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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경 / 태양이 나를 다 태워버릴 때까지

이선영

태양이 나를 다 태워버릴 때까지

  

이선영(미술평론가)

  

리경의 ‘more Light: 향유고래 회로도’는 빛, 정확히는 광원(光源)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심사를 향유고래 모양을 닮았다는 전시 공간에 맞춰 구현한 전시이다. 빛(광원)이라는 관심은 연속적이지만, 작가가 만나는 공간은 때에 따라 다르다. 작가의 향후 작업 방향을 들어보면, 그 범위는 전시장을 벗어나 지구 곳곳을 대상으로 할 만큼 선택지가 넓다. 작가는 사각형 공간을 벗어나 ‘땅 끝, 바다 끝, 버려진 성당, 폐허, 농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빛으로 작업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가가 얼마 전에야 접했던 구글 어스(Google Earth)의 세계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한 작업들이 ‘자신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이어진다면, ‘이 지구에서 자신이 살아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될 터이다. 세상은 넓고 찾아내야할 아름다움은 많다. 그러나 리경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쉽게 형식에 담길 수 없는 것, 그래서 미학적 용어로 따지자면, 미 보다는 숭고에 가까운 것이다. 숭고는 먼저 대자연에서 느낄 수 있다. 가령 이 전시에서 빛이 그렇다. 




 4층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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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에서 ‘사유는 자연 안에서 그것의 제시 노력을 넘어 서는 크기나 힘을 단지 암시할 수 있는 양과 직면하게 된다’고 하면서, ‘숭고는 그 자체의 순수한 상태인 크기, 힘, 양이며, 하나의 형식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현전(現前)’이며, 마치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이 ‘파악할 수는 없지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부제인 ‘향유고래 회로도’ 역시 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다는 역설적 의미가 있다. 향유고래는 소설 [모비딕]에도 나오는 흰 고래의 학명이다. 포유류지만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 속까지 잠수하는 향유고래의 생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향유고래는 그 거대한 크기—우리말에 ‘고래 등 같은 집’ 이란 표현이 있듯이—와 더불어 미지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향유고래는 요즘 작가가 보는 한국의 ‘흙탕물 같은’ 세태와 비교되는 보다 큰 존재를 상징한다. 


리경의 작품에서 공간은 작품을 담는 수단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것은 작가가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빛이 작가의 관심사가 된 이후, 매번의 전시는 빛이라는 소재(또는 주제)라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아내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릇이라는 형식이 중요하다. 그 점이 리경의 작품에서 동일성 속의 차이를 견인하는 요소다. 그만큼 공간으로부터 받는 영감이 크다는 말이다. 작가는 그 공간에서 받은 영감을 더듬더듬, 또는 차츰차츰 찾아나간다. 전시회란 이미 작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언어로써 확실해지는 과정일 따름이다. 물리적으로 본다면 리경의 전시장에는 볼만한 대상들이 여기저기 놓여(걸려)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구현되는 장치들만이 전부인 전시장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출된 빛은 한갓된 환영이 아니라, 실재를 향한다. 마치 태양이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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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가상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포스트모던’적 사상과 달리, 아직도 세상에는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감성을 가진 이들이 있으며, 수년간 봐온 작가 리경 또한 그러한 부류라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는 더 이상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종교는 이제 그녀의 무의식, 그리고 그 무의식의 거처인 몸에 내재하면서 작가에게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작업으로 스며 나온다. 종교라는 덩어리가 남김없이 펼쳐져 예술이 되었다고나 할까. 2001년 성곡 미술관에서 리경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처럼 더 이상 종교나 신을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인간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 평문에서는 리경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참고할만한 종교적 텍스트를 활용하기로 한다. 빛의 향연이라고 할 만한 이 전시에서도 감지되는 것은 종교적인 감성이다. 그러한 감성은 경험의 결과이기도 하고 조건이기도 하며, 작품은 작가가 겪었던 것을 추체험하게 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요아힘 바하의 [비교종교학]은 종교경험의 첫 번째 기준을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로서 경험되어지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본다. 


여기에서 궁극적 실재란 ‘모든 것을 조건 지우며, 꽉 묶는 것, 우리에게 감명을 주고 도전하는 것’을 뜻한다. 궁극적 실재는 쉽게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이다. 리경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사람, 즉 영매의 역할’임을 밝힌다. 두 개의 구별되는 차원이 있고, 작가는 그 사이에서 오가는 매개자인 셈이다. 타계(他界)에 대한 개념이나 감성과 예술은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성상을 비롯한 종교 예술품들은 저 너머에 있는 존재를 지시해 준다’는 것, 요컨대 ‘예술은 종종 인류를 둘러싸고 있는 이상한 힘들에 대한 반응을 표현하는 수단’(니니안 스마트)임을 알려준다. 특히 이번 전시의 영감을 받는 태양이 ‘최고의 신적 존재나 우주적 본질을 나타내는 보편적 상징’(로버트 앨우드)임을 염두에 둔다면, 빛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것이다. 태양은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지구의 영원한 에너지원인 태양을 흉내 내서 인공태양을 만들려는 계획을 짜기도 한다. 핵융합 반응에 기초한 인공태양 기술에서 핵심은 초고온의 물질 상태(플라즈마)를 붙잡아두는 기술이다. 즉 미학으로 치자면 숭고에 해당될만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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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 전시전경



 3층 전시전경



2014–15년에 일본의 에르메스(Ginza Maison Hermès le Forum)에서의 전시에서 세 면이 유리블록으로 된 거대한 공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바닥을 가득 채운 자개 패널로 담아냈다면, 그 이후 국내에서 열린 이 전시는 여러 층의 공간으로 나뉜 전시장에서 빛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150평이나 되는 큰 공간에서의 전시 기회를 잡은 작가는 일본의 기획자에게 ‘겸재의 [인왕제색도] 같은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비가 온 뒤 안개가 자욱한 순간이 담긴 인왕제색도는 이번 전시에서 스모그로 가득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 공간 속을 움직이는 빛줄기는 뉴욕의 레지던시에서 유폐 아닌 유폐 생활을 하다가 발견한 해 그림자로부터 왔다. 높은 천정에서 비추는 빛은 마치 지하의 수인에게 도달하는 지상의 빛처럼 느껴진다. 바닥에 깔린 자개는 성스러운 하얀 빛을 영롱한 무지개 빛으로 되돌려준다. 조개가 상처를 진주로 만들 듯이 유폐는 하나를 여럿으로 분화시킨다.


천정이 높은 곳과 낮은 곳은 다른 빛의 이야기가 있다. ‘장소특정성’은 설치가 주류가 된 현대미술의 주요 어법이기도 하지만, 리경의 경우에는 그 공간이 ‘자신에게 들어왔을 때’ 비로소 작품이 시작된다. 자신에게 온전하게 들어온 것만이 자신으로부터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 공간은 그 공간에 맞는, 그리고 그 공간들을 통과하는 관객의 동선에 맞춘 서사가 있다. 물론 서사는 관객의 그 공간에서 만나는 빛과의 관련 속에서 생겨난다. 작가는 빛의 양상을 통해 최소한의 방향타만 제시한다. 리경의 작품에서는 빛의 양상이 공간에 따라 드라마틱할 정도로 다르다. 여기에서 서사를 이끄는 것은 빛이다. 빛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부터 온다. 빛과의 관계는 타자와의 관계이다. 타자와는 거리가 있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무수한 계단으로 미끄러지며, 강한 에너지로 시각적 충격을 주고 아득한 원근법적 조망을 가진다. 




 3층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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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멀리서 왔지만 공간에서 편재한다. 빛은 레비나스가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말한 대로, ‘감각적 태양에서 발산되는 것이든 지성적 태양에서 발산되는 것이든 빛은 플라톤 이래로 모든 존재의 조건이다. 무엇보다 경험, 직관, 명석한 비전 또는 이루려 애쓰는 명석성이다. 현상의 조건, 즉 의미의 조건’이다. 즉 빛을 통해서 세계는 주어지고 파악된다. 이 전시에서 관객이 가는 어느 공간에도 빛은 존재한다. 그 빛들은 태양처럼 우리를 따라 다닌다. 빛은 화이트부터 옐로우, 블루까지 다양하며, 그것이 펼쳐지는 방식은 쏟아지고 넘쳐흐르며, 강타하고 아득한 저편으로 인도하는 빛 등 다양한 양태를 띈다. 관객이 처음 들어선 공간의 맞은 편 구역은 8미터 높이의 천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 꼭대기에서 비치는 하얀 빛은 마치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같은 느낌이다. 그 물줄기는 시간에 따라 두께를 달리한다. 그 조명의 모델이 된 태양빛은 모든 인공적인 색을 하얗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다. 우리는 햇빛에 노출되어 색이 바랜 물건들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성경]에는 ‘빛처럼 희다’는 표현이 있음을 밝힌다. 즉 흰색은 시작을 알리는 절대적인 색이다. 그것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제일 먼저 한 명령—‘빛이 있으라!’—을 떠올린다. 두 개의 광원이 비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밝기가 변하면서 켜짐과 꺼짐을 반복한다. 거기에는 마치 낮과 밤이 교차되는 듯한 빛의 흐름이 있다. 빛이 닿는 바닥에 테두리를 황동으로 두른 정방형의 자개가 놓여 있어 위에서 떨어지는 빛을 아래에서 받아 친다. 일본에서의 전시에도 등장한 자개 판이다. 조개껍데기를 잘라 붙인 장식물인 자개는 그것이 비롯된 대양을 소우주의 형태로 머금고 있다. 전시장에 깔린 두 개의 자개 판은 움직이는 바다 표면에 비춰진 햇살처럼 쏟아지는 빛줄기를 반사한다. 숭고를 추상과 연결 지었던 이들은 ‘대양적 공간에서 굳이 어떤 형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에그니스 마틴)고 말하기도 한다. 사각형의 조명장치나 사각형의 자개 판이나 무한의 자연을 유한한 인공에 담으려는, 아니 담는다기 보다는 담음을 은유하는 추상적 형식이다. 






3층 전시전경



그것들은 자족적이기보다는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어떤 판의 일부처럼 나타난다. 판의 단면은 사방으로의 확장성을 가진다. 그 위층으로 가면 끝없는 계단의 이미지가 벽면에 영사된다. 영상 속 빛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화한다. 영사된 빛을 통해 벽을 가득 메우는 것은 쏟아지는 빗줄기가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빛줄기의 이미지이다. 중력에 충실한 물의 이미지와 비상하는 빛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비인지 빛인지 알 수 없는 흐릿한 이미지, 무엇인가 경계를 가로질러 아래로 계속 쏟아져 내려오는 이미지에는 경계를 넘는 과도함이 있다. 마치 지고한 존재의 강림(降臨)처럼...로버트 앨우드는 [신비주의와 종교]에서 강림의 체험을 말한다. 그것은 ‘빛으로 흠뻑 젖었을 때 명상 속에서 그가 깊이 도달할 수 있는 영원한 나라의 표현’으로, ‘빛의 대양, 길 없음, 경계선이 없는 신성한 어둠, 혹은 열반의 영역’ 등에 해당된다. 그 모두는 무제약적 실재에 몰입하는 체험을 말한다. 


넘쳐흐르는 빛과 함께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어디를 향한지 알 수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다.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계단은 동서고금의 종교적 상징이다. 특히 그노시즘(영지주의)에서 대표적이다. 세르주 위탱은 [신비의 지식, 그노시즘]에서 영지주의가 ‘지상의 한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러한 인간 조건을 넘어서며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고 해석한다. 또한 이러한 인식이 낭만주의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런 맥락에서 근대예술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예술가 보들레르는 ‘단일성이 이중성으로 된 것이 전락이라면, 인간은 추락한 신이며, 신의 추락이 바로 창조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인간은 땅을 딛고 살아가며 빛의 근원인 천상을 바라보는 존재이다. 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의 이미지는 ‘인간은 하늘을 기억하는 추락한 신’(라마르틴)이라는 낭만주의의 신화를 떠오르게 한다. 자신이 비롯된 곳을 기억하고 그곳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려는 움직임은 종교의 현대적 계승자인 근대 예술가로 하여금 승화와 추락을 반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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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상승의 이미지는 거리감을 전제한다. 신성함과 경외감은 이러한 거리감의 산물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정치경제학과 죽음]에서 신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선과 악의 거리를 유지하는 자이며, 남자와 여자,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육체와 정신, 타자와 동일자 등등의 분리를 유지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보다 일반적으로 신은 모든 변별적 대립을 이루고 있는 극점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자이다. 이러한 거리감은 다음에 도착할 공간에서 다소간 폭력적으로 나타난다. 영상이 투사되는 벽 사이에 뚫린 문으로 들어가면 노랑과 주황 사이에 있는 오묘한 빛이 강하게 점멸하는 어두운 방이 나온다. 전시장 전체에 들려오는 음향 속 목소리가 강압적일만큼 분명하게 들리는 공간이다. ‘He goes to the sky. on the wind’라는 반복적 메시지와 경고등처럼 번쩍거리는 빛은 관객에 따라서는 공포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하늘로 갔다’는 표현에는 죽음이 깔려있다. ‘he’라는 주어는 얼마 전에 있었던 부친의 죽음과 연관될 수도 있다. 


작가와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부친이었으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갔다. 바람과 함께? 또는 바람을 타고? 삶의 끝자락을 넘어선 것이 죽음이라면, 이 또한 경계를 넘어서는 숭고함이 계시되는 공간이다. 만약에 누군가 살아서 그 경계를 넘어섰다면 그것은 초월이다. 레비나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초월은 건너감의 운동, 올라감의 운동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하늘을 향한 눈은 결국 자신이 자리 잡고 있는 신체로부터 분리된다. 하늘을 우러르는 시선은 접촉할 수 없는 것, 신성한 것을 만난다. 이렇게 시선이 뛰어넘는 거리가 초월이다. 신과 같은 절대적 타자와는 비동등성, 즉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인다. 이 방에 들어온 관객은 다른 방에서의 잔잔한 신비로움과는 달리 소란스럽고 역동적인 느낌을 받는다. 니니안 스마트는 [현대 종교학]에서, 루돌프 오토가 범주화환 종교개념인 ‘numinous’라는 용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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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누미노스의 경험은 ‘공포심과 경외감을 유발시키고 황홀하게 해주며, 그리고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잡아끄는 신비스러운 것에 대한 경험’이다. 전시 공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와 목소리는 타자적이다. 니니안 스마트에 의하면 누미노스 경험 속에서 영원한 존재는 우주 저 너머에, 그리고 인간밖에 있다. 그것은 나의 밖에 있는 것으로 신비, 경외, 공포 같은 복합적 감정을 자아낸다. 누미노스의 경험에 대한 담론은 종교의 핵심적인 경험이 창조와 피괴를 넘나드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것은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근현대미술은 파괴에 방점을 찍어왔다. 이 전시에서 파괴적 의미는 전시 키워드 중의 하나인 ‘more’에 있다. 리경이 치루는 전시회는 매번 극단의 에너지가 투입된다. 이번 전시에서도 눈의 실핏줄 터지기는 기본이고, 엠비언트 뮤직(Ambient Music) 풍의 사운드를 손수 만들다가 특정 음역 대를 듣지 못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말 그대로 눈멀고 귀먹는 것에 근접하는 체험이다. 


필자에게도 ‘more’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핑크 플로이드의 메인 테마 음악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히피적 세계관—그 자체가 유사(類似) 종교적인—이 담긴 영화 [More](1969)에서는 ‘좀 더-’라는 욕망이 죽음에 이르는 파멸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빛은 고갈되지 않는 원천으로 ‘좀 더-’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가처분 에너지는 무한하며 그것은 얼마든지 소모가능하다고 하면서, 잉여에너지를 파괴하면서 생성되는 열락을 말한다. 그가 드는 예로는 축제, 에로티시즘, 종교 등이다. 뛰어난 작가이기도 했던 바타이유의 이력을 생각하면, 예술 또한 마땅히 포함되어야 하리라. 바타이유는 [저주의 몫]에서도 에너지는 생산력을 위해 무제한 축적될 수는 없고, 최종적으로는 강이 바다로 흐르듯 에너지는 우리에게서 벗어나며 우리를 위해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인간은 모든 생물들 중에서 잉여 에너지를 가장 강렬하고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동물임을 말한다. 






 I can see your halo #scene04_레이져 라이트, 멀티채널사운드_가변설치_2017



바타이유가 이러한 제한 없는 소모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주체의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에서 내밀성을 ‘여기 이 세상에 신적인 광채의 반사’라고 정의한다. 내밀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칭송받을만하다고 평가하는 바타이유에게 내밀한 존재는 절대성에 이르려는 욕망의 화신이다. 그러나 유용성과 합리성만을 따지는 현대에서 내밀성이나 절대성은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종교의 힘이 위축된 오늘날 내밀성이나 절대성이 교환되는 장(場)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그 점에서 리경의 전시는 미술작품을 넘어서는 근본성이 있다. 전시장을 벗어나려는 향후의 행보 또한 이러한 근본성을 향한 것이라 생각된다. 근본성만이 새로움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된 미래’인 대지(와 그것의 대응인 하늘)에서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관객이 도달하는 맨 마지막 공간, 즉 최상층부에는 푸른 레이저 빛으로 원근법적 공간이 연출된다. 소실점이 존재하는 맞은편 벽은 거울로 되어 있어 막혀있는지 아닌지 모호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어두운 공간 속에 배열된 빛 속에서 나아가는 관객은 뒤돌아 나갈 때와는 사뭇 다른 빛을 체험하게 된다. 직선으로 나아가며 굴절되는 푸른빛은 관객이 들어선 원근법적 공간 속의 무한 소실점을 주시하게 한다. 자연에서는 이러한 직선을 발견하기 힘들다. 안 쉬르제는 [서양 연극의 무대장식 기술]에서 자연 속에서의 직선은 수평선과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라는 두 개의 예만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원근법적 공간 속을 거닐 게 되는 관객은 전시장에 피워 올린 스모그 속에서 좀 더 강렬해지는 선적 흐름을 만난다. 구름이나 안개 이미지 또한 경계의 모호성으로 빛 못지않게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리경은 자연과 예술적 관례를 기술에 접목하여 무한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유한한 존재는 무한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에 근접하려는 극단적인 노력이 있을 수는 있다. 이 과정에서 무한이 반드시 특정 종교의 신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어떤 것’(샤르댕)에 대한 직관이며, 리경의 전시에는 이러한 직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출전; 송은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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