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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 / 생성과 소멸이 서로의 조건인 세계

이선영

생성과 소멸이 서로의 조건인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신민주의 최근 작품에 공통적으로 붙여진 제목 ‘uncertain emptiness’는 두 개의 부정적 단어로 이루어진다. 그 뒤에 붙은 다섯 자리나 되는 일련번호는 두 부정어법이 무한정 펼쳐질 수 있음을 예시하는 듯하다. 누구보다도 작업에 열정적인 작가의 작품 제목치고는 역설적이다. 그러나 역설이 바로 현실이다. 단어의 한켠에 내재한 불확실성이나 공허함 등은 과장이나 환상이기 보다는, 현실로 여겨지는 것이다. 불확실한 것만이 확실하다는 역설은 확실성의 첨병인 수학이나 물리학 등에서도 회자되곤 한다. 그것은 체계의 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불확실성 또한 확대되는 현실과도 맞아 떨어진다. 전시된 작품 뿐 아니라, 연희동 작업실 한켠에 쌓인 수많은 작품들은 그때그때 꽂힌 영감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례이다. 그것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작은 기념비들이다. 그것들은 대부분 완성된 작품이지만, 언제든지 다른 맥락 또는 대화의 장으로 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열려있다. 




uncertain emptiness17061 acryic on canvas 50x50cm 2017 (71)



작가가 선호하는 캔버스의 크기는 150호이다. 손이나 팔정도가 아니라 몸이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크기다. 그 크기라면 그려진 그림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이전과 달리 요즘은 그림 내부만이 아니라 바깥에서 거리를 두고 보고자 한다. 정확히는 들락날락 한다. 본 작업은 아크릴 물감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진행하고, 물감이 말라야 그 다음 작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적 간격이 필요하다. 그러한 방식은 공간적인 간격이 있는 작품을 낳았다. 이전 층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층이 나오므로, 어느 층도 완전히 부정되는 일은 없다.  그 다음날 어제 그린 화면이 어떤 얼굴로 작가를 맞이할지는 늘 상 불확실하다. 마치 타자와의 관계처럼, 작품과의 거듭되는 대화가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uncertain emptiness’, 불확실하고 공허해도 일단 가고 보는 것, 가다보니 불확실성이 불확실해지고 공허함이 공허해지는 역변의 장이 생성된다. 


더한 불확실성으로 불확실성을, 더한 공허함으로 공허함을 상대화시키는 작업은 동종 요법의 성과이다. 불확실성이든 공허함이든, 그 표현이 무한한 유희로 펼쳐질 수 있음은 긍정적이다. 예술의 긍정적 측면은 승화보다는 거듭된 퇴행을 통해 원초적 시공간으로 회귀에 있다. 즉 다시 세팅하기(reset)이다. 그러나 완전한 원점으로의 복귀는 아니다. 이때 예술은 풍요로운 삶의 잉여가 아니라, 결핍된 삶에서 요구되는 필연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은 삶의 씁쓸한 진실을 그저 반영(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영은 재확인에 불과하다. 그런 예술은 가혹하거나 진부한 인생을 가혹하거나 진부하게 반영할 따름이다. 재확인에 머무는 예술이 기만과 환멸로 가는 길은 가깝다. 가혹하거나 진부한 현실은 예술이 혁명과 관계된다는 사상도 우습게 만들었다. 현대예술이 근대사회의 분업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래, 그들만의 게임 속에 안주해버렸다. 그러나 소수를 위한 제도 바깥, 또는 경계에서 선 또 다른 예술가 군이 있다. 




uncertain emptiness17015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2)



uncertain emptiness17034 acryic on canvas 162x227cm 2017 (26)



그들은 매 순간 작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고자 한다. 작가는 그러한 자문자답에 대한 극단적인 실행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의 질문으로 만든다. 그것이 자신의 내밀한 산물인 예술이 사회와 내통하는 길이다. 신민주의 작품에서 위로와 다독임, 달콤한 사탕발림과 과대 포장 된 관념 등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일상적 용법에서 불확실함은 확실함의, 공허함은 충만함과 대조된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 배경과 형상, 바닥과 표면, 융기와 흘러내림, 해체와 구축 등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작품들은 불확실한 공허함이 확실한 충만감의 이면임을 말한다. 표면과 이면은 서로의 조건이 된다. 강력하지만 유동적인 작품에서 두 가지 대조 항은 뫼비우스 띠처럼 자리를 바꾼다. 차이를 통한 연결이 반드시 부드럽지만은 않다. 색조는 오래된 사물처럼 차분하지만, 강력한 움직임이 있는 화면은 정갈하게 가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지고 휘저어진다. 


여러 층의 상호 간섭작용이 활발한 작품에서는 두 가지 대조 항 그자체가 아니라, 그 둘의 관계가 중요하다. 작가에게 당면한 두 가지 중요한 국면이 삶과 예술이라면, (불)확실함, 그리고 공허와 충만은 그 국면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삶 그자체가 충만하거나 확실하다면 예술은 불필요하다. 이상주의자의 사회적 프로그램에서 예술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해 이상은 위대하거나 초라하다. 의지와 열정, 재능의 기회의 산물인 작업의 지속은 그자체로는 불확실하거나 공허하지는 않다. 그러나 예술은 삶의 이면으로서 불확실성과 공허함을 공유한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쓸려가는 이미지는 삶이 그러한 것보다 더 강하게 밀어붙여진다. 시간차를 두고 쌓은 것들을 허물어버리는 방식은 삶의 진실을 압축한다. 쌓음과 허묾은 순식간에 일어나며, 많은 작품들에 단호하고도 속도감 있는 붓질이 그대로 남아있다. 




uncertain emptiness17008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13)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한 거듭된 시도에서 요구되는 것은 대담함이다. 작품에 관한한 버려야 얻는다는 생각이다. 그리기만큼이나 지우기를 통한 그리기가 횡행하는 작품은 이미지가 불확실하지만, 연상은 된다. 인간이라는 심리적 동물은 어떤 희미한 얼룩에서도 형상을 찾아내곤 한다. 작품 [uncertain emptiness 17015-이하 뒤의 번호만 표기함](2017)에서는 뭔가 가득한 짐을 지고 있는 듯한 가느다란 다리가 연상된다. 명암이 교차하는 붓질이 만들어내는 동감은 균형을 잡는데 더욱 부담을 줄 것이다. 아래의 잘록한 부분이 마치 사람의 목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 [17034](2017)에서 얼굴은 사정없이 지워지는 중이다. 관객은 이 작품에서 얼굴을 지우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하면 된다. 뭔가 탁 풀려있기 때문에 야기되는 카타르시스, 그리고 뭔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야기되는 스트레스를 동시에 주는 붓질이 연속적인 가운데, 최근의 변화는 색의 적극적인 도입이다. 


작가는 3-4년 전에 집중했던 [블랙 & 화이트] 시리즈에서 블랙과 화이트 사이에서 모든 색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근래에 색에 대한 욕구가 다시 생겼다. 작품 [17008](2017)에서는 어두운 바탕에 빨강, 노랑 계열의 색채도 등장한다. 화면 우측 하단에 보이는 흑백 이미지는 이전의 [블랙 & 화이트] 시리즈의 화면이 깔려 있어서, 색이 덧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추가되었다기보다는, 흑/백의 계열에 잠재되어 있던 색이 현실화된 것이다. 최근 구사되는 색감에도 명암 대조가 있다. 여러 층이 복합된 화면은 회화를 지탱하는 물리적 골격이 드러날 정도의 강한 밀어내기의 결과이다. 중층적인 표면의 상당부분은 스퀴즈로 밀어내는 작업에서 나온 것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갈아엎는다’는 표현을 한다. 갈아엎기는 회화라는 대지에 씨를 뿌리는 행위를 떠올린다. 또한 시원찮은 것들은 밑거름이 되기 위해 갈아엎어져야 한다. 




uncertain emptiness15070 acryic on canvas 97x130cm 2015 (57)



uncertain emptiness15085 acryic on canvas 41x53cm 2015 (75)



uncertain emptiness15088 acryic on canvas 41x53cm 2015 (73) (1)



uncertain emptiness15088 acryic on canvas 41x53cm 2015 (73)



갈아엎은 흔적의 연속, 즉 물감이 그리면 스퀴즈는 지우는 식의 작업은 여러 겹 그 흔적이 쌓이면서 화면의 밀도를 높여 나간다. 어두운 화면에서 불타오르는 색은 흑백 계열의 작품에 내재된 빛과 어둠의 대조를 연상시킨다. 작품 [15070](2015)에서 캔버스 올이 드러날 정도로 긁어낸 화면은 밝은 빛으로, 그 위(또는 아래를)를 휙 지나가는 듯한 어두운 형태로 보인다. 스퀴즈 작업에서는 온몸을 실어 확 긁어내기 때문에 속도감이 있다. 그림자 또는 유령처럼 보이는 형태는 사라짐 또는 출현의 흔적, 또는 기척이다. 작품 [15085](2015)에서 방향을 확 틀어버린 자국이, 작품 [15084](2015)에서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희끄무레한 형태가 발견된다. 이러한 유령적 형상은 갈색(번트엄버라이트) 바탕 면에서 수시로 출몰한다. 긁어낸 흔적이 있는 작품에서 심연은 수직적일 뿐 아니라 수평적이다. 심연은 중력의 방향을 향하기도 하고 화면 저편을 향하기도 한다. 


회화의 바닥과 심연이 만나 조화를 이룬다. 붓 이외의 도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가는 선은 역설적으로 빛과 어둠을 뒤섞으며 휘몰아치는 붓질을 더욱 강조한다. 신민주의 작품에는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 항해하는 듯한 위험하고도 막막한 느낌이 있다. 출발과 종점이 분명치 않은 항해에서 길을 잃거나 익사하지 않으려면 그림이 나아가는 흐름에 몸을 실어야 할 것이다. 필연과 우연, 의식과 무의식이 총동원되는 작업은 주체 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시작하지만 나로 귀결될 수 없는 작업이다. 단지 나를 통과해서 나오는 작업이다. 현실의 나는 그 상태를 지키고 지속하는 역할만 맡으면 될 것이다. 그래도 불확실한 항해의 키는 작가가 잡고 있다. 밀고 밀리는 물의 운동처럼 회화는 매번 갱신되는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연다. 작품 [16091](2016)은 빛과 어둠을 품은 액체, 또는 바닷물을 수직으로 세운 듯하다. 거기에는 수평적인 것이 깍아 세워질 때의 아찔함이 있다. 




uncertain emptiness16091 acryic on canvas 130x162cm 2016 (61)



uncertain emptiness16094 acryic on canvas 130x162cm 2016 (63)



uncertain emptiness17025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18)



작가는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회화에 대해 ‘평면이지만 무한대의 깊이를 가진 바다’와 비유한다. 회화에서 현실에서는 은폐되어 있는 실재를 예감한다. 이러한 바다의 표면에서 항해하는 법은 무한할 것이다. 삶과 관련되어 회화는 ‘그 사람의 기질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을 살면서 그럴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이 지금도 회화가 존재해야 하는 명쾌한 이유이다. 흑과 백이 뒤섞인 카오스의 작품 [17025](2017)에서 생겨나는 것은 무엇이고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생성과 소멸이 서로의 조건인 세계에서 그 차이를 묻는 것은 바보 같을 것이다. 캔버스에 얹힌 물감의 긁힌 흔적이 마치 껍질 벗겨진 피하조직처럼 점점이 드러나는 작품 [17061](2017)에서 여러 겹을 이룬 층과 층 사이의 대화는 매우 빠르고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낚시꾼처럼 꾸준히 기다리다 보면 대어가 낚일 기회는 있다. 배경이 있는 작품은 전경의 형태를 강조하는 중성적인 배경, 가령 블루 스크린 같은 역할을 한다. 


최근 작품에서 도입된 색은 배경을 다채롭게 한다. 전경에서 진행되는 사건은 비슷하다. 화면 하단의 지반은 불확실한 작품들은 대체로 무너지는 모습이 연상된다. 화면 곳곳에는 에어포켓—침몰되는 배에서 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아 형성된 공기층—처럼 무너짐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공간들이 있다. 표면이 이면인 작품에서 형식은 내용이다. 중력의 방향을 은근하게 지시하는 흘러내림부터 과격하게 무너지는 형태에는 어떤 정서가 깔려 있다. 작가는 ‘고통과 슬픔 같은 정서가 친숙하다’고 말한다. 작품은 주체의 욕망이 분출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 속에서 욕망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욕망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 들 간의 관계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삶에는 우호적 관계 보다는 갈등의 관계가 더 빈번하다. 최근의 작품들에는 전경의 형태들이 무너지고 배경색은 다른 것들이 많이 보인다. 넓은 평 붓 자국은 면 같은 효과를 내면서 겹겹이 쌓이면 구축적인 느낌을 준다. 




uncertain emptiness17002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17)



uncertain emptiness17004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15)



그러나 균형의 순간은 길지 않다. 곧 또 다른 균형을 위한 움직임으로 돌입한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가느다란 선들은 구축과 해체를 구별할 수 없는 얽힌 덩어리들을 위태롭게 지탱한다. 그것은 스퀴즈에 묻은 물감으로 도장 찍듯이 찍은 선들이다. 화면 속에는 보다 견고한 선, 가령 캔버스를 물리적으로 지탱하는 버팀목이 스퀴즈 작업을 통해 드러난다. 구축과 해체라는 방식에 내재된 건축적 은유에 의한다면, 가는 선들이 철근이라면 굵은 선(면)은 기둥에 해당된다. 겹겹의 층위에서 조형적 원근법이 생겨난다. 이는 배경이 있는 작품에서는 더욱 확실하다. 그만큼 많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구축했음을 말한다. 무너지는 것과 구축되는 것이 구별됨 없이 얽혀있는 작품은 건축—작가는 피터 줌토르(Peter Zumthor)의 건축을 예로 든다—을 포함하는 오래된 풍경을 떠올린다. 색감과 연결 짓자면, ‘녹슨 쇠나 손 때 탄 나무들’, ‘자연에 가깝게 풍화된 것들’이다. 


신민주의 작품에는 이성이나 현실의 확실성을 신봉한 고전주의자나 사실주의에 맞서서, 불확실함과 공허함을 사랑했던 낭만주의자들처럼 폐허에 대한 선호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무한을 앞세워 상대편의 유한을 비판했다. 21세기의 낭만주의에서 아름다운 폐허는 좀 더 차갑고 황량하다. 폐허는 여러 층의 시공간이 겹쳐진 것이다. 무엇인가 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흔적을 남기고, 그 위에 무엇인가 다시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작가는 본 작업을 거의 한 시간 이내에 끝낼 만큼 속전속결로 진행하지만, 일필휘지(一筆揮之) 식으로 작업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차를 두고 계속 대화하는 과정은 거듭해서 쓴 양피지(palimpsest)같은 효과를 준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적 충동]에서 이러한 중층적 텍스트를 포스트모던한 작품의 특징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러한 중층적 텍스트는 몸통이 아닌 단편만 남아있는 유적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uncertain emptiness17006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14)



uncertain emptiness17011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7)



그에 의하면 유적은 ‘돌이킬 수 없는 해체와 부식의 과정으로서의, 기원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져가는 것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신민주의 작품을 유적과 비교하는 것은 작가가 영감을 받았다는 건축에 한정되지 않는다. 화면에서 건축적 구조를 연상시키는 기둥 같은 요소는 회화의 표면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이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피부나 살처럼 무엇인가 쌓인 표면을 강하게 밀어내는 행위는 회화의 표면과 뼈대를 드러나게 한다. 캔버스의 올과 나무 지지대의 흔적이 여러 작품에서 나타난다. 현대의 화가에게 오래된 역사를 가지는 회화 또한 폐허에 다름없다. 회화는 원점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유산으로부터, 또는 그 유산이 파괴된 흔적으로부터 다시 시작될 뿐이다. 이렇게 진행되는 역사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상징이 아니라,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지는 알레고리에 가깝지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크레이그 오웬스에 의하면 알레고리의 충동에 빠진 작가는 이미 잊혀 졌거나 불분명하게 된 원래 의미를 복원시키지 않는다. 


그는 상실되거나 마멸될 수 있는 원래의 의미를 보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이미지에다 또 다른 의미를 덧붙인다. 신민주의 작품에서 이전의 흔적과 이후의 흔적은 파편들로 만난다. 대상의 파편이 아니라 붓질의 파편이다. 이러한 파편들이 집합된 작품은 매끈하고 산뜻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야생적인 그림은 음식으로 친다면 먹기가 힘들다. ‘요리(문명)보다는 날 것(자연)’(레비 스트로스)에 더 가깝다. 지시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호는 다시 기표와 기의로 분리되어 여러 갈래의 흐름을 탄다. 긁기 흘리기 그리기 등이 복합된 화면은 연속해서 분리된 기표들의 패가 수시로 재편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놀이적 속성을 띈다. 아무도 없는 폐허에서 이전의 흔적들을 가지고 홀로 노는 것이다. 구축과 해체를 거듭하는 화면은 ‘차이와 연기’(차연diffèrance, 데리다)를 특징으로 하는 무한한 놀이의 장이 된다. 




uncertain emptiness17014 acryic on canvas 182x227cm 2017 (3)



조셉 칠더즈와 게리 헨치가 편집한  [비평 용어 사전]에 의하면, 데리다의 어휘에서 ‘차연’은 불확정성과 관련된다. 편집자들은 ‘텍스트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결정되어있거나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의미작용의 연쇄 속에서 차연의 놀이에 따른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인용한다. 언어이든 조형언어이든 의미 가능성은 언제나 지연된다. 데리다에게 영향을 준 현대 언어학은 ‘기호의 체계는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그 요소들의 충만함에 의해 구성되지는 않는다’(소쉬르)고 본다. 확실성이 아닌 불확실성, 충만함이 아닌 공허함은 언어를 비롯한 모든 ‘차이적 관계의 놀이’(데리다)에 내재해 있다. 마이클 라이언은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이 모든 사물들과 의미들의 근원적인 상태를 자기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적 관계라고 본다고 해설한다. 그에 의하면 해체론은 항상 자기 자신만으로는 결핍된 상태에 있으며, 보충을 필요로 한다. 여러 겹 덧쓰여진 양피지같은 텍스트는 ‘차이적인 그물망, 즉 끝없이 자기가 아닌 어떤 것, 다른 차이적 흔적들과 참조관계를 맺는 흔적들의 직조물’(마이크 라이언)이다. 


신민주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흔적들은 이러한 차이적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밀고 밀리는 파도는 그 적절한 비유가 된다. 그림의 몸통(동일성)은 차이의 흔적으로 이루어진다. 작가는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지만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유령처럼 경계를 넘어 출몰한다. 흔적들은 데리다의 어법에서 ‘말소 기호 아래’ 놓인 기호들인 셈이다. 앞서 인용한 [비평 용어 사전]에 의하면, 데리다가 어떤 기호를 ‘말소기호 아래’ 놓을 때, 그는 하나의 의미, 진리, 혹은 기원의 부재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흔적을 남기는 지우기, 또는 깍아내기에서 은폐되거나 망각된 존재나 의미는 복원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진리나 의미가 아니라 흔적일 뿐이다. 흔적의 연속인 신민주의 작품에는 확실성 대신에 끝없는 계열이 자리한다. 표면과 이면의 역동적인 자리바꿈이 편재한 작품에는 불확실성에 대한 매혹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작업만큼은 확실하게 하겠다는 태도의 이면이다.  

 

출전; PKM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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