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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세부 연구주제 및 방향

이선영

1980년대의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세부 연구주제 및 방향

  

이선영(미술평론가)

 

1. 근대와 1980년대 미술


1990년대 미술계의 중요한 논쟁주제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이 ‘포스트’에 앞서 ‘모더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원초적 물음을 낳았다면,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모더니티에 대한 물음은 1980년대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모더니티는 근대화에 대한 보다 정치경제적인 토대를, 모더니즘은 그러한 모더니티에서 생겨난 문화적 감수성을 말한다. 모더니티에게 진보 또는 발전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모더니즘에게 진보, 특히 단선적 발전의 관념이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역사주의 방식으로 미술 내부의 역사, 즉 형식의 역사를 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한 시도에 의하면 미술사는 미술을 미술이게 하는 형식적 조건, 가령 평면성을 향한 진화에 해당된다. 1980년대의 대표적 미술사조로 평가되는 민중미술은 한국적 모더니즘이 도달한 순수한 미술적 조건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근대, 즉 모더니티에 대한 반응이었다. 근대화는 경제적 발전과 함께 그만큼의 많은 민중의 희생을 낳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형식으로서의 모더니즘과 사회변화의 흐름으로서의 모더니티가 구별된다고 할 때, 이 이중의 ‘근대성’에 대한 한국미술의 반응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근대는 형식주의 미술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중미술을 근대적 미술로 다시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근대는 자본주의라는 보편적 생산양식과 관련된다. 민중미술은 지금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의식이 강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에 대한 의식은 1980년대의 시대정신이었다. 근대는 전통과 구별된다고 여겨지지만, 역사가 재발견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그것은 민족국가의 성립이 활발한 19세기가 역사의 시대여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 역사는 20세기에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국가에게 다시 반복된다. 민중미술을 근대적 미술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민중미술의 한 갈래로 나온 여성주의 미술을, 그리고 민중미술의 후기국면과 밀접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여성주의는 전통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킨 근대적 민주주의의 흐름과 함께 활기를 띠었다. 페미니즘에서 근대와 여성의 관계는 그자체로 단독적인 주제로 깊이 연구되곤 했다. 여성은 남성과 함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함께했기에 갈라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근대에 역사의 진보를 이끌었던 주체의 남성적 속성에 대한 자각이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신세대라고 불리웠던 청년문화 또한 한국적 근대화에서 비롯된 상황의 산물이다. 


1990년대 두각을 나타냈던 대표적 신세대 작가들의 지지기반이 되었던 이들도 주로 좌파로 구별되는 기획자이자 평론가들이었다. 그것은 일견 기묘한 현상이지만, 민중미술의 후기 국면은 전형적인 80년대 식의 민중미술이 아니었다. 가령 1990년대 핫한 전시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 금호미술관에서 최정화와 백지숙이 기획한 [이런 미술](1994년)이 대표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고 옹호한 평론가 그룹과 반대편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이영철 또한 그러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은 1990년대 초반 진보적 담론을 주로 실었던 미술잡지 [가나아트]에서 이루어진 박찬경과 서성록의 대결이다. 이론가의 경우, 그들이 주장보다는 그들이 실제로 지지했던 작가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1990년대 중반 귀국한 후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2004년 46세로 요절한 박이소는 이영철--2006년 로댕 갤러리에서 박이소 유작전을 기획했음--이 적극 지지한 작가이다. 박이소는 대안공간 풀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좋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박모라는 필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담론을 국내에 소개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2. 근대적 다양성이 분출하기 시작한 1980년대, 시대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민중미술 


만약 1970년대가 한국적 모더니즘 즉 ‘환원과 확산’(이일)에서 환원의 시기였다면, 80년대는 확산의 시대일 것이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적 모더니즘, 즉 미술 고유어법에 대한 탐구는 그리 순수하지는 않았다. 미술사가 김미정의 연구에 의하면,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중반까지 미술 판을 휩쓸었던 앙포르멜’은 ‘시기상 5.16 쿠데타 이후 군정 기간과 일치 한다’ 그것은 ‘식민지 청산이라는 역사적 공감과 추상미술 수용이 군사정권 주체의 개혁성을 과시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김미정에 의하면 이는 ‘봉건질서를 밀고 새 근대를 창출하겠다는 혁명정부의 역사관’과 ‘미국이 냉전기 사회주의 진영과 맞서려고 만든’ 문화적 흐름과 관련된다. 이러한 기조는 군부독재가 계속되던 1970년대와 80년대도 지속되어 청산과 저항의 대상이 된다. 대립구도 속에서 자유주의자의 자유는 별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세모 그리다가 네모를 그리는 것이 예술적 자유는 아닌 것이다. 미술에서 이것저것을 다 빼고 나니, 결국 아카데미나 화랑가에서의 입지 다툼만 남았을 따름이다.


오히려 획일적 선전선동 미술로 폄하되기도 했던 민중미술의 ‘예술적’ 입지는 더 자유로웠다고 생각한다.  ‘자유가 필연의 인식’이라는 변증법적 사고에 의한다면 말이다. 1980년대,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은 최루탄 가득한 교정과 군인에게 끌려가는 민간인들, 군부의 압제와 그에 저항하는 민중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우리사회는 그러한 희생에 힘입어 서서히 민주화되었다. 그 시대와 실시간으로 호흡하고 소통하려했던 그 때의 대표적인 미술을 민중미술이라고 자리매김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대대적인 회고전이 열렸고, 심지어 2016년 국내 미술시장의 주요 화두는 민중미술이 되기도 했다. 1970년대 단색화 열풍에 힘입은 미술시장이 후속 기획으로 1980년대 민중미술을 염두에 두었다는 시장의 분석이다. 대표적인 미술기관과 시장(KIAF)의 인정은 민중미술의 역사적 의미와 현실적 성공을 암시한다. 그러한 경향을 변절이나 변질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점차 확대되고 공고해지는 관료주의와 상업주의는 전적인 내부인과 외부인을 구별할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은 전두환 정권 시절 ‘20대 힘’전 사태부터, 아주 가깝게는 탄핵 된 전직 대통령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 비밀’에 관련된 이구영(민중미술인협회 소속)의 작품 [더러운 잠](2016)의 파괴까지, 적지 않은 탄압도 있었지만, 추상 홍익대/ 사실주의 서울대라는 양 강 구도의 한 자락에 속하면서 제도권 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곤 했다. 물론 표피적으로만 대조되었던 제도권 아카데미스트들에게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외면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민중미술은 그 모두와 대립했다. 민중미술을 억압받기만 정치미술로만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민중미술은 정치의 파탄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꾸준히 성장세를 타고 있었던 1980년대의 물질적 성장, 그리고 그것이 야기했던 다양성에 대한 요구에 답한 사조의 하나이다. 1980년대는 1960-70년대 근대화에 관련된 발전주의를 이어받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이러한 경제적 성장세는 주춤해 졌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보수층에게 사회주의는 가난과 독재/ 자본주의는 풍요와 자유라는 잘못된 신념(이데올로기)을 심어주기도 했다. 

  

3. 여성주의 미술과 신세대 미술의 등장


민중미술은 이전 세대의 불통에 대해 소통을 외쳤고, 미술의 현실적 기반을 확장시키고자 했다. 형식보다는 현실에 치중했지만, 새로운 내용을 담기 위한 형식 또한 활성화되었다. 형식은 형식을 위한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위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약적인 성장을 했던 대중문화와의 상호작용은 물론 발전주의에 의해 억압되었던 민중적 전통을 발견하면서 자기 지시적인 유희적 붓질에 머물고 있던 답답한 제도권 미술에 숨통을 틔워주었고 다양한 내용은 물론 표현에도 일조했다. 투쟁의 와중에 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통일된 전략이 있었지만, [여성과 현실]전, [시월 모임; 반에서 하나로] 전 등을 낳은 여성주의 미술은 다른 어디도 아니고 민중미술 진영에서 첫 주장을 했다. 동시에 그녀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입지를 다짐에 있어서 협소한 미술계가 아니라, 여성문화라는 보다 광범한 영역과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페미니즘 자체가 탈근대적 국면이다. 당시에 미술 쪽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주로 발표한 사람은 오혜주, 엄혁, 김홍희 등이며, 대표적 작가로는 김인순, 윤석남 등이 거론된다. 


민중미술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는 미술평론가보다는 미술사가에 의한 것으로, 2000년대 이후에 활발했으며, 김현주와 양은희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말 신세대 미술 또한 페미니즘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불이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면, 여성과 신세대는 함께 생각되어야 할 대안의 주체들이다. 1987년 이후 더 확대된 대중적 운동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이 대거 문화예술에 참여했다. 신세대 미술은 1990년대에 꽃을 피웠지만, 그러한 신세대가 나온 바탕은 1980년대이다. 기성세대의 권위가 근본적으로 무너진 때가 1980년대이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중인 자본주의의 지배세력으로 군부정권은 젊은이들의 기대치에 한참 모자랐다. 지배세력은 물리적 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들에게 한국적 모더니즘(추상)이나 모더니티에 반응한 미술(민중미술)은 둘 다 거부의 대상이 되었다. 그 둘은 근대성이라는 공통의 테두리에 속했다. 


민중미술 권에 속해있던 기획자와 평론가들은 민중미술보다는 오히려 신세대 미술에 더 호의적이면서 진보적 미술이라는 우산 아래 젊은이들을 모아들였다. 그들은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1980년대 진보적 미술을 따랐다고 볼 수 있지만, 현실의 또는 가상의 적을 향한 전선을 만들지 않았으며, 대부분 1980년대에는 학생신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에 대한 부채의식도 없었다. 페미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일컬어졌던 사조는 1980년대의 어둡고 획일적인 정치 예술과 대조되는 1990년대의 다원주의의 흐름이라는 인식은 수정되어야 한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에서 여성주의 미술이나 이후 신세대 미술과의 관계는 민중미술이 투쟁일변도의 경직된 예술이 아니라, 1980년대 분출된 다양성의 요구에 가장 강력하게 답하고자 했던 사조로 봐야 할 근거가 되고 있다. 


순수로 포장된 자율적 예술에 현실이 개입—민중미술권의 한 축에서 ‘현실주의’(박신의)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될 뿐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사회도 변혁시킬 수 있다는 이상주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은 쓸모없는 환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상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저항 이데올로기'(테리 이글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술은 진보적이든 아니든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깝다. 예술 하는 삶 자체가 단순한 현실반영을 넘어서 현실을 거슬러 올라가 또 다른 현실을 창출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류’작가를 넘어 여성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최초의 미술운동이 민중 미술권에서 나온 이유는 민중미술이 민주주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여성을 주체로 인정할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사적으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볼 때, 개인이란 중산층 남자인 경우가 많았고, 여성이 선거권을 가진 것도 부르주아가 민주주의를 쟁취하고도 한 참 후의 일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민중적, 민족적 주체라는 관념에 내재된 남근주의적 측면이 여성의 입장과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민중미술 일각에서 자본주의의 퇴폐적 문화와 유혹을 비판하기 위해 등장하곤 하는 여성의 잘려진 육체는 잔인하면서 쾌락적이고, 남성적 욕망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그러한 여성 도상들은 반(反)페미니즘적이기까지 하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던 민중미술 회고전에도 여성주의 미술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보다 근본적으로는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주체 개념 자체가 근대적이다. 민족, 민중적 주체란 그러한 근대적 주체와 밀접하다. 여성 또한 자신들을 억압하는 지배적인 가부장적 문화와 싸우기 위해 주체의식이 필요했다. ‘여류’가 아닌 여성미술인으로서 말이다. 민중미술에서 최초의 자의식적인 여성미술이 나온 것은 진보를 지향하는 근대적 주체 관념이라는 시발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임과 동시에 거부해야 할 유산이 되었다.   

  

4. ‘예술’에 대한 거부감과 정보혁명 전야; 사물과 키치, 미디어


신세대 미술가 및 뮤지션으로 주목받던 한 작가는 ‘학교보다는 학교 앞이 더 재미있었다’(백현진)는 말로 1990년대 초반을 회고 했다. 그것은 미술의 축이 미술대학을 넘어서 담장 밖으로 나온 것이며,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부터 고급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저항의 움직임과 궤를 함께 한다. 대중문화는 하위문화로 갈래를 치게 된다. 대문자 A로 시작되는 ‘예술’은 다소간 경멸적인 뉘앙스를 가지게 되었고, 모두 ‘예술’을 넘어서 문화로 나아갔다. [현실문화연구]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 출판사이다. 1990년대는 문화비평의 전성기였다. 많은 문화비평가들이 활동했고, 미술평론가들도 문화비평가로 폭을 넓혀갔다. 미술 내부에서도 평론가 윤진섭, 김현도 등에 의해 신세대 미술이 자세히 소개되고 분석되었다. 1980년대는 자본주의 성장기이다. 근대 이후 모든 시대가 격동의 시대이며 과도기의 시대지만, 시간관념은 더욱 빨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문화의 주체를 생각할 때, 1980년대 대학 인구의 증가를 지적할 수 있겠다. 한국교육개발원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대학생은 1980년 이후 4.7배 늘었다고 한다. 이제는 출산율 저하로 대학에 가는 비율이 80%를 넘나들며 아무리 늘어난다 한들 대학생 자체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말이다. 


계몽된 대중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당연히 미술대학생도, 여성 미술대학생도 많아졌다. 사회운동이든 미술운동이든 대중성을 띄게 된 것이다. 1980년대는 대중을 이끄는 전위적 지식인의 의식이 있었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식인으로 생각했고, 그 뒤를 누가 따르든 말든 간에 밤새워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토론했던 세대가 있었다. 실제 그들의 사회적 존재에 비해 의식이 과도할 수 있었던 상황--‘의식화’라는 용어가 있듯이--이다. 1980년대는 선도적 지식인의 역할이 커짐과 동시에, 금 새 그 위치가 수그러든 시대이기도 했다. 선도적 지식인이나 예술가는 전망을 제시해야 했다. 1980년대에 의식(화)의 힘은 컸다. 그러나 예술가와 지식인의 의식만으로 시대를 보는 것은 관념적이다. 지식이나 예술을 압도하는 물질주의의 성장이 있던 시대, 그래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가 팽배해진 시기에 전망이란 좋게는 삶을 살아가는 신념, 나쁘게는 희망고문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 정보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터넷 기반의 정보사회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은 1990년대-2000년대지만, 1980년대는 그 전야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민중미술에서 지배계급의 풍자를 위해 많이 사용되었던 꼴라주같은 양식은 그만큼 많은 재료들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이제 그런 방식은 장난감처럼 사용되는 포토샵 등의 원초적 형식이기도 하다. 1980년대 민중문화 중 중요한 부분이었던 판화나 걸개그림의 경우 고화질 출력본 시대를 맞는 요즘에 더욱 고풍스럽게 다가온다. 개인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볼 때, 1980년대의 화두는 여전한 유효성을 가진다. 물론 방점을 달라진다. AI로 추동될 ‘노동의 종말’(제레미 리프킨)의 시대에 일하지 않는 사람의 권리도 중시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혁명을 통해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 때에도 여전히 차이 짓기를 위한 기득권의 움직임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노동이 사라져도 부의 재분배를 위한 투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생산으로부터 제외되어왔던 예술의 입지는 커지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가능성으로만 남아있다.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드는 것이 예술가들의 과제이다. 


그동안 가족의 재생산을 위해 사적 영역에서 그림자 노동의 영역에 종사하면서 임금 노동에서 제외되어온 여성, 그리고 현실보다는 가능성의 영역에 더 관심을 쏟는 청년세대의 중요성이 커지고, 노동과 노동 분업에 기초한 가부장제는 더욱 도전을 받게 된다. 남성적 주체가 주도해온 노동이나 역사에 대해 타자화되었던 주체들이 부각된다. 이때 1980년대 저항문화의 주체로 간주 되었던 민중, 민족 개념과 여성의 관계를 따져 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저항의 전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남성화—투사의 이미지에 전형적이듯—되었는지의 문제, 주체의 통일을 전제하는 전선에서 여성예술가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대의 저항문화의 모토인 ‘인간해방’이나 ‘노동해방’이 ‘여성해방’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히스토리’의 주체가 보이지 않게 남성이었다면, 대안의 주체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1980년대에 생겨난 것은 분명하다. 

  

5. 민중미술,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연계 연구


민중미술에서 운동(혁명, 노동)의 주체가 민족이나 민중이냐, 대중이냐 시민이냐, 다중이냐 등등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페미니즘을 말할 때 여성적 주체가 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정치적으로) 유용한 것인가의 문제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페미니즘 미술이라면 여성 특유의 언어가 무엇인지, 그것은 예술에서 어떻게 재현 또는 생성되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보혁명과 밀접하다. [포스트모던 조건](1979년)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시작한 리오타르가 변화된 문화의 토대 중의 하나로 주목한 것은 정보혁명이다. 1990년대에 뉴 미디어와 관련되어 자주 논의된 작가는 이용백, 김영진 등이다. 그림을 매우 잘 그리던 작가 공성훈도 당시에는 미디어 아트를 했다. 문화적 다양성이 분출되기 시작했던 1980년대는 미디어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에 한국은 외국으로 컬러 TV를 생산해 수출할 수 있는 생산력이 있었지만, 컬러 TV 방송은 나름의 금욕주의를 추구했던 박정희 정권의 반대로 그가 죽은지 1년 후인 1980년 12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한겨레 신문 2018년 1월 22일 [역사 속 오늘] 기사 중)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에 뒤이은 군부정권 전두환은 스크린, 스포츠, 섹스로 상징되는 3S 정책을 펼치는데 화려한 모니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8년 서울에서의 올림픽은 시각환경을 한단계 업 그레이드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흑백에서 컬러로의 세상을 연 미디어의 변화와 더불어 중요한 계기는 1989년부터 시작된 해외여행 자유화이다. 그러나 이브 미쇼가 [기체상태의 예술]에서 말했듯이, 여행은 예술의 심미적 경험을 대신해 나간다. 현재 모든 것이 스마트폰으로 들어가고 스마트폰에서 나오고 있듯이 말이다. PC 통신이 90년대 중반에 열리는 등, 미디어의 극적인 변화가 1980년대를 이은 1990년대의 다양성의 분출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1990년대 말에는 한국 최초의 미술웹진 [미술과 담론]의 맹아적 형식도 탄생한다. 미술을 넘어 다양한 민중문화(연극, 노래, 문학, 영화 등)와 상호 교류하던 때가 1980년대이다. 1990년대 말에 보편화된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혁명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시켰다. 다원주의는 단순히 문화가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개인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한국 근대화의 격동기인 1980년대에 발아했다. 다원주의는 하나의 중심을 해체하고자 했는데, 그 중심과 상호작용하던 타자들인 여성과 신세대가 있었다.


그들은 페미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문화의 주체들이 탄생한 시대이다. 그러나 민중미술 내 페미니즘 동아리들의 활동 외에 개별적으로 페미니즘적 감수성을 표현했던 작가들의 발굴 및 재조명 또한 중요할 것이다. 1990년대에 탄생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부터 여성미술가들이 대거 참여했던 전시 [팥쥐들의 행진](1999년)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여성문제가 산적함에도 불구하고 이프는 폐간되었고, 이미 여성미술인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데 다수로 압도하려는 듯한 [팥쥐들의 행진] 전은 아쉬움을 낳았다. 너무 많은 작가들의 참여는 여기에‘도’ 끼지 못했던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의 소외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지금도 부러워하는 논쟁의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에 미술잡지 등의 지면을 달구었던 필자들이 각자의 입장을 더욱 업그레이드 시키며 구체화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있다. 말과 사물의 괴리를 생각해 볼 때, 주체가 의식적으로 주장한 특정 '이즘'과 함께 그에 걸맞는 개별 작가들의 연구가 따라주었는지 의문이다. 


만약 어떤 유효한 이즘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에서 발현되었는가의 연구가 생산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로서의 육체’ 전(금호미술관, 1997년) 등, 당시의 주요 기획전을 중심으로 미술사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즘이 앞서는 것은 미술이 본래 감성적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만큼 수입이론의 힘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말과 사물이 따로 노는 허망한 사태, 말을 연구했지만 결론이 안났고, 결론은 안났지만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여전히 이즘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불행한 사태를 끝내야 할 것이다. ‘사실은 이미 해석’(니이체)이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지난 세기의 실증주의 이데올로기는 기능적 역할만을 맡을 뿐이다. 모든 이즘은 이론가들 자신을 부각하기 위한 전략—니이체의 어법대로 하자면 ‘권력에의 의지’--이기도 하다. 모든 대립된 이즘들은 하나의 실재를 다르게 보는 방식이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의 차이보다는 비슷한 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1980년대에 민중미술과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에 살펴보는 연구는 사소한 차이보다는 중요한 공통점을 알려줄 것이다.


  



  







출전; 한국미술 담론형성을 위한 세미나(예술경영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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