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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 존재와 의식 사이의 괴리

이선영

존재와 의식 사이의 괴리

  

이선영(미술평론가)


넓고 깊은 바다, 유원지 풍의 숲, 오래된 집 같은 이미지들이 등장하곤 하는 이승희의 작품은 일견 평화로와 보인다. 그러나 멀찍이서 포착된 풍경에는 세월호와 천안함의 침몰,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 최근, 또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있었던 사건 사고의 현장을 지시하는 기표들이 박혀 있다. 작가는 기표들을 두드러지지 않게 슬쩍 끼워둔다. 또는 바꿔 끼워 넣는다. 가령 작품 [기억의 충돌]에서 ‘세월’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배 다음에 다른 배(천안함)가 배치되어 있다. 관객들은 작품 속 배들을 집단적 트라우마를 안겨줬던 세월호로 인지할 것이다. 이승희의 작품에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불완전하다. 기표와 기의는 파도가 파도를 타는 듯한 미끄러짐 속에서 각기 떠돌 뿐이다. 구조주의 이후의 현대사상에서 양자 간의 결합은 더이상 당연시되지 않는다. 작가가 천안함과 세월호를 함께 호명한 이유는 두 사건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서로 반대 진영에서 중시하기 때문이다. 




 Conflict of memories, each 120x80cm 총 5 piece, Backlit film, Light box.



이승희가 소재로 삼은 사건들은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미디어의 소비가 매우 뜨거웠고, 그만큼 빨리 식어버린 그래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무심하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들이다. 푸른 바다나 숲은 이미지의 배치에 따른 간극을 따라 이상한 기운을 뒤집어 쓴 채 어떤 기억을 건드린다. 더이상 돌아가지 않는 숲 속의 놀이기구, 해수욕장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보이는 원자력 발전소 등은 정상과 이상을 가르는 이상한 경계에 놓여 있다. 작가가 다루는 사건들은 분단의 비극이나 방사능 피폭 상황같은 심각한 것들이지만, 처음 출발은 [Must have Item] 시리즈같은 상품 물신주의를 다루는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같은 공간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 즉 체험을 다루는 작품에서는 개인의 인식과 기억에 관련된 내밀한 사적 영역을 다룬다. 미시적인 것부터 거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관통되는 것은 실재와 진리 사이의 괴리이다. 


작가는 어느 것이 진리이고 실재임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상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축을 이루는 후자의 주장이야말로 기존의 억압적 질서를 유지하는 반동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환상 그 사이의 간극이며, 혼란과 활기가 공존하는 이 간극의 시공간에서 예술적 실험이 전개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자신감 있게 외쳤던 근대인과 달리, 존재와 사고 간의 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품문화가 더욱 확장됨에 따라 괴리는 더 강조된다. 큰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 대중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담보해줄 진보적 정치인이 아니라 보수적 정치인에 투표를 하곤 한다. 존재와 사고, 행동 간의 괴리는 일상에서 흔히 경험된다. ‘나도 안다. 하지만...’이라는 사고는 보편적이다. 이러한 괴리는 허위의식이라고도 폄하될 수 있는 이데올로기 탓인가. 




 Garden of memory, installation, paper, black light, grassy incense, sound



그러나 허위의식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신념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은 현실화된다. 테리 이글튼은 [이데올로기 개론]에서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허위의식의 불운한 희생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책에서 인용되는 철학자들은 말은 허위의식의 현실성을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바를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계속 그렇게 한다’(슬로터딕)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있어 환영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지첵)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철학자들의 주장은 프로이트가 물신주의자를 분석할 때의 방식과 유사하다. 여성의 작은 구두를 욕망하는 성적 물신주의자는 그 구두가 여성--프로이트는 여성의 성기를 남근의 거세로 보기 때문에 물신은 사라진 남근에 해당—이 아님을 알아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테리 이글튼은 사회학자 폴 허스트의 말을 인용한다. ‘이데올로기는 환영이 아니며 허위도 아닌데,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 어떻게 허위일 수 있겠는가’ 


실제로 체험되며 실제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 단계에서 환상과 현실을 구별할 방법은 없다. 테리 이글트은 허위의식이 일군의 관념이 실제 사실이 아니라는 것, 이 관념들이 억압적 권력의 유지를 위해 기능하며,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대다수는 자신의 권리와 이해에 상당히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허위의식이 편재한다고 해서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환상은 현실과 경쟁하고, 그것을 대체할 정도까지 그 힘이 막강하다. 신념 및 행동의 기준, 그래서 결국 세계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미 지난 세기에 ‘이데올로기의 종언’(다니엘 벨)이 공언되곤 했지만, 현재 세계 정치의 흐름은 그렇지만도 않다. 아랍권 국가에서의 근본주의의 득세,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초 장기집권에 따르는 신권위주의의 발흥을 보면 이데올로기는 여전하다. 




 Conflict of memories , 80x80cm, Light box, Backlit film,  2016.



과거와 같은 대결 구도는 아니어도 언제든 이러한 구도는 재발하며, 일상 속에서는 소비의 체계를 통해서 보다 유연하게 권력이 관철되곤 한다. 미셀 푸코의 주장처럼, 권력은 담론으로, 권력-담론은 주체를 형성한다.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심리적이든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임을 인식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이며, 그것이 작품의 주된 내용과 형식을 이룬다. 어느 상황과도 일체화되지 않는 현상은 작가의 실존과도 관련된다. 지방에서 상경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 여대를 다녔고, 한국과 역사관이 상당히 다른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왔으며, 지금은 여러 레지던시를 거치는 과정에서 주변인의 시선을 줄곧 유지한 것이다. 시스템이 그 속에 속한 대다수의 인간과 무관하게 자체 재생산되고 확장되는 시점에서, 이러한 아웃사이더의 시점은 이제 보편화되고 있다. 그것은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은 상황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작가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타자와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독특한 존재이다. 일본 유학 중에 작가는 그 사회의 바깥에 존재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다루는 차이를 더 확실하게 인지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등장하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경우, 대재난을 겪고 빨리 안정을 찾아야 했던 일본은 다른 나라에서 그 사건을 보는 것 보다 안전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일본에서의 경험에 의하면,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동요한다고 한다. 작가가 일본 원전 사고가 터지기 이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던 체르노빌 사태도 마찬가지다. 해외에서는 체르노빌 사건 때문에 (구)소련이 해체되었다고까지 하는 역사적 평가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그곳에서의 삶은 지속 되고 있는 것이다. 그곳이 어떤 지옥으로 변했든지 떠날 수 없는 사람들과 자연이 거기에 여전히 존재한다. 이승희의 작품에 의하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련되어 사태의 심각성이 조정된다. 




Conflict of memories, 80x80cm, Light box, Backlit film,  2016



요즘 우리나라를 달구고 있는 ‘#미투’ 운동을 보라. 가해자와 피해자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본다. 가령 한쪽은 합의지만, 다른 한쪽은 강압으로 간주한다. 가해자는 기억에 없는데 피해자는 그날의 사건을 샅샅이 기억한다. 이승희의 작품에서 이러한 차이는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것은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 이전에 그러한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는 보다 근본적인 토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부/하부 구조라는 경직된 모델 또한 해체되어가는 중이다. 작가는 경상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을 넘나드는 와중에, 양 지역에서 천안함과 세월호 침몰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감지한다. 그동안의 정통성 없는 정권이 분할지배를 위한 전략으로 생겨난 동서 간의 보이지 않는 전선은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낳는다. 작가는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두 해난 사고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편집해 놓는다. 


작품 [기억의 충돌]은 기억의 문제를 다루지만, 경험과 인식부터 차이가 난다. 역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국가, 가령 일본과 한국 간에도 인식 차이가 있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적산가옥이라는, 한국과 일본의 비슷한 공간구조에 대한 기억의 차이를 다룬다. 작품 [기억의 집]은 이제는 민속 유물 수준의 공간이 된 적산가옥에 대한 생각에 세대 차이가 있음도 암시한다. 1980년대 생인 이승희 세대에게 적산가옥 하면 일제 강점기의 억압이 먼저 떠오르는데, 정작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어머니의 기억은 예상 밖으로 따사롭다. 적산가옥에서 실제로 살아보지 않았던 딸 세대의 인식은 교육에 의한 것이다. 교육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밀접하다. 지난 보수 정권 때 권력의 핵심부가 그토록 역사 교과서 문제에 매달렸던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일제 강점기의 지배적 이미지는 악랄한 일본 순사와 교활한 한국인 앞잡이 때문에 고통당하는 조선의 민중의 이미지일 것이다. 


적산가옥에서 실제로 살았던 세대의 경우에도 계층에 따라 다른 기억을 가진다. 작품 [Space of memories_ various whispers]에는 같은 세대의 한국과 일본의 소녀를 가상의 인물로 내세워 인식과 기억의 차이를 말하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집에 대한 두 개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안함이나 세월호를 다룬 [기억의 충돌]은 보다 극적이지만, 두 소녀의 이야기에도 충돌의 지점은 있다. 작품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나 기차 소리같은 효과음을 통해 모호한 상황을 강조한다. 두 소녀의 추억에 관련된 이미지들 주변 곳곳에 설치한 초지향성 스피커(Parametric speaker)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재현한다. 시각적인 것에 비해 청각적인 것은 더 불분명하다. 시점과 달리, 소리는 보다 많은 지점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일본과 한국의 소녀(할머니 어릴적)는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역사적 서사 또한 이런 방식으로 그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손녀에게 말하는 할머니의 화법에 깔린 서정적이고 아련하기까지 한 이 작품도 남녀가 결혼할 때의 다이아몬드 크기, 천안함과 세월호,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소재로 하여 이데올로기나 허위의식을 다룬 작품들과 연결고리가 있다. 그것은 기표/기의 간의 괴리에 관련된 심리적 차원의 괴리를 암시한다. 존재가 통일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현대 정신분석학의 진단을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적 동물인데, 언어 자체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나직이 들려오는 소리들은 타자의 현존을 암시하지만, 의미를 확인하기 어렵다. 실제 우리의 환경에도 백색 소음이 가득하다. 정보는 이런저런 형태로 흐름을 형성하면서 소비자를 감싼다. 소비자가 물건을 사기 전에 이미 사전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개인은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지만 소비환경은 조직화 되어 있다. 


라깡을 필두로 하는 현대 심리학에 의하면 아이가 언어—모든 주체에 선행하는 상징적 질서—를 배울 때 타자의 목소리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는 소리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목소리라는 기표와 먼저 접한다. 라깡의 이론에 대한 해설서 [욕망의 전복](페터 비트머)에 의하면, 인간은 기표의 비(非)의미와 만난다. 배우기를 통해 기표의 법칙에 종속되는 인간이 되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비의미였던 것이 의미로, 기표가 의미 있는 기호로 전환된다. 그러나 라깡은 기표의 소외시키는 측면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소외는 단어와 사물의 균열로 인하여 생긴다. 언어적 주체는 이 균열을 극복하고 잃어버린 무엇과의 합일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주체가 만나는 것은 실재의 허무일 뿐이다. 이 빈 공간을 그 어떤 대상도 충족시킬 수 없다. 이른바 욕망의 충족 불가능성이다. 작가에게 작업이란 현대의 욕망에 대한 이론처럼, 이 빈 공간을 채우려는 끝없는 시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출전; 전북도립미술관, 전북 청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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