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부드러운 권력 전 / 정체성을 해체하는 정체성

이선영

정체성을 해체하는 정체성

부드러운 권력 전 (3.15-5.6, 청주시립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가족의 구성원을 비롯해 생산조건의 재생산을 맡아왔던 여성들은 예술의 창조에 참여하기 힘들었다. 오랫동안 그녀들은 예술 대신에 자식을 창조한다고 간주되어왔다. 그녀들이 예술에 나타나는 경우는 주로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나 어머니 등이다. 페미니스트의 집요한 연구에 의해 여성 예술가들은 모래사장의 바늘처럼 하나둘씩 찾아내지고 있다. 출산과 육아를 둘러싼 여성의 역할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가지는 이 전시의 기획자가 기획의 글 서두에 인용하는 ‘왜 지금까지 위대한 여성미술가들이 존재하지 않았는가?’(린다 노클린)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답이라고 본다. 출산과 육아를 비롯해 주로 여성이 담당해왔던 가사노동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대표로 임금을 수령하는 분업체계 속에서, 요즘 말로 을(乙)의 입장에 놓여왔기 때문이다. 간혹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서의 임무 모두를 잘 수행하는 수퍼 우먼도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여성들의 뒷받침을 통해서이다. 




정정엽 전시 전경 (이하 청주시립미술관 사진제공)



정정엽 전시전경


정정엽. red bean, 116.8x91cm, oil on canvas, 2012



정정엽. red bean, 116.8x91cm, oil on canvas ,2012



출산과 육아를 위해 일생의 중요한 시기를 비워놓아야 하는 현실은 지금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2차 대전 이후 인류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평가되는 경구 피임약의 등장 등, 출산과 육아에 관련된 준 생물학적 운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시기에 여성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목소리가 더욱 높아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출산과 육아가 선택이 된 지금은 여성의 재생산 활동에서의 ‘파업’이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급격한 변화의 와중에 있다. 여성의 출산과 육아에 대한 전통적인 역할 때문에 오랫동안 여성은 남성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반대편인 자연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자연이 변화하고 있다. 자연은 단순히 대상화되지 않는다. 여성이 자연이라면 그 자연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 여성-자연은 과정 중에 있다. 이 전시에서 나타나는 씨앗이나 싹, 파종같은 이미지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의 상징으로 각 작가마다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모토로 한 의식적인 운동이 처음 나타난 민중미술, 그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정엽의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 콩은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키우는 여성을 떠올린다.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팥 알 하나하나는 헤쳐 모이면서 다양한 형태와 상상력으로 번져나간다. 여성의 생리적 특성과 관련된 붉은피톨부터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까지 말이다. 정정엽의 팥알은 하나이면서 다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중이나 민족, 대중을 넘어서는 다중(多衆)의 이미지로 고양된다. 화면 가득 팥이 있는 그녀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추상미술에 함축된 환원이 아니라 현실로의 확장을 지향한다. 김주연의 설치와 사진작품에 등장하는 씨앗은 여성의 옷에 붙어 자란다. 옷이 몸의 연장이라면 싹들은 몸의 연장일 것이다. 한시적 상황 속에 걸쳐있는 싹은 자랄 뿐 아니라 죽기도 한다. 생명의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삶만큼이나 죽음도 있는 작품에서 생명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싹은 알 껍질과도 같은 어떤 세계를 뚫고 나오는 것이다. 김주연의 작품에서 몸/옷의 경계를 해체한다. 작품의 우툴두툴한 외곽선은 경계의 흐트러짐에 민감한 몸의 외곽선과 중첩된다. 생명의 과정과 연관되는 여성은 깔끔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그 대가로 어떤 코드로도 환원될 수 없는 실재감을 가진다.




김주연 전시전경



김주연, 존재의 가벼움 VIII 사진, 피그먼트프린트 108x144cm 2016



김주연, 존재의 가벼움III, 108x144, 2015, 사진,피그먼트 프린트



여성의 억압은 남성의 억압을 야기하여 가족의 대표자(가장)로 바깥 영역에서 임금노동에 복무하는 남성 또한 고통받아왔다. 단적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고 고군분투하는 대부분의 남성에게 예술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들에게 예술에 더한 페미니즘은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좀 여유 있는 계층의 ‘교양’ 있고 ‘신사적’인 남성의 경우 그것이 좋은 뜻을 가졌다는 점까지만 인정할 것이다. 가부장제가 명목적으로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폐지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여성을 포함한 다수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동성애 같은 소수자의 목소리가 페미니즘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특히 나이든 여성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 이채롭다. 현실 속에서 나이든 여성은 유령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취급되기 일쑤이다. 현대적 환경을 이루고 있는 스펙터클에는 생물학적 전성기의 미녀가 주로 나온다. 이 전시에서는 여성예술가 자신을 포함하여 나이든 여성의 꿈과 환타지를 비롯한 여러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나이든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는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에는 게이와 레즈비언 포함된다. ‘미친년’은 사회의 규범에 맞지 않은 여성들을 상징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잘 찍힌 거대한 컬러 사진에 담긴 여성에 대한 기대치를 저버린다. 여성, 아니 모든 인간에는 광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모두들 미친 기운을 잠재우고 정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가부장제를 비롯한 사회의 상징적 질서는 정성/이상을 구별하는 잣대로 예외적 존재를 억압 또는 관리하기 때문이다. 극단은 소수지만, ‘소수는 다수가 될 수도’--들뢰즈가 [카프카 론]에서 주장했듯이—있다. 관객이 대면하는 여성예술가, 여성신학자를 포함한 다양한 ‘미친년’들은 사회의 희생양이면서도 매력적 존재로 나타난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 또한 억압받는 다수에 속하게 된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이 전시는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약한 고리를 통해서 삶과 괴리를 가지는 예술에 대해서 묻는다. 



박영숙, 내안의마녀 전시전경



박영숙, 내안의 마녀 전시전경



박영숙, A flower shakes Her 미친년프로젝트 ‘꽃이 그녀를 흔든다', 120x120cm, 2005, c-print, 2015



박영숙작-미친년 프로젝트 ‘게이 그리고 레즈비언', 0x120cm, 2003, c-print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어떤 한 세력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세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일 수 있다. 19세기의 산업 자본주의 시대 프로레타리아가 사회적 진보를 견인할 수 있는 보편계급으로 평가되었듯이 말이다. 19세기 ‘리얼리즘’—린다 노클린의 또 다른 저서명이기도 하다—에서 프로레타리아는 당당히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이 되는 시점이 되면 계급도, 페미니즘도 사라지는 것이다. 계급을 주장하는 세력은 계급이 없는 사회를,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세력은 ‘페미니즘이란 말 자체가 소멸되는 사회’--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기획자가 말했듯이—를 꿈꾼다. 더 나아가 삶 자체가 예술적이 되면 예술도 사라질 것이다. 맨 마지막 대목은 예술을 한시적으로만 인정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이었다. 그러나 가족, 여성, 예술 등 서로 이어지는 영역들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러한 문제의식이 페미니즘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새롭게 한다. 


페미니즘이 ‘부드러운 권력’인 것은 모든 운동 자체가 지배적 권력에 대항 하는 또 다른 권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지배적 권력 또한 부드럽게 작용한다. 미셀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주장하듯이, 성이 자리하는 몸은 권력의 가장 밀접한 통로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 운동 또한 성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는 해석이 있다. 미셀 푸코의 권력이론에서 성과 권력은 담론으로 연결되어있으며, 그것은 억압적이 아니라 생산적으로 작동한다. 생산적이라 함은 권력이 지식은 물론 쾌락을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흔히 앎의 기쁨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앎이 권력이 되고 타자를 억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보다 바람직한 경우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권력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여성이 억압당한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큰 공감을 얻지 못한다. 여성과 권력이 연관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경우로 ‘여성적 향락(jouissance feminine)’(자끄 라캉)이 드러나는 예술을 들 수 있다. 




윤지선 전시전경



윤지선 전시전경


윤지선, rag face #17001-2 2017 Sewing on Fabric and Photograph Approximately 58x53cm



윤지선, rag face #17001-1 2017 Sewing on Fabric and Photograph Approximately 58x53cm



즐거움을 주는 차이야 말로 예술의 정체성 아닐까. 회화, 사진,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가 하나의 주제로 수렴되고 있는 ‘부드러운 권력’ 전은 향락을 포함하여 여성적 감수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언어에 대해서 고민한다. 페미니즘은 성-권력의 담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세상의 반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존재와 의식의 괴리가 있을 수 있다.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여성주의와 자신의 문제를 쉽게 일치시키지 못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페미니즘이 상투적으로 코드화될 때 그 틀에 갇히는 것은 분명 꺼림칙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집단적 해결이 필요한 페미니즘 또한 다른 사회운동처럼 의식화의 문제이다. 여성적 주체가 앞서는 것인데, ‘부드러운 권력’이라는 부제를 가지는 이 전시에서는 그러한 강한 주체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기획자가 떠올리듯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로 대표되는 현대사상은 강한 주체를 의심한다. 더 나아가 그것을 해체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대변되는 강한 주체는 근대의 특징이다. 현대에 대한 거대한 지형도가 형성되던 극적인 시기에 주체는 거의 이념이 됐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기존의 경직된 정체성을 해체/재구성하는 또 다른 정체성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얼굴을 사진으로 담은 이미지를 활용하여 천에 바느질한 윤지선의 작품에서 개인의 정체성의 상징인 얼굴은 누더기가 된다. 천을 관통하는 바늘은 앞뒷면으로 초상을 그리게 한다. 작품에 따라 앞뒷면은 동시에 보여 지게 설치되기도 한다. 표면의 이면은 더욱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갈무리되지 않은 실들이 지저분한 뒷면은 의식에 가려진 무의식처럼 보인다. 자기풍자적인 윤지선의 독특한 초상에서 무의식은 더욱 강력하다. 그녀의 작품에서 무의식은 저 깊숙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에 가리워진 진리같은 묵직함을 가지지 않는다. 




조영주, 그랜드 큐티 전시 전경



조영주, 그랜드 큐티 전시전경



조영주, 그랜드 큐티 Grand Cuties단채녈 영상(7분34초), sound, color_ Single channel video (7mins 34secs), sound, color 2015



그것은 표면과 바로 연동되는 또 다른 표면으로서의 가벼움으로 팔락거린다. 즉 그것은 부드럽다는 특징을 가진다. 유연성은 이도저도 아닌 자의성과는 다르다.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종의 강한 명분을 가진 운동일수록 유연해야 하고, 다양한 상상력을 중시하는 예술은 그러한 유연성을 제공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예술로 접근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정도면 여성의 지위 향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안이한 생각이 들 때조차 페미니즘 예술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예술은 ‘이 정도면 됐지’하는 한계 자체를 거부한다. 또한 현실적으로 달성된 성과가 충분한 것인가도 질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 특히 페미니즘 예술은 불온하다. 예술은 사회적 현실에 대응하는 또 다른 현실이다. 애초에 허구인 예술은 사회적 현실에 내포된 허구적 측면을 용이하게 다룰 수 있으며, 이 전시에서는 풍자적이고 유쾌하게 나타난다. 


단채널 영상으로 만들어진 조영주의 [그랜드 큐티]나 [꽃가라 로맨스]는 이 전시회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유치찬란하게 꽃단장하고 다양한 설정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희극적이다. 그것은 기괴한 코미디같기도 하지만, 인간이 성장을 마친 후 늙어가면서 다시 어린애처럼 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거대한 창고, 공장처럼 보이는 배경은 산업시대의 상징이며 할머니들의 직장이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그곳에서 지루한 노동 대신에 자신의 환타지가 투사된 의상을 갖춰 입고 춤을 춘다. 춤은 그다지 자유롭지는 않다. 마치 매스게임처럼 보이는 동작은 노동을 비롯한 삶에서의 소외를 반영하는 듯하다. 오늘날 소외는 소외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지배 이데올로기의 공세가 전방위적이다. ‘낭만적 사랑’, ‘혈연공동체’ 같은 기분 좋은 허위의식은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가차 없는 세계를 견딜만하게 해주는 허술한 장치가 되고 있다. 




김희라 전시전경



김희라 전시전경



김희라 전시 전경



김희라, 새빨간거짓말, 가변크기 2004,



김희라, 파란닭, 50x65cm, 2006, 천위에 바느질



전체 예술의 영역에서 남성이 두드러지지만, 남성의 영역에서 예술은 소수자의 취급을 받을 것이다. 즉 그것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말 그대로 ‘부드러운’ 영역, 즉 여성의 영역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미술대학의 학생들을 비롯해서, 구성원의 숫자로만 본다면 미술은 여성이 주도하고 있다는 착각도 일으킬 법하다. 예술자체가 소수화 된 형국에 남성, 여성 따지는 것 자체가 누군가한테는 부당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예술은 그러나 가족을 비롯한 공동체들이 깨지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 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경향이 우세해지는 시점, 그래서 그림자 노동으로 은폐되어왔던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잡다한 일들에 대한 객관적 가치가 수치화되는 시점에서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분란을 일으키는 말썽 많은 담론이 되기도 한다. 노동에서의 소외는 여성이과 남성, 그리고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서 동일하다. 사적영역에서 일어나는 소외를 놀이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 예술의 영역으로 고양될 수 있다. 예술을 통해 사적영역은 공적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김희라는 자신의 집이자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어수선한 광경을 보여준다. 누군가 집안일을 하면서 예술을 한다면 그것은 ‘토탈 아트’일 것이다. 작가는 좋게는 자기의 모든 것이 예술이고 나쁘게는 혼돈인 장을 보여준다. 섬유공예를 전공한 작가의 감각은 예술로는 그다지 적당해 보이지 않는 다양한 재료들을 능숙하게 다룬다. 줄무늬대로 쭉쭉 오려진 의상, 두루마리 휴지나 책을 바느질로 만든 작품 등등이 두서없이 여기저기 널려있어 관객으로서는 발견의 기쁨이 있다. 여성에게는 무엇이든 통째로 주어지는 법이 없다. 시간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다. 여성은 조각보처럼 파편들을 이어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한다. 한편으로 사적 영역에서 작업하는 여성은 그 존재와 방식이 감춰져 있음으로 인해 신비하다. 공적/사적 영역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여성이 사적 영역을 담당한 이래, 여성은 하찮거나 신비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하찮음과 신비는 일상과 비일상과 같은 관계를 가진다. 




임은수, 파종, 퍼포먼스, 2017



임은수 전시전경



하찮음이 때로 좋은 평가—‘일상의 소중함’ 따위로--를 받는 거처럼 신비함 또한 그러하다. 그렇지만 하찮음처럼 신비함도 단번에 반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가령 여성적 신비함의 화신인 팜므파탈은 여성의 힘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매혹적으로 포장한 것이다. 오직하면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단이 [여성의 신비]를 썼겠는가. 남성이 규정한 여성의 신비함과 여성의 여성에 대한 신비함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무당인줄 알았던, 작가의 어머니가 함께 등장하는 임은수의 퍼포먼스에는 신비함이 있다. 퍼포먼스와 작품은 하늘과 바다가 그러하듯이 무한을 상징하는 푸른색이 주조를 이룬다. 그자체로는 푸르지 않은 하늘과 바다가 그렇듯이, 블루는 보이지 않는 힘을 상징하는데, 푸른색 의상과 이미지가 있는 작품에서는 여성의 보이지 않는 힘을 표현한다. [파종] 시리즈에서 바깥으로 빛을 발하는 이미지는 씨앗에 잠재된 생명력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또는 그 반대에 내재된 마술적 과정을 주재하는 여성은 신비하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여성작가들을 초대한 이 전시는 여성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해체한다. ‘이것이 여성적 언어다’라는 단정은 없다. 여성/남성에 대한 고정된 정체성이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 더욱 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차이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차이가 차별이 되지 말아야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필자는 성에 관련된 대표적인 담론인 정신분석이 그에 가까운 답을 준다고 본다. 특히 앞서 언급된 ‘여성적 향락’을 주장한 라깡의 이론이 그렇다. 페터 비트머는 라깡의 이론을 알기 쉽게 해설한 [욕망의 전복]에서 가부장적 기표의 대명사의 팔루스에 대해 ‘남성성은 가시적인 것에 근거하며 이것을 기초로 논리적이고자 하는 속성을 가진다’고 본다. 반대로 ‘여성성은 논리를 벗어나는 것이며 기초, 심연으로서 파악이 불가능하며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 그 무엇’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는 동인’이다. 




임은수, 파종3, 127×94cm, 한지위에 드로잉, 2017



임은수, 파종4, 127×94cm, 한지위에 드로잉, 2017



페터 비트머에 의하면 라깡은 여성성의 우위를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남성성은 여성성에 의해 정립된다. 남성성은 구조지어지지 않은 것에 의해 구조 지어진다는 것이다. [욕망의 전복]에 의하면 라깡은 여성적인 말해질 수 없는 것이 리비도의 원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리비도를 남성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프로이트를 결정적으로 넘어서는 부분으로 평가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라깡이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을 결합시킨 듯한 인상’을 준다. 여성성을 ‘어떤 실체화도 벗어나는 범주’라고 보며, ‘여성성을 하나의 실체로 파악하지 않는’(페터 비트머) 라깡의 입장은 페미니즘이 시대의 유력한 사상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를 제공한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대한 담론은 페미니즘 미술에서 필수적으로 도출해야할 여성적 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낳는다. 여성적 언어는 이론 또한 예술적으로 표현하게 한다. 


가령 뤼스 이리가라이는 여성의 정체성을 문학의 언어로 기술한다; ‘삶의 근원은 항상 흐르고 밖으로도 흐른다. 죽음과 같은 경계선 없이 어디나 흐르는 여성의 몸은 살아있는 거울이 된다. 그것은 만지면 타자의 윤곽이 그려지는 민감한 거울이다. 더 이상 얼어붙고 굳어진 횡령과 몰수의 장이 아닌 정체성의 모태인 것이다’(뤼스 이리가라이 [근원적 열정 중에서]) 이론과 예술, 그리고 삶이 종합된 이상적인 여성성은 현대적 삶에서 요구되는 유연한 정체성의 넉넉한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쟁지향의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을 고무하면서도 위축시킨다. 단적으로 소비의 장에서 개인은 자유로운 개성으로 고무되지만 생산의 장에서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시스템의 나사못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개인으로서는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시대, 개인을 위한 작은 행복 이외에 어떤 관심도 없는 개인의 시대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40대부터 70대까지 이르는 여성들의 작품들에는 가족이든 예술이든 사회변화든 서로 치대고 희생하면서 얻어지는 가치들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또 다른 울림을 줄 것이다.


출전; 청주시립미술관 부드러운 권력 전 부대행사, 작가와의 대화 (4/20)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