 않고 이러한 입자들이 헤쳐모여 이루어진 순간적인 고정물이다. 그것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무쌍하게 조합될 수 있을 것이다. 민정수의 작품 또한 통합이기에 분열이기도 한 거울이 잠재한다.(도11) 작가는 잘려진 육체 부스러기들과 거울 프레임을 결합시킨다. 거울 단계가 전제된 절단된 육체는 명백히 죽음을 떠올리는데,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심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이다. 세계가 더욱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는 위험 또한 늘려나간다.

젊은 작가들의 디지털 아카이브인 인터넷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나 전쟁 이미지가 넘쳐난다. 그들은 묵시록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집단적 죽음의 현장에서 피 흘리는 육체를 표현한다. 자화상은 무엇보다도 거울 앞의 자신처럼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으로 변신하는 무대가 된다. 그러나 섬세하거나 야성적인 모습에는 멜랑콜리나 트라우마같은 심리적 현실이 담겨있다. 거울에는 원하는 것 뿐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도 등장한다. 자기 안의 타자는 매혹이자 두려움이다. 거울을 마주한 이에게 맞은 편의 상은 분신이다. 박영근의 작품에서 자신의 반사상인 분신은 자율화되어 자신과 대결한다.(도12) 타자로서의 자신은 동일자가 탐구해야 할 거대한 대양으로 다가온다.

고전적인 기법을 숙달하고 있는 박영근은 실제를 보고 그리기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이미지를 검색하고 기억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실험도 행하면서’ 무중력 공간에서 붕 뜬 듯한 환상적 이미지들을 그린다. 물론 작가는 화면에 자신의 신체가 개입된 촉각성을 유지함으로서, 코드화된 이미지들과의 차별점을 강조한다. 박영근은 거울 앞에서의 유희 뿐 아니라 거울 너머로 가는 여행 속에서 가상적 외관을 풀어헤치는 몸의 리듬을 표현한다. 그것은 상상이나 상징이 생겨나는 보다 원초적인 시공간으로의 여행, 또는 역행이다. 이주형의 자화상은 끝없이 자라는 머리털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끝없는 욕망을 상징한다.(도13) 얼굴을 이루고 있는 머리털은 닿을 수 없는 현실을 향해 촉수를 뻗으며 무한히 변신한다.

Ⅴ. 자화상에 드러난 환타지의 예술적 언어

현실과의 비슷함을 넘어서, 의도적으로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환타지는 그자체의 현실성을 주장하고자 한다. 가상현실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인터넷 기반의 생태계에는 현실에서 나온 코드가 아닌 코드로부터 생성되는 또 다른 현실이 있다. 현실과 비교되는 맥락이 아니라 그자체의 맥락이 형성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터페이스에서 나오고 다시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한 시대, 정보화 시대의 대중들은 그러한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와 상시적으로 접속된 채 살아간다. 그것은 이제 인간을 넘어 사물끼리의 접속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소통의 혁명에 소통을 가능케 하는 효율적인 언어가 있다. 언어는 점차 코드로 단순화되고 있지만, 지시대상이 아닌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은 정보혁명이 있기 이전에, 모더니즘부터 시작된 흐름이다. 모더니즘은 지시대상에 의존하는 리얼리즘을 넘어 언어의 자기지시성을 자각했다. 허구를 넘어서 허구에 대한 허구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때 허구를 구성(또는 재조합이라는 의미에서 해체)하는 언어의 역할이 부각된다. 언어는 현실 그자체까지는 아니어도, 현실에 도달하기 위한 길목이다. 언어가 없다면 현실도 없다. 그것은 현대의 언어학과 정신분석에서 반복적으로 주장된다. 가령 라깡의 상징계 이론이 그렇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론』에서 ‘픽션과 리얼리티의 유일한 차이는 전자가 완전히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이로 인해 확실히 자유가 허용된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메타 픽션 작가들은 리얼리티는 확실히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만 텍스트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특히 최근의 현실은 ‘더이상 질서 있고 안정된 구조로 여겨지지 않으며, 상호관련 된 복합적인 리얼리티의 그물망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여기서 ‘픽션은 그것과 구별되는 리얼리티를 설명하는 수단이고,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다 쉽게 찾아내는 도구’ 이다. 

그러나 도구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목적이 되는 경향을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술가들도 현실을 괄호치고 현실과 평행한 또 다른 현실을 말한다. 작품은 그리기에 대한 그리기에 대한 메타적 차원의 실험실이 된다. 그림과 거울의 비교는 서로를 비추는 무한반사 속에서 현실성의 휘발을 알려준다. 언어 또한 또 다른 언어를 지시할 뿐이다. 언어를 중시하다가 ‘언어의 감옥’(테리 이글턴)에 갇힌 사조들을 형식주의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의식의 통일성만큼은 유지되었지만,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의식보다는 언어 그 자체에 몰두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 결과물을 더 어지럽고 파편적이다. 그러나 지시대상에 이어 의식으로부터도 자율화된 언어는 보다 유희적이다. 그 점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예술가에게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그 자기만의 세계를 타자와 공유할 수 있다는 점도 예술의 특징이다. 

난해하고도 긴 제목을 가진 정수진의 작품 [2002년 1월 내쇼날 지오그래픽, 14페이지에 나온 한 소녀의 얼굴로 표상된 가변적 지시-서술 구조를 가진 사실적 상황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내적 감각에 대한 표상들](2013-2014년)에서 파편들로 흩어질 것들을 모아주는 것은 그림이라는 틀이다.(도14) 작가는 현실 속에서는 파편인 것들에 맥락을 부여하고 또 다른 현실 안에서의 유희는 계속된다. 작가의 머릿속에 일어나고 있는 의식의 흐름은 스스로 정한 게임원칙에 의해 매번 재배치되는 사물로 표현된다. 자신의 그림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한 정수진은 자기 그림이 임의적 상상의 산물은 아니라고 말한다. 거의 수학적 기호 같은 언어로 서술된 그 책은 다수가 고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기보다는 자기만의 규칙이다. 이러한 대안의 세계에서 언어의 비중은 크다. 이 세계에서 언어는 거대하고 부드러우며 파편적이고 인간 외부에 있다. 언어는 인간에 외재적이다. 이 외재적인 것이 다시 인간을 구성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인간이 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억압적 과정이다. 작품 속 언어는 파편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언어의 분열적 조건을 암시한다. 

분열은 거울상의 자아 뿐 아니라, 언어라는 상징적 우주에서 태어나는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인간이 되는데 언어가 분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라깡이 상징계라는 이론적 구조물로 주장하는 사항이다. 현대미술은 세계로부터 자율화되고 그자체가 세계가 된 언어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렇게 추상적 자화상이 생겨났다. 추상적 초상들에서 얼굴이나 몸의 외곽선은 분명치 않다. 거기에는 그리기라는 궤적만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궤적 그자체가 작가의 초상이 된다. 작가는 자신을 주체적으로 그리기 보다는 그리기라는 것을 통해 그려진다. 나는 확실한 출발점이 아니라, 작업 과정을 통해 도달해야 할 미지의 것이 된다. 지우기와 그리기가 구별되지 않는 이러한 행위에서 죽음의 암시는 강력하다. 그러나 죽음은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조건이다. 자신의 분신과 대결하는 거울의 단계를 넘어, 죽음으로서 사는 자신에 대한 처절한 환타지이다. 그리기에 대한 그리기라는 폐쇄적 회로에서 현대의 작가는 지친다. 새로운 양태로 전개되는 현실은 겹겹이 드리워진 폐쇄회로를 변형시키는 동인이 될 것이다.  

Ⅵ. 결론

환타지는 개인을 넘어설 수 있다.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익을 낳는 동인이 되는 환타지는 상품의 생산단계부터 기획된다. 현실을 기만하는 장치들이 편재한다. 환타지가 개인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속성을 띈다. 테리 이글튼이 『이데올로기 개론』에서 행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 가지가 넘는 폭넓은 정의들에서, 환타지와 관련된 것으로 ‘사회적으로 필요한 환영’과 ‘사회생활이 자연적 현실로 전환되는 과정’을 뽑고 싶다. 현실과 상상이 복합된 사회적 상상력은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집단들을 사로잡곤 했다. 예술 또한 이러한 사회적 상상력에 힘입고 그것에 뛰어난 이미지를 부여하기도 했다. 신화나 종교의 영향력이 컸던 이전 시대에 환타지는 집단화되어 혁명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은 천년기설(millennialism)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환타지일 것이다. 거기에는 선과 악이 극단적으로 대결하고 갖은 고난 끝에 선이 악을 절멸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펼친다는 기본적인 서사가 깔려있다. 

이러한 서사는 게임이나 SF 풍의 영화에서 수없이 되풀이된다. 새로운 세상을 도래하기 위해 주체에게는 행해져야 할 실천적 강령이 있다. 물론 이러한 의식은 반동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집단적인 환타지가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허위의식으로 간주되며 ‘과학과 대비’(루이 알튀세)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환영’이라는 표현에는 이데올로기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즉 집단적 환타지라고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지배와 저항이라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그것이 환타지라 할지라고 강력하다면, 더구나 개인을 넘어서 집단화된다면 현실적 힘으로 전화될 수 있다. 변혁의 시대였던 1980년대 중반에 그려진 신학철의 작품 [신기루]는 이원적 구조가 확실하다. 거기에는 중심과 주변, 풍요와 빈곤의 대조가 있다. 자본 고유의 메커니즘에 따라 물질적 발전이 정치적 파행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던 시대, 사회의 갈등은 더욱 커졌고 이의 해결을 위한 집단적 힘도 요구되었다. 

당시의 사회운동을 이끌던 강력한 의식과 실천은 집단적이라고 할 만 했다. 1980년대는 미술운동도 집단적이었으며, 그것은 좌파 우파를 상관치 않는 시대의 특징이었다. 환타지 또한 집단화될 수 있다. 대표적인 민중미술 화가로 평가받는 신학철의 작품에서 자화상을 살펴보자. 2000년대 이후에 발표된 신학철의 작품 [한국 근대사-갑돌이와 갑순이]에서는 한국 근대사의 주요 장면들이 거대한 기표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작가 또한 그사이에 끼어서 함께 몸부림친다. 신학철의 작품에서 2000년 이후의 작업에 활용되는 자료사진은 1980년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아나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환은 사진을 보다 흔한 소재로 활용하게 하였으며, 자신을 포함한 현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계에서는 ‘리얼리즘’ 보다는 ‘환타지’로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사회참여적인 예술가에게 현실의 환타지적 측면은 현실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 그리고 현실의 변혁 가능성에 무게중심이 실린다는 점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는 위로부터 주입된 환타지에 대응하는, 아래로부터의 변혁에 필요한 환타지가 필요한 시대였다. 현실만큼이나 의식화라든가 전망이 중요했다. 이때 화가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로마가 불타는 광경에서 심미적 쾌락을 취했으며, 더 나아가 로마가 불타든 말든 난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로마시대의 황제에 자신을 대입시킨 공성훈의 자화상은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소위 말하는 ‘386세대’의 상황을 표현한다.(도15) 배불뚝이 몸을 밝게 드러내고 얼굴이 어둡게 가려져 있는 것으로 봐서 그림이나 열심히 그려야겠다는 자신의 선택이 그리 자랑할만한 것은 아님을 말해주는 것 같다. 벨라스케스, 또는 쿠르베의 자화상 구도에 서 있는, 붓을 든 남자를 임신한 여성으로 본다면 이러한 가장은 작품을 창조하는 행위를 출산과 비유하는 것이다. 모호한 상황은 의미의 폭을 넓힌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사회적 실천일 수 있는가의 문제는 그림이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변혁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직접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편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예술의 힘이 자체의 언어적 구조에서 나올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어의 혁명이 곧 사회의 혁명을 추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환타지는 현실 도피나 퇴행을 넘어서 현실을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힘이 보다 강력해지는 시대에 그러한 기대는 어느 때 보다 현실적이다. 환타지는 별자리와 비슷하다. 실제의 위치 관계라기 보다는 보는 사람의 위치 관계에 따라서 존재하는 허구적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다. 또한 환타지는 개인을 넘어서 집단화될 수 있다. 그것은 신화나 종교의 시대부터 근대의 사회적 이데올로기까지 관류한다. 환타지는 가상이다. 가상이라고 거짓은 아니다. 본질이 아닌 가상은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다양한 것을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이다. 주체 안의 다양한 미지의 타자를 상정하고 유희하는 환타지는 주체를 갱신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자화상 자체에 환타지가 개입될 수 있다는 현대 심리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 현대 자화상의 환타지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자화상들에는 자기 내부의 타자와 대화하는 자의식적인 면부터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무)의식이 드러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인터넷 기반의 문화 생태계에서 대중문화의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발견된다. 정보의 혁명은 세계 공통의 언어에 대한 벽을 없애고, 동시대성을 더욱 고무함과 동시에, 나(인간)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한국 현대 자화상에 나타난 환타지는 2000년대 이후에 작가들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소비환경의 변화로 현실과 가상의 구별이 더욱 불확실해지는 시대에 환타지에 대한 연구는 보다 흡입력 있는 또 다른 차원의 현실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며, 시각예술의 역사를 다루는 학문인 미술사가 동시대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도판목록
1. 이불, [히드라], 1998년
2. 권경엽(Louise Kwon), [엔젤스 테일(Angel's tale)], 97x145.5cm, 캔버스에 유채, 2012년.
3. 이림, [막스 에른스트를 넘어서], 100x100cm, 2010년.
4. 이형구, 2010년.
5. 이샛별, [인터페이스 풍경], 종이에 아크릴 채색, 409.4x282cm, 2014년.
6. 최승선, [플랫폼], 캔버스에 유채, 80.3x130.3cm, 2014년.
7. 신창용, [기타 어택],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2007년.
8. 심점환, [나의 껍질을 뜯어먹는 폐허], 캔버스에 유채, 130.3x162.1cm, 2015년.
9. 김인배, [샤모랄타 사모라타], 플라스틱, 펜슬, 가변설치, 2007년.
10. 김혜진, [자화상], 가변설치, 2011년.
11. 민정수, [혼돈], 혼합매체, 2010년.
12. 박영근, [나를 무찌르다], 캔버스에 유채, 162x227cm, 2018년.
13. 이주형, [포자 1], 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2009년.
14. 정수진, [2002년 1월 내쇼날 지오그래픽, 14페이지에 나온 한 소녀의 얼굴로 표상된 가변적 지시-서술 구조를 가진 사실적 상황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내적 감각에 대한 표상들],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2013~14년.
15. 공성훈,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194x130cm, 2001년.

출전; 미술사학보 제50집(미술사학연구회), 2018년 5월 12일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 각주, 도판 포함된 원본은 한국연구재단  www.kri.go.kr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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