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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 / 세계는 그림이고, 그림은 세계

이선영

세계는 그림이고, 그림은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한가득 잡힌 구도의 도시풍경이 있는 이상봉의 최근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얼굴이 담겨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표정이 다르듯이, 대부분 건물로 이루어진 풍경의 모양새가 장소마다 차이가 있다. 다른 장소는 다른 형태와 색조를 가지며, 붓 터치 또한 그렇다. 그의 작품은 형태를 이루는 외곽선을 진하게 처리하여 물감을 묻힌 붓의 밀도와 강도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느 지역은 균일하게, 어느 지역은 균일하지 않게 칠해졌지만, 어떤 선이든 전체적으로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순한 창을 넘어서, 창의 어떤 특성이 풍경을 다시 규정하는 모더니즘의 방식이다. 모더니즘 시기에 폴 고갱이 장식예술의 영향을 받아 색 면을 싸는 굵은 선(cloisonnisme)으로 화면의 평면성과 장식성, 그리고 상징성을 강조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21세기 이상봉의 풍경에는 세기말 상징주의의 비의적인 밀폐감이 아니라, 대기의 개방감이 있다. 어떤 대기는 선을 갉아먹고, 어떤 대기는 선을 더욱 농밀하게 한다. 




감천동 3, Oil & Watercolor on Canvas, 97.0x162.1cm, 2017



명륜동, 80.3x130.3cm, Oil & Watercolor on Canvas, 2017



풍경마다 다른 밀도와 굵기의 선에는 작가의 호흡도 담겨있다. 유화지만 수채가 포함되어 맑고, 동양화같은 느낌도 난다. 진한 선 내부의 색 면도 완전히 평면적이지는 않다. 거기에는 오래된 동네의 느낌을 살려주는 흔적과 얼룩이 있다. 내적 율동감을 가지는 조형적 요소는 전면에 나와 있지만, 실재감 또한 있다. 실재의 어떤 차원을 휘발시켜 아름답게 조율된 작품이지만, 상상의 풍경은 아니다. 작품 제목에 동네이름도 명확히 나와 있다. 작품 [황학동]의 낡은 슬레이트 지붕부터 작품 [전주]의 기와지붕까지 장소를 대변할 수 있는 부분이 포착된다. 건물들로 가득 찬 풍경이 기조를 이루는 가운데, 작품 [신림동]이나 [하월곡동]은 가늘게 나있는 가파른 길이나 계단을 강조하기도 했다. 작품 [명륜동]은 낡았지만 변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싶은 정겨운 동네로, 작품 [황학동]에는 다소간 방치되어 있는 듯한 거칠음이 드러난다. 한국의 이곳저곳이 담은 그의 작품에서 어떤 것은 동화적이기까지 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을 동화 속 풍경과 달리 변화의 흐름이 느껴진다. 


가령 작품 [하월곡동]의 변두리 산동네부터 작품 [강남]의 고층 아파트가 가득한 공간으로의 시간적 추이이다. 개발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산동네는 아파트촌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밀집의 강도는 더 높아지며, 거의 모든 것을 상품화한 사회의 판매망은 더욱 원활해질 것이다. 시간은 각자 다르게 흘러도 과도기적인 모습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저 끝에 고층 빌딩이 구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작품 [길동] 같은 곳이 그렇다. 급조된 새것은 오래된 것을 낡아 보이게 한다. 사고나 행동방식의 획일성 속에서 새것과 오래된 것의 공존은 다양함보다는 열패감을 낳곤 한다. 전통이 담긴 작품 [전주]는 사라진 전통을 되살리는 것도 근대의 프로젝트 중의 하나임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발전주의를 강박관념처럼 느끼게 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아름다운 장소들도 있다. 오래되었지만 추레하지는 않은 [감천동]이나 [명륜동]이 그렇다. 작가가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그곳들과 매우 닮았지만, 동시에 그곳에 대한 작가의 인상이 확실하게 추가된다.




강남, Oil & Watercolor on Canvas, 97.0x162.1cm, 2017



길동, Oil & Watercolor on Canvas, 97.0x162.1cm, 2016



이상봉의 작품은 초창기 모더니즘처럼 실재에의 감각과 조형적 자율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진다. 주체냐 객체냐 하는 어리석은 이항대립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상호 상승하는 국면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결과 색감을 통해 작가는 심미적인 가치평가를 한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 들 아래로는 모세관같이 뻗어있을 경사진 골목길들이 있을 것이다. 화면 상단에 아주 조금 배치한 하늘은 시야를 평평하게 칠해진 화면 안쪽에 맴돌게 한다. 어느 풍경에서나 밀집된 건물은 도시화로 압축될 수 있는 근대적 국면을 모더니즘의 방식으로 푼다. 형태를 감싸고 엷게 칠해진 색을 강조하는 선은 자연에는 없는 인공적인 것이며, 회화는 3차원 현실을 2차원에 담는 평면적인 것임을 새삼 강조한다. 동네마다 있는 색감이 반영되어 있지만, 모두 색칠한 것은 아니다. 이상봉의 작품에서 여백은 형태 내부에 표현되어 있다. 마치 원고지의 빈 칸 같은 느낌이다. 빈 하늘과 같은 색의 건물들의 눈에 띄며, 이는 현실에서는 다소간 무질서했을 대상을 심미적으로 조율한 것이다.


이상봉의 작품은 현실과 그림 모두를 놓치지 않는다. 추상화는 3차원 현실을 2차원에 담는 그림이 현실에 대한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빠르게 진행되어왔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모더니즘과 모더니티는 미학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로 구별되곤 했지만, 근대시기에 갈수록 평면화 되는 그림과 세계의 평면화는 동형관계에 있다. 모더니즘은 지시대상으로부터 자율화되어 세상을 구성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평평화된 세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몇몇 천재 건축가들이 전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성냥곽같은 국제주의양식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같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이상봉의 작품에는 근대화가 야기하고 세계화에서 그 본모습을 드러냈으며, 더욱 가속화될 현실의 평평화를 반영한다. ‘세계의 평평화’(토머스 프리드먼)는 지구는 원래 둥근데 평평하다고 착각했던 근대 이전 시대의 오류가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온 근대화/세계화가 야기한 세계의 지배적인 양상이다. 




하월곡동, Oil & Watercolor on Canvas, 90.9x72.7cm, 2016



신림동, Oil & Watercolor on Canvas, 65.2x90.9cm, 2016



세계의 평평화에 의해 저곳에 있는 자원과 인간을 여기에서 이용(또는 착취)할 수 있었고, 여기에서 만든 것을 저기에도 판매할 수 있었다. 생산과 소비가 전 세계적으로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 장벽은 최대한 낮아지고 동질화는 필수적이다. 현대는 세계사의 어느 때보다도  서로 간의 이질감이 덜 느껴지는 시대이다. 동시에 이해관계의 충돌은 더욱 빈번하다. 거기에는 정보의 동시적 소통이라는 기술적 기반이 깔려있다. 정보는 상품이고 상품은 또한 정보이다. 이상봉의 작품 [강남]에서 똑같은 격자무늬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비슷한 상품을 소비할 것이다. 비슷한 것을 욕망하고, 비슷하게 살다 죽을 것이다. 가난함이 독특함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선적 전망의 사회에서 목적은 분명히 설정되고, 어디까지 왔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시에 같은 것을 추구함으로서 더욱 가속화되는 것은 무한 경쟁이다. 물론 전에 없던 새로운 기회도 생겨난다. 3차원 현실이 있고 2차원 그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의 수렴이다. 


그림만큼이나 평평한 세계에서, 세계는 그림이고 그림은 세계이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회화는 평평한 대상’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평평화는 기술과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의해 가능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기술의 발전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의 감소하여 오프라인의 사람과 물자, 온라인의 데이터 등의 이동시간이 빨라져 이웃처럼 평평하고 좁은 세상으로 느낀다’고 말한다. 물론 평평한 세계는 평등한 세계는 아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평평한 세계의 플랫폼’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평평한 와중에 더 결정적 지점을 암시한다. 평평화 정도에 따라 ‘평평화 계수(coefficient of flatness)’가 측정되기도 한다. 평평한 세계에 상응하는 평평한 그림은 현실과 조형언어가 적절한 균형감을 가졌던 모더니즘 초창기의 짧은 순간을 떠올린다. 그림이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던 시대, 가히 그림의 황금기라 생각되는 시대이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그림이나 화가의 전형이 성립된 것도 그 시대이다.




황학동, Oil & Watercolor on Canvas, 60.6x72.7cm, 2017



전주 2, Oil & Watercolor on Canvas, 60.6x90.9cm, 2016



지시대상과 의미에 발목 잡혀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재현주의나 기술로 달성될 가능성이 더 큰 가상현실과의 사이에 어떤 지점이 있었다. 가령 그 시기를 연 화가 세잔은 자연과 예술을 통일시키고 싶어 했다. 메를로 퐁티는 [세잔의 회의]에서 ‘모든 터치 그 하나하나가 공기, 빛, 대상, 구성, 성질, 윤곽 및 스타일을 포함해야 한다’는 세잔의 말을 인용한다.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기하학은 감각적으로 되고 감각들은 명확하고 지속적으로 된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감각의 실현’(세잔)을 말한다. 이러한 작품은 재현이기 보다는 변조인데, ‘변조는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틀로서’(질 들뢰즈) 작용해야 한다. 이상봉의 그림은 건물이라는 기하학적 구조들로 가득하지만, 부는 바람에 나풀거릴 것같은 경량구조, 미묘한 색감이 깔린 유동적 표면을 가진다. 빛이 스며있는 광학적 공간이면서도 조형언어의 자율성이 느껴지는 촉각적 화면이다. 화가는 붓 하나로 이 모든 종합을 이루어낸다. 

 

출전; 미술과 비평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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