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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 삶 속에 도입된 반복

이선영

삶 속에 도입된 반복

  

이선영(미술평론가)

  

윤성호는 ‘발견의 여정’ 전이 열리는 전시장 한 켠을 가벽으로 막아 직사각형 공간을 한 작품으로 꾸몄다. [NC-0012017]이라는 암호 같은 제목을 가진 그의 작품은 전시장 끄트머리에 있어서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그곳으로 관객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일종의 무대처럼 연출된 공간이다. 일정한 형태와 크기, 색채로 이루어진 단위 구조들이 엇겨서 배치되어 있어, 무대 저편으로의 운동감이 발생한다. 비슷한 형태의 반복과 차이는 조형예술에서 움직임의 환영을 주는 요소였다. 그러한 메커니즘에서 영화도 애니매이션도 탄생했을 것이다. 육면체는 6개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공간에 따라 갯수는 더 늘어날 수도 있는 열린 작품이다. 그것들은 마치 울퉁불퉁 거친 길을 뚫고 지나간 자동차 타이어 자국을 양각화 한 것 같이도 보인다. 또는 그러한 타이어가 장착된 자동차를 타고 스쳐지나갔을 줄 지어 나열된 건물로도 보인다. 




NC-0012017, 2017년작, 75cmx 8cm x25cm(가변설치), 도자, 기와



NC-0012017(부분)


바닥에는 낡은 기와 파편들도 깔려 있는데, 전경에는 잘게 부서진 것들을 후경에는 비교적 원형이 보존된 것을 깔아 놓아 전후간의 시간적 흐름을 반영한다. 도기(기와)와 자기(육면체) 간의 시대적 격차도 있다. 윤성호의 작품에서 시간성에 대한 암시는 중층적이다. 기와는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사용된 물건이었으며, 어쩌다가 예술작품으로 흘러든 사물이다. 기와같이 대량적으로 생산된 물건은 일상성과 현대성에 관심을 가져왔던 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그는 ‘일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인공구조물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인공구조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기하학적 재배치를 통하여 그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미를 찾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공구조물은 누군가의 창안이기도 하기 때문에, 범용화 된 구조물 가령 ‘골목의 계단, 맨홀 뚜껑, 전봇대, 신호등, 철길 등’이 그 대상이 된다. 


그러한 대상들 중의 하나였을 기와는 종축(공간상의 전후, 그리고 지붕에 있던 것을 바닥에 배치했다는 점에서는 상하)과 횡축(시간상의 앞뒤)으로 시공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사물이 되었다. 중국에서 실제 사용되었다는 낡은 기와는 얼마 전에 직접 만든 육면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의 분류법에 따르자면, 익명의 도공에 의해 만들어진 오래된 기와는 사물이고, 작가가 막 만든 육면체는 예술작품이다. 그러나 윤성호의 작품에서 무심한 계열의 속성을 띄고 있는 육면체의 나열 또한 사물에 가깝게 연출되어 있다. 육면체들은 익명의 도공이 만들었을 기와의 방식처럼 나열되었다. 그는 시공간의 단편을 전시장의 한 켠에 연출해 놓았지만, 그것을 확장한다면 기와는 더 잘게 부수어져 먼지가 될 것이며, 그 옆의 육면체들도 기와의 운명을 따르게 될 것이다.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증가하게 되어 있다. 






NC-0012017(부분)



기와는 900-1100도에서 구워지는 도기이고, 육면체는 1100-1300도에서 구워지는 자기여서 파괴와 마모의 속도는 다르겠지만, 종국적으로 우주의 먼지가 되는 공통의 운명을 가진다. 이 작품에서 기와는 전통 및 자연에 더 가깝고, 육면체는 현대 및 문명에 더욱 가깝다. 12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된 자기는  토기로부터 시작된 장구한 기술적 진화의 산물이다. 자기 기술의 발달은 무엇인가를 담고 저장하는 기구에 견고성과 예술성을 더할 수 있었다. 동양은 서양처럼 발명이나 발견을 사회적 생산력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였을 따름이다. 작가가 1만 2천년 전에 최초로 발명된 토기와 12세기에 발명된 자기를 대면시킨 것은, 흙이라는 원초적인 재료로 만들어진다는 점은 같지만 도예사 및 과학사에서 질적인 도약의 지점을 의식하는 것이다. 기와와 육면체가 상대적으로 제시된 만큼, 인간의 역사는 자연사에 포함된다. 


운전하면서 터널을 통과했던 경험이 반영된 이 작품은 시공간을 통과하는 인간의 육체 또한 포함한다. 매우 위험한 행동이지만, 터널을 걸어서 통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처럼 차를 타고 간다면 서서히, 또는 빠르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다가오는 광경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작가는 이동 속도나 위치에 따라 다가오는 터널 내의 차선이나 조명시설, 안전시설 같은 인공구조물에 대한 인상을 작품에 반영했다. 그 구조물들은 미니멀리스트들의 체험처럼, 반드시 예술작품이 아니어도 강렬한 느낌을 주는 사물들의 계열에 속한다. 다가오면서 멀어지는 시간을 암시하는 추상적 공간은 일정한 단위구조의 배열을 통해 이루어진다. 작가는 이를 통해 정지를 동감으로, 환원을 확장으로 변형시켰다. 단위 구조를 통한 설치작품으로의 확장은 현대적 공간에 대한 작가의 애호와 맞물린다. 그의 이전 작품 목록을 보면, 건물과 도시 풍경을 찍은 사진과 그 앞의 작품이 세트를 이룬 것이 있다. 




(참고작품 )702-M, 도자, 20x24x75cm(가변설치), 2013



(참고작품) 704-M, 도자, 20x24x75cm(가변설치), 2013



작품에 앞서 공간을 먼저 면밀하게 연구하는 이에게 작품은 그것이 놓이는 공간의 내재율을 어떤 식으로든 반복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곳에 놓인 작품을 통해 건물을 포함한 공간 또한 변화될 것이다. 근대 건축이 고전적 건축에도 내재해 있었던 모듈의 방식을 산업적 생산과 결합시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양식을 만들었듯이, 단순하면서도 압축적인 상징을 가진 단위구조의 배열은 건축의 안팎과 잘 어울린다. 그의 많은 작품이 근대 건축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모더니즘 또한 나이를 먹으며 새로움은 낯익음이 된다. 이전의 낡은 장식을 걷어내고 약진한 근대 건축 또한 변화의 기로에 놓인다. 대규모 재개발 아파트 단지에서 명확하듯이, 어떤 것은 곧 사라질 늙은 몸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콘크리트 숲에서 태어난 세대에게 그것들은 인공만큼이나 자연으로 나타난다. 지난 세기 말에야 보편화되기 시작한 인터넷이 ‘디지털 생태계’로 불리우듯 말이다. 


그것들은 주체 이전에 자리한 상징적 우주이다. 근대건축은 그것들이 무너뜨린 이전시대의 건축보다 더 빠른 주기로 사라질 것이다. 죽 늘어선 사각형 건물을 통과할 때, 시간성이 감지된다. 윤성호가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염두에 둔 터널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조건을 더욱 강하게 압축한 것이다. 목표지점에 보다 빠르게 도달하기 위해 도로는 방해가 되는 자연적 조건을 극복해야 했는데, 터널이 대표적이다. 그러한 인공 구조물은 잠수함이나 비행기처럼 한 치의 오류도 없을 것을 요구받는다. 당대 최고 공법이 적용되어 건설되곤 하는 터널은 일종의 실험적 공간(그리고 시간)이다. 윤성호의 작품에서 육면체라는 단순한 형태의 다소간 기계적인 나열의 방식은 미니멀리즘의 방식을 떠올린다.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에 기초한 구성 대신에, ‘동일하고 상호교환이 가능한 기본 단위들의 단순한 정렬들로 이루어진 집합’(도널드 져드)이다. 




(참고작품) K2012, 도자, 20x24x75cm(가변설치), 2012



거기에는 ‘접착이나 이음새, 기초나 받침대조차도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조각은 끝이 없는 사슬처럼 반복적인 방식으로 배치’되어 ‘반복과 연속이라는 보다 예측하기 쉬운 요소들에 의존’(도널드 져드)한다. 미니멀리즘의 ‘차이와 반복의 미학’(핼 포스터)은 ‘시뮬라크라의 재생산’(로잘린드 크라우스)과도 비교된다. 작가는 자신이 고안해 만든 것들을 어디선가 대량생산된 것처럼 배열함으로서 현대 사회에서 상품과 예술, 사물 등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터널을 통과하는 경험은 그러한 대상들이 총체적인 환경을 이룬 상태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쇼핑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 창문하나 없는 백화점 같은 장소나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기를 제안하는 테마파크, 깊이 잠들기 위해 필요한 수면의 조건, 또는 최면과도 비슷하다. 삶 속에 반복을 도입하는 것은 죽음과의 적극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가사(假死)상태와 비교될 수 있다.  


시간성 속에 지속하는 미니멀리즘의 작품에 대해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는 ‘꾸며진 무대장치(mis-en-scene)’ 가운데로 들어서게 되는 느낌과 비교한다. 연극의 무대와 같은 장 속에서 지속하는 사물과 몸을 지각하는 것은 탁 트인 공간 속에서 스펙터클하게 펼쳐지곤 하는 현대미술의 주된 방식이 되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구성된 작품의 오밀조밀한 형태와 이야기를 보고 읽는 방식이 아니라, 무대장치로 연출된 장으로 관객을 밀어 넣어 총체적인 체험을 야기하는 방식이다. 체험의 매개물로 무엇을 구조적 단위로 할 것인가에 있어서 윤성호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도자의 기법이 동원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미니멀리즘에서는 공업생산품이 많이 동원되곤 했다. 예술가에 의해 선택된 것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 할지라도 익명적인 대상, 즉 사물이 되었다. 윤성호의 작품에서 사물의 역할을 맡은 것은 깨진 기와조각들이지만, 자기로 된 육면체 또한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참고작품) P-101, 도자, 철, 350x270x60cm(가변설치), 2015



(참고작품) C2012, 도자, 20x24x75cm(가변설치), 2012



(참고작품) P2012, 도자, 225x150x39cm, 2012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인 육면체들은 지속이라는 시간 감각을 제공한다. 그것은 ‘한 순간에 파악되는 자족적인 체험’이 아니라, ‘지각의 일과성(temporality)’(마이클 프리드)이다. 이 작품의 바탕이 되었던 운전자의 관점이 전형적이다. 운전자는 앞에 펼쳐진 광경들을 방해받음 없이, 특히 터널 같은 곳은 어떤 선택도 없이 주어진 궤도를 통과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대상들을 통과하는 체험이 중요할 뿐, 각각의 대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순수한 현재 속에 농축된 미학적 경험이 아니라, 펼쳐진 시간(동시에 공간)의 축 속에 놓인 불확실한 과정이 중시된다. 그리고 그 시공간은 무한히 펼쳐질수록 좋다. 그것은 순간적인 각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몰입(absorption)의 체험을 낳을 것이다. 운전자의 시점을 많이 사용하는 가상현실은 몰입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체험의 예다. 더 이전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반복적 주문(呪文)이나 행위—가령 수피교도의 춤 같은—에 의한 주술적 효과가 그럴 것이다. 미니멀리즘 작가에 의하면 ‘몰입이란 작품의 체험이 시간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도널드 져드)를 말한다. 지속은 무한을 향한다. 


작품은 매개의 역할을 할 뿐, 그 안에 선험적으로 들어있는 미적 가치는 없다. 무엇인가 내부에 온전히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온갖 물신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가령 작가의 영혼이나 이성을 그대로 재현(또는 표현)했다고 간주되는 예술작품에 대한 환상이 그것이다. 소유에 기반 한 이러한 환상은 예술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그러한 환상은 겉으로는 순수하고 고상해 보이지만, 결국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의 판박이이다. 오늘날 (소유적)주체에 대응하는 대표적인 객체는 상품이다. 작품의 안이 아니라 바깥에 중심을 두는 미니멀리즘의 관례는 유아론적 환상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한국에서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의 일부처럼 간주될 뿐, 모더니즘을 넘어서는 국면이 강조되지는 못했다. 포스트(post) 국면에서만 그 이전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 ‘발견의 여정’ 전에서 여정(voyage)에 방점이 찍힌 윤성호의 작품은 ‘passage’--현대조각에 관련된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책에서 강조된--가 키워드인 현대미술과 공명한다. 그의 작품은 공예나 예술이라는 중심을 넘어서 보다 확장된 장(場)의 체험을 향한다. 

  

 출전; 클래이아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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