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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인간을 위한 흙의 시 전/ 지구인으로 거듭나야 할 근대적 인간

이선영

지구인으로 거듭나야 할 근대적 인간

  

이선영(미술평론가)

  


1. 휴머니즘- 인간을 위한 흙의 시  HUMANISM - Poem of Earth for Human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돔 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는 ‘휴머니즘- 인간을 위한 흙의 시  HUMANISM - Poem of Earth for Human’ 전은 도자예술로 펼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광범위해서, 그것이 시라면 대서사시라 할만하다. 예술이 인간을 말하는 것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이 아직도(또는 새롭게)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간취하여 만물의 영장이 된 이후 진보를 거듭해왔지만, 진보의 부정적인 면이 인간의 뒷목을 잡은 역설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다시 호출되었다. 현대의 위기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즉 인간의 자기 동일성(主體)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연을 비롯한 너무 많은 것들을 타자(他者)화시킨 탓이 크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동화시키려는 집요한 권력에의 의지, 거기에 문제의 시작과 끝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그 자체가 타자였고 또한 타자와 함께 해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예술 중에서 도자예술로 인간을 말한다 함은 어떤 특별함을 가지는가. 도자예술은 보다 고색창연한 과거로 인간을 소급시킨다. 인간의 기원에 관한 신화 중 강력한 근대 이전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신의 형상을 따라 흙으로 빚어진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의 신화에 바탕하지만,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는 동양적 서사, 더 나아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제 가장 지배적 서사가 된 과학 또한 인간과 흙과의 관련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주의 먼지로부터 시작된 별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은 흙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걸쭉하게 모여있는 태초의 원시적 스프(Primordial Soup)로부터 발생하여 진화해온 산물이다. 기획자는 ‘흙’을 ‘Earth’로 번역함으로써 또 다른 차원을 첨가한다. 그것은 애드가 모랭이 [지구는 우리의 조국]에서 말하듯이 지구 전체의 생물생활권을 염두에 둔다. 


모랭에 의하면 지구시대가 열린 것은 지구의 여러 부분들이 소통되기 시작한 근대부터였다. 과학기술의 힘을 강조하는 모랭은 기술과학의 발전과 전파가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의존, 상호연대, 재조직, 동질화의 발전과 전파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지구시대가 발달했다고 말한다. 마샬 맥루한도 ‘지구촌’을 말한다. 미디어 이론가는 지구를 정보화나 세계화 같은 보다 현대적인 맥락에 놓는다. 또 하나의 국면은 생명공학에 의해 펼쳐졌다. 모랭에 의하면 유전형질의 전달 방법 뿐만 아니라 그 유전형질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남에 따라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본질은 정치적 문제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컨대 사는 것, 태어나는 것, 죽는 것은 정치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지구는 정치화되고 정치는 지구화된다. 그것은 지구(흙)과 관련된 이 전시의 내용들이 목가적 서정을 넘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휴머니즘- 인간을 위한 흙의 시’ 전의 작품들은 인간의 종말을 비롯한 어두운 현실과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구(흙)에 내재된 정치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다. 다만 이 전시는 지구적 차원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전망, 즉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전망을 제시하려 한다. 그 이전에 물리적인 의미의 지구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지구의 모델을 기억해 보면, 흙으로 이루어진 지표면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인간은 바로 그 표면 위에서 생멸(生滅)하는 존재이다. 표면 위의 존재들에게 둥근 지구, 즉 3차원으로서의 세계는 일정한 부피를 가지지만 무한하게 경험된다. 움직임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는 시간이다. 이야기는 3차원에 시간의 차원을 첨가하여 기계적 연속성을 끊고 도약과 비약을 도입한다. 자연이라는 무대는 예술에 의해 상징적 우주로 변모되어 무심한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보다 의미 있게 다가온다. 도예는 지표면의 흙으로 시작되곤 하지만, 지구를 이루는 심층 모델처럼 불과 결합된 광물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는 구워져 단단하게 된 흙뿐 아니라, 가공되지 않아 다시금 재생의 회로에 투입되는 흙도 있다. 무엇보다도 작가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손으로 직접 주물럭거릴 수 있는 흙덩이들도 있다. 이 전시는 재료로서의 흙을 넘어 확장성을 가지는 데 그 끝에 지구가 있다. 지구는 세계화와 관련되어 인간에게 양날의 칼이 된 새로운 국면의 역사적 단계를 함축한다. 세계화는 풍요와 빈곤을 함께 늘렸고, 다양함과 획일성도 함께 늘려왔다. 예술은 당연히 풍요와 다양함의 편에 서지 빈곤과 획일성의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빈곤과 획일성은 위험을 낳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공동체이며,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해 소통이 요구된다. 그 소통은 형식적이어서는 안된다. 인터넷 시대 개막 이후 소통은 인플레 현상을 겪고 있기도 하지만, 현재 소통은 인간만큼이나 다시 복구되어야 하는 문제적 개념이며, 전통사회가 지나간 이후 공동체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다. 


  

2. 공동체와 참여, 그리고 소통

  

한국과 영국 상호교류의 해를 기념하여 웨스트민스터 대학 세라믹 연구소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이 진행한 ‘생명 교환 프로젝트’는 도자예술을 매개로 한 공동체를 보여준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 클레어 투미와 이바 마스터만이 진행한 ‘지역공동체 도자프로젝트’(생명 교환 프로젝트)는 영국과 한국에서 수백명의 일반인이 참여했다. 참여자들은 유년부터 노년까지 인생의 주기와 관련된 질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도판에 그림을 그렸는데, 전시장에는 한국과 영국 참여자의 작품 300여 개가 질문내용에 따라 분류되어 걸려있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각자의 주제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인간-소통-공동체-지구라는 줄줄이 연결되는 키워드들을 내장한다. 흙(Earth)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한국과 영국의 교류전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도자예술로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예의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아니다. 다만 도자예술의 특성상 인간에 대한 서사는 은유적이다. 


전시 부제에 포함된 ‘시’는 산문에 비해 은유적이다. 은유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내포와 외연에 있어서 더욱 깊고 넓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은유적 어법으로 참여와 공동체, 인간의 욕망과 기억, 노동, 자연의 문제를 두루 말한다. 두리뭉실한 인간애를 말하기에는 너무나 엄혹한 시대, 이 전시의 작품들은 현대 사회의 위기가 ‘휴머니즘’을 잘못 이해한 결과로 야기된 것임을 보여준다. 인간 중심의 목적론이 야기한 생태의 위기가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협소하게 정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령 ‘인간’이라는 기준에서 성적 소수자, 여성, 노동자는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했다. 이 전시에서는 그들뿐 아니라 아이, 심지어는 죽은 자들까지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운다. 예술가는 지배적 사회가 지지하는, 대개 합법적인 주체들로부터 벗어난 이들을 주목한다. 죽음은 삶의 타자이다. 죽음은 소통 및 공동체에서 큰 역할을 한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이미지의 탄생은 죽음과 결부된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분묘에서 나타나는 고대의 이미지란 죽음에 대한 거부이자 영생을 위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예술(이자 기술) 중의 하나인 도자예술은 그러한 이미지와 연관되었다. 날렵한 코드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두툼한 도판에 새겨진 이야기는 다른 울림을 자아낸다. 현대인은 자신이 하는 소통에서 보다 깊은 실재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 정점에 예술이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이전 시대의 종교를 계승했다. 작업실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하며 이미지를 새기는 작업은 코드화된 소통에 결핍된 무게감을 부여한다. 물론 영국 측 참여자를 비롯하여 최종 산물은 SNS를 비롯한 관계망을 타고 또 다른 소통의 회로에 포함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코드에서 코드로 전전하는 피상적 소통과는 차이가 있다. 실재감을 주는 물질인 흙은 삶과 동시에 죽음의 은유이다. 삶은 죽음이라는 타자를 끌어안을 때 보다 묵직해진다. 


도자예술을 비롯한 전반적인 의미의 예술의 힘이 위축된 것은 이미지와 죽음의 관련에 있어, 죽음의 비중이 줄어든 것에 있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사회생활에서 죽음이 잊혀질수록 이미지의 생명력도 그만큼 덜하게 되고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요구 또한 덜 긴요하게 된다고 말한다. 죽음을 포함하는 이미지는 초월적이다. 죽음은 삶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것들, 가령 종교나 철학 등은 모두 죽음에 관련된 의식(意識, 儀式)에서 비롯되었다. 예술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해 왔지만, 근대를 거치면서 직업의 하나로 분업화되면서 초월성의 기미는 사라졌고, 이것은 진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예술에는 여전히 초월이나 신비 같은 것들이 남아있다. 예술은 그냥 소통이 아니다. 아무리 민주주의적인 전망을 가진 예술가라 하더라도 예술적 소통이 비대칭적임은 인식한다. 간단히 말하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간극이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약과 도약을 거쳐야 한다. 생산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비대칭적 소통은 권력관계를 야기한다. 


그러나 예술은 비대칭적 소통이지만 현실의 정치경제학과 달리, 지배가 없는 권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레지스 드브레가 ‘초월성이 없이는 진정한 전달도 없다’고 말할 때 그는 고저의 차이가 없이는 에너지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절대적 타자를 상정하는 종교는 고저의 차이가 확연한 경우이다. 그 경우 타자로부터 전달되는 사항은 관심의 중심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종교란 전통적인 그것을 말하기보다도 종교라는 단어의 어원에 있는 ‘다시 잇다(re-lier)’라는 의미와 관련된다. 오늘날 다시 잇는 역할을 인터넷을 비롯한 문명의 이기의 역할이 크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도구가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전시가 내세우는 휴머니즘 또한 초월적이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신의 형상에 따라 빚어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월적 사유, 가령 형이상학이나 종교같은 사유를 거부한 이들은 ‘휴머니즘’을 명백한 공격 목표로 삼곤 했다. 인간 대신에 구조, 후기 구조 등의 관념이 자리했지만, 아직 인간이라는 ‘근대적 거인’--포스트 모더니즘을 비롯한 탈 근대적 사조를 ‘거인의 등에 탄 난쟁이’(칼리니스쿠)라고 비유하기도 한다--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3. 사람과 사람을 다시 잇다-우관호, 이바 마스터만, 클레어 투미



우관호


 우관호의 작품 <일 만개의 선물>은 높이 9 미터로 돔하우스의 메인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비슷한 형상의 두상은 의미의 밀도 또한 충만하다. 그 공간도 거대하지만, SNS를 활용하는 그의 작품은 또 다른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둥그스름한 전시 공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배열된 수만 개의 두상과 동물 형태의 소품들은 마치 빛처럼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기 때문이다. 작가는 수개월 간 진행되는 전시회의 관객들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수만 개의 소품을 제작하여 선물하고 빈 곳을 지속적으로 채워 넣는다. 그것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진행형의 작품(프로젝트)이다. 원하는 관객이 하나를 선택하여 가져가서 어딘가에 배열하여 사진을 찍어서 작가에게 보내주면 비워진 공간이 피드백된 사진으로 채워지는 형식의 작품들은 [일만 개의 선물]이라는 제목처럼 선물이다. 작가는 작품을 아낌없이 주며, 선물을 받은 자 또한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해야 이 상호적 회로가 완성된다. 선물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주고받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이처럼 선의와 창의만 교환된다면 좋겠지만, 인류사는 폭력 또한 상호적이고 확대의 성격을 가짐을 보여준다. 수직으로 배치된 중심 부분의 어두운 소품들은 인류사의 어둠을 조명한다. 둥근 배열 방식보다 계층적인 수직구조는 검게 그을린 형상들이 긴장감을 자아낸다. 해골탑처럼 보이는 중심부의 기둥은 전쟁과 혁명, 테러와 범죄 등으로 얼룩진 대참사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희생물이 아이의 얼굴을 닮았다는 점은 비극의 강도를 높인다. 주먹 크기 정도의 소품들은 크기가 다른 몇 개의 모델에서 나왔지만 소성 방법과 색상, 드로잉 등을 다르게 해서 완전히 똑같은 형태는 없다. 피부색은 다르지만 조상이 같은 인류는 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폭력으로 멍들어있다. 인간의 이성을 상징하는 두상이 목잘린 희생물처럼 보이는 양면성이 있다. 그의 작품은 희생제의와 선물의 관계도 떠올린다. 이전시대에 신에게 보내는 희생물은 오늘날 누구를 위해 누구를 희생하는 제의가 되었을까. 인형 머리와 함께하는 너구리 상은 차이를 폭력으로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타자 지향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바 마스터만


이바 마스터만의 전시장은 얼핏 작업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어수선하다. 전시 공간 속의 사물/예술들은 관람을 위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작품과 사물, 물건들을 구별하지 않고 뒤섞어 놓는다. 원래 작품과 물건은 구별된다. 대개 미술작품은 감상용이고, 물건은 사용 목적이 분명한 것을 말한다. 이 전시장에서 한국까지 작품을 운송하기 위해 사용된 포장재, 작품이 놓인 탁자, 작가나 관객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등이 그렇다. 사물은 작품과 물건 중간쯤에 있다. 대개 물건이 오래되어 그 용처를 잃으면 사물이 된다. 어떤 사물은 예술로 고양된다. 물건을 다르게 사용해도 사물이 된다. 단순한 물건, 또는 상품이 누군가에게는 개인적 의미나 상징을 가지는 용도로 전환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를 비롯하여 기성품을 시적인 오브제(발견된 오브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예술을 사물과 구별하기 위해 애썼던 모더니즘과 달리, 미니멀리즘 이후의 예술은 그러한 구별을 철폐시키려고 했다. 주체와 대상의 분명한 거리를 두면서 예술작품을 초월적인 경지로 이끌었던 모더니즘은 설치의 형식으로 와해되었다. 


관객은 이바 마스터만의 작품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간다. 그곳은 관객 또한 작품의 요소가 되는 무대가 된다. 작품/사물/물건들 또한 관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는다.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공수해온 양동이, 냄비, 물주전자 같은 형태의 세라믹 오브제들, 그리고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서 가져온 가구, 선반, 도구 같은 여러 비품들이 공존하는 <나를 만지고 사용하세요>는 그냥 눈으로만 보는 작품이 아니다. 영국 측 이론가인 테사 피터스는 [인본주의, 실존주의, 그리고 예술]에서 하이데거를 인용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유용한 도구는 고장 나거나 다른 이유로 사용할 수 없게 될 때만 세상에서 객관적으로 존재는 것으로 인지된다.’ 예술의 언어 또한 단순히 무엇을 지시하거나 의미하는 용법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만 할 수 있다. 예술은 사용(기능, 의미) 보다는 존재의 편에 섰다. 그러나 이바 마스터만은 존재를 통한 또 다른 의미나 용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클레어 투미


클레어 투미의 작품 <교환 Exchange>은 사회적 메시지를 새겨넣은 자신의 작품들과 거기에 지시된 행동이 교환되기를 바란다. 거기에는 예술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깔려있다. 진선미가 구별된 이후로,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정도로 삼아왔다. 그렇다고 선(善)이나 진(眞)이 윤리나 학문 부문에서 제대로 성취된 것도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진선미는 모두 과거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의지하는 유물로 남게 되었다. 가령 영미의 현대철학에서 주류였던 분석철학은 진선미에 대한 담론을 구시대의 형이상학으로 치부한다. 그것은 진정한 ‘과학’에 의해 지양되어야 할 유물로 간주된다. 진선미와 결합된 미는 고전주의적 관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한 고전주의는 현대미술관이 아니라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등 당대의 유행에 따라 잠깐잠깐 호출되곤 한다. 그러나 예술계에만 한정되는 소통은 일반인들은 물론 그 내부의 작가들조차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8세기에 설립된 영국 최초의 빈곤 아동 구제소를 전신으로 하는 공공미술관에서 2013년 처음 선보였던 클레어 투미의 작품은 선행을 약속한 관객에게 작가가 컵을 선물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선물은 선물을 낳는다. 클레어 투미가 시도하는 ‘교환’은 형식적 의미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전염을 닮았다. 대형 테이블 위에 배열된 접시들은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것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듯하다. 1550여 개에 이른 선행의 목록 또한 방대하다. 대개 ‘감사 편지 보내기’, ‘정기적으로 빅이슈의 구매자가 되기’ 등 생활 속 작은 실천들이다. 이 전시에서는 1550개 중에서 꼽은 것으로 전시장 벽에 선행의 목록이 제시되어 있다. 작품의 배열은 열을 지어 있고 어떤 특정한 것에 중심이 맞춰져 있지 않다. 멀리서 보면 한 공장에서 찍어나온 대량 생산물 같지만, 각자의 차이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선행의 메시지이다. 테이블 위의 접시에는 서로 다른 메시지들 전사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작가에게 아름다움의 기준이 된다.

 


4. 사회적 정체성; 석창원, 윤정선, 고사리 레볼루션



석창원


석창원은 세라믹 오브제에 그림을 그려 넣어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소박한 희망부터 강렬한 욕망까지 그가 다루는 인간의 감성의 스펙트럼은 넓고 깊다. 얼굴, 반신상, 전신상 등으로 만들어진 도자 표면 위의 이미지들은 마치 몸속 깊숙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들을 표면으로 띄운 것 같다. 인간의 오욕칠정, 서구의 신화적, 종교적 도상, 현대 대중문화나 하위문화의 관례 등 다양하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무한정한 변주를 행하고 끝도 없는 욕망의 기표들이 얼굴과 몸 표면을 스크린 삼아서 표류한다. 푸르게 칠해진 전시장 벽면은 떠도는 기표의 무대에 무한성을 부여한다. 몸 표면의 장식 자체가 몸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몸을 특징짓는 구멍이나 틈은 유전자의 결정에 의한 재현을 넘어서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다양하게 생성된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피부를 캔버스 삼아 장식하는 관습은 유래가 깊으며 현대의 하위문화나 대중문화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석창원의 작품에서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 선입견에 의해 고정된 몸은 유연해진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고대인과 현대인 등이 경계를 넘나든다. 


그것은 작가가 인용하는 것처럼 ‘모든 대립물이 한 존재 안에 결합 된 신’(칼 융)을 은유한다. 전능한 존재만이 인간사회가 그어놓은 금기의 선을 넘나드는 위반을 행할 수 있다. 인류학자나 종교학자들이 말하듯이 금기의 위반은 불경함과 동시에 신성함을 낳는다. 경계를 넘나드는, 표류하는 정체성은 고정된 역할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억압받는다. 그러나 다양함을 추구하는 예술에서는 환영받는다. 종교학자들은 위반을 통해 불경한 존재가 된 이들이 다시 신성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술이 종교의 후예로 간주되는 것은 위반에 얽힌 구조와 밀접하다. 석창원은 유희의 자유를 최대한 구가한다. 몸이라는 바탕, 특히 특정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형상들은 그의 작품이 단순한 유희를 넘어서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있음을 알려준다. 당시 유래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홍석천의 초상과 자화상이 그것이다. 벽에는 가면같은 형태들도 붙어있다. 무수히 많은 얼굴로 변신하는 가면은 그 뒤에 어떤 실체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노랑나비는 탈피를 통해서 자유로워지는 어떤 상태를 상징한다.  



윤정선


윤정선의 <정원사의 기억>은 정원이라는 공간성과 기억이라는 시간성을 제시한다. 멀리서 보는 광경이 풍경이라면 정원은 내부의 시점이다. 저절로 자라기도 하지만 인위적인 선택과 보살핌의 몫도 요구되는 곳인 정원은 자연과 인공 사이에 있는 완충적 공간이다. 현대 과학에 의하면 공간은 시간과 관련이 있으니 완충적 시공간이다. 인생에 있어서 그러한 완충적 시공간을 충분히 누리는 시기가 바로 유년기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에는 아이와 소녀같은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러한 완충적 시공간, 가령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나뉘어지지 않는 잠재적 공간이 다시 가능한 경우는 그가 놀이를 하거나 아니면 예술을 할 때이다. 예술은 어른의 놀이이고, 놀이는 아이의 예술이다. 윤정선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어린 동물이나 열매는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무엇을 상징한다. 구름같이 뭉글거리는 형상도 같은 맥락이다. 열매와 어린 동물들은 작가로 추측되는 여인의 품에 안겨 있곤 한다. 또한 그것들은 금색이 칠해져 있기도 한데, 그만큼 소중한 존재임을 상징한다. 


현실을 중시하는 누군가에게는 퇴행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러한 역행은 가능성으로 빛났던 시기에 대한 그리움을 은유한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과 세라믹 부조가 결합된 작품들은 마치 2차원에서 3차원이 나오고, 반대로 3차원에서 2차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또한 가능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윤정선의 정원은 붉은색으로 감싸여 있다. 어두운 빨강은 여성성을 연상시키며, 여성/정원사의 기억은 그다지 평화롭지만은 않다. 누군가의 행복한 유년기를 책임졌던 여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여성이 되어 무조건 받는 입장에서 무조건 주는 입장이 되었을 때 세상은 온통 현실로 다가온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쾌락원리가 현실원리로 변환된다. 문명(또는 이성)이라는 현실원리에 만족하지 못하는 예술은 현실원리에 맞서 쾌락원리를 복구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과 함께 한다. 윤정선의 작품은 상처받고 고통받아 치유와 재생이 필요한 상태가 역력하다. 모든 것이 충족되었던 원초적 정원은 실낙원이 되었다. 예술은 복락원의 여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고사리 레볼루션


프로젝트 팀 고사리 레볼루션(김진, 백경원)은 ‘혁명’이라는 무게감 있는 정치적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앞에 ‘고사리’라는 장난스러운 단어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에 내재된 이상주의적 측면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미 존재하는 것보다 앞으로 도래할 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는 예술가들은 혁명가와 이해 관심을 공유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정치가와 달리 집단화에 바탕한 전략에 약한데, 고사리 레볼루션이 집단으로서의 최소한의 인원을 충족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사정에 근거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진보적 사상에서 실천의 중요한 두 계기는 혁명과 노동으로 간주 된다. 고사리 레볼루션은 이 전시에서 노동, 특히 ‘그림자 노동’을 다룬다. 자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노동은 늘 그림자의 역할을 맡지만, 그림자 노동은 특히 노동의 댓가에 대한 상실감과 연관된 개념이다. <그림자 노동자>라는 작품명은 노동 중에서도 더 열악한 그림자 노동을 소재로 하는데, 그들이 주목한 것은 영국과 한국의 도자기 제조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조사에 의하면, 작업공정 중에서 단순 반복적인 일은 여성 노동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공장이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해고되는 이들도 그녀들이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여전히 적으며, 인생의 주요한 시기에 출산과 육아에 시간을 소모하는 여성은 산업예비군이 되어 저임금 노동에 시달린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일의 많은 부분이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무임금 노동이기 때문에 공적 영역에서도 저임금 노동자로 취급되는 것이다. 고사리 레볼루션은 최초의 여성 노동자이기도 했던 고대의 베를 짜는 여신을 액자 모양의 틀에 담아 벽에 가득 걸어놓았다. 뒤에 거울을 깔아서 보는 이 또한 그림자 노동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거울은 보드리야르가 [생산의 거울]에서 말한 바와 같은 생산의 원리를 암시한다. 인간해방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 ‘생산의 거울은 깨져야 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논리였다. 진열대 속에 전시된 <그림자 노동자 II; 당신의 도구들>은 공장에서 생산된 도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수작업한 작품 뒤에 회사 이름 대신에 그것을 생산한 노동자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접시의 선을 따라 둥글게 배열된 것들은 작업 도구들이다. 작가는 숨겨져야 했던 것을 전면으로 드러내며, 노동자는 도구가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5. 자연과 인간; 크리스티 브라운, 피비 커밍스, 맹욱재 

 


크리스티 브라운


크리스티 브라운의 작품 <앰비카의 꿈>은 어린 나이에 죽은 소녀를 소재로 한 것이어서 그런지 아이와 동물이 나오는 장면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분위기가 감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하나의 틀에서 나온듯한 아이의 상들은 맞은편 벽에 걸린 동물원 그림을 향해 있는데, 동물들도 아이들도 지워지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동물원 그림에서 동물들은 부분적으로만 정확하다. 그리다 만 듯 비워진 부분이 많다. 이러한 불완전한 느낌은 생물체로서의 그것들은 완벽하지만 이제 그러한 대형동물들이 과연 자연계에서 자연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된다.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드로잉이라는 형식을 유지했다. 스케일만 기념비적이고 형식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 또한 복제에 복제를 거쳐 흐릿해진 복사물처럼 흐릿하다. 눈 코 입은 물론 성별도 불분명한 세라믹 인형들은 철저히 익명적이다. 반복에 바탕한 차이가 정확한 재현을 대체한다. 테사 피터스는 크리스티 브라운이 ‘구상 조각가이면서도 자연주의적 인체 묘사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조각상과 이집트의 반인반수 신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물이 존재의 안녕을 희망하며 영원을 응시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유령과도 같은 분위기는 낮은 조명으로 전시장 하단에 비치는 아이들의 그림자 때문에 더욱 고조된다. 거기에는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지만 무덤처럼 적막하다. 비슷한 형상이 많이 놓여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고대의 조상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지만 미묘한 운동감이 있다. 죽은 소녀는 동물들을 다시 만날 수 없지만, 동물들 또한 인간에 의해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어 아마도 저세상에서나 그들은 행복하게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흐릿한 만큼 그들이 보는, 또는 보면서 나아가는 대상 또한 그러하다. 동물원에 가기 좋아했던 어린 소녀라는 소재로 출발했지만, 다른 맥락으로 보자면 그것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었지만, 자연을 타자화하는 순간 인간 또한 그렇게 되었다. 정물처럼 배열되곤 하는 동물원의 동물들은 이미 ‘죽은 자연(Nature morte)’인 것이다. 인간이 인형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죽은 자연에 마주한 존재들은 한 세대가 아니라 억겁의 세대라도 되는 양 숫자도 많다. 자연 및 인간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은 삶의 타자인 죽음을 호출한다. 



피비 커밍스


피비 커밍스의 작품은 하나의 문턱이 더 있다. 전시장 안의 비닐하우스에 안치된 정체불명의 것은 그 내부로 들어가서야 확인된다. 어디에선가 적출된 기관같은 모양새다. 전체로부터의 분리는 죽음을 떠올린다. 아래에는 기관의 몸체에서 떨어진 흙 부스러기가 깔려있어 공중에 매달린 그것은 점차 변환 중임을 말한다. 작가는 흙덩어리라는 광물질에 적용되는 기나긴 변환의 시간대를 전시장에서 압축해서 재생한다. 작품 <임계질량>은 임계점에 놓인 어떤 존재를 표현한다. 그것은 멸종 위기종인 식물들의 부분들을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 동물들의 경우 그러한 가상적인 존재는 괴물이라고 불리운다. 그 식물들이 위기를 맞은 이유는 관객이 그것을 보기 위해서 비닐하우스의 문을 여는 행위에 암시된다. 작가는 문을 여는 가장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위들조차 생태계에는 치명적일 수 있음을 말한다. 소비자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일회용품들이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라. 인간이 개입되는 순간 습도의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공중에 매달린 ‘기관 없는 몸체’(질 들뢰즈)의 먼지화는 가속된다.  


작가는 가공되지 않은 흙을 사용하기 때문에 바닥의 흙은 다른 작품에 재활용되기도 한다. 모든 자연이 먼지로부터 왔다가 먼지로 돌아가는 과정을 겪지만 지구 생태계 속에서 인간은 더욱 큰 변수가 되었다. 테사 피터스는 피비 커밍스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새로운 지질학적 시기로 ‘인류세(Anthropocene)’를 언급한다. 지구 온난화 등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생태운동가들은 인간은 자연을 필요로 하지만, 자연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구호로, 인간과 자연의 비대칭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몫이 과도해지는 단계로 진입한 현대는 상시적인 생태계 위기를 살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섬세하게 기록하는 멸종 위기종 식물들은 곧 화석이 될지도 모른다. 지구의 일개 기생 종인 인간이 자연환경을 보호한다는 발상은 인간의 또 다른 오만일 수도 있겠지만, ‘인류세’에서 자연환경은 목적의식적 대상이 된다. 다양성이 생명인 예술은 자연의 편에 선다. 

 


맹욱재


맹욱재의 작품 <3개의 정원>에서 3개의 설치물은 인간이 자연을 더럽히는 단계를 나타낸다. 하얀 영역에서 회색 영역, 그리고 검은 영역까지 말이다. 극명한 삼계의 대비는 흑백논리처럼도 보이지만, 그만큼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극단적인 단계에 진입해 있다. 전시장 벽에 상영되는 영상물은 삼계를 무대로 방재복(또는 실험복)을 입은 인간이 이것저것을 행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자연이 행하는 다양성을 위한 실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상물은 설치물이 가능하게 된 원인과 과정을 유추하게 한다. 삼계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 관람객은, 그래도 아직은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색이 진해질수록 종 다양성은 줄어들면서 이상(異常)은 늘어난다. 맨 마지막 단계에서는 극단의 생태적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 가령 검은 쥐들이 드글거린다.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간이 그렇지 않은가. 설치물은 공중에 붕 떠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움과의 거리를 나타낸다. 원초의 자연에서는 맹금류가 다양한 종들과 어우러져 있지만, 회색지대에서는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가축만 남아있다. 


그나마 머리가 둘인 닭의 모습은 자연을 불구화시킨 인간의 손길이 감지된다. 자연의 이용에서 착취로, 그리고 파괴로 이어지는 과정이 묵시록적인 것은 인간 또한 자연에 속하며 같은 운명을 밟는다는데 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발명된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의 원류는 자동차 산업이 아니라 축산업이었다. 인간이 축제가 아닌 일상에서 항시적으로 고기를 먹기 위해 만든 시스템은 다시 인간에게 피드백된다. 인간 또한 고기나 자동차 부품처럼 파편화되는 것이다. 맹욱재의 영상작품 <a garden>은 실험복을 입은 인간이 자연을 조물주처럼 다루는 모습들이 나오고 있는데, 질서를 창조하는 전지전능한 모습이기보다는 질서를 어그러뜨리고, 어그러진 질서를 다시 세우려 동분서주하지만 역부족이다. 촘촘히 이어진 생태계에서 나비효과는 대부분 안 좋은 경우로 귀결되곤 한다. 지배하고 착취하는 자 또한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자 못지않은 위험부담을 떠안는다. 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의 목적론과 구별되어야 하며, 인간 또한 자연의 일원이라는 자연스러운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사고여야 할 것이다.  

  

출전; 클래이아크김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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