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미혜 / 회색빛 일상과 푸른 하늘

이선영

회색빛 일상과 푸른 하늘

  

이선영(미술평론가)

 

2010년 이후의 이미혜의 작품들에서는 비슷한 도상들이 조금씩 다른 맥락 속에 등장하여 작가의 사고와 상상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의 도상이 다른 도상을 불러오면서 가지치기 하는 식으로 변화된다. 각각의 상징도 있지만, 각 도상들이 다르게 결합함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변주 되곤 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은 장기판의 말처럼 서로 다른 좌표 위에 놓이면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미혜의 작품에서 상징은 그 자체만큼이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창문, 거울, 하늘, 의자, 민들레 홀씨, 여자아이의 얼굴 등은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도상이다. 창문이나 거울은 현실을 반영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화가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상징적 대상이다. 하늘은 일상의 유한성과 대조되는 무한의 이미지로, 작품 속 다양한 사물들의 바탕이 되어준다. 그것은 또한 막힌 벽과 비유될 수 있는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 







하늘은 벽에 붙인 한 장의 이미지로부터 서서히 일상을 잠식해 나간다. 하늘을 품은 거울은 여기와 저기를 잇는 가교이다. 그런 거울은 창이나 그림과 비슷하다. 거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차원으로의 이동이 가능하게 했던 문 같은 위상을 가진다. 이러한 거울 저편으로의 이동은 단순한 현실의 반영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할 것이다. 거울의 저편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은 민들레 홀씨이다. 홀씨는 다른 작품들에서 꿈꾸는 듯한 소녀의 얼굴과 중첩된다. 작품 [yellow brick road](2016)에서 눈을 감은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들이 줄지어 연결된 둥근 틀을 볼 수 있는데, 홀씨를 확대하면 이런 모습일 것 같다. 그러나 이미혜의 작품에는 대부분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재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것은 빈 의자이다. 작품 속 사물들 자체가 의인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또 등장하는 것은 중언부언이 될 수 있다. 


가령 벽에 붙어있는 하늘 이미지와 그 앞에 나무 의자가 놓여 있는 최근 작품 [the inner landscape](2017)를 보자. 하늘이 아니라 막힌 벽 위에 붙은 하늘 이미지 앞의 빈 의자는 주체의 어떤 상황을 드러낸다. 하늘 이미지는 테이프로 간단하게 붙여져 있어서, 현실 속 환상 또는 유한 속 무한의 위상은 그다지 탄탄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라도 툭 떨어져 시멘트 색 현실을 드러낼 것이다. 작품 [the inner landscape](2017) 시리즈는 벽에 붙인 하늘 이미지나 의자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진다. 벽에 붙은 하늘 이미지들은 경계를 넘어서 종이들 밖으로 나와 벽을 타고 흐르기도 한다. 작품 속 크기와 무관하게 저편으로 시원하게 트여있는 하늘과 대조되는 것이 시멘트벽이다. 시멘트벽은 무덤의 묘비같이 글자가 새겨진 석벽으로 변주된다. 서랍 또는 받침대를 떠올리는 판 위에는 여러 가지 은유적인 사물들이 놓여있다. 뒷배경은 하늘이다. 








작품 [상복동291](2017)시리즈에서는 60.6x60.6cm 규격의 캔버스에 마치 라벨이 붙은 상자안의 것들처럼 보이는 사물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나씩 놓인다. 책들, 모래시계, 운동화, 봉제인형, 작은 화분, 촛불 등이다. 아무것도 안 놓인 것 있고 민들레 홀씨가 몇 가닥 있는 것도 있고, 나비들이 날아다니기도 한다. 작가에게 시적인 감흥을 주는 일상의 사물들은 하나씩 호명되어 조명된다. 받침대 위에 이렇게 호명된 사물들은 그 아래에 새겨진 글자들과 더불어 하찮을 수도 있는 일상을 영원한 차원으로 기념비화 한다. 그러나 그 토대 역시 푸른 하늘로 스르르 녹기도 한다. 벽과 하늘, 현실과 허구(또는 더 고차원적인 현실)의 대조어법에 의하면, 이러한 사라짐이 비극적이지만도 않다. ‘마음속 깊이 품은 생각’이라는 의미의 제목 [유회(幽懷)](2017) 시리즈에서 머리와 몸통으로 구성되어 있어 사람의 비유가 있는 민들레는 하늘 이미지를 통로 삼아 이동한다. 


여러 작품을 함께 보면 홀씨들이 이런저런 상태의 하늘로 이동하는 것 같은 환영이 있다. 그것은 정지된 매체에 잠재적 움직임을 부여하는 화가의 방식이다. 하늘 이미지가 이 세상 저편으로의 통로 역할을 함을 알려주는 것은 벽에 붙은 도로 이미지가 있는 작품  [signal](2017)이다. 시원하게 뚫린 길 위로 하늘이 있는 이 작품은 원근법 저편의 세계로 관객의 시선을 유도한다. 최근 작품 [the inner landscape](2017)에서 푸른 바탕 위에 있는 하얀 종이배, 그리고 작품 [부치지 못한 편지](2016)에서 종이배와 종이비행기가 있는 이미지는 모두 이동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다. 그러나 부치지 못한 편지로 만들었을 종이배와 종이비행기는 현실은 물론 가상의 이동조차도 여의치 못함이 암시된다. 민들레 홀씨는 이동을 방해하는 현실의 벽들을 변신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카프카가 [변신]에서 보여줬던 전략이다. 빠져나갈 틈이 너무 작다면, 그 틈보다 더 작게 변신하면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사이3](2015)에서 저편으로 날아가려는 민들레는 벽에 붙은 하늘 이미지들을 향한다. 지금 여기의 존재가 이동할 수 있는 통로로서 벽에 붙은 이미지는 취약하다. 그러나 프레임이 있는 거울과 창은 좀 더 튼실할 것이다. 모서리 장식이 파손된 거울의 부분을 재현하고 주변에 민들레 홀씨가 흩어져 있는 작품 [챵내고자. 챵네고자](2014)는 하늘을 반영하는 거울이 그 통로가 된다. 작품 제목에 암시되듯, 작가는 창을 만들고 싶어 한다. 거울과 마찬가지로 프레임이 있는 그림은 그러한 창이 될 수 있다. 이미혜의 작품 속 거울은 창이나 그림처럼 하늘을 반영한다. 거울은 일상 속 사물 중 자연스럽게 무한을 품을 수 있다. 작품 [사이2](2014)에서는 고풍스런 타원형 거울에 비친 하늘과 그곳을 통과할 것이라 기대되는 홀씨들이 회색 빛 공간에서 대기한다. 창과 거울은 서로를 반영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유희를 고도화 한다. 


작품 [두개의 방](2010)에서 창문과 거울은 푸른 하늘을 반영한다. 푸른 하늘로 나있는 창, 또는 그 하늘을 반영하는 거울은 탈주의 필요조건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자체가 환상으로 창을 내는 행위에 해당된다.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제작된 [두개의 방](2012)시리즈에서 하늘은 창과 거울이라는 통로가 아니고서도 현실화된다. 즉 이미혜의 작품에서 하늘로 상징되는 또 다른 차원은 광학적 가상을 벗어나 촉각화 된다. 푸르름은 허름하고 좁은 방부터 고풍스럽고 거대한 건축에 이르는 공간들에서 이끼처럼 증식한다. [두개의 방] 시리즈에서 좁은 실내에 놓인, 창과 캔버스를 비롯하여 실내의 곳곳이 푸르게 변화한다. 실내의 사물들 중 이러한 변화를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은 거울일 것이다. 거울은 변화의 시작이자 원동력이다. 이미혜는 그림을 통해 탈주의 무대를 연출한다. 이러한 탈주극에는 서사의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홀씨가 대역을 맡는다. 









하나의 줄기에서 또 다른 수많은 줄기를 내는 민들레 홀씨는 작가의 분신처럼 여기와 저기를 넘나든다. 하나이자 여럿인 홀씨는 분신이다. 홀씨에는 꿈꾸는 어린 소녀의 얼굴을 부여된다. 홀씨/눈감은 여자 아이는 타원형 거울에 비춰지곤 한다. 창문 뿐 아니라 하늘을 품은 거울 또한 저편으로의 이동을 암시한다. 현대의 심리학이 주장하듯 거울상은 주체의 즉물적 현실이 아니라, 주체의 요구를 반영한다. 거울 앞에서 주체는 분열된다. 민들레 홀씨는 그러한 분열의 이미지로 절묘하다. 민들레가 홀씨로 분열되지 않으면 가상적 차원에서나마 이동은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넘나드는 분신은 무엇보다도 고정된 주체로부터의 탈주이다. 이러한 상황이 극단화 된다면 정신분열증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은 그러한 심각한 상황과 아슬아슬한 게임을 통해 진행되기 마련이다. 예술은 현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잠재적 영역이지만, 동시에 현실로부터 나를 유리시킴으로서 위험에 빠지게 한다. 이미혜의 작품에 암시된 여기와 저기의 관계는 이러한 양면성을 표현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겨울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