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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균 / 기준의 흔들림, 자유인가 재앙인가

이선영

기준의 흔들림, 자유인가 재앙인가

  

이선영(미술평론가)


물웅덩이에 작살처럼 꽂힌 쇠파이프들, 로딩이 되다만 채 일그러진 얼굴 이미지, 눈금이 박박 지워진 자나 각도기, 축축한 폐지 더미 등이 있는 임승균의 최근 작품들은 냉소적이다.  오늘날 젊은 작가에게서 종종 보이는 이러한 경향은 결국 예술 및 예술가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반응에 대한 반응이다. 즉 그들은 사회의 냉소를 반사하는 것이다. 작품의 분위기와 의미는 상당 부분 작가가 선택한 대상들의 상징적인 위치와 무게에서 발생한다. 가령 축축하고 부드러운 진흙 바닥에 꽂힌 막대기들은 아직도 대지모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픔을 느끼게 할 것이다. 창을 던지는 행위가 떠오르는 그의 작업은 가상적인 사냥이기도 하다. 중국에서의 작업을 영상으로 담은 것이라 그런지 중국무술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는 이 작품에 [Installation]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서 예술이라는 정교한 구성적 행위를 해체한다. 조각을 전공한 그로서는 반석 위에 놓인 듯한 기념비와는 거리가 있는 작업이다. 




 Installation_쇠파이프_가변설치_2017



Installation_Detail



역설적인 것은, 그가 무작위로 던져진 것들이 마치 잘 구성된 설치작품 같기도 하다는 점이다. 제대로 박히지 못하고 쓰러진 것들도 의미작용에 함께 참여한다. 장소 또한 과정 중에 있다. 흙탕물처럼도 보이는 그곳은 연못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의 장소이다. 과정 중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과정 중의 행위가 일시적인 균형을 이룬다. 아무렇게나 꽂힌 듯한 막대기들이지만, 그래도 주변의 자연환경이 작용하여 나름의 분위기를 만든다. 놀이처럼 자유롭게 시작했지만, 의외의 조화에 후반 작업은 더 심혈을 기울였을 것 같다. 놀이가 심각해지면 예술이 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숲이 비치는 고인 물에 첨가되는 쇠막대기가 야기하는 직선의 그림자는 비정형적인 자연에 절묘한 리듬감을 준다. 장소나 행위에 있어 불안정성이 두드러지는 작품 [설치]는 과정 중의 주체를 전제한다. 그것은 영화 캡쳐 이미지가 담긴 모니터 속 이미지가 있는 작품 [사진]에서 다시 강조된다. 


사람을 중심에 놓는 세계관이 아직 건재하다면, 일그러진 채 부서져 내리는 얼굴들은 섬뜩한 느낌을 줄 것이다. 오브제 작업에서, 보편적인 기준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측량 도구들에 가해진 장난스러운 행위는 무질서에 대한 저항감을 줄 것이다. 임승균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작업을 하지만, 기존의 언어를 약간 비틀면서 다른 말을 하는 방식이 많이 발견된다. 그는 희귀하고 희한한 무엇을 다루지 않는다. 값비싼 재료로 작업하지 않는다. 녹슨 쇠파이프나 종이뭉치 등은 거의 쓰레기나 다름없는 재료다. 일상적이어서 쉽게 알아보지만, 그만큼 변형의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소재를 선택한다. 대신 그만큼 반전의 폭이 크다. 마치 시처럼... 이번 청주 스튜디오에서의 전시 제목 [河流弯弯,我等着…你靠岸]는 ‘강이 구부러져, 나는 너를 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시적 의미를 가진다. 시는 함축적이지만 쉽게 소통되지 않는다. 반대로 더 쉽게 소통될 수도 있다. 




Installation_Detail



Installation_작업과정



시적 행위는 이 간극 속에서 도박을 벌인다. 함축적 시는 장황한 산문의 투명한 소통보다는 불투명 속에서의 비약을 추구한다. 가벼운 풍자부터 심각한 비판까지, 예술을 포함한 사회에 대한 예술가들의 의사 표현은 찻잔 속의 폭풍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는 언어라는 상징적 우주로 이루어져 있고, 예술가들 또한 이 상징적 우주에서 상호작용한다. 상징적 우주 밖에는 자연이 있지만, 그 또한 과학이라는 언어로 체계화되어 간다. 이전 시대에는 양식이라는 단어를 써야 할 만큼 예술 또한 견고한 상징적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채 그 안에 태어나기 마련인 상징적 우주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억압적이다. 편안하면서도 불편하다. 그러나 제국의 지형도와 관련되는 지배적 언어는 조금씩이나마 변해간다. 지배적인 만큼이나 변화하는 언어는 권력의 문제이다. 언어-권력의 복합체는 점진적으로, 또는 급작스럽게 변화한다. 


후자의 경우 혁명이나 돌연변이 같은 용어로 대체될 수 있다. 임승균의 작업에서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우연성이나 임의성은 대체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예술가들의 주 무대는 지배적 언어를 변화시키는 빈틈이나 작은 균열이다. 그래서 예술은 현실에서의 입지가 매우 좁다. 고정되고 안정된 현실에 바탕 하는 상식은 예술을 불편해한다. 그러나 임승균은 상식의 무대인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작품들은 평소에 주변의 사물을 잘 관찰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에게 예술만을 위한 고립된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삶의 불안정함을 말하지만, 예술은 불안으로부터 추동되는 움직임과 관련된다. 안정이란 그 안정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수많은 것들을 암시하기에, 예술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얼마 전 중국에서의 작업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작품 [Installation]은 일시성을 극대화한 설치 작품이다. 




사진1_디지털영상캡쳐_2014



사진2_디지털영상캡쳐_2014



사진4_디지털영상캡쳐_2014



사진5_디지털영상캡쳐_2014



물론 그것은 젊은 남성이 던진 것으로 일부러 뽑을래도 힘들다고 하지만, 주된 방점은 일시적 속성이다. 100여 번의 실행 중에서 꽂히지 않고 주변에 널브러진 막대기들도 꽤 있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떠올리는 한편, 그동안 작가로서 그가 세상에 던졌을 크고 작은 예술적 화두들을 비유한다. 3 미터의 긴 쇠막대기가 만들어내는 입체적 드로잉인 작품은 대자연 속에서 실행한 조각적 실행이다. 그는 이 작품도 세상에 던지고 있다. 이 작품에 의하면 그의 스타일은 최소한의 계획을 가지지만, 실행 중에는 전력을 다한다. 이러한 실행과정과 더불어 의미는 추후에 생겨난다. 그 점에서 그의 작품은 관념적이지 않다. 관념적 예술은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진짜 중요한 부분을 간과한다. 디지털 영상 캡쳐 작품인 [사진] 시리즈는 그가 즐겨봤던 영화 중의 장면들이지만 무심한 일련번호로 구별될 뿐이다. 


모니터에 멈춰진 사진은 마치 화가의 붓질이 극대화된 회화처럼 거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들이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든 것은 아니다. 얼굴은 가장 좁은 면적에 가장 집약도가 높은 내용과 형식을 가지는 몇 안 되는 대상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얼굴을 읽는 법에 소홀한 적이 없다. 아니 그것은 다윈이 말한 것처럼 거의 반사적인 행위이다. 막스 피카르는 [사람의 얼굴]에서 ‘우주만물은 사람의 얼굴 속에 그려져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사고는 ‘사람의 얼굴을 신과 똑같은 모습’(막스 피카르)으로 간주한 서양의 종교적 관념이 자리한다. 어쨌든 막스 피카르의 기준에 따르자면. 임승균의 작품 속에서의 우주 이미지는 혼돈 그 자체다. 막스 피카르는 신과 인간의 동시적 몰락을 암시한다. 막스 피카르에 의하면 ‘사람의 얼굴은 신의 참모습을 담은 형상’이었다. 그러나 이제 ‘얼굴은 그저 두개골 위쪽에 얹혀 있을 뿐이’다. 




사진7_디지털영상캡쳐_2014



사진8_디지털영상캡쳐_2014



사진9_디지털영상캡쳐_2014



사진10_디지털영상캡쳐_2014



이제 얼굴은 ‘그저 하나의 표면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판 표면조차도 최근에는 깨어지고 조각나고 있다’ ‘차원들이 떨어져 나간 얼굴’은 ‘유기적이기도 본질적이지도 않으며 우연히 던져진 듯한 느낌을 줄 뿐’(막스 피카르)이다. 이 전시에서 동영상과 정지영상 모두에서 보여지는 것은 던져진 것들에 대한 사고이다. 임승균의 던지는 것, 또는 던져지는 것은 자유롭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예술 또는 삶이 가지는 양면성이다. [사진] 시리즈들은 전송되는 정보 속의 주체에 대한 상을 암시한다. 알렉스 라이트는 [분류의 역사]에서 정보란 ‘의미를 만들기 위해 데이터를 나란히 배열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기준에 의하면 그의 작품 속 정보는 엉망진창이다. 작품 속 얼굴들은 분명 유명 배우였을텐데 말이다. 질서/무질서의 관계처럼 정보/노이즈의 관계가 유추된다. 물리학에서 노이즈는 ‘전자의 무작위적 운동에 의한 전자의 교란 현상’이라고 규정된다. 


물리학을 더욱 미시적 차원으로 확대하자면 인간의 몸 역시도 전자의 흐름으로 간주된다. 정보에 비해 노이즈가 많아지면 정신분열증이나 죽음이 야기된다. 모니터에 담아서 정보의 소스와 과정을 노출하는 [사진] 시리즈에서는 이러한 교란성을 극대화한다. 물질과 정보를 혼동해서는 안되지만, 가상현실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현실에서 이러한 오류는 재앙으로 다가온다. 캐더린 헤일즈는 [사이버 공간의 유혹]에서, 가상현실에서 정체성에 대한 불안은 ‘주체의 연속성을 확증하는 정보패턴의 일관성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본다. 여기에서 ‘거세에 상응하는 재앙은 정보 회로의 고장, 즉 자아를 표상하는 패턴의 분산’(캐더린 헤일즈)이다. 가상현실에서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신체구조의 물질성이 아니라, 여러 체계 내부에 있는 정보의 흐름’(캐더린 헤일즈)인데, 임승균은 이러한 정보의 흐름에 끼어드는 노이즈를  보여준다. 




평면26_삼각자에 맨소래담_2014



평면27_각도기에 맨소래담_2014



평면28_삼각자에 맨소래담_2014



질서감을 주는 도상 중에서 얼굴이 최고라면, 그다음은 몸일 것이다. 얼굴이나 몸은 정상/비정상의 민감한 기준선이 되어준다. 임승균의 얼굴 이미지는 또한 전송 중의 정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노이즈가 존재한다. 정보보다 노이즈가 많다면 무의미가 될 것이다. 인간적 형상과 관련시키면 그것은 질병이나 죽음을 떠올린다. 그는 [평면] 시리즈에서 정상/비정상의 기준이 되는 측정 도구들을 활용한다. 삼각자, 각도기의 눈금은 지워져 있고, 표준 시력표의 경우 시력 2.0만 볼 수 있는 기호 하나만 남겨놓고 다 지워버렸다. 물론 그것도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시력과 무관하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기준치를 너무 높이 설정하다 오히려 편법이 더 성행할 것이다. 임승균이 선택한 오브제인 자나 각도기는 정상/이상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중잣대’, ‘고무줄 잣대’ 등의 용어가 일상어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자는 정상과 이상을 가늠하는 기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주 캉길렘은 이러한 주제를 다룬 책 [정상과 병리]에서, 한 철학 사전은 인용하면서, ‘정상이라는 것은 어원이 norma, 즉 직각자(T자)를 나타내는 말이므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기울어지지 않는 것, 따라서 두 개의 방향을 낳는 정확히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조르주 캉길렘은 ‘정상적인 것이 산술평균이나 통계적 빈도로서 정의되기보다는, 오히려 한정된 실험조건 내에서의 이상형으로 정의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그에 의하면 ‘정상이라는 개념은 그것 자체가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표준화나 규격화는 전체주의 체제와 밀접하다. 모든 구성원을 하나의 잣대로 측정하는 사회는 구성원들을 하나의 방향으로만 몰아치기 마련이고, 그 결과 무한 경쟁이 야기된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식은 높은 기준을 만족시키든가 속이든가, 그 기준을 거부하는 등의 선택을 낳을 것이다. [Test] 시리즈는 측정 수치를 교란하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참고) 평면323_표준시력표_75x35cm_2018-올해 새로 설치된 작품은 기호가 지워져 있음.



(참고) Test273_박스에물_가변설치_2011-올해 새로 설치된 작품은 수레가 없음.



가령 작품 [Test273]은 폐지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물을 뿌리는 행위에서 영감 받은 것이다. 세상의 기준들은 그것을 위반하는 크고 작은 행위를 낳는데, 위반에는 불안과 쾌감이 야기된다. [사진] 시리즈에서 작가는 특별하게 왜곡을 하거나 가필을 하지 않은 채 인간의 일그러진 표정을 부각시켰다. 니콜 아블릴은 [얼굴의 역사]에서 ‘얼굴(visage)’이라는 단어가 ‘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파생한 것임을 밝힌다. 그에 의하면 원래 얼굴은 ‘보는 능력,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의 겉모습’을 의미했다. 즉 그것은 ‘내가 타인에게서 보는 것이고 타인이 나에게서 보는 것이 얼굴’(니콜 아브릴)임을 말한다. 이러한 상호성은 불가피하게 간극을 만든다. 나와 타자 간 시선의 간극은 모든 사회적 드라마에 내재한 비극의 씨앗이다. 임승균의 작품에는 이러한 간극을 가늠하는 동일성의 잣대가 시험대에 올려진다. 그것은 결국 자유와 재앙 사이를 수시로 왕복하는 예술에 대한 자기 이야기이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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