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박영근 /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 현장

이선영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 현장

박영근 전 (3.30-4.29, 자하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내 속에 너무 많은 나’라는 부제로 열린 박영근 전은 초상 속 생김새가 혈육임을 확인시키는 ‘딸의 딸’까지도 포함된 주체의 확장이다. 이러한 주체의 확장은 주변 모두를 자기화하는 나르시시즘적인, 또는 아전인수적인 방식이 아니다. 그러한 동어반복적 방식은 단조롭기는 하지만 나름의 평화를 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시에서 주체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분신들은 원본과 경쟁하고 도전한다. 투사에 대한 고전적인 상인 갑옷을 입은 기사부터, 자기와의 싸움을 수행하는 대표적 상징인 운동선수 이미지까지 다양하다. 예수의 상으로 자신의 초상을 그렸던 뒤러처럼, 종교적 인간에게 주체는 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캔버스 15개를 붙여서 만든 이 전시의 가장 큰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인물들로 변신한 자기의 모습들이 있다. 붓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전기 드릴로 확실하게 새긴 예수의 상흔은 신적 주체와 작품의 창조자를 중첩시킨다. 판토마임 배우처럼 열두 제자의 상징적 제스쳐를 하고 있는 분신들은 5x3열로 배치되었다. 







다빈치의 작품이 예수를 중심으로 열두 제자를 좌우로 배열했다면, 그는 그리드 구조를 택했다. 그림을 걸 수 있는 공간 문제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작품의 구조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 조치였을 것이다. 인물이 등장하는 12개의 패널은 밝은/ 어두운 배경으로 나뉘며, 그것들은 서양 장기의 판처럼 교차로 배열되어 빈틈없이 짜인다. 분신이라는 주제는 그만큼 작가에게나 관객에게나 혼돈을 주기에 틀은 더욱 확고해야 했다. 그의 작품은 주체가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기존의 상징적 우주에 태어나는 인간의 운명은 자유롭지 않다. 화가이자 종교인인 그에게 이 상징적 우주는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언어(상징)가 포함된다. 그는 이번 전시의 작가 노트에서 이전에 그렸던 ‘징기스칸의 12필의 말, 콜롬버스의 12척의 배, 월머트 박사의 체세포 복제물인 12마리의 양....’등을 떠올린다. 그것은 피타고라스나 카발라, 그리고 동양의 주역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에 보편적이었던 수비학(數祕學)적 상상력이다. 기표의 배후에 무언가 있다는 것, 그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비밀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에 의하면 세계는 읽어 내야 할 기호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우주에서 대상과 기호, 기표와 기의는 일치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기표들의 연쇄 망으로 복잡하다. 작품 속에 유령처럼 편재하는 것, 즉 미끄러지면서 형상과 상황을 모호하게 하는 선들은 세계에 새겨진 조화로운 기호 읽기가 쉽지 않음을 알려준다. 이 얽히고설킨 불투명한 우주에서 읽기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도전이다. 종교적 어록부터 아이의 일기장에 이르기까지, 형상과 함께 등장하는 문자들 또한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상징적이지만 전형적인 상징주의처럼 닫혀있지 않다. 기표 아래 깔린 내용이 있지만, 그것은 확정되지 않고 열려 있다는 점에서는 알레고리적이다. 상징적 중심은 시간 화 된다.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 초상화의 어법이 차용된다. 분신의 이미지는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껍질을 들고 있는 자화상에서 영감 받았다. 알맹이가 빠진 축 늘어진 가죽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것이 또 다른 미켈란젤로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이 고전적 데생의 힘이다. 


손녀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담긴 전시장 2층의 초상화들 역시 서양미술사의 고전적 전통을 빛내는 화가들, 가령 루벤스나 티치아노의 화법이 활용되었다. 그는 학교 수업 때 서양 고전주의가 적용되어 그려진 초상화를 교재로 활용한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부터 모국어처럼 배웠던 조형 언어는 하나이면서 여럿인 주체의 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현대미술의 거듭된 도전에도 고전주의가 살아남은 것은 최소한의 효용성 때문일 것이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널리 공유되었던 고전은 같음과 다름을 가늠해주는 전거이다. ‘내 속에 너무 많은 나’라는 전시 부제는 동일자 속의 타자라는 주제를 말한다. 주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탈(脫)중심화 되었다고 회자되는 시대, 탈중심이 가능하기 위해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중심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음으로서 탈중심은 그 진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근대를 야심차게 비판했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무력한 상대주의로 와해되어 기존 질서에 흡수된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동안 학원에서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려라’고 단언했던 스승의 말을 따라 초창기에는 추상적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90년대 말부터 다시 형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추상적 필력은 붓 이외에도 여러 도구를 사용한 여러 겹의 화면에 남아있다. 근대의 ‘새로움의 전통’은 인간의 안팎을 둘러싼 모든 것이 전적으로 사라지는 일은 없으며, 어딘가에 남아있고, 억압된 것은 언제든지 회귀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박영근의 작품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분신들은 명징한 형식이나 의식에 의해 억압되었던 것, 즉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곳은 몸이다. 그의 작업에서 몸의 상태는 매우 중요하다. 이전의 그가 전기 그라인더를 들기 위해서 몇십 킬로 그램의 살을 찌웠다면, 요즘 작업은 근육이 있어야 하기에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운동선수의 이미지는 이 전시의 여러 작품에서 나타난다. 몸은 경계를 풀어헤친다. 둘로, 넷으로, 그리고 n개로 분열한다. 분열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어떤 것들은 발이 보이지 않는다. 


정신분열증자를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데 적합한 주체로 생각한 철학자도 있었지만, 나를 잊는 쾌락은 죽음과 연결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주목한다. 그 경계에서 정상과 병리가 구별될 것이다. 예술가들이 이미 알고 있었고. 인류가 온몸으로 느껴왔던 그것에 무의식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큰 반향을 일으킨 이는 프로이트이다. 그는 [문명 속의 불안]에서 ‘이 거대한 우주에서 인간이 맡고 있는 사소한 역할을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람은 비종교적이다. 병리학적 연구를 통해 자아와 외부세계의 경계가 불확실해지거나 실제로 경계선이 부정확하게 그려진 상태를 많이 알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박영근의 분신들은 주체의 경계를 문제 삼는다.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확정짓는 선들은 헝겊을 둘둘 감은 전기 드릴의 무자비한 횡단에 의해 교란되곤 한다. 미리 해놓은 밑칠과 그 위에 얹힌 형상의 불일치도 특징적이다. 실제로 봐야만 진 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종적으로 횡적으로 상호 반응하는 층들의 도가니이다. 


박영근의 작품에는 형상과 씌여 진 텍스트 모두에서 웅웅 거리는 듯한 소란이 있다. 그것이 자신 속에 수많은 자신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자, 스펙터클의 홍수 속에서 손으로 작업하는 이유이다. 이전에 그린 돌멩이를 든 다윗처럼, 단촐하지만 자신에게 익숙한 매체는 골리앗을 이길 수도 있다는 믿음이다. 그는 그림과 자신 사이를 단순하게 해야 순간적인 영감을 살려낼 수 있다고 말한다. 배경도 언제나 깨끗하여, 형태가 변형이나 이동을 위해 움직이는 순간의 잔상을 부각시킨다. 캔버스의 조합을 통해서 설치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에, 회화가 가질 수 있는 밀도와 강도를 굳이 포기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붓처럼 사용하는 기계에서 비롯되는 속도감이 추가된다. 박영근의 작품은 초상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와 더불어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육체의 현존이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열한 자의식과 야생성이 공존한다. 전시에서는 오브제를 초상에 포함시킴으로서 현실과 환영을 병렬시켰다. 나이프를 문 초상과 액자 틀이 종려나무 잎으로 꾸며진 종려나무 잎을 문 소녀의 초상이 그것이다. 


고전적 형식과 종교적 내용은 변형의 기본 모델이 되어준다. 마귀같은 환영들과 싸우는 주체는 ‘말씀의 방패’와 ‘전신갑주를 착용한’ 기사의 이미지로 대변된다. [나를 향해 달리다], [나를 향해 빠지다], [나를 뛰어넘다], [나를 향해 던지다], [나를 무찌르다], [나를 넘어 뜨리다] 같은 제목은 자신과의 투쟁이 얼마나 격렬한 드라마인지 알려준다. 작품 [짐을 진 자]와 [전진하다]는 고통과 투쟁으로 점철된 종교적 승화의 서사이다. 경계의 흐트러짐은 불경스럽지만, 반(反)을 통해 정(正)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상반되는 것의 대구는 배경색이 다른 작품들을 이어붙이는 설치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전부터 캔버스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조합하여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좌우의 배치만 바뀌어도 의미가 달라지는 작품을 비롯하여, 최대 20년까지도 벌어지는 작품들을 조합하기도 한다. 나와 분신이 끝없이 부딪히듯, 나의 분신인 작품들도 부딪힌다. 박영근에게 작업은 시간을 가속 시키고, 때로는 역주행도 하게 하는 역동의 장이다. 그렇게 주체와 분신들은 독백이 아닌 대화를 시도한다. 

  

출전; 월간미술 2018년 5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