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문수만 / 상징적 우주의 메아리

이선영

상징적 우주의 메아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작가가 영감을 받은 도자기나 담배함 같은 옛 물건들보다는 크지만, 세계를 담기에는 턱없이 작은 원형의 캔버스에는 세계를 압축하여 재현한 상징적 우주가 있다. 에밀레 종에서 유래한 소리나 울림을 표현한 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니 압축 재생이라는 말도 어울리리라. 원형 구도를 가지는 그의 작업은 많은 것들을 하나로 융합시키지만, 세목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세목들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여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하기도 하다. 이러한 생략은 유한 속에 무한을 담는 문수만의 방식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Simulacre’와 ‘Fractal’ 시리즈가 주를 이루고, ‘Cloud’, ‘Coherence’, ‘Bronze Mirror’  ‘Gate of Time’ 등이 나왔다. 큰 것은 지름이 2 미터가 넘는 원형 캔버스들은 원 속에 또 다른 원들을 배치하면서 하나의 우주 안에 있는 또 다른 우주들을 보여준다. 마술의 원(magic circle)처럼 그어진 하나의 원형 안에 다시 접어 넣은 또 다른 소우주들은 서로 공명하면서 의미를 증폭시킨다. 



Simulacre(241804)_diameter 191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Simulacre(201804)_diameter 159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그가 주로 감흥을 얻는 자연과 문화재급의 유물은 정교함이 특징적이지만, 또 하나의 원천은 최초의 전공인 엔지니어적 정밀함이다. 이전 시대에 장인은 예술가이자 기술자였고, 개념화가 많이 진전된 현대미술에서도 제작과정은 작품의 독특함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요소이다. 서울 근교의 공장 한 켠에 자리한 그의 새로운 작업실은 예술과 자연, 그리고 기예를 나누는 인공적 경계를 무화시키는 작품의 산실로 적당해 보인다. 문수만의 작품은 옛 유물을 포함한 자연 등, 세계를 모사한 것이기에 ‘시뮬라크르’이며, 모사의 방식에 있어서 대우주와 소우주를 일치시킨다는 점에서 ‘프랙털’과 연관된다. ‘거울’이라는 소재는 어떤 법칙 또는 규칙이 무한 반사되는 메커니즘과 관련된다. 소리의 경우 공기라는 매질을 통해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 ‘시간의 문’을 통과하고 있는 작가에게 이전작품에 명확했던 선적 경계는 흐려지는 경향도 보인다. 그것들은 ‘구름’처럼 가장자리가 모호하다. 


‘원본 없는 복제’(들뢰즈)로 정의되는 용어 ‘시뮬라크르’가 그의 주요 시리즈의 제목이 된 것은 백자와 청자, 분청사기 등 그가 선호하는 옛 유물의 색감과 질감, 그리고 무늬를 참조한 것에서 왔다. 미술사가들은 시작과 끝이 선처럼 이어지는 역사적 규범을 적용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도공들을 추적하고 싶겠지만, 극소수의 훼손되지 않은 유물과 파편들은 그것들이 대부분 이름 없는 도공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다만 시대의 양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데, 그 또한 개인의 독창적인 산물은 아니다. 작가는 배치를 통해서 이전의 것들을 변주한다. 이미 존재하는 형태와 상징은 배치를 통해 변화한다. 새로운 배치로부터 재현이 아닌 생성이 이루어진다. 대부분 입체 위에 새겨졌을 무늬가 원형캔버스에 옮겨지면서 생겨난 빈공간에 작가가 개입할 여지는 많아진다. 그 공간은 더욱 넓어져서 참조대상으로부터의 자율성을 구가하게 될 것이다. 



Simulacre(171804)_diameter 159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Simulacre(221804)_diameter 191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Simulacre(161804)_diameter 159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둥그스름한 캔버스는 그의 작업에 내재 된 ‘영원회귀’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품는다. 작은 원들이 큰 원안에 빼곡이 자리한 작품 [Simulacre(241804)]는 회귀의 과정이 무한함을 알려준다. 자연 또한 무한히 회귀한다. 죽은 듯하다가도 이듬해에 다시 피는 꽃, 다시 생겨나는 나비 같은 동식물은 진화라는 대역사에 참여하는 가운데, 매해 다시 발생하는 개체들로, 문수만의 작품에서 원과 원 사이, 원의 안팎에 자리한다. 물론 용이나 봉황같은 가상의 생물체 또한 포함된다. 이 가상생물체들은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존 동물들의 부분에서 따온 복합체들이다. 가령 문수만의 작품에서 패턴으로 나오는 돼지 코는 용의 코이기도 하다. 이전 시대의 자연 및 자연의 과정을 담은 물건들에는 자연의 이치와 닿고자 한 불교같은 종교(또는 정신체계)의 도상으로 남아있으며, 관객에 따라서는 이러한 기시감을 좋게 또는 나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기존의 상징적 의미가 너무 두드러지지 않게 처리한다. 


그의 작품에서 상징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않고 다가(多價)성을 가진다. 도자기 풍의 외관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동양적인 것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근대이전의 서구의 세계관인 ‘존재의 대연쇄’을 떠올리는 층층의 구조 또한 전능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신성한 질서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작품  [Simulacre(231804)]에서 나타나듯, 그의 최근 작품에서 명확한 경계는 사라져간다. 구름 모양의 언덕 위에 버드나무가 자라고 그 사이사이로  새들이 날아다니는 미지의 세계 가운데에는 이 모든 지상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을 태양같은 존재가 자리한다. 방사되는 빛은 식물의 잎처럼 보인다. 지상에서 최초로 빛을 접수하는 것은 엽록소가 있는 부위이다. 그것이 단계별 과정을 거치면서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를 가능하게 하고 이러한 격세유전적인 과정을 통해 관객 앞에 걸려있는 예술작품도 가능해진다. 작품 [Simulacre(201804)]와 [Simulacre(181804)]에서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은 마치 짙은 안개나 구름이 낀 듯한 우주이다. 



Simulacre(181804)_diameter 175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Simulacre(211804)_diameter 175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Simulacre(231804)_diameter 191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보통 부정확한 것이 정확하게 되는데, 그의 작품은 거꾸로다. 문수만의 작품에서는 더 많이 작업한 것이 더 부정확하다. 80% 할 때까지는 경계가 완벽하다고 한다. 그러나 물감을 뿌리거나 사포로 갈거나 하면서 정확한 형태를 흐릿하게 한다. 이전의 청자 작업이 완벽주의에 집착한 스타일이라면, 요즘 작업은 좀 더 열어두고자 한다. 열린 체계로의 진화이다. 갈아내면서 작가가 상감기법으로 심어놓은 형태를 다시 찾아 나간다. 빈티지 스타일로 뿌옇게 보이는 부분들은 사실은 지워진 것이 아니라 덮여있는 것이다. 사각형으로 된 유일한 작품 [Simulacre(091803)]를 제외하면 ‘시뮬라크르’ 시리즈의 기본구도는 원이다. 청자나 백자를 닮은 색감 때문에 둥근 형태는 천구(天球)를 떠올린다. 문수만의 작품에는 이러한 구들이 크기와 위치를 달리하며 수많은 비눗방울처럼 자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연적이기 보다는 필연적인 연쇄망을 이룬다. 선이 명확하든 아니든 대칭적인 구도가 대세이다. 


아서 러브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근대가 무신론을 통해서 텅 비워 놓은 공간 이전 단계를 복구한다. 그에 의하면 근대 이전 세계는 명백한, 이해하기 쉬운 단일한 구조를 가졌고, 명확한 형태일 뿐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완벽한 형태라고 생각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별들을 그 표면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우주 구성단위인 천구이다. 플라톤 이래, 원은 자기충족적인 완전함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리는 자아와 우주를 일치시켰다. 문수만의 작품이 세계와 나의 통일이기도 한 만다라 형상이 떠오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프랙털’ 시리즈에서 질서정연하게 구축된 것들이 카오스로 되돌아가는 국면은 만다라가 지워질 때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티벳의 승려들은 색색의 모래를 바닥에 뿌려가며 만다라를 짓고 그것을 다시 허물곤 한다. 



Cloud(011707)_Circle175cm_Acrylic on Canvas_2017


Cloud(081804)_diameter 159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Cloud(071803)_diameter 210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영원한 회귀가 가능하기 위해 이전 세계는 허물어져야 하는 것이다. 티벳 승려들의 모래 장난처럼 보이는 행위는 우주적 행위로 고양된다. 문수만 또한 정교한 상징적 우주를 구축하고 해체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백이다. 공백은 내포적 다양성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지워진(또는 덮인) 부분이 점점 많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새나 나비가 날아다니는 그 공간이 하늘이라면, 요즘 작품에 드리워지고 있는 구름들은 체계보다는 과정을 강조한다. 구름은 그 안에 결정체를 비롯하여 여러 단계의 물질을 품고 있다. 문수만의 정교한 상징적 우주는 체계적이지만, 이 체계 또한 생멸하는 것이다. 여러 겹의 원으로 이루어진 공간 중간계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작품 [Cloud(011707)]는 바탕 면이 밝아서 그런지 형태들이 명확하게 보이지만, 나비들이 가득한 모습은 나비들만큼이나 나비들이 움직일 공간의 넉넉함을 말한다. 


작품 [Cloud(071803)]에서 물고기들이 있는 공간 또한 그러하다. ‘예술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고정된 점(定點)은 부풀어 올라 구름이 되었다. 구름이 몰려오는, 또는 구름 그 자체를 닮은 작품은 조화롭지만 움직임 없는 우주가 아니다. 구름 시리즈에서의 나비나 물고기는 구름과도 같은 순환 현상을 예시한다. 프랙털 시리즈에서는 어떤 형태도 고정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흐름이 느껴진다. 중심과 주변의 밀도와 색이 다르기도 하지만 대체로 푸른색 계열인 프랙털 시리즈는 일단 물결처럼 보이는데, 이 물결은 형태와 과정이 합쳐진 것이다. 여기에서의 물은 강처럼 흐르기 보다는 샘처럼 분출한다. 이러한 공간적 상상은 시간 또한 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솟아오르는 것으로 상상하게 할 것이다. 그 모두는 ‘재현이 아닌 생성’(들뢰즈)을 위한 조건이다. 프랙털 시리즈에서 걸쭉한 질감은 분화구에서 분출되는 용암처럼도 보인다. 



FRACTAL(101803)_diameter 85cm_Oil & 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1)



FRACTAL(131803)_diameter 85cm_Oil & 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FRACTAL(171803)_diameter 38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그는 이 형태에 대해 ‘마그마의 분출, 퍼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마그마가 분출되면 중심이 비게 되고 다시 중심부로 빨려가는 움직임이 생겨나는 것에서 착안했다. 자연은 빈 곳을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에 밀도와 농도의 차이에 의한 움직임이 발생한다. 프랙털 시리즈는 대개 지름 1미터 내외로 물질과 에너지의 집약도가 매우 높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가 녹고,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단계를 말한다. 코스모스의 이전과 이후의 단계는 카오스인 것이다. 사고에 있어서 시간의 도입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 뿐 아니라 그 현실이 생멸하는 조건 또한 보게 한다. 둥글게 보이는 태양 또한 더 자세히 찍힌 사진을 보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문수만의 프랙털 시리즈는 사물의 변화를 야기할 에너지의 흐름을 가시화한다. 또한 움직임의 가상은 있지만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는 프랙털 시리즈는 에너지가 굳은 것이 물질임을 알려준다. 


그것은 우주부터 공장의 기계까지 모두 관통되는 법칙이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열을 ‘서로 충돌하고 있는 원자들의 무질서한 운동’(벤저민 톰프슨)이라고 정의하면서, 열의 흐름에 의해서 기체가 팽창(가열)하거나 수축(냉각)되어 피스톤을 순환시키는 카르노 순환장치가 발명되었다고 말한다. 필립 볼에 의하면 19세기 엔지니어들에게 더 나은 엔진을 만들기 위해 등장한 분야(열역학)가 이제는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가장 장엄하고 근본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문수만의 프랙털 시리즈는 열역학처럼 변화의 과정을 전면화한다. 열역학은 생물체부터 증기기관까지 종류와 차원을 달리하면서 관통된다. 프랙털 또한 규모를 달리하며 구조가 반복되는 현상이다. 필립 볼의 시적인 표현에 의하면, 프랙털은 ‘역사의 사건들이 얼어붙어서 만들어진 지도인 셈’이다. 



FRACTAL(201803)_diameter 69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FRACTAL(221803)_diameter 69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FRACTAL(261804)_diameter 191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작품 [Coherence(031707)]는 소리의 전달이라는 또 다른 에너지의 방식과 관련된다. 청동의 느낌이 나는 이 캔버스 작품은 ‘에밀레 종을 펼친 것’이다. 화면 가운데에 봉황이 자리하고,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무늬들이 방사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13세기에 만들어진 에밀레 종 소리의 비밀은 종의 단면이 틀려서 치면 두 가지 파장이 나오고 큰 파장과 작은 파장이 서로 간섭하여 맥놀이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알려져 있다. 그 울림 소리가 너무나도 신비하여 갖가지 추측도 나왔지만, 사람을 녹여서 만든 종이라는 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악기에서 사람 소리를, 사람 소리에서 악기 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의 추구는 계속되었다. 작품 제목인 ‘coherence’는 맥놀이와 관련되며, 작가의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인 오디오 기기 관련 특정 상표 이름이기도 하다. 소리가 나지는 않는 이 작품은 파동의 형상화를 보여준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음악을 ‘허공을 날아다니는 진동의 연속’과 ‘두뇌 속의 정서적 반응의 연속체’로 정의한다. 그러나 저자는 정서적 반응에 이를 수 있기 전에 일단 진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동에 대한 형상화는 음과 관련된 이 작품 뿐 아니라, 재귀순환적(recursion)인 문수만의 작품에 편재한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재귀순환적인 구조란 ‘그물구조로 둘러싸인 구조’를 말한다. 가령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다. 원 속에 원, 그 안에 또 다른 원들이 중층적으로 배열 된 ‘프랙털’적인 문수만의 작품은 ‘순환적이 되어서 무한역행(infinite regress)으로 치달을 것’(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이다. 순환적인 자기복제가 끝없이 이루어지는 프랙털과 음이 전달되는 과정은 동형적이다. 재귀순환은 ‘동일한 사태가 상이 한 층위들에서 한꺼번에 출현하는데 근거’(더글러스 호프스태터)한다. 



Coherence(031707)_Circle212cm_Acrylic on Canvas_2017_rm



수학자와 미술가 음악가가 모두 등장하는 책 제목 [괴델 에셔 바흐]는 음악이나 미술에서 발견되는 재귀순환성이 원자에서도 발견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핵 구성 물질은 양자와 중성자, 중성미자와 파이 중간자, 쿼크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방울 속의 방울 속의 수십억 개개의 방울들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만들어진다. 가운데 꽃이 마치 태양처럼 자리하고, 중간계에 풀, 물고기, 새 등이 함께 있는 작품 [Gate of Time(041803)]은 색감 때문에 따스한 느낌을 준다. 그와 짝패를 이루는 작품 [Gate of Time(051803)]은 서늘한 느낌이다. 푸른색 선이 더 지워지면서 시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지려는 듯하다. 마거릿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에서 빅뱅의 순간에 물질뿐 아니라, 공간과 시간 역시 태어났음을 말한다. 이러한 공간개념은 우주론적 서사를 낳는다. [공간의 역사]에 의하면 빅뱅이 양자, 중성자, 전자와 같은 기본 소립자들을 생기게 했다면, 인체의 살과 뼈를 이루는 원소들, 즉 탄소, 질소, 산소 등은 바로 항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수만의 작품에서 공간은 물론 그 이후에 생겨난 생명도 모두 ‘시간의 문’을 통과한다. 동심원 형태의 거대한 캔버스는 팽창하는 공간감을 표현하며, 때로는 시공간을 통과하는 문 같은 느낌을 준다. 둥근 형태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구멍(화이트홀, 블랙홀, 웜홀 등)들에 대한 상상과 연결된다. 현대 우주론에서 시간은 공간의 다른 차원으로 간주 된다. 그래서 이러한 4차원의 복합물은 시공간(spacetime)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번 전시에서 실험적으로 선보이는 거울 관련 작품은 차원의 이동에 대한 상상과 관련된다. 작품 [Bronze Mirror Design-Front and Rear View]는 프랙털 시리즈에 나오는 촉감과 시뮬라크르 시리즈에 나오는 무늬를 하고 있고, 반은 비워 놓은 작품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청동거울의 설계도면’으로, 그는 한 장의 설계도면에다가 두 개의 면을 병렬했다. 오른쪽은 거울의 전면이고 왼쪽은 거울 뒤의 문양이다. 



Gate of Time(041803)_diameter 78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Gate of Time(051803)_diameter 210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작가는 거울의 앞과 뒤를 동시에 보여주는데, 그것은 거울 이편과 저편을 나누는 일종의 문턱(threshold)을 생각하게 한다. 거울은 ‘시간의 문’에서의 구멍들처럼 이곳과 저곳을 연결 시키는 또 다른 문으로, 이러한 상상력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같은 기묘한 동화에도 나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편을 생각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고이며, 작품을 상징적 우주로 보는 작업에 스며있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에 비친 상은 거울 너머에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다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를 넘어서라고 말한다. [거울의 역사]에 의하면, 거울은 기호와 유추를 통해 나아가는 길, 보이는 것의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다른 곳을 증명하는 간접적인 여정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보네는 빛과 반사상의 형이상학이 펼쳐지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예를 들면서, 여기에서,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이며, 영혼은 신성한 것의 반사상이라는 관념이 있음을 말한다. 


보네에 의하면, 플라토니즘의 전통에서 거울은 유추와 위계의 체계 안에서 매개의 역할을 수행한다. 거울은 존재의 연쇄 망으로 이루어진 문수만의 상징적 우주에서 유비의 매개자가 된다. [거울의 역사]는 플라톤적인 낙원, 즉 대칭과 상응의 세계에서 신비한 대칭은 인간으로 하여금 우리의 일상적 현실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그보다 더 나은, 보이지 않는 짝이 존재한다고 믿게 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거울을 넘어 반대쪽으로 가려는 꿈은 바로 다른 쪽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구에 부응한다. 그것은 안과 밖을 조화시키려는 희망을, 그리고 현실의 무게와 죄의식의 압박을 벗어난 세계에서 결정적으로 환영과 상상 쪽에서 살아가려는 매혹적인 희망을 반짝거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 이편과 다른 세계인 저편으로의 여정이 쉽지는 않다. 거울을 통과하는 앨리스는 그냥 저편으로 순조롭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험의 여정에 돌입하는 것이다. 거울 이편에서 저편으로의 여정은 출구를 찾기 어려운 미로로 나타난다. 



Klopfen(031803)_diameter 210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Bronze Mirror Design-Front and Rear View_diameter 93cm_Acrylic on Canvas_2018_SOOMANMOON



복잡한 선으로 이루어진 문수만의 작품은 만다라와 비교되며, 만다라 또한 미로를 상징한다. 진리에 이르는 길일 미로에서 시간은 중요한 변수가 된다. 문수만이 영감을 받는 오래된 유물들은 시간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 있다. 그의 작품에서 흐릿해지는 선들, 또는 처음부터 흐릿하게 표현한 선들은 단지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다는, 단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에 머문다. 묻어놓은 도상들을 갈아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다. 최소 열 겹이 넘는 층을 가지는 작품에서 길은 만들어질 뿐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은은한 분위기의 작품 [Klopfen(031803)]은 어느 작품 못지않게 정교하지만, 촘촘하게 새겨진 무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한정한 영역 내의 시공간을 밀도 있는 도상으로 채우는 상징적 작품은 신비롭지만, 텅 비워 놓은 중심이 암시하듯 결정적인 의미는 없다. 다만 끝없이 나아가는 길(道)이 있을 따름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소우주와 대우주를 상호적으로 결합하는 융합 관계에서 신비주의적 기호현상을 본다. 에코에 의하면 신비의 지식은 위에 있는 것은 아래의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그 역도 가능하다. 


이렇게 우주는 모든 것이 다른 것들을 의미하고 다른 것들에 반사되는 엄청난 유리방으로 인식된다.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말하듯이, 유비적 사고는 끝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근대과학은 유비적 사고를 거부했다. 과학적 관측은 타원궤도인데, 완벽을 고수하는 유비적 사고는 원궤도를 고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학문인 과학도 유비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으며 예술은 더욱 그렇다. 상호작용의 미로에서 궁극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에코는 신비주의적 비밀은 텅 빈 비밀임을 말한다. 신비주의적 사고에서 세계는 기호의 그물망으로 덮여있지만, 그러한 기호에서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은 생략되어 있다. 그것은 기호가 결코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호의 불투명성은 현대미술이 재현주의를 거부할 때도 부각되었다. 지워진 면적이 점차 늘어나는 문수만의 작품은 기호의 불투명성을 암시한다. 그것은 고정된 조화가 아니라 요동(fluctuation)치는 우주의 결과이기도 하다. 예술적 작업의 의미와 목적도 인생의 의미와 목적처럼 모호할 것이다. 다만 후기 구조주의로 대변되는 현대의 철학은 이러한 표류의 상황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