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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주 / 자연의 거울

이선영

자연의 거울

  

이선영(미술평론가)

  

물과 숲이 함께 있는 김연주의 풍경에는 실제의 재현이라는 그림의 기본, 그리고 그것에 내재된 반영상의 위상이 있다. 가령 모두 [순간]으로 붙여진 작품 중의 하나는 하늘을 품은 물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화면의 2/3 이상을 물 반영상으로 채웠다. 실제와 그림자가 수평면을 중심으로 데칼코마니처럼 펼쳐진다. 물에 반영된 하늘의 색/빛은 화면 상단의 실제의 하늘보다 더 미묘하다. 김연주의 작품은 실제와 반영을 동시에 담은 또 다른 반영상으로서의 회화이다. 그림은 실제와 관련은 되어 있지만, 실제와는 다른, 또 다른 실재인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생산물 중에서 자연과 가장 가까운 것이면서도, 자연은 아닌 독특한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실제의 숲과 물이 그림의 그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에서의 퍼포먼스같은 것을 담는 영상이나 사진, 또는 자연 그자체에서 실행하는 작품들은 재현의 2차적 요소를 거부한다.




김연주,  순간  60.6x90.9  oil on canvas  2018



현대미술이 재현주의를 극복하려 하면서 그러한 실행 그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소 특정적인 예술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 순간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어떤 재현적 매체를 활용해야 한다.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는 흥행성 있는 전시에서는 화이트 큐브도 특정한 장소로 작동하여, 작가들은 대형 설치작업을 중심으로 작가적 역량을 표출하곤 한다. 이러한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특정 장소에서의 작가의 체험을 전달할 수 있는 현실적 매체가 중요하다. 마음이 직접 마음과 통하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래서 이미지, 특히 상투화된 이미지를 거부한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개념이나 관념으로 대신하려는 ‘미술작품’은 자가당착에 빠지곤 한다. 그들도 결국은 문자나 언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재현하는 것 아닌가. 재현주의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옮겨 놓은 것으로 한정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림을 제외하고 이미지로서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흔한 매체는 사진이나 영상이다. 오늘날 사진이나 영상은 그림보다 더 흔한, 거의 장난감같은 무엇이 되었다. 장소특정성이 있다면 매체특정성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특히 기술이기도 한 매체들은 매체 자체에 내재한 표현이 있고 그것은 쉽게 상투화될 수 있다. 그 자체가 또 다른 뛰어난 사진작품이나 영상작품이 아닌 이상, 단순 기록은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작가를 중심에 놓는 풍조에 대해 비판적인 이론들--작가의 죽음을 선언한 롤랑 바르트는 그 스스로가 뛰어난 작가이지 않았나--도 있지만, 어떤 매체를 쓰든 예술에 관한 한 작가가 중요하다. 오늘날 작가가 지나치게 기술이나 자본, 또는 타인의 노동력에 의존하려는 만큼 예술의 자유로움은 좀 더 멀어진다. 예술은 정치적 비전을 통해서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지만, 그 또한 이상주의적 면모를 띈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아무리 회화의 위기가 논해진다고 한들, 회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나 회화는 순간의 현실을 기념비화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삶이라는 것은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시간적 순간의 하나의 형태지만, 삶이 제 1의 현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하나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시간은 순간 안에 꽉 조여 있고 두 개의 허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현실’이라고 보는 바슐라르의 관점에 의하면 순간만이 순수하다. 그에 의하면 현재의 순간과 실재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순간 속에 모든 것을 압축하는 회화는 순수함의 결정체로 다가오며 그것이 김연주의 경우처럼 자연이라는 소재를 만났을 때 더욱 그렇다. 순간은 매번 다르다. 같은 풍경도 매번 다르게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더니즘 시기의 야외 사생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사진이 발명된 근대는 회화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회화는 사진과는 다른 방식으로—사진도 이용하면서—순간을 기록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기까지의 시기 동안 대중들이 기억하는 기라성같은 미술 작가들은 거의 화가였다. 



김연주,  순간  116.8x90.9  oil on canvas  2016



물과 숲이 같이 등장하는 김연주의 그림도 같은 장소, 또는 비슷한 장소를 옮겨가며 여러 번 그린 풍경이다. 화가는 자연을 유화를 통해 재현하지만 그것은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작가가 같은 풍경을 그리면서 차이의 유희를 행하지 못하면 그는 금방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화가는 자신이 직면한 풍경에서 무한한 자연의 갈래들을 감지하고 그것을 붓으로 옮긴다. 인간이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아를 구성하듯이, 자연의 거울로서의 회화는 그림으로서만 가능한 무엇인가를 모은다. 인간이 거울을 볼 때 분열된 육체가 통합되는 것처럼, 자연은 하나의 분위기로 모아진다. 김연주의 작품 속에서 인간은 자연에 푹 묻혀 있다. 마치 동양화처럼 풍경 안의 극히 일부를 차지한다. 자연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러한 스케일의 대조는 큰 그림이 아니어도 자연의 기념비성을 살리기에 충분하다.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에 함께 있는 물에 비친 인간은 하얀 얼룩에 불과하다. 


물가에서 낚시를 드리운 남자가 낚시를 본격적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연에서 무엇인가를 건져내려는 그의 행위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 작품 속 인물의 관점은 화가와 비슷한 관점일 것이다. 풀숲을 비추는 물, 즉 하늘을 품은 아래의 물을 그냥 하늘로 본다면 풍경은 중력을 초월하여 붕 뜬 듯한 모습이다. 낚시하는 남자가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낚시꾼인지 말뚝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위치를 차지한다. 작가는 길과 강물 사이를 가르는 수풀, 그 안에 자리한 낚시꾼을 멀리서 포착했다. 낚시꾼 보다 관객의 눈을 더 끄는 것은 전경 가득히 펼쳐진 야생화들을 밝은 색 물감으로 툭툭 찍어서 표현한 부분이다. 그곳에서 화가가 낚은 것 중의 하나는 야생화 무리이다. 야생화가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피어나듯이, 색의 얼룩은 그럴듯한 꽃의 이미지가 되었다. 매해 꽃이 지고 다시 꽃이 피는, 알고 보면 기적과도 같은 자연의 신비가 그리 힘들이지 않고 실행되어 보이는 것처럼, 작가 또한 가벼운 붓터치로 그러한 기적들을 기록한다. 


김연주의 작품에서 인간의 위상이 미미하다고 해서 그 풍경들이 원초적인 자연이라 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길, 심지어는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길들이 있는 도시 근교의 반쯤은 문명화된 자연이다. 이제 지구상 어디에서도 원초적인 자연이라 할만한 곳은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수풀 사이를 가르고 흐르는 물이 저편에 지는 해를 반사하는 작품에서 문명의 상징인 전봇대 줄도 풍경의 하나로 자리한다. 해가 지면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하는 전기의 통로이다. 수풀을 가장자리로 하는 물웅덩이에 비친 것은 전봇대 알림판을 비롯한 다양한 도시의 기호들이다. 작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발밑의 수풀을 자세히 그리고 나머지는 반영상으로 처리했다. 인간이 아무리 주도적인 입장이 되었다 할지라도 문명도 자연의 품 안에 존재할 따름이다. 인간이 자연에 찍어 놓은 어떠한 흔적도 자연은 점차 흐릿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김연주,  순간  100.0x100.0  oil on canvas  2010



눈 온 날 소나무 숲 길 사이의 길로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한 풍경에서, 눈길 위에 비치 그림자는 자동차 길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선을 만든다. 자동차 바퀴 자국이 또 하나의 길이 된 풍경에서 바퀴가 누른 곳은 풀이 나지 않지만, 빛이 드는 길에 드리워진 그림자 얼룩은 다소간 심심한 풍경에 흥미로운 세부를 만든다. 자동차를 포함한 인적이 드물어진다면 그것은 곧장 자연으로 다시 메꿔질 것이다. 김연주의 작품 속 풍경은 누구라고 걷고 싶을 바로 그 길이다. 그곳은 자연의 풍부함과 인간적 접근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준다. 도시인이 자연에서 ‘힐링’을 하고 싶을 때 가볍게 떠나볼 수 있는 그러한 장소들이다. 물과 수풀이 있는 풍경에서 주변의 빛을 반사하는 물 표면의 색깔이 미묘하다. 원경의 물보라는 이 고요한 자연풍경에 작은 사건을 만들어낸다. 가는 선을 쌓아 만든 수풀풍경은 어느 부분부터 그림자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형태이다. 


인간이 풍경을 본격적으로 그렸을 때 그것은 이미 자연이 더이상 위협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라는 가설이 있다. 위협적인 순간은 미가 아닌 숭고로 기록되지만, 그러한 숭고함조차도 작가가 안전한 곳에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미술사에서 야외 사생이 그림의 혁신과 연결되기 시작했던 인상파 시기의 회화들은 산업혁명에 의해 급격하게 자연이 오염되던 시대였다. 그때보다 더 많이 오염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조차도 청정한 시대처럼 보이지만, 그 시대의 소설가들은 석탄 연료를 사용하던 시기의 대도시를 시커먼 지옥의 유황불과 비교하기도 했던 것이다. 김연주의 작품이 소재 그자체로 이미 반쯤은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점은 되돌이킬 수 없는 오염의 시대, 오염을 정화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어야 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매해, 그리고 매 순간 이루어지는 자연의 기적을 오롯이 붓 하나로 증언하고 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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