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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성 / 인간과 동물, 그리고 기계

이선영

인간과 동물, 그리고 기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인간은 대지로부터 자유로워진 두 손, 그리고 그렇게 직립을 통해 커진 두뇌를 통해 동물성을 초월하게 된 듯했다.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가 강조하는 것은 동물과의 차이이다. 그자체로서는 훌륭할 수 있는 차이에의 감각이 차별적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동물성은 여전히 인간에게 잠재해 있다.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과 연동된 과학기술이 만물을 코드화하고 있지만, 몸은 최후의 식민지로 자신의 불투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성, 정확히는 도구적 이성인 오성의 한계가 여실하게 드러난 근대의 후기 국면에서 억압된 것은 회귀하고 있다. 무의식의 처소인 몸도 그중 하나이다. 몸을 대변하는 무의식의 우선성이 프로이트에 의해 주장되었을 때 충격은 컸다. 불온함과 도발성을 탑재한 현대 예술가들은 이 금기의 영역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으며, 재미 작가 유두성도 그 부류에 속한다. 금기는 금기 위반의 충동을 낳는다. 금기/위반이 낳는 내밀한 체험은 과거에 종교나 제의의 영역에 속해 있었지만, 그 현대적 계승자에 의해 반복된다. 








특히 현대 미술은 금기보다는 위반에 초점이 맞춰진다. 물론 이러한 억압된 것의 회귀는 대량생산과 소비시대에 이익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탐구된 결과이기도 하다. 생산과 소비를 이성에만 맡겨둔다면 어떤 자본가도 큰 이익을 남기지 못한다. 합리적 계산은 물론, 끝없는 욕망의 발원지인 몸과 무의식을 함께 공략해야 하는 것이다. 근대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더욱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기계는 문명사에서의 인간성을 가늠하는 동물성에 또 다른 변수로 떠올랐다. 유두성의 작품에서 동물이나 기계는 단순한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대상화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해체되는 범주 중의 하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엄밀한 객관성을 내세우는 과학은 이분법의 대변자였지만, 이제 그러한 이분법을 해체하는 주범이 되었다. 즉 과학은 인간과 동물, 그리고 기계를 어느 시대보다 근접시켰다. 가령 유두성의 작품에 등장하는 돼지나 거머리 등은 인간 장기의 대체나 치료로 활용되는 대표적 동물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을 통해 날개를 단 인간은 동물을 비롯한 자연의 진화에 깊이 개입한다. 그렇게 인간과 기계, 그리고 동물들은 상호영향을 주면서 공(共)진화한다. 동물과 기계가 많이 등장하는 유두성의 작품은 이러한 역사의 상황을 압축하여 반영한다.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뉴 미디어 예술이라고 말하며, 거기에는 ‘로보틱스, 바이오 아트, 비디오, 애니메이션을 중점으로 설치(전기/기계, 인터랙티브 비디오/애니메이션), 비쥬얼 퍼포먼스(행위), 공연적 퍼포먼스(무용, 음악, 연극)등 을 한데 어우르는 실험적인 예술’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화려한 목록들은 미술을 넘어 동시대적인 화두를 담고 있다. 작업뿐 아니라 전시 기획, 관련 부문 논문 발표 등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단순한 희망 사항으로 만들지 않는다. 경계를 횡단하는 그의 작업은 조형미술을 넘어서는 학제적 연구가 병행하게 했다. 다방면에서의 작가의 실행은 화가라는 대표적인 시각 이미지 생산자들을 소외시키며 자율적으로 발전하는 듯한 스펙터클 시대의 중심에 있으려 한다. 








캔버스라는 틀을 벗어난 복합적 실행은 아름다움이라는 전래의 협소한 기준을 넘어선다. 생물학, 의학 또는 공학의 실험실과 미의 실험실은 중첩되고 있다. 어떤 실험실이든 대체로 그곳은 공개되지 않는다. 과학기술 분야는 극심한 경쟁의 와중에 있으며 과정보다는 경쟁력 있는 상품이라는 결과를 중시한다. 물론 실패나 오류가 또 다른 발명이나 발견으로 이어진다는 과학사의 뒷얘기는 많지만 말이다. 그러나 실험적 예술에서는 과정이 중요하다. 예술은 무엇이 정상인지 이상인지 그 기준이 다른 분야의 실험만큼 정확하지 않다. 진보나 발전이라는 기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런 만큼 거기에서 나오는 오류나 우연 등은 긍정적 역할을 한다. 유두성의 작품은 동물의 해부학적 기관을 충격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이질적 기관들 간의 소통이 중시된다. 예기치 못한 접합, 즉 이접(離接)이라는 방법론은 그의 실험이 앞으로도 무한히 다양하게 펼쳐질 것을 예고한다. 


유두성의 작업을 생물학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해부학이기보다는 생리학이다. 해부학이 공간적이라면, 생리학은 시간성이 중요하다. 윌리엄 하비의 혈액 순환론이 생리학 뿐 아니라 근대사상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시간은 살아있는 것들의 기준이다. 사회도 고루한 유비론을 넘어서 움직이는 것이어야 했다. 신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존재의 대연쇄로서의 우주에서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정해진 위치가 아니라, 복잡한 그물망에 의거한 동적 관계가 되었다. 공연이 동반되곤 하는 유두성의 실험적 작품에서 드러나는 과정은 아름다움의 이상을 위한 승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들은 매우 징그럽고 때로는 역겹다. 현대 문화의 화두로 (재)등장한 그로테스크, 언캐니, 압젝션, 돌연변이, 기관 없는 몸, 사이보그, 리좀 등등의 개념이 줄줄이 연상된다. 그러한 개념의 공통점은 순수와 본질에 대한 사고를 뒤흔든다는 점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순수의 반대인 오염’(메리 더글라스)이 아니라, 새로움, 실험, 생성, 확장 등 보다 긍정적인 뉘앙스를 띄는 용어로 바뀔 수 있다. 








양자의 경계는 유동적이어서, 뫼비우스 띠처럼 한 평면에 존재하며 매 순간 다르게 배열될 뿐이다. 그가 다루는 몸이나 무의식 자체가 이전 시대에 가정한 바와 같은 종적 완전성, 그리고 그러한 관념에 깔린 유기적 질서로서의 계층성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해체적 국면은 작품의 외관에서 분명하다. 유두성의 작품, 또는 공연에서는 동물의 내장 등이 그대로 등장하여, 순화된 표현을 요구하는 기획자들에 의해 전시 기회가 박탈당하기도 한다. 도축장 등을 드나들며 그러한 주제를 장기간 탐구하는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육식을 거부하게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기계도 자신의 내장을 모두 내놓는다. 동물로 치면 혈관계를 떠오르게 하는 전선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이질적인 것들, 가령 인간이나 다른 동물과 접속한다. 거기에는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인 괴물이나 사이보그들이 편재한다. 인간, 기계, 동물이 서로 접속하여 소통하기 위해서는 구별되는 각각의 계들은 자신만의 경계를 해체해야 한다. 동물의 일부, 가령 돼지의 방광이나 소의 혀 같은 것들이다. 


한편으로 그러한 실험들은 동물과 인간, 그리고 기계가 생각만큼 이질적이지 않음을 암시한다. 근대시대에 ‘동물은 기계’(데카르트)로 간주되었다. 동물은 단순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논리를 확장하면 수단이 되는 모든 것이 기계일 수 있고, 인간 또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인간기계론’(라 메트리)은 만물이 계몽의 빛에 의해 낱낱이 드러나고 이용될 것을 촉구하는 계몽주의 시대 때 주창되었다. 경계의 불확실함은 종교나 과학의 역사를 들것도 없이 일상의 경험에서 확인된다. 인간을 포함하는 먹고 배설하는 동물들은 끝없이 타자와의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소수의 식인종을 제외한다면, ‘인간은 인간을 먹지 않는 동물’(바타유)이다. 또한 배설된 것은 나와 다른 것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유전학이나 세포학 등이 밝혀주는 바처럼 이미 타자는 내부에 있다. 타자는 조건에 따라서 현실화되는 잠재적인 실재를 이룬다. 여러 계를 넘나드는 유두성의 작업은 협소한 동일성의 경계를 부수고 잠재된 타자적 존재를 가시화하는데 집중된다. 이러한 가시화는 과정적이다. 










그의 작업은 정적이기 보다는 동적으로 보여져야 했다. 경계들이 해체되는 과정 중의 작품은 축제적 속성을 띈다. 축제야 말로 위계적인 것이 무너지는 한시적인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바흐친의 이론이 예시하듯이, 그로테스크라는 미학적 개념은 축제와 관련되어 논해진다. 유두성의 작품은 인간과는 별개로 간주되었던 인간의 동물성과 기계성을 드러낸다. 동물이나 기계는 인간의 타자였다. 인간은 그러한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현대철학과 더불어 ‘동일자의 핵심에 타자가 있음’(데리다)을 말해준다. 그가 작업의 한 축으로 삼는 포스트 휴머니즘이나 윤회 사상 등은 협소한 인간의 관념을 확장하는 사상이다. 지금은 인간이지만 이전이나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는 동양의 오래된 사상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묘하게 어울린다. 유두성은 인간 자신의 동일성의 구축을 위해 대상화 되었던 동물이나 기계를 내적인 요소로 간주한다. 내적인 요소만이 예술의 소재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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