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지영 / 세상의 모든 구석진 곳들

이선영

세상의 모든 구석진 곳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지영의 전시는 뭔가 확실한 의미를 찾으려는 이의 관점에서 볼 때 명확한 대답이 없는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금 간 시멘트 벽, 철제 펜스 뒤의 화분, 식탁 위의 정물 등, 왜 그러한 사물이나 풍경을 찍었는지에 대한 의도가 선뜻 읽혀지지 않는다. 사진 내부의 사물들의 관계는 물론이고, 여러 사진이 한 묶음으로 걸린 경우에도 왜 한데 엮여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가령 나목들 사이로 보이는 건물과 나목 중간에 붉은 색 화살표가 그려진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들, 건물 옆에 어색한 정원 술이 발휘된 나무가 있는 풍경 사진과 고속도로 사진을 같이 배열한 것들이 그렇다. 한편 집 앞에 나무 한그루씩이 담겨 있는 사진들에는 나무 그림자만 비치는 건물을 포함하여 시각적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붉은 줄이 지나가는 밭과 붉은 벽돌 벽에 붙은 농구대 사진은 붉은 색이라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발견된다. 거기에는 주목할 만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현대 미술가들의 주목이 있다.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54X31cm, 2017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은 그것이 왜 찍혀졌는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놀라운 무언가가 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초기에 사진은 놀라움을 주기 위하여 눈에 띄는 것을 촬영했다. 그러나 곧 사진은 자신이 촬영한 것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치전도에 의해 하찮은 것이 가치의 절정이 된다. 물론 바르트는 우연히 찍힌 것들로 대변될 수 있는 ‘하찮음’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코드화되는 경향에 맞설 수 있는 예술 본연의 속성으로 간주했다. 우연성은 이질성을 낳는다. 특히 자연이든 인공이든 풍경의 전체를 담지 않는 이지영의 예상을 깨는 사진 적 틀 짓기는 ‘동일한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두요소의 공존’(바르트)을 야기하곤 한다. 사진과 오브제의 병치 또한 이질성을 낳는다. 사진 속 또는 밖에 있는 모호한 사물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오브제를 떠올린다. 


거기에는 생경하게 드러나는 부조리는 없지만, 이상한 호출과 배치가 있다.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나 그 이후 초현실주의를 계승한 누보로망 등의 사조에서 사물은 이성이 아닌 부조리에, 의미가 아닌 무의미에 방점을 찍는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난해함에 탐닉하거나 쓸데없는 수수께끼를 연출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대예술가들은 사물을 새롭게 보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를 연구한 비평가 수지 개블릭은 [르네 마그리트]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서만 사물을 본다면 결국 사물 자체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수지 개블릭에 의하면 초현실주의는 원하는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전형적인 시각의 단절에 도전했다. 사진이 아니라 설치작품이면 좀 더 확실해질까. 독일에서의 전시 ‘connect in’에 이은 ‘connect out’ 전에서는 사진이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사진에서 선택된 사물이나 상황을 전시장에 설치했다. 사진과 함께 하는 설치물은 현장에 있었던 작가에게는 장소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법한 것들이다.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낡은 풍경 사진과 같이 설치된 것들은 폐기물에 가깝다. 설치작품들이 대부분 전시가 끝난 후 폐기물이 되곤 하는 실정을 생각해 본다면 다소간 풍자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에는 인간이나 인간적 이야기 대신에 시간의 흔적이 있다. 이전 작품의 목록을 보면, 사진과 함께 하는 사진 이외의 것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영상과 소리 등이 포함된다. 사진은 완결성을 지향하곤 하지만, 사진 한 장으로 완결되지 못한 것은 보충을 통해 확장된다. 이지영 전의 ‘연결’이라는 키워드는 사진과 그것을 둘러싼 것과의 연결을 말한다. 거대한 장막처럼 보이는 건물의 일부 사진은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뒷면의 꺽쇠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합판은 사진 자체에서 느껴지는 부분성, 표면 성을 극대화한다. 사진 속 풍경은 베를린의 건물인데 뒤가 감옥인 곳으로 우중충하고 음울한 기운이 역력하다. 합판이나 시멘트 등으로 만들어진 설치물은 회색 톤의 사진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이 전시의 설치물중 가장 규모가 큰 합판 구조물은 사진의 특성, 가령 건물이지만 일부만 찍혀서 평면적으로 보이는 경향을 반복한다. 사진처럼 뒷면은 안 보이는, 또는 없는 껍데기 말이다. 부분성과 표면성으로 인해, 맥락은 지워진다. 특정 시공간의 단면을 절개하는 사진 자체의 속성이 그렇지만, 이지영은 그러한 사진 자체의 특성을 더욱 강하게 밀어 부친다. 그래서 대상은 물론 장소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베를린에서의 작업이라니 베를린이라고 추정될 뿐이지, 전시가 열리는 대구라도 상관은 없는 것이다. 장소의 익명성은 작품 속에서 서사를 이끌만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강조된다. 거기에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산재된 중심들이 있다. 일찍이 중심보다 주변의 중요성을 알린 이들은 해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이다. 사진에서 무엇을 꺼내서 설치하는가의 선택지는 사진을 찍었을 당시만큼이나 많다.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가령 건물의 일부에서 떨궈진 그림자도 설치작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작가의 눈길을 끌었던 작품 속 어떤 부분이 설치물로 선택된다. 전시 공학상 설치하기 용이한 대상이 선호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3차원 상에서 구현되기 너무 버겁다면, 추상화시킬 수도 있다. 하얀 대각선이 교차된 바닥이 있는 건물 사진에서 작가는 하얀 선을 뽑아 전시장 바닥에 그렸으며, 길바닥에 나뭇가지 하나가 놓여 있는 사진에서는 나뭇가지를 선택하여 바닥에 설치한다. 거대한 단추처럼 보이는 둥근 놀이기구 사진 앞에는 둥근 판을 세로로 세워 놓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굴뚝이 보이는 건물 사진에서는 굴뚝을 뽑아 설치했다. 평면에서 현실로 슝 나온 것 같은 마술적인 장면이지만, 설치된 것들이 사진 속 그것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진과 설치물은 비슷한 것이지 똑같은 것이 아니다. 양자는 재현의 관계가 아니다. 


재현되지 않은 작품은 모호하다. 추상미술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의문시 한 것은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였다. 여기에서 의미란 현실 속에서 확인될 수 있는 참조 대상이었을 것이다. 추상 화가들은 사물을 지시하는 손가락 자체를 그리려 했다. 그 결과는 어떤 대상도 확인 할 수 없는 물감의 흔적들이었다. 그러나 이지영의 작품은 참조대상이 분명해도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거기에는 분명한 불명확성이라는 역설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은 본질적으로 명증성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사진은  마치 그 존재자체를 풍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교하고 무엇인가로 가득 찬 하나의 명증성이지만, 동시에 사진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이지영은 사진에 설치물을 부가함으로서 ‘분해될 수 없는 명증성’(바르트)을 흔들어 본다. 일상의 관습에 따라 뭔가 빨리 의미를 찾아내려는 이들에게 닥친 상황은 호전되지 않는다.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150x100cm_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이지영의 사진 속에서 저것은 나무이고 이것은 건물이지만, 왜 그것이 거기에 그렇게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의미가 아닌 심미의 기준으로 볼 때, 이지영의 작품은 긴 여운을 남긴다. 나름의 의미는 관람자 각각이 따로 챙길 수 있을 뿐이며, 작가는 그것을 굳이 지시하지 않는다. 작품들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 의해 현실화 되어야할 잠재적 의미가 있는 장(場)일 따름이다. 작가가 굳이 무엇인가를 지시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생성되는 장을 지시한다. 그러한 작품들이 이미지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현대의 관습과 맞지 않음은 분명하다. 굳이 분류한다면 분류될 수 없는 이미지이다. 분류되지 않는 것들은 쓸모없는 것, 또는 분류를 초월할 만큼 의미 있는 것이다. 기능주의와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예술의 존재양태가 그렇다.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에서 거의 상시적으로 접속하면서 수많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관습은 1초 안에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이미지만을 유의미한 정보로 간주한다. 그런 정보는 정보를 전달한 후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의미가 아닌 존재를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단번에 파악될 수 있는 의미--바르트의 기준에서 본다면 ‘스투디움’--가 아니라, 목적지가 불확실한 우회로들이 깔려 있다. 그렇게 모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은 관객이 그 안에 뭔가를 써 넣을 수 있는 또는 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그것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을 야기하는 텍스트’,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열락을 낳는 텍스트’(롤랑 바르트)이다. 이지영의 작품에는 시멘트가 드러나는 헐벗은 건축이 많이 등장한다. 전시된 작품은 수 백 장의 사진에서 고른 것이지만, 분위기는 비슷하다. 전시가 열리는 즈음의 날씨가 그래서인지, 대부분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이다. 장소와의 교감이 중시되는 작품에서 작가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물과 건물, 그리고 자연이 포함된 풍경이지만, 거기에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그 풍경을 주시하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질 뿐이다.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224x150cm_2017



분위기는 사진이라는 전형적인 복제매체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예견—‘가장 완벽한 복제에 있어서도 한 가지 것은 빠져 있다. 즉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 현재성, 곧 그것이 위치한 그 장소에 있어서의 일회적인 현존이 복제품에는 결여되어 있다’(발터 벤야민)--이 있었지만, 복제가 대세가 되면 거기에서도 나름의 분위기가 생겨난다. 오래된 사진이나 오래된 풍경을 찍은 사진은 그자체가 분위기로 충만 되어 있다. 찍자마자 낡아지는 사진에는 그 시공간만의 공기가 있다. 폐허는 특히 낭만주의가 사랑하는 장소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18세기 말 영국에서는 지나간 과거의 문화가 남긴 건축물의 잔해들을 심미적으로 그린 폐허 낭만주의가 부흥했다고 전한다. 아스만에 의하면 고딕 시대의 폐허는 심미적인 코드에 따라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시대의 승리를 암시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작가에게 다시 호출된 낭만적 폐허는 ‘폐허의 상태에서 문화는 자연에 가까웠다’(아스만)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이지영의 작품에서 인공의 산물인 건물이나 사물은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듯이 보인다는 점에서 곁의 자연과 비슷하다. 


자연물과 인공물은 함께 나이를 먹어서 한 덩어리로 된 분위기를 만든다. 그것은 모든 것이 혼융된 채 다시 활성화되기를 기다리는 무의식이 되어 가라앉는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에서 두드러지는 무의식적 공간을 말한다. 일찌기 벤야민은 매체계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의 시각 또한 변했고, 예술의 양태 또한 변화한다고 예견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물을 확대하여 촬영하고 일상적인 사물의 세부를 강조하여 보여주는 카메라 렌즈의 특이한 인도에 따라, 예측치 못했던 행동 공간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때 사람의 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이 작용하는 공간이 들어선다. 벤야민은 정신분석을 통해서 충동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되듯이, 우리는 카메라를 통해서 시각의 무의식 세계를 알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성과 합리만을 중시하는 의식에 저항했던 낭만주의 또한 무의식을 중시했다. 아스만은 낭만주의가 망각과 잊혀 진 것을 폭발적으로 다시 회복하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면서, 잊혀 진 것은 문화의 발전과정을 무의식의 세계로 빠트리게 한다고 말한다.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54X31cm, 2017



이지영-connected out_pigment print_54X31cm, 2017



아스만은 유령소설의 예를 들면서, 이야기에서 건축물은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소환해주는 기억의 장소, 억압된 것이 회복되어 그려지는 무대가 된다고 분석한다. 이지영의 작품에서 방치된 듯 한 풍경은 지금도 그곳이 그렇게 있을지 의심하게 만든다. 풍경이 잘 바뀌지 않는 독일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한국이라면 어림도 없다. 한국에서의 작업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지영의 작품에는 이미 부재의 징후가 있다. 그것은 또한 모든 언어가 부재를 전제로 함을 알려준다. ‘메시지 없는 약호’(바르트)인 사진은 일종의 언어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논리 철학 논고]에서 말하듯, 언어는 어떤 사물을 표현할 수는 없고 단지 관계들, 혹은 순전한 부재만을 나타냄으로서 어떠한 준거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오브제들은 잘려진 맥락, 애초부터 확실치 않았던 맥락을 강조한다. 작품의 의미를 쫒는 관객은 작가가 던진 단서에 따라 빈 칸을 채워가며 나름의 맥락을 만들어야 한다.  

 

출전; 대구 예술발전소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