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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필름 / 피할 수 없는 만남

이선영

피할 수 없는 만남

  

이선영(미술평론가)

  

순리필름(박영임+김정민우)의 ‘들-고독·死’는 영상과 사진작품 전시 외에, 오픈 날 영상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라이브 시네마를 진행했다. 영상 및 음향기기 앞의 작가들은 관객들과 같은 방향으로 앉아서 공연한다. ‘라이브’라 함은 가변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12개의 클립으로 된 영상과 4곡으로 된 음악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조합된다. 순리필름의 라이브 시네마는 영상이 나오고 그 아래 오케스트라 등이 공연하던 초창기 무성영화 시절처럼 공연한다. 그것은 일종의 영화지만, 꽉 짜여 진 극영화가 아니라 현장과 상황을 고려하는 열려있는 예술작품이다. 열린 작품이란 단지 느슨하다기 보다는 관객이 채워서 완성해야할 빈 칸들이 많은 작품을 말한다. 영상과 음악을 담당하는 두 작가의 콜렉티브인 순리필름 로고에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이 포함되어 있는데, 동물 보다 넓게는 생명의 죽음을 다루는 이번 전시와 공연에는 그들의 세계관이 잘 녹아 있다. 




들1 (들-고독·死 시리즈), 잉크젯 화인아트 인화, 168.8x118.9cm, 2017



‘순리에 따르는 삶’을 위해 5년 전 도시를 떠나 반려동물과 함께 홍성에 정착한 그들의 작품에도 문명의 전횡, 특히 일방적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로드킬이라는 내용이 담긴 사진작품, 버려진 생명의 고독한 죽음에 대한 내용이 담긴 영상 및 공연작품에는 빠른 것이 무조건 좋은 도시와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포착되는 현상들이 있다. 인간중심주의--매우 훌륭한 관념같지만, 인간 이외의 생명들을 뒷전에 둘 뿐 아니라, 결국에는 소수의 인간만을 ‘인간’으로 취급하기에 편협한 사고--는 수많은 해악을 낳았다. 작품 속에 나오는 희생물들은 추후에 인간이 겪어야할, 아니 이미 겪고 있는 비극을  표현한다. 인간들이 자기 이익만을 다투는 사이에 악화일로에 있는 생태학적 상황은 자연의 산물인 인간이 자연에 대한 최대의 적대자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들의 작품에서 기계의 속도에 부응할 수 없는 타자들은 죽음을 맞는다. 그들이 끝내 건널 수 없는 길은 죽음의 길로 나타난다.  


영상 작업의 주인공은 병든 채 버려진 개로, 무슨 동물인지 알아보기 힘든 몰골로 발견된 지 불과 이틀 만에 저 세상으로 갔다. 누구도 알 수 없었을 무명의 죽음이 예술 작품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발견된 개는 산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들이는 특별한 개라기 보다는 하나의 전형으로,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산들이가 있다. 스크린 앞에 촛불 두 개가 켜있는 공연은 살아생전 내내 목줄에 묶여 있다가 죽어갈 즈음에야 ‘자유로워진’ 생명에 대한 애도의 분위기가 있다. 작품 속 동물들은 속도가 지배하는 문명에서 살아있음의 특징인 움직임을 포기한다. 순리필름은 하나의 지배적 원리(동일성의 논리)에서 주변화 된 이들, 즉 타자들을 조명한다. 사진작품에서 타자들은 죽음으로 항변한다. 영상에서 그들이 비롯되었던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 상상적으로 구현된다. 사진이 이미 시체로 종료된 사건을 표현한다면, 영상은 죽음 이전과 이후를 표현한다. 




들1 (들-고독·死 시리즈), 잉크젯 화인아트 인화, 84.1x118.9cm, 2017


들1 (들-고독·死 시리즈), 잉크젯 화인아트 인화, 29.7x42cm, 2017



작가들이 사는 동네는 한적한 곳인데도 로드킬 동물들을 산책길에서 많이 만나게 된다. 고라니, 고양이, 다람쥐, 청솔모, 새, 뱀 등등. 자기 몸에 새겨진 자연의 부름에 따라 길을 건너야 했던 그 동물들이 급작스런 마주침을 겪었다. 작품은 시간차를 둔 마주침의 결과이며, 관객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순차적인 마주침들을 통해 타자들의 때 이른 죽음에 대한 의미가 두터워진다. 순리필름에게 예술은 전원에서의 한갓된 여가생활이 아니라, 뇌리를 떠나지 않는 어떤 필연적 마주침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이다. 현장 상황이다 보니 대부분의 작품이 스냅사진이고, 따로 포토샵도 하지 않았다. 전시된 흑백사진들은 마치 영정사진처럼 죽음의 기호를 각인한다. ‘약하지만 아름다운 존재를 환기시키면서 공감을 끌어내려는’ 그들의 작품에는 처참한 광경을 다시 한번 소비하지 않기 위한 장치들이 있다. 어떤 것은 왜 길에서 고양이가 잠을 자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시 명에 포함된 고독사란 단순히 고독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고독해서 죽는 것’ 이다. 작품 속 죽은 동물들은 세상에 설자리가 없는 생명들을 대변한다. 고독하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는 인간 또한 포함된다. 세상을 경악하게 할만한 큰 사건에 의한 죽음 보다 더 보편적인 것은 이미 살아있는 채로 세상과의 연을 끊을 수 밖에 없는 유예된 사자(死者)들이다. 순리필름의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죽음,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은유한다. 말없는 동물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음악이다. 작가가 사는 곳의 현장음을 녹음해서 만들어진 음악은 말 그대로 ‘환경음악’이다. 자연음 및 일상의 소리를 포함하는, 잔잔하게 들려오는 앰비언스 뮤직 풍의 음악은 영상으로 압축된 한 생명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1시간 가량 진행된 공연은 크게 4개로 나뉘어졌고 내용에 따라서 음악도 다르다. 라이브 시네마이기에 공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들1 (들-고독·死 시리즈), 잉크젯 화인아트 인화, 29.7x42cm, 2017


들1 (들-고독·死 시리즈), 잉크젯 화인아트 인화, 29.7x42cm, 2017


[들-고독사], [존재들]에 이은 [고요]는 영상은 물론 음악조차 나오지 않는다. 공연의 주요작품인 [산들]에서도 빈 화면이 나온다.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가 소음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했다면, 순리필름은 빈공간(빈화면)에 걸맞는 빈 시간도 음악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것은 형식상의 유희라기 보다는 어떤 이미지도 어떤 말도 소용없는 시공간을 은유한다. 19분 분량의 작품 [산들]은 버려진 병든 개가 저세상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바라봤을 또는 꿈꾸었을 장면이다. 생사의 경계선 상에서 현실과 상상은 크게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병원 가는 길에 개가 차 뒷자석에서 창밖을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숲 속 오솔길을 신나게 뛰어가는 장면은 작가의 반려견이 대역을 맡았다. 빛이 가득한 화면은 곧 빛이 없을 세상으로 가야하는 존재의 눈에 가득 담겨진 충만한 장면이다. 시각보다는 후각의 동물인 개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가 휘젓고 다녔던 땅 내음, 풀내음 또한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마지막을 함께 해준 인간의 냄새도. 


온 생명이 바글바글 꿈틀되는 듯한 빛의 무리들은 햇빛을 받는 나뭇가지들의 모습에서 온 것이다. 추상화된 자연의 생명의 생사고락을 압축적으로 재현하는 듯하다. 하늘은 빛이 기원한 곳이며, 지상으로 추락했을지 모를 빛나는 존재는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하얀 개를 연상시키는 하얀 구름이 인상적이다. 서정적인 뮤직 비디오처럼도 보이는 빛과 음이 충만한 화면은 끝을 향해 가면서 격한 피아노 소리로 마감된다. 지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도 점차 멀어진다. 개도 눈을 감는다. 지상에는 ‘이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생명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자연은 수많은 존재에 의해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지만,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들에는 자기의 자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지배적 종에 의해 설계되는 공간은 중심/주변의 관계로 조직 되어 있고, 보다 많은 다수를 타자화하는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경제 논리가 그렇다. 경제 논리는 타자들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속도 지상주의를 낳는다. 가령 1분에 한건을 배달해야 한다는 택배기사들의 노동 강도는 어떠한가.




들4 (들-고독·死 시리즈), 비디오, 62분, 2017


들4 (들-고독·死 시리즈), 비디오, 62분, 2017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경제활동은 최소한의 생명보존에서 최대한의 쾌락으로 넘어가는 과학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합리적 기능에서 부조리한 욕망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누군가의 최대한의 쾌락은 누군가의 최소한의 생명보존도 위협할 수 있다. 지구화 시대에 최대와 최소의 관계는 보다 직접적이다. 스마트 폰에 필수품인 어떤 금속을 캐기 위해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아이들은 광산에서 맨손으로 일하고, 그것이 지역의 전쟁 자금으로 흘러들어가 다시 폭력적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스마트폰 사용자는 그런 폭력적 현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지만, 경쟁과 전쟁으로 점철된 사회는 그러한 구조를 지속, 확대시킨다. 부지불식간의 소비생활 조차도 악과 연결될 수 있다. 순리필름이 수집한 현장음 가운데 가장 섬뜩한 소리는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음이다. 현대인은 삶에 필요한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를 원하는, 때로는 속도를 위한 속도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속도에 치이는 삶은 분명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순리필름의 작품에서 그것은 인간처럼 축축해진 눈을 질끈 감는 개의 모습에 선명하다.    스크린 앞에 놓인 두 개의 촛불은 자신을 불태우면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희생물들이 등장하는 영상에 걸맞는 소품이다. 주인공 산들이의 하얀 몸체는 희생양을 연상시킨다. 인류학과 고고학은 인간 사회의 기원부터 폭력적 희생이 있었고 그러한 원초적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희생제의가 있음을 밝힌다. 르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신화의 기원에 실제로 희생과 집단적 폭력이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그는 [희생양]에서도 악을 어떤 희생양에게라도 투사하여 개인들 간의 불화를 정리함으로서 위기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르네 지라르에 의하면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게로 향하게 한다는 말이다. 희생의 메카니즘은 복수의 위험이 없는 폭력이다. 그래서 결국 이방인을 비롯하여 취약한 계층에게 폭력이 전가된다. 




들4 (들-고독·死 시리즈), 비디오, 62분, 2017


들4 (들-고독·死 시리즈), 비디오, 62분, 2017


‘희생양’이라는 말이 있듯이, 희생의 대상은 주로 동물이었다. [희생양]에 의하면 결정적인 순간마다 폭력과 그 대상인 사람 사이에는 항상 동물이 중간에 위치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희생과 동물희생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희생제의는 실제로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물과 그 희생물을 대체하는 인간 존재 사이의 연속성이 있다. 지금도 남미의 유적지에는 으스스한 인신공양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 고고학적 자료들은 엽기와 충격의 소재가 아니라 진행형의 현실이다. 단지 합리화된 방식으로 포장되었을 뿐. 작가들은 2014년에 있었던 ‘송파구 세 모녀 자살사건’의 예를 든다. 그들의 아픈 삶을 함께한 고양이 시체도 함께 발견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있다던 한국 사회의 복지제도의 취약성을 알렸다. 그 이후에 어떤 개선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사회는 경악할 만한 사건의 경종을 울리는 희생양을 가진다. 


순리필름의 공연은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한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운명론자들의 푸념과 달리, 폭력은 불가피하지 않다. 자연을 포함한 세상의 많은 부분이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독도 약도 사회로부터 비롯된다. 자연에 뿌리를 둔 예술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힘을 발휘한다. 사회라는 맥락에서 폭력의 최소화에 필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윤리일 것이다. 윤리란 무엇인가 이야기하는 예술과 분리할 수 없다.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에서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이야기는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찬양과 비난이 담긴 평가, 가치측정, 판단이 시도되는 방대한 실험실이며 이것들을 통해서 이야기성은 윤리에 예비과정의 구실을 한다. 폴 리쾨르가 인용한 바로는 ‘말할 때 그것은 행하는 것이다’(오스틴) 작가들이 무명의 개에게 ‘산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때부터 어떤 새김의 행위가 시작된다. 순리필름의 작품은 많이 자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비극적이며 때로 충격적인 내용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산들(들-고독·死 시리즈), 디지털 프린트 168.8x118.9cm, 2017



가령 병원 치료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개의 눈에 비춰졌을 것이라 가정되는 화면 속 이미지는 몽환적이며 아름답다. 그것은 비극적 현실에 대한 가림막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떠나야 하는, 또는 자신에게 인색했지만 그래도 그런 세상을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바라본 어떤 시선을 가진 존재의 사라짐을 상기시킨다. 영상의 말미 부분에 죽은 개의 대역을 맡은 개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담겨진다. 작품의 메시지에 대해 관객의 공감을 유도하는 부분에서 작가들은 타자의 얼굴에 호소한다. 전시 엽서에 담긴 살아생전 산들이의 상처 난 얼굴도 그렇다. 타자에 대한 윤리를 호소한 철학자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얼굴을 봄은 곧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모든 자유로운 동의, 모든 협정과 계약에 선행하는 부인할 수 없는 책임을 의미한다. 책임은 짊어지면 질수록 배가된다. 


진선미라는 기준에서는 다른 영역이지만, 결국 타자의 영역에 속한 예술은 타자들의 고통을 함께 한다. 그것은 미(美)안에 선(善)을 담는 문제가 아니라, 양자의 경계가 모호한 영역이있다는 말이다. 순리필름의 작품에서 윤리는 관념적 당위가 아니라, 타자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말한다. 문득 맞딱뜨린 타자의 죽음은 그 관계를 문제시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외재적이지 않다. 타자는 자기(동일자)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타자는 곧장 아무런 보호도 없이 비참한 자로 다가오며 단번에 내게 맡겨진다고 말한다. 즉 타자의 얼굴은 은총 속에서가 아니라, 그 살의 벌거벗음과 비참함 속에서 맞아 들여진다. 순리필름의 작품에는 피할 수 없는 만남이 있다. 종국적으로는 이 모든 상황에 충격을 받는 이 조차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타자의 고통을 대면시키는 순리필름의 작품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불러낸다. 


출전;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레지던시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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