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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상상

이선영

예술과 상상 

  

이선영(미술평론가)

  


1. 예술가가 당면한 현실

  

예술가에겐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해진다. 그러나 상상력이라는 것이 예술가에게만 필요한가. 예술 이전에 현실을 이해하는데도 상상이 필요하다. 현실은 있는 그자체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가에겐 가장 중요한 현실이랄 수 있는 자신 또한 그러하다. 전통사회처럼 아무런 반성 없이 기존의 가치를 답습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뒤로 밀려나는 근대 시대부터 상상력은 중시되었다. 상상력은 새로움의 원천이다. 역사를 보면 새로움이 늘 추구되었던 것은 아니고 어느 시기에 더 요구되었다. 새로움은 진보의 가치를 추구했던 모더니즘에서 중시되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주장이 다시 호응을 얻었다. 그것은 만물이 코드화되어 더 쉽게 다루어지는 정보화 사회를 바탕으로 한다. 상상력은 근대 낭만주의에서 강조되었다. 무한을 추구하는 낭만주의는  눈앞의 현실(사실주의처럼)이나 형식적 전범(고전주의처럼)만을 중시하지 않았다. 


키치의 원형이 되기도 한 낭만주의는 고딕같은 기존의 코드를 활용하기도 했다. 각박해지는 산업사회에서 고풍스러운 성채나 아름다운 귀부인, 기사 등이 등장하는 중세는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왔던 것이다. 근대이후 더욱 빨라진 시간감각은 얼마 전에 지나간 것도 새로움의 원천이 되게 했다. 유행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새로움이란 예술적 창조에 대한 미학적 이데올로기가 가정하는 것처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전대미문의 전적인 새로움이 아닌, 약간의 차이일 뿐이다. ‘차이의 조건은 반복’(질 들뢰즈)이다. 현대사회는 상상력을 중시하는 만큼 상상력이 생겨나는 토대를 중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발휘된 상상력을 제대로 수용해주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의 모델에서 나타나듯이, 사회를 이루는 기존의 ‘상징적’ 언어는 자아를 형성하는 ‘상상적’(자끄 라깡) 언어와 충돌하곤 한다. 주어진 현실을 유일한 질서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상상력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리 고무되지 않는다. 단적으로, 상상력이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상상력 그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예술 분야는 지금처럼 사회의 주변부로 물러나 있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러한 소외 덕분에 예술은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이러한 역설은 근대 이후 예술의 기본조건이 되다시피 했다. 예술이 예술계로 고립된 것은 예술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장치일까. 아니면 예술이 소수의 것을 넘어서 사회에도 꼭 필요한 것임을 제대로 알릴 기회조차 차단하는 것일까. 예술이 예술계로 고립될수록 사회와의 소통방식은 서툴러진다. 그림을 그릴수록 잘 그려지는 만큼, 사회와의 소통에 대한 시도 또한 그만큼의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을 당연한 조건으로 생각하는 근대적 관습은 사회적 소통에 소극적이다. 예술적 상상력은 자신 속의 다양한 타자를 발굴하고 그 타자들과 대화하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만나는 실제의 타자와도 활기찬 대화를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예술적 상상은 무엇보다도 현실만큼이나 불확실한 자기에 대한 상상이다. 자아는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상상은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술계에 사회 부적응자들이 꽤 있는 것만큼이나 대중들에게 현대미술은 아직도 낯설다. 


그렇다고 고립된 예술계가 순수의 결정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랙털 이론처럼, 미시우주는 거시우주를 축소된 형태로 반복한다. 사회의 고루한 관습이 또 다른 버전으로 웅크리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에서는 정치판이 제일 막장 같지만, 어디를 가나 비슷한 모순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 '예술 너마져도!' 하는 생각에 더 큰 실망을 하게 마련이다. 예술계는 사회의 모순을 축소화한 형태로 재생산한다. 예술가들은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아있다. 예술을 개인적으로 좋아서 하는 일로 치부해 버린다면, 예술이 처한 조건에 대해 사회가 무슨 책임이냐는 방관을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예술계 내부에서도 비평이나 담론이 무력해진다. 예술이 사적 취미에 머문다면 예술은 굳이 소통이나 유통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교육조차 필요 없을 것이다. 


사회복지나 문화복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에 대한 공적인 지원제도는 시민의 세금을 쓰는 문제니 만큼, 예술을 공공 영역으로 끌어내는 효과를 가진다. 물론 공공예술이라는 것이 있다. 공공예술은 예술분야 중 가장 경제적 규모가 큰 부문이기는 하지만, 작가보다 업자들의 활동이 더 활발한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예술성까지 두루 담보하면서 시민과 소통하는 공공예술이 우리 주변에 많지는 않다. 공공예술에 예술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예술에는 공공성이 포함되어 있다. 대중성은 공공성과 예술성이 성공적으로 결합할 때 생겨난다. 예술성과 공공성이 따로 노는 사태는 작업실의 작품에는 소통불능을, 광장의 작품에는 장식을 낳을 뿐이다. 작업실의 작품이든 공공영역에서의 작품이든 공공의 지원을 받는 전시회나 행사들이 예술과 현실이 만나는 충만한 기회로 고양되는 일은 많지 않다. 한국미술계는 작품과 작품이, 작가와 작가가, 작가와 이론가가, 이론가와 기획자가 서로 얽힐 수 있는 공통의 장이 부족하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회에서 소통이란 요식적이기 마련이다.


실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첨예한 상황이 아니라면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지연이나 학연같은 전근대적인 유대관계가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는 곳이 미술계이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 대해 이렇게 늘어놓는 것은, 예술이 출발해야 하고 또한 돌아와야 하는 곳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폐쇄회로에 갇혀 있는 예술계에 자극을 주고, 예술 또한 이해관계에 굳어진 현실에 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상상력을 말하기 이전에 그 상상력이 상호작용해야 할 현실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만, 현실은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결코 완성된 규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현실은 부드럽고 언어는 딱딱하다. 아니면 그 반대이다. 현실과 언어가 완전히 일치하기는 힘들다. 비록 예술가들이 그 불가능한 이상에 도전하느라 애쓰고 있지만 말이다. 현실은 변하고 있는데 언어가 지체되는 경우, 그 언어는 사어(死語)가 된다. 교과서로 예술을 배울 수 없는 이유이다. 물론, 현실과 무관한 언어유희는 사어만큼이나 무가치하다.

  


2. 예술적 상상이 만나는 현실

  

현실에 대한 거창한 이론 대신에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조건의 재생산 때문에 현실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일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은 큰 만족을 주지 못한다. 더구나 현대의 노동이라는 것이 분업화에 의해 파편화되어 있고, 자본의 이익을 따라 나랑 관계없었던 세계의 보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날로 발전하는 기계와 경쟁을 하다 보니 단조로움에 더하여 가혹함까지 가세한 양상이다. 그 반대에 다양함과 재미가 있을 것인데, 이 부분에서 대중문화와 예술이 경쟁한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생태계는 자동화 되다시피한 소비패턴을 통해 문화를 소비하게 한다. 현대에는 보다 많은 상품들이 문화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예술보다 좀 더 느슨하고 폭넓은 영역인 문화는 예술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 생산이라면 문화는 소비에 바탕 한다. 생산과 소비는 연동되는 것이지만, 생산자와 소비자의 입장은 천양지차이다.


생산의 사회를 넘어 소비의 사회가 열렸다. 생산의 현장은 점차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분업 시스템에 의한 것이다. 1인 공장도 가능할 4차 산업혁명은 이러한 추세를 가속시킬 것이다. 반면 시장은 더욱 보편적이다. 소비는 생산과 달리 수동적이다. 뭐든 쉽게 접근해서 잠시 살펴보고 다른 항목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짧은 관심의 시대에, 호흡이 긴 예술은 그다지 좋은 조건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소비되는 이미지가 편재하는 스펙터클의 시대가 회화의 시대는 아닌 것이다. 스펙터클은 코드이고 회화는 코드가 아니다. 더구나 예술은 단편적 현실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실재를 탐구하는 영역 아닌가. 현실은 실재의 한순간에 불과하다. 현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라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 가장 큰 압박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그 현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잠재적 현실을 포함하여 보다 많은 현실을 다루는 자이다. 예술적 상상은 현실을 그저 수동적으로 반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비자의 구매욕에 호소하는 광고업자조차도 대중적 취향의 반영을 넘어서 정곡을 찌르는 표현에 골몰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취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현실을 표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수단은 예술 말고도 많다. 단지 요즘 유행하는 상품의 소비로 충분할 것이다. 예술이 사회로부터 고립된—좋게 말하면 ‘자율화된’--근대 이후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소비자의 입장에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보통 사람들도 자유로운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노동에 복무해야 하므로 상품의 소비를 통한 만족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노동이나 오락 말고도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은 노동처럼 생산이지만, 파편적이지 않다. 예술은 오락처럼 소비이지만 표피적이지 않다. 예술의 창조와 향유의 조건이자 결과인 몰입은 단순한 중독과 다르다. 몰입은 대양을 항해하는 것이고 중독은 익사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현실에서 만들어지고 때로 현실에서 소통 및 유통되지만, 예술이 현실과 만나는 방식은 노동이나 소비와는 다르다. 


현실에 대한 기계적 반영에 머무르는 예술은 예술이 노동 및 소비로 현실과 만나는 최악의 방식이다. 어떤 작품을 보면, 자기가 샀거나 사고 싶은 것을 재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하면 타자도 그 작품을 사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인가. 내용보다는 뛰어난 기술이 먼저 눈에 띄는 극사실주의 풍의 회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기름진 표면을 자랑하는 그러한 류의 작품은 가상적 소유이자 대리만족에 머문다. 그러한 방식은 잘 만들어진 상품 카탈로그로 충분하지 않은가. 전시나 작품, 또는 작가의 생각에 대한 충분한 콘텐츠 없이 도판으로만 가득한 도록을 보면 그런 카탈로그가 연상된다. 소비주의적 환경에 무가지 형태로 놓인 그런 이미지들은 흔하다. 존 버거가 [보는 방법]에서 분석하였듯이, 미술사에서 액자의 발명은 그리기를 통한 가상적 소유라는 욕망을 만족시켜주었다. 그 이전 시대에 그림의 주된 양식은 벽화였다. 액자에 담긴 그림은 고유의 장소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이 가능한 물리적 조건이다. 


그림의 이동성은 그림을 포함한 만물이 상품화되어 가격이 매겨지는 상업 자본주의 시대와 함께 개막되었다. 그것이 속한 특정 ‘장소와 결합되어 발휘되는 아우라’(발터 벤야인) 대신에, 예술 또한 마케팅을 비롯한 각종 전략이 결집 된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물신주의는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 때문에 생겨난다. 그것이 일치된다면 진실 된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 이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분리되는 시대에, 현실은 그 자체로 모호한 것이 되었다. 상품과 가격은 현대 언어학의 가설에서 대상과 기호의 관계처럼 임의적이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정리하듯이, 모더니즘은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재현의 위기에 대한 반응이었다. 현실은 예술이 출발해야 할 자명한 지점이 아니라 도달해야할 미지의 시공에 있으며, 그 결과물은 지금의 현실과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작품을 통한 소유라는 욕망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예술작품이 그렇게라도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나름대로 현실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갖고 싶었는지를 생각해보는 자기반성적인 작품이라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미 누군가 한번 생산한 방식에 불과한 상품을 넘어 살 수 없는 무엇을 그릴 수 있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예술작품의 생산자를 생각할 때 소통을 넘어서는 유통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유통을 위해 소통이 먼저지만, 유통망이 발달한 현대에는 그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소통망이든 유통망이든 그 또한 우리 미술계에 부족한 부분 중 하나이다. 미술이 사회적으로 소(유)통 되려면 미술 또한 대중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소수의 미술작품(유물 포함)을 중심으로 명품에 적용되는 바와 같은 물신숭배가 존재하긴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빈익빈 부익부같은 괴리감을 낳는다. 현대에는 역사상 여태껏 존재해왔던 예술가보다 더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가 누구냐 같은 질문에 얽힌 담론들은 다분히 수상하다. 이제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한 두 명의 뛰어난 작가가 아니라, 개별 작품이 놓이는 적절한 맥락이 있을 따름이다. 

  


3. 대안의 현실, 또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예술적 상상

  

현실에서 출발하든 상상에서 출발하든 작품은 맥락이다. 작가는 맥락을 잘 구성하여 예술을 제2의 현실이 되게 한다. 잘 만들어진 맥락에서 몰입도는 최대치가 된다. 피상적인 현실반영은 현실과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상세계란 단순히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사실주의는 이러한 일상세계 속의 계속이거나 확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은 현실의 단순한 연장이 아닌 재구성이다. 상상은 재구성작업에 필요하며,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 현실은 변형된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최초의 현실 또한 재구성된 것임을 자각한다. 현실은 만들어진 것이므로 다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참신한 작품을 만들게 할 뿐 아니라, 정치적 상상력으로 확장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조용히 작업에만 몰두했던 작가가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는 것은 의외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예술적 상상력이 부족한 예술은 예술을 단지 도구화시킬 뿐이다. 도구로서의 예술은  익숙한 보수적 형식을 그대로 수용한다. 내용은 형식과 연동되니 만큼 보수적인 형식은 그 작가가 주장하는 진보적 내용을 퇴색시킬 것이다. 과학이라는 미시 담론도 정치라는 거대담론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현대과학은 관찰행위가 관찰대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현실의 불확정성을 말한다. 아무리 고용량의 이미지라 하더라도 계속 확대하다 보면 추상적 입자로 흩어진다. 자세히 보다보면 정작 자세함은 사라진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잇어서 ‘따로 또 같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접근하는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결과로서의 냉랭한 현실과 과정으로서의 역동적 현실은 다를 것이다. 현실에서 소외되곤 하는 예술가는 결과로서의 냉랭한 현실로부터 시작할지 모르지만, 작업을 진행하면서 역동적 현실에 진입할 것이다. 최초의 현실은 좀 더 잠재적인 다양한 현실의 일례로 상대화 될 것이다. 


그러나 작업에 충분히 진입하지 못하면 현실은 여전히 냉랭할 것이며 어떠한 변화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냉소적인 관점으로 물화 된 현실의 한 축을 그저 건드려주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예술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억지춘향식으로 작업에 임하면서 현실이나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냉소주의를 퍼트리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소비와 노동에 매몰된 순진한 작품들도 허무하지만, 냉소적 작품도 볼썽사납다. 그러나 작업은 엄청난 열정까지는 아니어도 몰입을 요구한다. 몰입은 나에게서 시작했으나 나로 끝나지 않는 어떤 다름을 가능하게 한다. 다름과 차이는 예술의 정체성이다. 똑같아 보이는 현실 속에서 다름을 보는 것은 상상력이다. 현실에 이미 상상이 포함되어 있다. 현실과 상상의 관계는 원자와 허공의 관계와 같다. 어떤 대상을 미시적 차원에서 볼 때 대상을 이루는 물리적 입자가 운동할 수 있는 허의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세계를 문학적 텍스트로 간주한 철학자 니이체는 사물자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사물이란 ‘그 영향의 총합’이다. 실증주의는 주어진 것의 단단함을 가정한다. 더 나아가, 있기 때문에 옳다라는 가치판단으로 이어진다면 실증주의는 보수주의가 된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사실은 이미 해석’(니이체)이다. 알렉산더 네하메스는 [니이체, 문학으로서의 삶]에서 니이체에게 객관성이란 ‘이해관계를 떠난 사유가 아니라 찬성과 반대를 통제하고 이들을 잘 활용하는 능력’(니이체)에 있음을 논했고, 헤이든 화이트는 [19세기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객관성이란 최고의 형식으로 구성된 것’(니이체)임을 강조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은 현실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현실 또한 텍스트처럼 씌여진 것이고 다르게도 쓰여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텍스트를 이루는 언어는 투명하지 않다. 사실주의는 언어의 투명성을 전제한다. 어떤 대상을 투명하게 재현해서 관객 앞에다 가져다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언어의 투명성을 의심한다. 현대예술의 주제는 언어 그자체이다. 언어는 언어에 대한 언어로 가지를 치며 메타적인 차원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경향이 너무 앞서가다 보면 현실은 실종되고 언어의 그물망으로 가득하게 되는 경우도 생겨난다. 언어의 그물망은 현실과는 평행한 또 다른 현실이 될 것이다. 


사실주의만큼이나 환상의 힘을 강조했던 저자 퍼트리샤 워는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예술이 행하는 대안세계들의 구성은 역사세계의 사건들과 논리를 무시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 세계를 낯설게 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예술의 관념화는 예술에 대한 정의에 관한한 어떤 언어철학 못지않게 명증했지만, 관객과의 접점을 이룰 현실을 실종시켰다. 현실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 언어를 통해 이해되고 언어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예술가들에게 힘을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혼자만의 공간인 작업실에서도 혁명적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예술에 있어서의 언어적 측면을 과장하는 것은 관념론의 또 다른 형태로 의심받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현실은 언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의 상징적 우주를 강조하는 정신분석학이 강조하듯이, 언어가 없으면 인간도 없고 현실도 없다. 만물이 정보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언어의 힘은 더욱 커졌다. 


물론 정보화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코드는 언어가 아니다. 코드는 언어의 한 측면이다. 코드는 모든 것을 O 또는 X로 환원시키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환원이 아니라 조합의 용이성이다. 수학이나 물리학같은 과학은 자연을 해석하는 언어를 거의 부호의 차원으로 축소하여 큰 효과를 봤다. 과학기술혁명은 물질적 생산의 비약을 낳았다. 그래서 과학은 오늘날 정확성과 객관성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환원된 언어가 세상을 더 풍부하게 해주었을까. 예술은 과학보다 정확하지 않지만 풍부하다고 기대된다. 눈앞의 현실에만 연연하지 않는 상상은 풍부함의 원천이다. 온갖 기괴한 것들이 펼쳐지는 별천지를 상상하는 것 이전에 현실을 상상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바로 그것이 예술과 현실의 접점이다. 예술가 자신 또한 상상해야 할 현실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한 상상부터 시작할 수 있다. 자기 안의 타자들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예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필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출전; 한남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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