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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 / 힘의 흐름으로서의 자연

이선영

힘의 흐름으로서의 자연

  

이선영(미술평론가)

  

자연의 일원임을 잊게 만들 정도의 문명화는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낳게 하였다. 예술은 인간의 그러한 욕망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이성근의 작품에서 호출된 자연은 그저 대상화된 것이 아니라 자연력이다. 자연력에 대한 관심은 구상 뿐 아니라 추상에도 두루 나타난다. 이성근의 작품 속 자연은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고정된 자연보다는 움직이는 자연을 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재현적 요소가 있는 작품 뿐 아니라 추상적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철된다. 가령 물고기인 경우에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 보다 역동적으로는 낚시 줄에 걸려 발버둥치는 모습이 포착된다. 강물처럼 가로 방향의 흐름 속에 있는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물고기의 특징적인 요소만 듬성듬성 남아있는 반(半) 추상적인 작품도 있다. 그러나 물속이라는 환경을 암시하는 가로 방향의 흐름은 여전하다. 주둥이가 뾰족한  입 같은 형태와 연결된 선은 낚시 줄에 낚인 물고기를 연상시킨다. 




 이성근 17X13cm



살아 움직이는 존재에게 죽음을 알아채는 순간만큼 절박한 몸짓은 없을 것이다. 자연이라는 것이 먹고 먹히는 생태의 그물망으로 엮여 있다는 것, 다른 개체의 죽음이 또 다른 개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치열한 관계가 자연에서의 주된 흐름이다. 유기체의 차원이 아니어도 그러한 움직임은 있다. 농도나 밀도의 차이에 의한 움직임이나 원근감이 그러하다. 이성근의 작품 중 추상화에서는 구체적 이미지가 아닌 조형적 요소의 배치만으로 움직임을 표현한다. 가로로 길거나 세로로 긴 그림의 형태 또한 그림 안의 추상적 요소와 관련된다. 여러 농도의 먹으로 다양한 굵기의 선, 점, 얼룩, 흔적을 추상적으로 남긴 작품은 모든 추상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의 중력감이 있다. 세로 방향으로 길이가 있는 작품에서는 다양한 농도의 먹으로 추상화를 그린다. 번진 점과 면을 형성하는 굵은 선은 점과 선이라는 기하학적 요소의 변주이다. 


작가는 먹 농도를 조절하여 이미지 없이도 추상적인 원근감을 준다. 진한 먹 선은 앞을, 흐린 먹 선은 뒤를 암시한다. 물고기가 명시되거나 암시되는 그림에는 먹 농도의 변화와 더불어 엷은 색을 가미하여 생동감을 부여한다. 작품 속 말은 자연력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이전 시대에는 마력(馬力)--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말의 한 필의 힘에 해당하는, 1초당 75kg의 물체를 1m 움직이는 힘’이라고 함--이라는 단위도 사용했다. 지금은 단위 자체가 달라졌지만, 인류사의 오랜 기간 동안을 함께 해온 말은 힘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작품 속의 한 마리, 또는 여러 마리의 말도 무엇엔가 놀라거나 도망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성근의 그림 속에서 말은 풍부한 갈기가 흩날리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작품 [군마]는 여러 마리의 말들이 한데 엉켜 뛰고 있으며, 말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선들이 역동적이다. 작품의 추상적 요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 


작품 [도약]은 가로 방향으로 달리는 말을 보여주는데, 갈기와 꼬리, 뒤를 바라보는 놀란 눈이 빠른 동감을 준다. 이성근의 작품에서 사람은 문화적 자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품 [가족]은 빨강, 파랑, 노랑, 녹색 등 원색의 옷을 걸친 사람들이 마치 단체 사진을 찍듯이 정면을 향한 모습이다. 동물이 나오는 그림에 비해 정적으로 보이지만, 대신에 작가는 화려한 원색을 사용하여 잠재적인 동감을 주었다. 굵고 검은 선으로 처리된 얼굴 실루엣은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토속적인 분위기를 가진다. 그들의 눈 코 입은 없다. 그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집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작가는 아직 근대의 개인주의에 의해 혈연적 유대가 깨지기 이전의 인종들을 통해 가족의 원초적인 모습을 표현했다.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 중에서 자연의 절정은 여성이다. 풍만한 몸의 여성은 어둑한 배경 속에서 밝게 빛이 난다. 이 둥글둥글한 환한 덩어리는 양기보다는 음기(陰氣)가 충천하다. 





이성근, 가족-1 53X37cm



여성과 함께 하는 이미지는 꽃, 닭과 초생달 같이 전통적으로 여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을 서로를 보충하면서 여성성을 강조한다. 화면 안의 화면처럼 오목하고 어두운 곳에 앉아있는 풍만한 여성은 긴 머리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위를 향해 눈을 감은 모습은 나르시시즘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는 시선에 반응한다. 오늘날 자연은 타자화 되었다. 같은 타자의 처지에 놓인 예술과 자연의 유대는 내재적이다. 자연은 특히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대상화, 물화되었다. 엘리자베츠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이분법적 사고는 두 가지 양극화된 용어들을 반드시 서열화 시키고 등급을 매김으로서 하나가 특권적인 용어가 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억압되고 종속적이며 부정적인 상태편이 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자연/ 문화, 감성/ 이성 등이 대표적인 이원 항이다.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강력한 주도권을 쥔 분야는 과학으로,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 이원론적 사고를 고수했다. 


그것은 근대과학 역시 기성의 형이상학을 벗어나지 못한 대목을 알려준다. 반면 현대과학은 대상의 관찰에 있어 주체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철학적으로 근대를 열었던 데카르트는 근대과학에 깔린 이원론을 대변한다. ‘뫼비우스 띠’라는 비유를 빌어서 이원론을 해체하고자 하는 저자 엘리자베츠 그로츠에 의하면 데카르트에 있어서 과학적 담론을 다루는 주체성은 몰개성을 갈망하며, 이러한 몰개성을 객관성과 대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로츠는 데카르트주의가 의식을 육체 보다 고양시킨 근대적 형태로 간주한다. 이때 자연은 수동화 되어 정복과 점령의 대상이 된다.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는 이분법에 근거한 데카르트주의에 대조되는 스피노자의 모델을 소개한다. 이에 의하면 몸을 포함한 자연은 고정된 존재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일련의 생성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로츠에 의하면 이원론이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몸과 마음처럼 두 가지 상호 배타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이런 것들이 우주라는 보편성과 주체라는 특수성을 구성한다는 믿음이다. 


여기에서 시도하는 안팎뒤집기의 목표는 몸의 재형상화를 통해 주체성의 개념에서 마음, 정신, 내부, 의식(심지어 무의식까지) 차지했던 중심적인 위치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라는 이미지를 자크 라캉으로부터 빌어왔다.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 의하면 라캉은 주체를 뫼비우스 띠로 비유했다. 그에 의하면 몸과 마음은 두 가지 뚜렷이 구별되는 실체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일한 실체에서 기인하는 두 가지 다른 속성도 아니다. 이 모델은 내부/외부, 정신적 내부/육체적 외부의 기본적인 정체성이나 환원가능성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로 꼬인 것과 내부가 외부로, 외부가 내부로 흘러드는 통제할 수 없는 통로와 벡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원주의에 바탕한 사고는 관념적이다. 반면 자연을 힘과 동일시하는 이성근의 작품은 실재적이다. 주/객체의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도 세상이 모든 것이 구별 없는 덩어리로 시작되었음을 강조한다. 




이성근, 군마 22X17cm



그는 [헤르메스]에서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것에서는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분리에서는 어떤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혼합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성근의 작품에서도 자연은 움직임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주체와 대면한 대상이 아니라 주체 또한 포함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주체의 마음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과정과도 중첩된다. 과정 중의 객체에 대응하는 ‘과정 중의 주체’(크리스테바)가 있다. 근대적 이성과 객관성이 분리 및 지배와 연결될 때 억압적인 권력으로 작동된다. 시스템에서 생겨나는 권력에 대항하는 또 다른 힘이 있어야 하는데, 시스템의 힘이 나날이 확대되고 강고해지는 현대에 예술은 또 다른 힘이 잠재된 영역으로 사회의 기대를 받는다. 억압하는 힘과 저항하는 힘은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힘 그 자체는 딱딱하게 굳어 물화된 모든 것들을 느슨하게 할 수 있다. 이성근의 유연한 붓놀림은 그러한 유동성을 향해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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