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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익 / 행복을 둘러싼 가상과 현실

이선영

행복을 둘러싼 가상과 현실

  

이선영(미술평론가)

  

예술은 진(眞)이나 선(善)이 아니라 미(美)에, 그리고 오직 미에만 속한다는 생각은 근대의 예술가로 하여금 과학이나 종교, 정치나 윤리 등과 거리를 둔 ‘순수한’ 심미적 영역을 탐구하게 하였다. 이렇게 탐구된 미적 영역이 예술을 더 풍요롭게 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답은 아직도 확실치 않다. 계파에 따라 다른 대답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일단 현대미술의 형식적인 다양함은 예술이 풍요로워졌음을 인정하게 하지만, 그것은 내용과 분리된 형식이었기에 빈약했다. 어떤 형식 그 자체에 내용이 있다는 식의 형식주의적 사고는 그 형식의 언어를 공유하는 이가 극소수라는 점, 그래서 예술은 극소수의 유희로 축소되었다는 점이 문제다. 내용을 형식보다 중시하는 보다 자연스러운 관점은 뻔한 일상으로 환원되곤 하는 삶과 의 거리두기에 실패함으로써 진부한 삶과 동어반복적인 예술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거리두기를 최소화한 예술이 키치적인 양식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믿음의 도리-가족사진_캔버스에 유채, 벽지 콜라주_130.3x193.9cm_2017



순수예술과 키치는 근대의 쌍생아라 할 수 있지만, 양자 간에는 차이점이 있다. 칼리니스쿠는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에서 키치를 허위의 미적인 형식으로 규정하면서, 키치에 관련된 달콤한 끈적거림은 예술의 특징이라고 말해지는 거리감과는 대립된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고급 예술과 그 비평의 근거가 되고 있는 칸트 식의 무관심적인 관조의 미학은 키치의 열렬한 관심성과는 구별된다. 키치는 2017년 조현익의 개인전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사되는 어법이다. 아브라함 몰르는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키치의 특징을 잡다한 절충주의로 본다.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이것저것 다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아름다움 뿐 아니라 진리와 선함도 들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무사히’라는 간절한 메시지와 기도하는 예쁜 소녀의 이미지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키치에 대한 가치평가가 어떻든, 아름다움을 따로 분리시키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현익의 ‘믿음의 도리 II’ 전을 본다면, ‘믿음’이나 ‘도리’ 같은 키워드는 진/선/미를 분리시켜 갔던 현대 예술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게다가 두 단어는 결합됨으로써 더욱 무거워진다. 예술이라는 것이 ‘삶의 무거움으로부터 날아오르려는’(니체) 승화, 또는 초월의 몸짓이라 한다면, ‘믿음의 도리’는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번이 두 번째인 ‘믿음의 도리’ 전은 종교 전단지에서 발췌한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배적 사회의 타자에 해당되는 예술에서 풍자는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예술이 삶에 필요한 것을 담아도 그것을 충분히 담는다면 예술적이다. 예술은 단순한 필요(기능, 의미)를 넘는 충만함이기 때문이다. 대개 충분히 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술과 삶은 대극에 놓인다. ‘믿음의 도리’라는 전시 주제는 풍자이면서도, 예술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 또 자신이 그때그때 당면했던 삶의 국면에 솔직하게 반응했던 작가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 




Day-20170701_Digital C-Print_42x30.5cm_2017



Day-20170815_Digital C-Print_17.7x12.7cm_2017



고풍스러운 글자체와 결합된 ‘믿음의 도리’는 너무나 중요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너무나 당연해서 말하나마나한 주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이 전시에서 제시한 두 가치는 아름다움만큼이나 희귀하다. 믿음이든, 도리든, 믿음의 도리든 그것들은 예술 이전에 삶의 요건이라 한다면, 그것을 제대로 지켜가며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예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에 대한 믿음이 그것을 시작했을 때의 신선함과 강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예술가임을 앞세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도리를 면제받으려 한 경우는 더욱 흔할 것이다. 인간과 예술 사이의 갈등은 어떤 유파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어서, 각종 포스트 국면에 인간 또한 포함(post-human)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뿐 아니라, 자식과 가족까지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인간을 초월할 수는 없으리라.  


조현익은 이번 전시에서 아이의 시선을 통해서 자신의 사적 영역을 작품에 드러냈다. 상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이른바 ‘독박’ 육아가 한국 사회에서 문제시되는 시점에서, 그의 작품은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분업화와 함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과 분리가 더욱 강화된 후, 예술 또한 이 두 영역의 관계 속에서 작동했다. 사적 영역은 잔잔한 그림일기 같은 방식이나 선정적인 폭로의 방식으로 드러나곤 했다. 은유의 양식을 빌어 가장된 형태로 드러나는 사적 영역도 포함되어야 하리라. 너무 사소하거나 너무 선정적이어서 꺼려질 수도 있는 사적 영역이지만, 조현익의 전시에서는 아이의 눈과 손을 빌린 작품을 통해 그 영역이 색다르게 드러난다. 사진이 찍힌 날짜의 일련번호가 붙은 [Day] 시리즈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이 걸린 작품이다. 만약 이 사진을 찍은 아이들이 커서 부모처럼 작가가 된다면, 생애 초창기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Day-20171124_Digital C-Print_17.7x12.7cm_2017



Day-20170804_Digital C-Print_42x30.5cm_2017



아직 도구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어서 마구 찍힌 사진에는 나름대로 아이의 관심사가 담겨있다. 더 많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그중에서 추렸을 작품 중 몇 개만 보자. 침대에 늘어진 아버지(아이의 관점에서)의 팔목이나 발바닥 등은 마치 죽은 사람의 신체 일부처럼 보인다. 남편과 아버지, 작가의 역할을 하느라 피곤에 절었을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오로지 두 아이의 육아를 위해 세팅이 돼있는 듯한 실내에는 가족 구성원들의 일부와 흔적이 나타난다. 아이의 관심사가 잘 드러난 것들은 역시 장난감이다. 여기에 나오는 레고 블록이나 공룡인형 등은 아버지/작가에 의해 설치 작품으로도 구현된다. 초점이 안 맞은 장난감 차들의 무리는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 같은 모습이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관객이라면 아무리 부분적이라도 알아볼 만한 광경들은 그동안 장중한 스타일로 작품의 완결도를 중시해 온 작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 살짜리 아들이 찍은 사진에 대해 작가는 ‘그 어떤 욕망도, 지나친 의도도, 정치·사회적 목적으로 계획된 프레이밍도 들어있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연사로 마구 찍힌 사진들은 내용에 너무 몰두하거나 형식을 너무 가다듬다 보면 빠질 수 있는 틀을 벗어난다. 틀로부터의 자유는 작가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바람이다. 사진에는 그러한 바람에 대답하는 의외의 장면들이 있었다. 집이라는 소우주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는 아이는 예술가의 원형이다. 부모를 닮아서 분신 같은 느낌이 강한 아이의 모습은 놀이와 예술의 직접적 관계를 알려준다. 예술은 성인이 되어 이러한 원형적 조건을 되찾아 노는 방식이다. 다른 동물에 비해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오랜 보호 기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는 족속은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는데, 놀이와 협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놀이가 있어야 문명이 있고’(로제 카이와), 협동이 있어야 사회가 있다. 그 모두는 유연함을 전제로 한다. 유연함은 아이의 특징이다.




Day-20170804_Digital C-Print_29.7x21cm_2017(이 사진은 작가가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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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클라이브 브롬홀은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에서 인간의 독특한 해부학적 특징들은 유인원 태아의 특징이라고 분석하면서, 인간을 영원한 어린아이로 간주한 바 있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아이의 레고 블록을 이용하여 전시장 바닥에서 천장까지 연결된 탑을 쌓아 올렸으며, 아이의 공룡 인형으로 그림자 극장을 연출했다. 아이의 놀이 세계가 밝고 수평적이라면 어른의 놀이 세계는 다소간 어둡고 수직적이다. 어른은 아이처럼 놀이하지만, 놀이의 조건 또한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유지하거나 향상하는 것은 어른인 자신의 몫이다. 레고 블록으로 만든 작품 [공든 탑]은 조그만 충격에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준다. 자유로운 놀이의 세계는 보호(지속)되었으면 하는 조건에 대한 염려가 담겨있다. 자신이 낳은 것을 키워 세상과 만나는 자율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예술과 육아는 다를 바 없다. 


작품 [그림자놀이-공룡의 세계]는 개인의 역사를 넘어서 진화의 역사까지 소급한다. 지구 상 최상의 포식자였던 공룡이 멸종했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이 생존할 수 있다는 가설도 있지만, 공룡의 세계는 인류의 유년 시대인 것이다. 작가는 버려진 조명용 원판 위에 올려진 공룡들과 식물 모형이 센서와 모터의 작동에 의해 돌아가면서 격세유전(隔世遺傳)적인 놀이의 세계를 펼친다. 이전 작업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성적인 긴장감과 종교적 분위기가 어우러진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때 성(聖)과 성(性)은 ‘금기와 그 위반에 관련된 열락의 세계’(조르쥬 바타이유)와 관련되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계는 반복적이지만 동시에 차이도 있다. 저편의 벽에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의 움직임은 어린 시절의 경이로움이 기괴함으로 전치되어있는 것이다. 경이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함이 포함되어 있다면, 기괴함에는 불안이 포함되어 있다. 





Day-20170917_Digital C-Print_42x30.5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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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저편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저편에 아무것도 없다는 의혹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배반의 역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쓰는 자이다. 색색의 블록으로 쌓은 탑이 무너짐을 걱정하듯, ‘익숙한 일상의 이면인 기괴함’(프로이트)이 가득하다. 작품 [믿음의 도리-가족사진]에서 각 작품에 흩어져 있던 가족의 구성원들이 전모를 드러낸다. 부모를 쏙 빼닮은 아이들과 함께한 장면에는 가족 구성원의 유대감과 행복에 대한 기대가 반짝인다. 떡과 과일, 케이크가 가득 놓인 상, 그리고 황금색 커튼이 드리워진 것 같은 휘황찬란한 실내의 벽은 가족의 행복을 지켜줄 조건 중의 하나인 물질적 풍요와 그 기대를 한 가득 표현한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만 한 것이 없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가진 돈이 충분한지 의심해 봐야 한다’는 등, 인터넷 유머 란에 회자되는 언명들은 나름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 


황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벽지 배경은 풍요로운 상차림 앞의 가족들의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이미지이다. 번질거리는 벽지는 키치적 느낌을 물씬 풍긴다. 아브라함 몰르는 키치가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서구형 사회가 공유하는 현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키치는 행복의 예술이고 여기에 키치의 압도적인 보편성이 있다. 기념사진에 기초한 이 그림은 가족 기념일의 전형적인 상황을 보여주며, 그러한 전형성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심지어는 더 강조한다. 싸구려 벽지로 재현된 성스러운 빛은 가족의 안녕을 위한 기복 신앙에 가까운 의식을 표현한다. 거기에는 작가 말대로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유화물감 보다 조명에 더욱 강하게 반응하는 벽지는 동서고금의 종교가 활용하는 빛을 최대한 머금고 있다. 태양에 의존해 사는 지구적 삶에서 빛은 풍요의 원천이다. 무한정한 풍요에 대한 기대치로부터 성스러움이 파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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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에 도달하는 방식은 각 사회마다 비밀에 싸여 있기에 초월적이었다. 성스러움은 정기적인 의례를 통해 재현된다. 근대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사조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예술은 의례의 어떤 측면을 이어받았다. 이때 예술가는 성과 속의 매개자, 즉 사제나 샤먼이 된다. 의례란 ‘성스럽다고 생각되는 최초의 순간’(엘리아데)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 성스러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니면 인류의 오래된 상상력 속에 쌓여 구조화된 것인지는 학파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것은 종교의 기원과도 관련되는 민감한 문제이다. 그러나 최초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든 아니든,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진다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가령 많은 사회가 채택하는 대표적인 신화는 희생양의 신화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인류 사회의 시작에 범죄가 있었다고 본다. 이 범죄에 대한 합법성의 범위는 현대사회에서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종교가 단순히 제도가 아니라 무의식이라면, 종교는 아직도 현존한다. 


작품 [믿음의 도리-가족사진]은 재현주의에 충실하다. 그것은 의례의 재현과 회화적 재현의 동형성을 깨닫게 한다. 미술사에서 콜라주, 가령 1910년대 피카소와 브라크가 시도한 파피에 콜레(Papier Colle)는 화면의 평면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원근감에 기반하는 재현주의를 전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조현익의 작품에서 벽지처럼 정교하게 붙여진 콜라주는 재현주의의 연장이다. 금색으로 황금을 재현하듯이, 벽지로 벽지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 전시에서 아이들의 놀이나 놀이의 방식을 전용한 작품은 재현과 거리가 있지만, 회화 작품은 재현에 충실하다. 그는 주제, 또는 태도에 의해 양식을 선택한다. 단지 그림을 잘 그린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건물의 벽감(niche)처럼, 움푹 들어간 어두운 공간에 단독으로 건 작품 [믿음의 도리-탄생]은 회색빛 어둠을 가르는 굵은 빛줄기가 아이와 엄마를 비춘다. 광원은 생략되어 있다. 




그림자놀이-공룡의 세계_공룡장난감, 모터, 전선, 센서, 조명장치, 나무, 벽지, 전등 커버_가변크기_2017



위에서 홀연히 비추는 빛이 어두운 공간에 작은 문을 낸다. 전시실의 조명이 그림 속 빛줄기를 강하게 비추기 때문에, 단순히 벽에 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조명과 결합된 설치작품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을 당시의 신비로움과 앞으로의 역경을 빛과 어둠의 화면 속 대비를 통해 극명히 드러낸다’고 말한다. 어둠을 가르는 빛은 창조, 즉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탄생하는 서사에 보편적이다. 어둠 속으로부터의 빛의 창조는 신학적 비유이기도 한데, 작가는 모녀 상을 바로 그 위치에 놓았다. 그것은 마치 성모자상—여기서는 여자아이—같은 아우라를 가진다. 작가는 이 아우라를 위해서 이 작품에는 어떤 기계 복제물도 사용되지 않았다.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벤야민)에서 아우라는 소멸될 위기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품은 사진을 보고 그린것이 지만, 바르트가 지적했듯이 초상 사진에는 그래도 아우라가 여전히 남아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라는 그 오래된 시각적 전통에는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성만큼이나 강력한 시각적 이데올로기이다. 특히 ‘모성’의 ‘신비’에 의해 손해를 많이 본 여성 측의 비판이 거셌다. 모성이나 신비는 그 자체로는 나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공적/사적 영역으로 분리되고 이러한 분리가 권력의 차이로 연동되는 사회에서, 모성과 신비의 담당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때 모성이나 신비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이 전시는 그 무대를 가정에 더욱 국한했을 뿐이지, 종교나 정치를 비롯한 이데올로기를 대상으로 한 작년의 [믿음의 도리]전에 이은 전시로서 가족을 둘러싼 종교적 관념,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성역할 고정관념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시각적 관례 이데올로기임을 밝히는 것인가. 그 경계는 늘 모호하다. 그러나 조현익의 모녀 상에는 그러한 재현적 전통을 교란하는 틈이 있다. 




조현익_믿음의 도리-탄생_캔버스에 유채_193.9×112.1cm_2017



공든 탑_메가블럭_가변크기_2017



이 전시의 대표작으로 포스터의 표지로 삼기도 한 이 작품 속 검은 의상을 입은 여성의 분위기는 매우 강하다는 점이 그것이다. 작품 속 여성은 자신이 안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마치 여전사와도 같은 풍모를 가졌다. 여성은 약하지만, 여성/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두 아이와 남편이 함께한 작품 [믿음의 도리-가족사진]에서는 아이 셋의 보호자 같은 면모도 있다. 그녀가 작가—[믿음의 도리-탄생]은 여주인공의 개인전 때 우연히 포착된 장면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이자 여성이자 어머니라면 더더욱 강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전자는 강하다. 다윈을 비롯한 진화론자들은 모든 역경을 딛고 지속되려는 유전자의 책략--'행복은 생존의 기회이다'(리처드 도킨스)--을 강조하기도 한다. 어머니를 닮은 아이의 모습은 생물학적 분신처럼 세대를 이어갈 것이다. 공적 영역과 구별된 사적 영역에서의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육아 활동에  남성-작가가 함께 참여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는 [Day] 시리즈는 대체로 여성/모성에 대한 착취적 입장과는 거리를 둔다. 


조현익의 작품에서 육아의 공간을 비롯한 사적 영역은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된다. 사적인 것은 전시회라는 공적인 영역으로 이동한다.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여성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남성도 억압하는 공적/사적 영역의 경계를 와해시키려 했다. 그런데 시장 중심의 사회 또한 그러한 경계를 허물고 있다.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적 이데올로기는 공존한다. 반영이든 풍자든 비판이든, ‘믿음의 도리’라는 이데올로기적 뉘앙스가 강한 이 전시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상품들의 목록이 혼성적 현실을 반영한다. 조현익의 작품이 종교적이라면 그것은 일신론이 아니라, 다신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적 측면은 특정 종교라기보다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공간을 대할 때 취할 수밖에 없는 어떤 근본적 태도와 관련된다. 그에게 예술 또한 그러한 무한의 영역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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