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음 속 다름의 포획

이선영(미술평론가)

조진이 전에 걸린 드라마틱한 추상 풍경들은 일상으로부터 왔다. 생활인이자 작가에게 일상은 지속되어야하는 것임과 동시에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상의 단절이 일어나는 시공간도 일상이다. 작가는 운전이나 도보로 늘 왔다 갔다 했던 길가의 자연과 건물들이 평소에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가 어느 순간 확 다가올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만남은 그 자체가 예술적이며, 작업이란 이러한 잠재적 상태를 현실화시키는 과정이다. 종교적 심성이 강한 사람에게는 현현(Epiphany)이라고 표현해도 될 법한 신선한 만남은 축복이다. 자연은 이러한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다. 예술 작품과의 만남 또한 그에 못지않다. 영혼에 충격을 주는 만남이 없이, 단지 작업에서 작업이 나올 뿐인 작품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외양만 자유로운 예술이지 소외된 노동과 다를 바 없다. 조진이의 작업은 깨달음을 동반한 직관이나 감각의 갱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변화(의 느낌)는 매우 극적이어서 마치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Flow, break  acrylic on canvas, 162.2x130.3cm, 2017 (2)

Flow, break  acrylic on canvas, 162.2x130.3cm, 2017

그러한 다가옴은 매우 드물며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 상황의 변화이다. 반복적 일상에서 사람마다 다른 감성대는 다름을 포획하는 조건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알아본다’는 것은 예술적 기준에서 본다면, 현대에 와서는 극복 대상이 된 재현적 사고와 밀접하다. 알아본 것은 대개 이미 알려져 있는 앎으로의 환원을 말한다. 물론 차이를 감지하는 감성 역시 조형적 언어로 번역되는 단계에서 기존 언어로의 환원이라는 위험이 따른다. 언어는 인간의 조건이고 예술의 조건이이기도 하다. 조형 언어인 미술도 말을 하고 있고, 말을 할 준비가 된 사람만이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인상파의 한 대가는 장님이 막 눈을 뜬 순간처럼 세상을 보고 싶다고도 말했지만, 완전한 제로베이스의 지각(그리고 예술적 표현)은 불가능하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형적 언어에 대해  눈뜬장님이고 귀머거리이다. 그러나 그 사실조차 모르고 문제의식도 못 느낀다. 

그렇게 미술은 소수자의 언어가 된다. 그나마 교육이나 교양의 역할이 아니라면 잉여 취급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새로움을 갈구한다. 오늘날 새로움은 이런저런 물질적 소비생활로 대체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대용의 새로움은 거듭되는 소비 밖에는 출구가 없다. 예술 하는 삶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려면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삶에서 이러한 역류는 매우 힘들다. 우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각성과 진정한 새로움에 대한 욕망이 필요하고, 그게 다시 깨어난 지각을 손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작업은 보다 업그레이드 된 지각을 야기하고 심층의 무의식을 다시 활성화한다. 2016년에 발표된 조진이의 작품들은 건물 벽면의 색, 지붕이나 창문의 모양새, 건물과 주변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 등,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기록이지만 재현이 아니니 흔적이다. 속도감 있는 붓질로 층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화면이라는 공간에 남겨진 시간이다. 

Autumn window  acrylic on canvas, 116.8x91.0cm, 2017

Flow, green  oil on canvas, 53.0x45.0cm, 2016

변화무쌍한 붓질과 대조가 뚜렷한 색감이 있는 2017년의 작품들은 특히 계절이 바뀌는 즈음의 변화, 가령 우거진 신록이 단풍으로 알록달록 밝아지다가 어느 순간 나목이 되어 환해지는 식의 시간성이 느껴진다. 그 반대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번 전시에서 짝(companion piece)처럼 나온 작품들은 오는 길과 가는 길, 또는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 등의 차이에 상응하는 다름이 있다. 붓질의 흔적이 작업의 시간성을 보여준다면 색감과 밀도의 변화는 시간이나 계절 감각이 반영된다. 조진이의 작품에는 겹치는 층들에 의한 추상적인 원근감이 있다. 그것은 시각보다는 촉각이 만들어내는 원근법이다. 작년의 개인전에는 건물로부터 받은 인상이 직선적인 요소로 표현되어 있다면, 올해 전시에는 건물보다는 자연에 방점이 찍혀있다. 여기에서 자연은 작심하고 멀리 나가서 봐야하는 유명한 곳이 아니라, 바로 그 건물들 사이에 있던 자연이다. 

작년에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고, 올해에는 자연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또는 두 소재는 애초에는 분리될 수 없었지만, 차이를 얼마 두지 않은 두 번의 전시를 통해 두 가닥으로 분류되었다.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작업의 맥락에 따라 눈에 띄는 풍경도 달라진다. 지각은 기억과 연동되는 것이어서, 더 멀리는 금속 공예를 전공하던 학창시절의 작품들에 나타났었던 선적 요소,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바빴던 기간에도 놓은 적은 없었던 그리기의 경험들이 시간의 층을 뚫고 솟아난다. 이 때 시간은 방해물이 되기도 하고 촉진제가 되기도 한다. 다양한 색과 필획에 의해 겹겹의 층들로 이루어진 조진이의 작품은 가려짐과 드러남이 반복된다. 지우기와 그리기가 동렬에 놓인다. 그것은 기억과 지각이 뒤섞인 일련의 풍경이다. 실제와 심상을 구분 없이 한데 몰아넣어도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작가가 살고 작업하는 곳은 아파트들이 빼곡한 대도시이긴 하지만, 넉넉한 하늘풍경을 볼 수 있는 천(川)과 녹지가 적절히 어우러진 곳이다. 

Flow, red   acrylic on canvas, 45.5x37.9cm, 2017

Flow, sun  acrylic on canvas, 72.7x60.6cm, 2017

그 자체가 대자연의 캔버스라고 할 만한 하늘빛의 극적이고도 미묘한 변화는 작가에게 영감을 준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광경들을 지나가면서 주시하기 보다는 흘깃 본다. 또는 스냅사진으로 찍어 최초의 감흥에 대한 단서로 삼는다. 그것은 풍광 좋은 곳에서 이젤을 펼쳐 놓고 하는 식의 작업과는 거리가 있다. 참조 대상과의 일대일 맞춤은 없다. 시시콜콜하게 자세한 부분들은 뒤섞인다. 대부분 그다음의 붓질에 의해 지워져서 화면 저편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가 또 다른 관계망을 위한 지점으로 작동될 것이다. 기억들은 켜켜이 쌓여 있다가 막연하게 비어있는 화면 위에 붓질을 하는 순간, 다시 활성화되어 물감으로 고착된다. 감각기관이 있는 몸의 요동침은 물감으로 전이된다. 작품은 현실에서 받은 영감에 상응하는 또 다른 영감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작업은 계속 이어진다. 시점과 종점을 거부하고 과정만을 남겨두려 했던 현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생각처럼 작업이란 계속되는 시작일 따름이다. 물감으로 하는 모래성 쌓기 같다고 해야 할까. 

이번 전시에서 발견되는 반복과 흐름이라는 개념은 삶 뿐 아니라, 작업에도 해당된다. 반복만 있다면 흐름은 불가능할 것이다. 반복은 차이를 낳고 차이가 바로 흐름을 야기한다. 반복과 차이는 한 개인에게 뿐 아니라, 격세유전(隔世遺傳)적인 진리이다. 어느 날 작가의  눈에 띈 자연은 자잘한 인간사를 보다 큰 주기로 생각하게 한다. 모든 작가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드물게 다가오는 감흥의 순간이 있는 그대로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 구상만 있을 뿐, 스케치도 없이 시작되는 조진이의 작업은 변화의 연속이다. 최초의 영감을 붙잡아보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지만,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또 다른 영감이 파생되기도 한다. 니이체의 주장처럼 최초란 조야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최초의 영감이나 생각은 어디엔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림을 비롯하여 어떤 표현 수단을 가진 이들은 축복과도 같은 감흥의 순간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감흥은 우연히 닥치는 것이지만 준비된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것을 낳게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기분의 전환 정도로 지나친다. 예술작품은 그렇게 지나친 것이 다시 발견되는 장이기도 하다. 

Full  acrylic on canvas, 53.0x45.0cm, 2017

Luna shade  acrylic on canvas, 53.0x45.0cm, 2017

작업이란 일상에 잠재해 있던 것은 현실화시키는 것, 현실화를 가속화시켜 또 다른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많이들 말하지만, 작업은 시간을 가속화시키는 과정이다. 대조되는 색감의 필획이 교차되는 조진이의 화면은 마치 성긴 공간의 궤도를 주행하는 원자의 흐름처럼 속도감이 있다. 핵물리학에서의 입자가속기처럼 가속을 통해서 또 다른 실재가 생성된다.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자연은 자연의 요소로 분해되어 화면 속에서 재조합되었다. 운동감이 가능한 것은 필획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넉넉한 공간의 배정이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 원자론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면서, 물질원소들의 쉼 없는 동요를 묘사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원자로 가정된 물질 만큼이다 물질이 운동할 수 있는 빈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 빈 공간은 자유와 연결되었다. 어떤 구체적 참조대상을 찾아볼 수 없는 추상화지만, 자연과의 연결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조진이의 작품은 자연 그자체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자연이다. 

[고대 원자론]에 소개된 고대 원자론자 루크레티우스는 심원한 허공에서 제 1물체들에는 어떤 정지도 허락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어둑한 실내의 덧문을 열었을 때 햇빛에 비치는 허공 속에서 자유롭게 떠도는 먼지로부터 원자론을 생각해낸 고대의 자연철학자는 ‘덧문 틈으로 새어드는 햇살 속에서 수천가지 방식으로 뒤섞이는 무수한 물체들을 볼 때, 한 원인이 다른 원인으로 무한하게 이어지는 운동의 시작’은 지상의 생명체들이 가지는 자유라고 말한다. 원자론은 결정론과 숙명이 아니라, 자생성과 자유에 대해 말한다. 원자론자들에게 물질은 물론 영혼 역시 작은 원소들로 이루어졌다. 루크레티우스는 정신과 영혼의 구성에 관해 설명하면서, 열기, 바람, 또는 공기 중에 어느 것이 한 인간 개체에게 지배적인가에 따라 각각 화, 두려움, 차분함이 그의 본질적인 기질이 된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는 붓과 물감을 몸의 연장처럼 사용하는 화가들의 방식 또한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 

Summer night  acrylic on canvas, 116.8x91.0cm, 2017

Sunlights  acrylic on canvas, 90.9x72.7cm, 2017

고대 원자론을 참조하면, 예술의 의미를 찾는데 있어서 굳이 저 높은 곳에 있는 이데아나 관념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된다. ‘원자’는 예술과 비예술을 구별하지 않는다. 허공과 그 안을 자유롭게 유동하는 필획이 있는 조진이의 작품에서 겹겹으로 쌓인 베일의 움직임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것은 심연과도 같은 공간이다. 전경에 자리한 또렷한 것들도 시간에 따른 부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된 것은 없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유동적 화면은 불연속적이다. 작품은 작가가 받은 영감의 원천인 자연처럼 불안정하다. 불안정함은 변화와 생성의 조건이다. 찰나의 깨달음을 기록할 수 있는 예술에 대한 매혹은 크다. 조진이는 그 순간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어떤 지각의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긴 기다림 끝에 오는 순간의 축복, 또는 예기치 못한 축복을 기록하는 예술, 예술을 통해 그 순간을 다시 만나는 것 등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각이 공간적이라면 기억은 시간적이다. 시간과 공간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지각과 기억 또한 연동된다. 

조진이는 지각에 있어서나 기억에 있어서나 우연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이는 작업에서 우연의 비중을 설명해 준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무의지적, 또는 비자발적 기억이 예술화되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를 따라 기억에 의해 전개되는 감각적 기호들은 예술의 발단이며, 우리를 예술의 길로 끌어들인다고 말한다. 현대의 예술가와 철학자는 모두 오로지 예술만이, 삶이 그저 윤곽만 잡아놓은 이 관계를 완벽하게 성사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프루스트와 들뢰즈의 사고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예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암시한다. 그것은 근원적 시간의 회복이다. 그들에 의하면, 예술 작품을 통해 되찾은 시간은 근원적 시간이다. 이것은 펼쳐져 전개된 시간, 즉 흘러가는 계속적인 시간, 잃어버린 시간과 대립되는 시간이다. 반복되는 일상성은 흘러가는 계속적인 시간을 대표한다. 조진이에게도 예술은 일상성 속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