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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미 / 미지의 왕국으로의 초대

이선영

미지의 왕국으로의 초대

  

이선영(미술평론가)

 

모든 예술작품이 나름대로 또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지만, 김은미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러하다. 이 또 다른 세계가 필요한 이유는 현재 당면한 세계에 대한 결핍감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기 마련인 인생에서 자신만의 규칙을 관철시켜 구축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매력은 크다. 건축가, 정원사, 지휘자,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들이 그러한 매력에 빠진 이들일 것이다. 독재자나 광인은 자기 주도적인 세계가 가질 수 있는 어두운 측면이다. 인간은 할 수 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인류의 유년기나 어릴 때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놀이의 세계를 뺀다면, 그런 세계를 다시 만나기는 드물다. 소비문화가 집요하게 공략하는 이 부분을 예술 또한 대상으로 한다. 그런 면에서 예술은 소비문화와 경쟁한다. 눈높이를 대중에게 맞추는 일은 보다 공인된 시스템, 가령 소비자의 취향이나 유통과정 등을 고려해야 한다. 




zoom in zoom out series_2017



Landscape(island)_2017



이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희망하는 부류는 자연스럽게 예술과 엮이게 된다. 그래서 예술은 고독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 대신 밀도와 강도를 높일 수 있다. 대개 작가의 길을 택한 이들은 자기가 하기 힘든(또는 싫은) 것을 포기하는 대신에,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는(또는 하고 싶은) 것에 몰입함으로서 나름의 균형을 맞추려 한다. 그 열매가 무엇이든 놀이나 예술의 세계는 자신이 만들어낸 대안의 현실에의 몰입이다. 몰입할 수 없는 예술은 소외된 노동만큼이나 괴롭다. 그 결과물도 노동만 못하다. 거의 출근하듯이 작업실에 와서 작업하는 작가 김은미에게 예술은 노동과 놀이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복잡한 작업과정과 기나 긴 작업 시간은 노동과 무관치 않지만, 무의식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동원하는 몰입이라는 점에서 노동은 아니다. 생산적 노동이 주도하는 현실은 지엽적인 쾌락만을 줄 뿐, 깊은 열락을 낳지는 않는다. 그 때 인간은 대안의 세계를 꿈꾸게 된다. 


작가란 온힘을 다하여 자신이 꿈꾼 대안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자이다. 작가가 실제로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그 일각을 통해서 수면 아래 또한 감지될 수 있다. 김은미의 작품은 모호할 수 밖에 없을 상상의 세계에 명확한 형태와 색을 부여한다. 그녀의 작품은 작가란 단지 꿈만 꾸는 존재가 아니라 꿈에서 깨어난 자임을 알려준다. 김은미는 ‘WELCOME’ 전에서 협소한 현실을 압도하는 열락, 정신분석학적 용어로는 현실원리의 억압을 뚫은 쾌락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온 관객을 환영한다. 가상의 도시, 또는 왕국을 생각나게 하는 우주는 다채로운 색과 형태로 이루어졌다.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변이들이 이 상상의 우주를 가득 채운다. 기억은 불가피하게 변형을 야기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것들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유사할 뿐이다. 정확한 기준이 없는 비슷함은 유희적 변주를 거치면서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floating island_2016



몽글몽글 시리즈_2017



색 면을 통해 여백을 주는 요즘 작품과 달리, 이전 작업에서는 거의 공간공포증적인 밀집성이 두드러졌다. 대개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멀리서 본 시점이지만, 이전 작품을 보면 가상의 왕국 도시 내부로 들어가는 시점이 있고, 계단이나 난간 같은 보다 큰 건축적 구조 안에 빼곡이 들어차 있는 듯한 사물들도 자리한다. 건물이 사물이고 사물이 건물이기도 한 이 세계에서 척도 감각은 사라져 있다. 작품 속 건물이나 사물은 보고 즐기는 것 외에 아무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누군가 예술작품의 ‘기능’과 ‘쓸모’를 묻는다면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곳은 일종의 장소이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없는지 있는지 알 수 없다. 워낙 멀리서 잡힌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은미의 세계이기도 하므로. 따로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다. 거기에는 적절한 곳에 장기를 놓을 자리를 찾는 전능한 게임 수행자의 골똘한 시선이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본 것이든 가까이서 본 것이든 이 세계에서 색과 형태에 관한 한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원칙이다. 작가의 스케치 북에는 더 많은 다양한 형태를 위한 실험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2차원을 넘어 3차원까지 넘본다. 스케치북 속의 상상형태를 나무로 조각해서 채색한 오브제들은 그림 속 구조들이 밖으로 튀어나온 듯하다. 나무 조각들 역시 그림처럼 칠해진 색의 외곽선을 진하게 해서 형태의 특이함과 색의 강도를 높였다. 외곽선을 두른 색-형태의 무리들은 마치 아이라인을 한 눈처럼 더 강렬하게 빛난다. 색과 형태들은 어디하나 죽은데 없이 동일한 강도로 자신을 주장한다. 시각적인 소란스러움이 청각적인 소음으로 이어질 듯하다. 김은미의 작품에서는 아무 것도 없는 색 면도 밀집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침묵과 소음이 동일한 위상을 가질 수 있다. 특정한 강조점이 없는 화면에서 관객의 눈은 표면 여기저기를 방황하게 된다. 




보물찾기, 2016



오아시스2



color waterfall#2_2017



작품 속 가상의 건물들은 선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어 시각적인 산책을 가능하게 한다. 보다 구체적인 선택은 ‘줌 인, 줌 아웃’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미지의 왕국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접근된다. 그것은 마치 터치스크린을 확대하거나 축소함으로서 차츰차츰 읽어 나가는 방식으로, 작품을 스마트 폰으로 보여줬을 때 다른 사람들이 취했던 행동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하나의 색 면을 확대하면 무늬가 되고, 더 확대하면 미세한 것들인 바글바글 모여 있는 듯한 것들을 큰 화면에 펼친 듯한 모양새이다. 거기에는 시간성이 있지만, 영화나 문학 같은 시간예술과 달리 어디를 먼저 볼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색 면, 무늬, 형태들이 단순한 병렬이기 보다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의 방식이라는 점은 변치 않는다. 조밀한 형태들 사이에 널찍한 색 면은 도시와 도시 사이를 가르는 바다나 하늘을 연상시킬 수도 있지만, 바다나 하늘에도 또 다른 존재들이 가득할 것이다. 


김은미의 작품은 추상적인 색 면에도 잠재적 형태가 있으며, 다양한 형태와 색채들은 하나의 색채 톤으로 압축될 수 있다. 형태가 없는 추상적 색 면은 조형적으로는 화면에 강약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이전에는 형태로 거의 다 채웠는데. 지금은 색 면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 색면들은 와글와글한 형태 속에서 여백의 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림이라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도 각자의 거리감을 가진다. 각각의 세계들 사이는 매우 조밀하다. 그러나 틈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새로운 것의 생성은 이 틈에서 이루어진다. 생성은 수직적이기 보다는 수평적이다. 그것은 수직적 나무처럼 가지를 쳐 나가면서 계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뿌리줄기처럼 옆에서,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렇게 생겨난 것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게 된다. 그것은 음울한 독백이 아니라, 인접한 것과의 경쾌한 대화 속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나는 축제적 공간이다. 




green road



스르르 천천히,2014



follow me#3_2014



질서정연한 원근법의 단일한 공간이 아니라, 다시점의 공간이다. 그리고 시간들이다. 다양한 중심을 가지는 화면은 하나의 유력한 원근법이 작동하는 창의 모델이 아니라, 지도라는 모델을 가진다. 옛 지도처럼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지역은 미지의 공간으로 남겨둔다. 화면 어디에든 이러한 미지의 공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균열과 틈들은 산재한다. 도약과 비약이 비일비재한 마술적 공간이다. 형태 뿐 아니라 색채 또한 그렇다. 김은미의 이전 작품에서 색채의 폭포나 색채의 화산처럼 새로운 것은 계속 틈을 비집고 나온다. 그것은 분열을 통한 증식이다. 다양한 색과 그 색을 강조하는 외곽선은 분열적이다. 분열적 측면은 해체이기 보다는 생성이다. 산뜻한 색채로 덮인 형태들에는 탱탱한 탄력이 존재한다. 둘로, 넷으로...n개로 나뉘어도 에너지는 줄지 않는다. 오히려 확장된다. 또한 거기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하는 작업에서 나오는 리듬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김은미의 작품은 1960년대 하위문화의 싸이키델릭 아트 풍의 화려함과 몽환성이 존재한다. 가상도시는 근대의 기능주의가 배격하고 억압했던 다양한 장식적 충동들이 복귀하는 장이다. 작품 속 평면적이면서 입체적 무늬들은 작가의 무의식 속에 켜켜이 쟁여져 있던 것들이다. 깊숙이 쟁여져 있던 것들 중 현실로 떠오른 것들은 관객의 시선을 끈다. 즉 유혹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유혹에 대하여]에서 장식은 유혹처럼, 의례화 된 가상에 따르는 기호의 순수함, 순수한 가상의 지배라고 말한다. 현대의 사회성과 그것이 확립하는 의사소통과 교환의 방식은 극도로 보잘 것 없고 일반화되고 추상적이고 빈약하다고 비판하는 보드리야르는 가상의 순수한 유희를 중시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의미와 권력의 체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유혹은 기호에서 기호로 전해지고, 의사소통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공유하는 것이다. 




수다쟁이 시리즈2_2016



수다쟁이 시리즈_2017



수영장 시리즈_2016



재료의 펼쳐짐에 의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장식도 거부했던 근대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는 생산주의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비슷한 콘크리트 빌딩이 세워졌다. 그것이 현대적 삶을 보다 충만하게 했는가는 별도로, 경제 논리 우선주의가 낳은 음울한 회색빛 도시가 보편화된다. 김은미의 작품 속 도시는 정확히 그러한 ‘국제양식’과는 다른 진정한 국제양식—-가령 만국기 같은—-이 존재한다. 거기에서는 각각의 다름이 선호되고, 다른 것만이 합법적이다. 같음은 생산적이지만 다름은 유혹적이다. 보드리야르의 어법에서 생산은 유혹과 대립된다. 기능주의가 생산이라면 장식은 유혹이다. 잉여적이고 때로는 병리적으로 간주되었던 장식은 근대 이후 누명을 벗었으며, 또 다른 차원에서 부활하고 있다. 장식은 근대에 탄생한 순수예술보다 더 뿌리 깊은 연원을 가지고 있으며, 더 보편적이다. 김은미의 작품에서 장식은 단지 장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방식을 통해 업그레이드된다. 


자신의 규칙을 관철시켜 만든 왕국은 미지의 도시였고, 그 도시는 환상적 건물로 채워졌으며, 건물을 이루는 것들은 대개 장식들이었기 때문에 장식은 자연스럽게 화면으로 들어온 것이다. 건물과 분리되어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보다 유연한 상품 형식인 캔버스 그림은 이미지의 역사에서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장식이 추상적이듯, 추상 또한 장식에 속할 수 있다. 김은미의 그림은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붓질은 자제되어 있지만, 색은 폭발한다. 화가에게 물감은 다양함을 실험할 수 있는 최적의 매체일 것이다. 이전 작품에서 거품처럼 몽글몽글 솟아나기도 하고 아래로 흘러내리기도 한다. 색의 폭포가 등장하는 작품은 화면 상층부에서 흘러내리는 색의 물결이 흑백으로 남아있는 하층부를 채워 나갈 것 같은 모습이다. 칙칙한 현실은 상상에 의해 새롭게 탄생할 것이며, 이때 색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화 속 왕국과 현대도시의 모습이 적절하게 섞여있는 작품 속 공간은 마냥 쏘다니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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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마천루가 띄엄띄엄 있는 자동차 중심의 도시가 아니라, 길을 끼고 적절한 높이의 작은 건물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활력 있는 거리와 비교될 수 있다. 그곳은 차가운 콘크리트와 유리, 철강 등의 재료가 벌거벗은 기능주의에 충실한 근대적 건축이나 도시가 아니라, 근대 이전의 풍경에 가깝다. 작품 속에 나오는 패턴만큼이나 다양한 변주가 있지만, 뾰족뾰족한 지붕은 근대 이전의 건물과 도시, 가령 고딕 성당이나 불탑(stupa)을 닮은 기기묘묘한 형태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극도로 밀집된 양상은 현대적이다. 걷는 동안 작은 칸칸으로 나뉜 작은 세계들은 계속 그 내용과 형식을 바꾸며, 행진처럼 진행되는 이 대열은 변화무쌍한 꿈처럼 지속될 것이다. 거기에는 불연속을 통한 연속이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방식은 하나의 씨앗으로부터 열매까지 선적 연속성에 따라 이어지는 유기적 총체성과는 구별 된다. 


근대의 승강기나 자동차 등이 수평, 수직적 차원에서 불연속을 통한 연속을 가능하게 했다면, 근대이후의 이상적인 스펙터클은 그 텅 빈 간격을 인간이 만들어낸 무엇인가로 채우는 것이다. 일상에서 그것들은 대개 알록달록한 상품들이다. 사회와의 불화를 고무했던 순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다면 예술 또한 그러한 대열과 섞일 수 있다. 자연 또한 이러한 리듬에 복속된다. 김은미의 작품에서 자연의 비중은 높지 않다. 이전 작품에는 잎사귀 형태의 패턴들이 모여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들은 식물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식물을 원자적 차원에서 재구성한 듯한 모습이다. 낙엽이기 보다는 낙엽 모양 형태의 원자처럼 생긴 것들이 이합집산하면서 어떤 세계를 만든다. 거기에도 빈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은 변화를 위한 여백이다. 끝없이 운동하고 흐르는 세계에서 비어있는 곳이 없다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없으면서도 인간이 있는 것처럼, 자연이 없으면서도(많지 않으면서도) 자연이 있는 풍경이다. 




push a button 전시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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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기묘묘한 건축물로 가득한 가상의 도시 자체가 모든 것이 서로 얽혀있는 자연의 방식이다. 뿌리줄기처럼 증식하는 구조 또한 자연적이다. 김은미의 스케치북에는 작품 속에서 종횡무진 집적시키는 조밀한 단위들에 대한 연구가 가득하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일련의 기계적 단면들을 가지는 그것들은 연결될 수 있다. 나무 오브제 작업은 연결이 3차원 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실제의 어떤 기계장치와도 연결되지는 않은 작품 속 움직임은 잠재적이다. 그것은 단면들이 연결되어 작동되는 기계의 방식을 가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 외디푸스]에서  기계를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단그자체라기 보다는 절단에 의해 다음 연결이 가능하다는 사고이다. 이러한 연결은 끝없이 이어져야 한다. 예술은 현실 속에서는 힘든 연결망을 상상으로 가동시킨다. 기계를 작동시키는 버튼처럼 보이는 [push a button] 시리즈는 기계의 잠재적 움직임을 강조한다. 이 시리즈는 가운데의 사각 버튼을 누르면 바깥 사각형에 그려진 형태들이 연동될 것 같이 생겼다. 


그것은 산뜻한 색과 선으로 정돈되어 있기는 하지만, 팅겔리의 야성적인 ‘예술-기계’(들뢰즈) 작품과 다를 바 없는 방식의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나비효과처럼 한 지점에서 발생한 미소한 움직임이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야기하는 세계이다. ‘욕망하는 기계’(들뢰즈)라는 동시대 문화의 키워드에 비추어 본다면, 움직임을 야기하고 지속하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의 자리에 권력(니이체, 푸코)을 대입시킨 이들도 있다. 화면의 크기가 작은 대신에 두툼하고, 화면 안에 또 다른 화면을 내장한 사각형 안의 사각형은 [줌 인, 줌 아웃] 시리즈를 사각형 모듈 안에 접어 넣은 것 같은 형식이다. 접었던 것은 펼쳐지고 그 역도 가능하다. 접기와 펼치기의 반복적 실행 속에서 견고해 보이는 현실은 유동적이 된다. 작가는 이 유동적 재료를 주물럭거려 수많은 결을 만들어내고, 그 결이 만들어내는 틈 속에 현실과 평행한 대안의 세계가 자리하게 된다. 그것이 진부한 현실에서 탈출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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