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전시를 통해 완성되는 작품

이선영

전시를 통해 완성되는 작품

  

이선영(미술평론가)

  

동탄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신진작가 공모전의 작품들은 전시회라는 공적인 기회를 통해 사회와의 긴밀한 접속을 기대하는 젊은이들의 의지와 열정이 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 있어서 기성세대 보다 많은 몫을 가진다. 그 점이 그들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때로 현실과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작품은 고독과 고통의 산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작품들은 자기의 분신이 되어 타자와의 거듭된 만남을 시작할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하루 종일 접속이 되어 있는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예술작품을 통한 접속은 좀 더 내재적이다. 예술작품은 단순한 자기 노출이나 단편적 의견 개진을 넘어서 어떤 현상이 강렬하게 드러날 수 있는 맥락을 구축한다. 물론 시대도 그러한 맥락을 구축할 수 있다. 문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나 대부분 시대와 함께 떠내려간다. 예술은 단순한 시대의 반영과 달리, 그 자체 내에서도 맥락을 구축한다. 그래서 예술은 시대와 더불어 가며, 때로는 모더니스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시대를 앞서갈 수도 있다. 


작가란 그런 맥락을 만들어서 바로 그 작품만을 통해 꺼내질 수 있는 메시지를 가다듬는 자이다. 전시회 또한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작품에 대한 구상이 작업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발표된 작품은 말없이 멀리 갈 수 있다. 소박하게나마 실현된 작품이, 머릿속에만 있는 원대한 구상보다 훌륭하다. 작업에는 어떤 단계들이 있다. 그 단계들은 다른 분야보다는 자유롭게, 그리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통과하지만 말이다. 특히 작가 초창기의 전시는 그 성공 여부와 무관 하게, 그 다음 작업들을 진행시키는 원동력이다.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를 통해 작품은 완성된다. 뭔가 미진한 구석은 작품을 건 이후에야 발견되며, 이러한 불만은 그다음 작업을 위한 에너지가 된다. 전시는 에너지가 한데 모이고 방출되는 계기이며, 작업하는 삶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회화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 전시의 작품들에는 인간, 일상, 도시, 자연에 대한 관심이 두루 발견된다. 미술의 기본인 그리기는 화가의 지각과 기억을 바로 발설하게 해주는 오래되고도 친숙한 언어로 다가온다. 

 

1. 인간과 자연-문세희, 신하정

 

문세희의 [Breath](2013-2017) 시리즈는 수면 안팎에 공간에 걸쳐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물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있는 것도 있고 반만 들어가 있는 것도 있으며, 어떤 것은 몸통이 잠겨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모델에 의거하면, 수면 아래의 것들은 무의식을 상징한다. 수면 아래의 것들은 수면 위의 것들에 영향을 주는 근본적인 동인이다. 대개 수면 아래의 것(무의식)이 무정형적이고 위의 것(의식)은 정형적이지만, 문세희의 경우는 역전돼있다. 바깥이 안쪽 보다 더 무질서하다. 물 안/밖의 경계 면에 있는 사람의 힘든 호흡은 일렁이는 이미지를 생성하는데, 얼굴의 원 형태를 조금 더 간직한 수면 아래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경계를 사이에 둔 이 기묘한 짝 패들은 수면 아래의 인간의 상상처럼 보인다. 그것은 대개 상상이 일어나고 있는 머리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세희_Breath 12_116.8x72.7cm_oil on canvas_2017



문세희_Breath_10_90.9x65.5cm_oil_on_canvas_2016



머리끝에서 몽글거리는 형태들은 말풍선처럼 무엇인가를 말한다. 여러 가지 조합이 실험되고 있는 작품에 의하면, 상상의 계열은 다양하다. 그것들은 꿈결처럼 고요하면서 때로는 머리통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만큼 치명적이다. 만약 그 반대, 즉 물 밖에서 물을 바라본다면 거울과 같은 반영상이 생겨나겠지만, 그 반대의 방향에서 왜곡은 필연적이다. 거울 같은 반영 상에도 왜곡(인간의 상상이든, 물리학적 원인이든)은 있지만, 수면 아래에서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문세희는 수면 안팎의 연결된 이미지를 통해 경계 위의 존재를 그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과정 중의 주체는 위험하다. 그러나 매혹적이다. 신화에서는 괴물이 그러한 존재였다. 수면에 걸쳐 있는 인간은 분류될 수 없는 존재, 분류를 거부하는 존재, 변화 그 자체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역동적 존재이다.      

  

신하정은 유화로 그려진 풍경과 정물을 보여준다. 인간이 없는 사건의 무대 같은 빈 숲이다. 나목들이 춤을 추는 듯한 눈 쌓인 숲 풍경이나 물을 닮은 몽환적인 숲 풍경에는 시적인 제목이 붙어있다. 그러나 숲에 함께 있었을 법한 대상은 [축축한 바위], [그럴듯한 바위] 등의 제목이 붙어있지 않다면, 그것이 바위인지도 알기 힘들만큼 모호하다. 기괴한 구석을 감추고 있는 자연의 단편이 회화를 통해 전경화 된다. 그것들은 무기물처럼 단단하기 보다는 유기물처럼 흐물흐물한 느낌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생물체의 사체처럼, 자신이 비롯된 곳으로 되돌아가는 듯 퇴행적이다.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식물만큼은 아니어도 단단한 바위 또한 어떤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위의 ‘생사고락’이 전개되는 시간은 유기체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신하정, [그럴듯한 바위], 캔버스에 유화, 90.9x72.7cm, 2016년



신하정, [삶의단서], 캔버스에 유화, 각 60x60cm, 2016년.



그것은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진 대상이나 과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석이나 도자기 인형 같이 인간이 만들고 선택한 사물에도 그러한 비인간적인 관점이 적용될 수 있을까. 시리즈처럼 그려진 [삶의 단서]에는 도자기 인형들과 기묘한 분위기의 돌들이 집중적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관객은 거기에서 어떤 ‘삶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장식장에 잘 진열되어 있을 법한 컬렉션에서 누군가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 취향은 유의미한가 무의미한가. 동어반복적인 그 많은 것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거친, 그러나 풍경에서도 적용되었던 시원시원한 붓질은 특정 대상의 상징과 의미에 대한 문답에 괄호를 친다. 수집에 적용되는 제멋대로의 분류체계와 질서감각에는 단지 일련의 순서가 있는, 그리기를 위한 단순한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지시대상을 빼고 그리기라는 원초적 행위만을 남겨두는 방식이다.

 

2. 사물-임정은, 최규연

  

임정은은 물건을 싸는 반짝거리는 장식물이 그린다. 화면 가득히 클로즈 업 되며 유화의 모든 기술이 발휘되어 치밀하게 재현된 그것들은 무엇을 담는 그릇이기 보다는, 그자체가 내용인 대상이다. 포장이 내용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량생산의 시대가 개시될 무렵, 그림 또한 무엇 보다는 어떻게 그렸는가가 중요시됐다. 그것은 대상과 의미는 사라지고 기호와 기표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를 반영한다. 자본은 최대한 빠르게 순환되려 한다. 정보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정보화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주기는 더욱 압축되었다. 대상과 의미는 빛의 속도로 회전하기에 너무 무겁고 걸리적 가리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실재보다는 가상의 몫이 점점 더 커져가는 현대사회에서 사용가치 또한 그러하다. 더 빠르게 순환하고 소비되는 것에 기표만큼 적절한 존재방식은 없다. 




임정은, Firecracker6_116.7x91cm_oil_on_canvas_2017



임정은, Firecracker_112.2x193.9cm_oil_on_canvas_2017



소비자는 포장을 뜯는 순간, 더 필요하다고 착각하는 또 다른 대상을 향한 욕망에 휩싸인다. 번쩍거리는 색색의 띠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 [Firecracker_3]에서 포장은 기대와 설렘을 안고 폭죽처럼 터진다. 작품 [Firecracker 6]에서 작가는 번쩍거리는 화려한 색색의 포장 끈을 화면 가득히 담았다. 작품 [Firecracker_1]은 팝적 분위기의 실내에 화려한 포장재가 놓여 있다. 작품 [Wrapping]에서 작가는 땡땡이, 별무늬 등 화려한 포장재를 화면에 재구성했다. 소비되는 상품들의 많은 부분이 폭죽처럼 터지고 보여 지는 것 외에 어떤 사용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상품화된 사회는 불필요한 것들의 목록 또한 늘려 나간다. 상품/포장은 연이어 소비돼야 한다. 체계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소비를 위한 소비이다. 그것은 생산을 위한 생산, 예술을 위한 예술 등과 비슷한 계열의 사고방식에 속한다. 

  

최규연의 [Dried Plant] 시리즈에 등장하는 화분들은 일종의 축소된 자연이다. 자연에서 떠나온 인간은 자연을 그것을 축소시켜서나마 소유하려 하며, 이를 통해 자연과의 끈을 유지하려 한다. 어디선가 떼어온 축소모델은 대자연과 달리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최규연의 작품 속 화분들은 모두 시들어 있다. 대자연과 달리, 자생력이 없는 소자연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그것은 버려지지 조차 않는다. 동물인 인간에게 식물적 상태는 그 자체가 박탈감을 주는데, 시든 화분은 죽음까지 떠올린다는 점에서 우울한 감정 이입의 대상이다. 시각적 관습 상, 관객의 눈높이에 서있는 존재는 인간과 연관된다. 시든 화분은 풀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원래 푸르렀을 잎 새들은 태양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어야 하지만, 화분을 가릴 정도로 축 처진 잎 새들은 중력에 순응한다. 




최규연_Dried Plant, 130.3x130.3cm, oil on canvas, 2017



최규연_Dried Plant, 145.5x112cm, oil on canvas, 2017



남루한 귀퉁이에 자리한 화분 속 식물은 어떤 식물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없이 그렇게 있다. 그것들은 또 다른 쓸모없는 물건들과 함께 주차방지용으로 용도 변경된다. 그것은 없어져도 상관없는 잉여물이다. 실내인지 실외인지 모호한 배경 처리는 시든 화분이라는 어떤 특정한 대상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어떤 보편적 상황을 상징한다. 배경은 죽은 화분과 비슷한 색조인 것도 있고 알록달록한 것도 있는데, 후자의 경우 생기 없는 화분과 대조되어 그 상태가 적나라하게 강조된다. 최규연의 화분들은 칙칙한 일상 속에 매몰된 생기 없는 삶을 연상시킨다. 생생한 초록이 빠진 모노톤의 식물은 사물화 되어 있다. 화분이 놓인 물리적인 장소는 식물보다 생기 있는 경우도 있다. 생명은 무엇보다도 활기차지만, 죽은 생명은 원래 생명이 없는 것보다 더 추레하다.   


3. 공간-이부강, 이상엽

  

이부강은 나무 덩어리에서 만들어진 절편인 판자조각으로 이미지를 만든다. 판자란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진 생산품이기에 최초에는 매끈한 상품이었겠지만, 그자체가 시공간의 흐름을 각인하게 된다. 작가는 시공간의 흔적이 담긴 절편들을 모아 마치 그것을 물감인양 사용한다. 재료는 그와 어울리는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그가 수집한 판자조각은 오래된 집들을 구성한다. 이전에 낡고 초라한 집을 ‘판자집’이라고도 불렀듯이 말이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판자집뿐 아니라, 나무 전선주들도 있었는데 모든 것을 나무 조각으로 ‘그리는’ 이부강의 풍경에서는 나무 전선주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판자를 붙여서 만든 판자 집은 천 조각으로 만든 옷 이미지나 머리카락으로 만든 머리털 이미지처럼 시각적 위트가 있다. 판자로 구성된 건물은 모여서 좁은 골목길이 있는 마을을 만든다. 




이부강_trace layers_73X101cm_2016



이부강_trace 103,63X122cm mixed media  2014



그리고 그곳에 살법한 인간까지 만든다. 집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인간은 환경과 인간의 밀접한 관계를 알려준다. 나무라는 따스한 재료는 인간적인 풍경을 연출하는데 일조한다. 미술사에 처음 등장한 꼴라주는 원근법에 바탕 한 재현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부강에게는 그것이 모자이크 조각처럼 사용되면서 무엇인가를 그럴듯하게 재현한다. 색감과 질감을 두루 고려한 잘 짜 맞춰진 조각들은 재현 역시 본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임을 알려준다. 구성은 실체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사고이다. [trace]나 [trace layers]라고 붙여진 제목들은 대상이나 본질이라는 견고한 사고를 무너뜨린다. 굳이 대상과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의 산물이다. 판자는 나무의 흔적이고, 판자 그림은 판자의 흔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흔적에는 시공간적 차이가 내재되어 있다.    

  

이상엽은 기하학적 도형으로 도시풍경을 그린다. 거기에는 기능주의에 충실한 도시가 가장 잘 활용하는 사각형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도시를 이루고 있는 빌딩은 사각형의 확장이다. 육해공을 망라한 이동수단은 사각형으로 상징화된 건물 사이에서 활력을 부여한다. 건물이 기관이라면 이동수단은 모세혈관처럼 기관과 기관을 이어주는 통로이다. 이동수단은 좀 더 작은 사각형이 조합된 결과이다. 그것들은 마치 저용량 이미지처럼 가장자리가 모자이크처럼 깨져 있다. 그것은 레고 블록처럼 어떤 단위가 조합된 결과물이다. 정지된 물체와 이동하는 물체가 복합된, 지도처럼 펼쳐지는 풍경에서 자연적 배경 역시 매끄럽지 않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원자적 이해가 결국은 현대 도시를 낳았음을 알려준다. 공간을 가르는 색이자 빛인 작품 [LUMINARIE 0811]는 원자들이 이합집산 하는 허공을 몫을 강조한다.




이상엽, City Landscape- Busan 1606, Acrylic on canvas, 162X97cm, 2016



.이상엽_LUMINARIE 0811_112x145cm_2015



변화는 이 허공에서 일어난다. 자동차를 비롯한 이동 수단은 축소된 건물이다. 모더니스트들이 건물을 사는 기계로 규정했다면, 자동차는 이동하는 기계이다. 이상엽의 작품에서 다양한 이동수단들은 아이의 그림이나 고대 유물에서처럼 여러 차원이 공존한다. 그것들은 르네상스 이래 지배적이었던 시각적 관습인 원근법을 무시한다. 어떤 것은 위에서 어떤 것은 옆에서 포착된 모습이다. 그것은 이동에 전제된 차원의 변주를 상징한다. 현대의 도시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정보화된다. 이상엽의 작품 속 사각형들을 마치 폴더처럼 떠있다. 그것들은 각자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연하게 호환된다. 근대 도시는 그자체가 추상적인데, 피에트 몬드리안을 비롯한 초창기 기하 추상 화가들이 주목했던 코드화는 21세기의 젊은 화가에 의해 또 다른 차원에서 펼쳐지고 있다. 

  

출전; 화성문화재단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