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의성 / 예술의 생산성에 관한 실험

이선영

예술의 생산성에 관한 실험

  

이선영(미술평론가)

  

예술가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정은 작업에 포함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외에, 작업하는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정신/육체노동이다. 이의성의 전시는 젊은 작가로서 이 이중의 노동을 수행하며 생겨난 의문에 대한 탐구이다. 작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의식이 깔려있는  작품들은 재능이나 의지만으로는 지속할 수 없는 작업의 세계에서, 예술은 얼마나 생산적인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있을 수 없지만, 한 번 해보는 것과 안한 것과의 차이는 존재한다. 작업 또는 노동에 투입된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를 다루는 그의 작품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예술작업에 대해 차분하게 대차 대조표를 만들어본다. 들어간 것(input)과 나온 것(output) 사이에는 차이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이 차이가 가시화 된다. 이의성은 주로 물리적인 양의 차이를 다루지만, 그 차이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이다.  


 


생산적인 드로잉, 흑연가루, 점토, 철, 목재, 알루미늄, 석고 , Dimension Variable, 2016



생산적인 드로잉, 흑연가루, 점토, 철, 목재, 알루미늄, 석고 , Dimension Variable, 2016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 루소가 ‘모든 노동은 두 가지 목적, 즉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과 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집중된다’고 말한 바 있듯이, 노동이란 단지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 가치의 문제를 내포한다. 이의성은 예술과 노동에 공통적일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함으로서 가치를 매개로 한 양자의 관계를 묻는다. 가치 또한 의미처럼 차이에서 발생한다. 실로 그 문제는 경제와 사회, 언어 모두에 관철된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에 의하면, 가치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분배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교환과 가치, 사회의 재구성]에서, 가치를 세 가지로 나눈다. 1. 사회학적 가치; 인간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옳고 바람직하며 타당한 것들을 지시하는 개념. 2. 경제적 가치; 대상에 대한 욕망의 정도. 특히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얼마나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에 의해 측정되는 욕망의 정도. 3. 언어학적 가치. 


이 분류법에 의하면, 예술적인 의미의 문제는 언어학적 가치에 해당될 것이다. 언어학은 ‘의미상의 차이를 낳는 최소한의 차이’(소쉬르)를 말한다. 이의성이 준(准) 물리학적 연구를 통해서 가시화하려는 차이, 즉 처음과 나중의 차이, 유실된 것은 작품의 의미와 밀접하다. 즉 작가는 사라진 것을 통해 얻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가치란 자본주의의 지배적 질서가 전제하듯, 단지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자본이 자본을 낳는다는 관념은 형식주의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밝혀냈듯이, 가치란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나온다.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가 생산되었지만, 그것을 취하고 축적하는 시스템이 있는 것이고, 축적은 결국 타자를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 비슷한 약육강식일지는 모르지만, 자연에는 축적을 낳는 노동이 없다. 생산 중심사회에 전제된 축적은 결국 소수에게 집중되고 보다 많은 이들을 타자화 한다. 




생산적인 드로잉, 흑연가루, 점토, 철, 목재, 알루미늄, 석고 , Dimension Variable, 2016



생산적인 드로잉, 흑연가루, 점토, 철, 목재, 알루미늄, 석고 , Dimension Variable, 2016



생산적인 드로잉, 흑연가루, 점토, 철, 목재, 알루미늄, 석고 , Dimension Variable, 2016



축적의 위기는 잉여를 단번에 소비할 수 있는 지향을 낳는다. 전쟁이 그 예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축제처럼 낭비를 통해 만들어지는 긍정적 가치의 대표적 예이다. 이의성의 실험은 축적이 아닌, 사라진 것에 주목한다. 전시장에 있는 장황하리만치의 정교한 도구들은 그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라, 사라진 것을 가시화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노동이나 드로잉의 도구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건조한 실험실이나 작업장 같다. 그곳에 등장하는 인간들 역시 두 다리만 존재하는 익명성을 띈다. 각기 다른 틀에서 나온 오동통한 다리들은 여기저기 편재하면서 작가의 실험을 지켜보고 재현하고 그 결과물을 시연해 보기도 한다. 전시회란 작가의 상상력이 펼쳐진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인사미술 공간 3개 층의 설치물 모두 표현의 자제가 특징적이다. 창작의 열기는 냉정한 시험대 위에 놓여졌고 물화(物化) 되었다. 작가는 표현하는 대신에 재현한다. 


작업을 통해 유실된 물질과 에너지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그의 방식은 예술적 재현이기 보다는 과학적 재현을 떠올린다. 시험관, 저울, 자, 가격표 등등이 곳곳에 자리한다. 과학이 진리를 확증하는 방식은 재현이다. 누가 실험을 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가설은 진리로 인정받는다. 생산된 것은 보여 져야 하고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유실된 실오라기 하나하나도 다 체크하는 엄격함을 보여주면서 작업을 통해 사라진 무엇이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전시장 1층의 작품 [물리적 드로잉]은 린넨 천을 프레임에 고정시키고 파장 형태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부산물을 모은 것이다. 족집게로 모아 저울 위에 올려놓은 실밥의 무게는 천에서 뽑은 실과 모아놓은 실의 차이를 지시한다. 기록에 의하면 2g의 차이가 났다. 저울 위의 실밥은 금속이나 천 같은 평범한 재료가 노동의 과정을 거쳐 예술 작품이 되었을 때 측정될 수 있는 물리적 변화의 일례이다. 




종이 돌, 종이, 제스모나이트, 흑연가루, 점토, 목재, 석고 스티로폼, 철, 알루미늄, 2016



1층 전시장 전경



그 밖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이 있을 것이다. 천 아래의 모루는 그 위에서 망치로 작업을 할 때 진동이나 소리로 빠져나가는 에너지를 상징한다. 다른 모루에는 거기에서 탄생했을 법한 도구들의 실루엣이 상흔처럼 박혀있다. 상처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흔적들은 ‘모든 현전하는 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부재하는 것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데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의성의 작품은 부재하는 것을 통해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옆에는 재료와 노동의 결과물이 모여 있다. 작품 [분필 대장간]에서 분필 재료로 생산된 도구들 또한 어떤 쓰임에 의해 서서히 닿아 없어질 물건이다. 분필은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고, 그것이 소비된 만큼 누군가는 배웠을 것이다. 작품 속 익명적 인물들은 아이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배우는 자를 상징한다. 가르침/배움의 과정은 자본을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와 같은 비대칭 관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비(非) 등가 관계는 경제적 가치의 산정에도 관철된다. 가령 이의성의 작품은 예술적 가치가 평가되는 과정에 개입되는 불투명성을 말한다. 그것을 단지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물리적 실험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통해 등가적 사고에 기반 하는 합리적 이성이 배제하는 부분이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비밀을 폭로함으로서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있는 기존의 고전경제학을 넘어설 수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언어, 수, 화폐]에서 그러한 과정을 자세히 밝힌다. 그에 의하면 고전경제학의 입장에서는 모든 상품 안에 하나의 공통 본질인 인간 노동이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로 사회적 교환은 일종의 도약을 요구한다. 저자가 마르크스를 참고하면서 말하듯이, 사회적 교환/의사소통은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하나의 이질적인 체계를 형성하는 교통이다. 자기 증식하는 화폐인 자본이 자신의 잉여가치를 발견하는 곳이 바로 체계들 간의 차이 속이다. 




 물리적인 드로잉, 린넨, 알루미늄, 철, 모루, 비커, 저울, 칠판스티커, 드로잉 과정으로부터 발생한 실, Dimension Variable, 2017



 물리적인 드로잉, 린넨, 알루미늄, 철, 모루, 비커, 저울, 칠판스티커, 드로잉 과정으로부터 발생한 실, Dimension Variable, 2017



 물리적인 드로잉, 린넨, 알루미늄, 철, 모루, 비커, 저울, 칠판스티커, 드로잉 과정으로부터 발생한 실, Dimension Variable, 2017



마르크스는 고전경제학자와는 달리, 화폐와 가치가 균형 잡힌 체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균형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가라타니 고진이 드는 비대칭적인 관계는 판매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의 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의미의 교환을 포함한 사회적 교환에는 평평한 토대나 합리적 근거가 있는 아니라 도약이 있다. 특히 판매자의 입장이 그러하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알 수 있듯, 예술품은 물론 생활필수품까지 판매의 단계에서 요구되는 +α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치가 몰리거나 박탈당하는 거대한 게임이 펼쳐진다. 고진에 의하면  판매 입장은 항상 ‘운명을 건 도약’(마르크스)을 요구하는데, 고전경제학은 항상 파는 입장을 떠맡도록 강요당해온 임금노동자들의 비대칭 관계를 보지 못했다. 의미를 포함한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예술가 또한 판매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심지어 그들의 위치는 일반 노동자보다도 더 열악한 경우가 많다. 


이의성의 중성적인 작품은 그러한 사회적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작업과정에서 나오는 물리적 유실을 통해 생산물이 생산물로서 가능하기 위한 무형의 것을 암시한다. 경제학이 아닌 철학적인 용어로 다시 읽자면, 그것은 바로 동일자를 구성하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체계의 바깥에 있으면서 그 틀 안으로 결코 내면화될 수 없는 타자, 그러나 그 틀의 존립자체가 가능하기 위해서 부단히 소통되지 않으면 안 될 타자, 그런 타자의 존재를 양각화’(가라타니 고진)하는 것이다. 작품 [노동현장 조사]에서 다리만 있는 사람들은 깔끔한 생산물이 만들어지기 위해 투입된 에너지와 물질을 확인하기 위해 일련의 행동을 한다. 바닥에 그려진 망치 자국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종의 기표이다. 그러나 사물과 기호,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관계는 그의 작품 속 파장처럼 공중으로 샅샅이 분열되고 만다. 불가능한 일을 도모하고 있는 아이들의 자세는 사뭇 진지하다. 




분필대장간, 유토, 목재, 철, 플라스틱, 석고, 색소, Dimension Variable, 2017



분필대장간, 유토, 목재, 철, 플라스틱, 석고, 색소, Dimension Variable, 2017



노동현장 조사, 제스모나이트, 철, 망치, 석고, 색소, 나무, Dimension Variable, 2017



 2층 전경



지하층에 그려진 벽화 [생산적인 드로잉]은 예술의 도구와 노동의 도구를 하나의 과정으로 순환시킨다. 벽에 그려진 것은 흑연 덩어리이다. 흑연 덩어리를 흑연 덩어리로 그린 것이다. 바닥에는 실제의 흑연 덩어리와 가루들이 널려 있다. 이 부산물들은 옆에 나란히 놓인 생산물들을 제작하는데도 사용되었다. 건조대 위에 질서 있게 배열된 곡괭이는 흑연은 캘 때 사용되었던 노동의 도구였다. 모루는 이 모든 물리적 과정을 순환시키는 또 하나의 도구이다. 명확한 외곽선이 없는 흑연 덩어리 이미지는 그자체가 유실되고 있다. 허공에 둥 뜬 덩어리는 아래 부분 부터 흘러내리고 있는 듯하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곡괭이들은 생산이란 것이 생산수단의 생산임도 알려준다. 흑연 덩어리/가루들은 노동의 도구 뿐 아니라 옷도 생산했다. 다리만 있는 인형들이 여러 가지 모양새로 두르고 있는 것은 흑연 드로잉이다. 그것들은 흑연 드로잉을 패션처럼 걸치고 있다. 


패션은 흑연을 캐는 광산업보다는 고(高) 부가가치 사업이고, 예술도 그 가치가 충분히 인정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그것은 노동과 달리 거품도 많다. 소비의 세계는 생산의 세계만큼이나 체계화되어 있지만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합리성은 비합리성과 함께 간다. 소비는 최초의 필연성을 넘어서기 마련이다. 그것은 배가 부르면 멈추는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서 끝없는 배고픔으로 점철된 욕망으로 치닫곤 한다. 100벌의 옷을 가진 사람에게 101번째의 옷을 팔아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이다. 인형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걸치고 있는 부조리해 보이는 패션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물신주의를 생산해야 하는 패션쇼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연필심 찌꺼기로 그려진 드로잉은 덩어리진 부분과 문질러진 부분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우주처럼 보인다. 때로는 먼지가 가득 쌓인 거적때기처럼도 보인다. 




 구멍의 진하기, 6종류의 흑연스틱(HB, 2B, 4B, 6B, 8B, 9B),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6종류의 흑연가루, 시험관 6개, 알루미늄, 필통, 지우개, 70x22x50cm, 2017



30g 선 드로잉, 30g 흑연스틱, 30g 나무자, 70x22x50cm, 2016



이의성 노동의 무게, 목재,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목재 찌꺼기의 중량과 시간의 기록, Dimension Variable, 2015



하기야 우주는 먼지로 만들어진 것 아닌가. 먼지가 뭉쳐져 별도 되고 보석도 된다. 이의성의 작품에서 노동을 매개로한 순환의 과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우주처럼 무한하다. 물론 매 단계마다 유실된 물질은 끝을 보게 하겠지만, 그것은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어 우주 어디엔가 변환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사라진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자연의 법칙은 위안을 줄지도 모른다. 인생이나 예술을 우주나 자연처럼 보다 원대한 주기로 생각하는 것은 매력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짧은 인생, 그리고 그보다 더 짧을 예술 작업을 생각해본다면, 초월은 쉽지 않다. 자신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이 생산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내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수행된 일에 대한 가치평가의 문제이다. 유한한 인생에게 그것은 절박한 질문인 것이다. 이의성의 작품에서 사라진 것은 차이로 가시화되며, 그것이 의미와 가치를 낳는다. 어떤 재료도 동일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동일자가 같음을 말한다면 타자는 차이를 말한다. A는 A다라고 말하는 것은 동일자의 사유이다. 그러나 A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단지 A만이 아니라 BCD....에 의해 규정된다. A를 A로만 생각하는 것은 명증하긴 하지만, 헐벗은 명증성이다. 이의성의 전시에서 발견되는 차이의 사고는 동일자를 이루는 타자의 몫을 강조한다. 이전 작업에서는 그는 동물들을 등장시켜서 타자의 목소리를 대변한 바 있다. 철학자 벵상 데콩브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역사라는 우주의 부분에서는 부정성 혹은 차이가 지배한다고 본다. 역사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자연에서 존재는 동일성을 의미하지만, 역사에서 그것은 차이를 의미한다. 자연적 사물은 그것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역사적 행동자는 그가 행동하는 만큼 존재하며, 끊임없이 묻고 달라지는 만큼 행동한다. 벵상 데콩브는 사물이 진실로 사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과 다른 것이 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노동의 무게, 목재,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목재 찌꺼기의 중량과 시간의 기록, Dimension Variable, 2015



종이 돌, 종이, 제스모나이트, 흑연가루, 점토, 목재, 석고 스티로폼, 철, 알루미늄, 2017



 드로잉의 가격, 흑연스틱 5개, 종이에 흑연, 24x60(each), 70x24x24cm, 2016



드로잉의 가격, 흑연스틱 5개, 종이에 흑연, 24x60(each), 70x24x24cm, 2016



이의성의 작품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가시화되는 유실은 차이가 만들어지는 조건이다. 가령 가격이 대표적이다. 2층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작품의 가격이 산정되는 한 방식과 노동의 무게 등을 묻는다. 무게 또한 길이만큼이나 물리적으로 측정되는 양적인 것이지만, 앞에 무엇이 붙는가에 따라 질적인 것으로 전환 될 수 있다. 작품 [드로잉의 가격]에서는 그려진 이미지의 수나 방식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붙여 놓는다. 돌 하나와 돌 다섯 개가 그려진 것은 가격이 다르고, 겹쳐진 부분이 많은 이미지가 있는 작품은 가격을 깍아 주기도 한다. 그 작품을 창조하기 위한 기나긴 암중모색의 과정을 생략하고, 물리적으로 가시화된 부분만을 계산대에 올린 다소간 냉소적인 작업이다. 좀 더 촘촘해진 합리주의 사회는 일거수일투족을 계산하곤 하지만, 예술/노동에 관련해서는 여전히 작품 속 흑연 같은 암흑 속에 잠겨있다. 가령 예술 노동은 컨베이어벨트에서 수행되는 식의 행위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술은 노동, 특히 소외된 노동처럼 인간의 일부가 도구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전체가 작동한다. 이성은 물론 꿈과 무의식까지 활용된다. 그래서 예술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지만, 그 가치의 측정 기준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투명성은 억압적이기도 하고 해방적이기도 하다. 이의성의 작업은 판매가 아닌 생산 단계에서도 ‘운명을 건 도약’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40가지의 도구를 나무로 깍은 작품 [노동의 무게]는 가치가 생산되는 과정의 임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들은 일견 매우 질서정연한 것 같지만, 그때그때 조달해온 나무로 만들어진 도구들의 비율은 들쭉날쭉이다. 엄청나게 큰 바늘이 있는가하면 원래 크기보다 아주 작은 연장도 있다. 유일한 원칙은 하루에 한 개만 깍는다는 것이다. 다소간 기계적으로 정해진 원칙은 임의성을 감추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깍기 전의 무게와 깍은 다음의 무게의 차이를 노동의 무게로 간주했다. 하루에 한 개씩 40일간 깍은 시간도 그래프로 표시했다. 




드로잉의 가격 전경



드로잉의 가격, 망치 5개, 종이에 흑연, 40x57(each), 83x40x40cm, 2017



 드로잉의 가격, 망치 5개, 종이에 흑연, 40x57(each), 83x40x40cm, 2017



그렇게라도 노동시간이 등가로 인정된다면 정의롭겠지만,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 가령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적용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선진국/후진국, 정규직/비정규직, 정신노동/육체노동, 임금 노동/그림자 노동 등의 차이들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는 것이다. 작품 [30g 선 드로잉]은 길이를 재는 도구를 무게로 치환한다. 30cm길이의 선 드로잉을 30g의 나무 자와 30g의 흑연을 사용하여 그린 작품은 가치가 측정되기 위해 전제되는 공통된 계량의 단위를 바꾼다. 그것은 노동을 무게로 치환한 것이다. 작품 [구멍의 진하기]은 흑연으로 드릴을 깍은 것인데, 필통 안에는 드릴 모양의 연필심이 제일 흐린 HB부터 9B까지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작가는 드릴을 깍는 과정에서 유실된 것들을 모아 투명한 시험관에 담아 놓았는데, 진하기의 농도에 따라 그 깊이가 깊어진다. 바닥에 떨어지는 이미지는 실제의 그림자와 그린 것이 합쳐진 것이다. 그림자는 물론 먼지로 사라져 버릴 것들까지 함께 모여 작품을 이룬다. 


이의성은 작업과정 중 사라진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 예술 작품에서 사라진 것은 단순히 낭비된 것이 아니다. 사라짐이 없다면 변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변형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단순한 재료와 노동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건조한 실험실 같은 전시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부분은 사라진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미세한 감각이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소통(유통)되는 가치에 대한 개념과 연결된다. 물질A가 물질B로 변환, 또는 생산되어 유통의 회로에 투입되었을 때 어떤 가치가 발생한다. 작가는 사라진 것을 기준으로 가치를 측정한다. 예술이야 말로 사라진 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나 예술/노동은 너무 가치가 높아서 아예 가치가 책정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의 작품은 열정으로 시작했겠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본전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결과물 없는 무상의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출전; 인사미술공간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